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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근혜 . . . . 54회 일치
         박근혜는 대기업 관련 범죄·[[박근혜 정부의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등 혐의 18개 와 [[대한민국 국가정보원|국정원]] 특활비 · 공천개입 등 혐의 3개에 대해 각각 재판을 받고 있다. 전자는 2심, 후자는 1심 판결이 나온 상태이다. 2018년 4월 6일 18개 혐의에 대한 1심에서는 혐의 16개에서 일부유죄 및 유죄가 인정되어 징역 24년 및 벌금 180억 원을 선고받았으며,<ref name=":0" /> 2018년 8월 24일 2심에서 징역 25년 및 벌금 200억 원으로 형량이 늘어났다.<ref name=":2" /> 2018년 7월 20일 혐의 3개에 대한 1심에서는 2개가 인정되어 징역 8년 및 추징금 33억 원을 선고받은 상태이다.<ref name=":1">{{뉴스 인용|url=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8/07/20/0200000000AKR20180720096900004.HTML|제목=박근혜 '국정원 특활비·공천개입' 1심 징역 8년…33억 추징(2보)|성=송진원|이름=|날짜=2018-07-20|뉴스=연합뉴스|출판사=|언어=ko-KR}}</ref> 2개 재판을 합치면 혐의가 총 21개, 형벌은 총 33년형과 벌금 200억 원과 추징금 33억 원이다.
         2007년 7월 검증 청문회를 받았다. 이때는 그동안 박근혜가 정계 입문 이후 제기되어 왔던 각종 의혹이 모두 도마에 올랐다. 그러나 전두환 자금 6억 원 수수설 등 일부는 시인했으나 일부는 부정, 비판하였다. 이를 두고 곤란한 질문에는 이리저리 답변을 피하였다<ref>{{뉴스 인용 |제목 = 李-朴 청문회 관전평 |url = http://news.donga.com/3//20070720/8468691/1 |출판사 = 동아일보 |저자 = 이준한 |쪽 = |날짜 = 2007-07-20 |확인날짜 = 2013-01-24 |보존url = https://web.archive.org/web/20130928150932/http://news.donga.com/3//20070720/8468691/1 |보존날짜 = 2013-09-28 |깨진링크 = 예 }}</ref> 는 언론의 비판도 있었다.
         불안한 당내외 상황에도 불구하고 [[2012년]] [[4월 11일]] 제19대 총선에서 [[새누리당]]은 152석을 획득하여 과반 1당을 유지하였으며 그 후 공식적인 당 지도부가 출범하였지만 당내 영향력을 유지하였다. 대통령 후보 선출 방식 문제로 [[김문수 (1951년)|김문수]] 경기도지사와 정몽준 전 대표, [[이재오]] 의원과 대립하였고, 결국 [[정몽준]] 대표, 이재오 의원의 불출마 선언 속에 경선을 치렀다. 8월 중순 치뤄진 경선에서 박근혜는 압도적 지지로 승리하였다.
         국회의원 재직 중 대선 경선을 맞이하게 된 박근혜는 대선 경선 캠프 선대위원장으로 [[대한민국 헌법 제119조]] 2항 '경제 민주화'의 입안자인 전 [[민주정의당]] 헌법개정위원 [[김종인]]을 임명하는 등 [[사회양극화]] 문제 해소에 적극적 의지를 보였다.<ref>[http://media.daum.net/politics/assembly/newsview?newsid=20120628031405843] 김봉기 기자, '경제 민주화' 원조 김종인… 내달 출범 박근혜 캠프 맡는다, 조선일보, 2012.6.28.</ref> 박근혜는 재벌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였으나 재벌의 [[지배구조]] 개선보다는 경제력 남용을 바로잡는 데 방점을 뒀다. 재벌이 우리 경제에서 차지하는 긍정적 역할은 인정하자는 쪽이었다.<ref>[http://media.daum.net/politics/others/newsview?newsid=20120820160408085] 이제훈, 재벌이 싫어하는 헌법 조항, 한겨레21,2012.8.20.</ref> [[사회양극화]] 해소가 목적인 경제민주화를 위해서는 세수확보가 중요한데 박근혜 의원은 2012년 7월 16일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초청 토론회에서 "법인세는 가능한 한 낮춰야 한다"고 주장해 논란을 야기했다. 우리나라 법인세 최고세율은 22%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인 25.6%(지방세 포함)보다 낮은 편이다. 일본과 미국의 법인세 최고세율은 각각 39.5%, 39.2%에 이른다.<ref name="hani.co.kr">[http://www.hani.co.kr/arti/economy/economy_general/542826.html] 류이근, 성연철 기자, 박근혜 "법인세 인하"…친박서도 "경제민주화와 모순", 한겨레신문, 2012.7.17.</ref> 현재 법인세는 내국세 총액 가운데 부가가치세(33.0%) 다음으로 높은 비중(28.6%)을 차지한다.<ref name="hani.co.kr"/> 강병구 인하대 교수(경제학)는 “법인세를 낮추겠다면 소득세나 부가가치세 등에서 ‘박근혜식 복지’에 필요한 재원을 어떻게 마련하겠다는 것인지 대안을 내놔야 하는데 그게 안 보인다”고 지적했다.<ref name="hani.co.kr"/> '법인세 인하와 경제민주화 간의 모순성' 및 '법인세 감소분에 따른 대체 세수 확보' 등의 논란은 대통령 선거일까지 지속될 것으로 보였다.
         2010년 7월 10일 [[대한민국 제18대 대통령 선거]] 출마를 공식 선언하였다. 2012년 7월 5일 [[이상일]] 캠프 대변인은 오전 10시에 영등포 타임스퀘어 광장에서 대통령 선거 출마를 선언하기로 정하였다고 브리핑을 통하여 밝혔다. 이 대변인은 "각계각층 국민들이 다니는 열린 공간이라는 점이 고려되었다"고 설명하였다. 캠프명은 '국민행복캠프'로 정하였다고 이 대변인은 덧붙였다.<ref>[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2/07/05/0200000000AKR20120705160300001.HTML?sns 박근혜 10일 영등포 타임스퀘어서 대선출마 선언] 연합뉴스 2012년 7월 5일</ref>
         박근혜 후보는 안철수 전 후보가 [[문재인]] [[민주통합당]] 후보의 지지 유세를 함으로써 고비를 맞았지만, 지지층 및 여론의 굳건한 지지를 받으며 대선 기간 중 시행된 거의 모든 여론조사에서 지속적으로 1위를 기록하였다. 한편 대통령 선거 후반에 국정원 여직원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민주통합당]]은 2012년 12월 11일 [[국가정보원]] 소속 심리정보국 공무원들이 국가정보원의 지시에 따라 인터넷에 게시글을 남겨서 선거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공개했다. 이어서 해당 활동에 참여한 국가정보원 직원중 1명을 지목했다. 그러나 해당 직원은 오피스텔에서 경찰과의 대치 과정에서 나오지 않았고 그런 일을 한 적이 없다고 주장하였다. 결국 경찰은 수사에 들어갔으나, 국가정보원 요원은 전화를 통해 자신이 항상 정치적 중립을 지키고 있으며 대선과 관련한 어떤 글도 인터넷에 올린 적이 없다고 주장했다.<ref>조혜령,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79&aid=0002422919 국정원 직원 "문재인 후보 비방 댓글 단 적 없다"], 노컷뉴스, 2012년 12월 12일</ref>
         2013년 5월 7일 밤(미국 기준시) 홍보수석비서관실의 [[윤창중]] 대변인이 박근혜 대통령의 첫 해외 순방인 미국 방문 중 술을 마시고, 주 미국 한국대사관에서 지원한 인턴 여성의 둔부 근처에 손을 댄 행동과 다음 날 새벽 호텔에서 과도하게 노출된 상태로 해당 여성을 마주했다는 의혹이 발생, [[윤창중]]은 바로 성추행으로 미국 경찰에 신고되었으며, 이러한 사실이 윗선에 보고되어 경질되었다는 내용이 언론에 유포되었다.<ref>[http://www.yonhapnews.co.kr/politics/2013/05/12/0501000000AKR20130512057900001.HTML "윤창중, 靑진술서 '엉덩이 터치·본인 노팬티' 시인"]《연합뉴스》2013년 5월 12일 신지홍 기자</ref><ref>[http://www.sisainlive.com/news/articleView.html?idxno=16433 윤창중의 출국 누가 도와줬나?]《시사인》2013년 5월 11일 김영미 국제문제전문 편집위원</ref> 이 사건으로 직속 상급자인 [[이남기]] 홍보수석비서관(차관급)이 사과발표를 하였으며, 사의를 표명하였다. [[이남기]]의 사직서는 5월 중순 수리되었다.<ref>[http://news1.kr/articles/1129691 靑 "윤창중 사건, 美측에 조속한 수사 진행 요청"]《뉴스1》2013년 5월 12일 장용석 기자</ref><ref>[http://www.hani.co.kr/arti/politics/bluehouse/586998.html 이남기 홍보수석 사의…허태열 "책임 피하지 않을 것"]《한겨레》2013년 5월 12일</ref> 또한, 이남기 홍보수석비서관과 윤창중 전 수석대변인 간의 진술 차이, 대통령에 대한 사과 표현 등이 문제시되어 [[허태열]] 대통령비서실장(장관급)이 공식사과를 발표하였다.<ref>[http://imnews.imbc.com/replay/newsflash/3281506_7612.html 靑 허태열 공식 사과…이남기 홍보수석 사의]《MBC》2013년 5월 12일</ref>
         국정원의 댓글, 트위터등을 통한 대선 개입 활동이 대통령 선거 결과에 끼친 영향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ref>박응진,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421&aid=0000516975 '국정원 트위터'…대선에 영향? 의견 분분],뉴스1, 2013년 10월 22일</ref> 그러나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김용판의 지시에 따른 [[서울지방경찰청]]의 허위수사발표는 대통령 선거 결과에 영향을 미쳤다. [[리서치뷰]]는 전국 득표율과 거의 비슷하게 나온 [[인천광역시]]의 시민을 대상으로 여론조사를 했다. 경찰이 사실대로 발표했을 경우 박근혜 투표층의 13.8%가 문재인을 찍었을 것이라고 응답했다.<ref>정찬,[http://www.polinews.co.kr/news/article.html?no=183788 국정원 경찰수사발표가 대선 결과 영향 52.8%],폴리뉴스, 2013년 8월 16일</ref> 이는 전체 득표율의 7.12%p에 해당된다. 여론조사 업체 [[리얼미터]]의 이택수대표는 김용판의 허위수사발표직전 문재인 후보가 여론조사에서 박근혜 후보의 지지율을 추월하였지만, 경찰의 발표 이후 다시 아래로 내려갔다고 밝혔다.<ref>이성휘, [http://www.polinews.co.kr/news/article.html?no=181991 이택수 "12월16일 무렵 문재인 박근혜에 골든크로스, 경찰발표로 원상복구"],폴리뉴스, 2013년 7월 25일</ref> 리서치뷰가 2013년 10월 27일 전국 만 19세 이상 유권자 1000명을 대상으로 여론조사를 벌인 결과도, 경찰이 제대로 발표했었다면 대선 결과가 바뀌었을 것이라는 추정을 가능하게 한다. 박근혜 후보를 찍었던 투표층 중 8.3%는 경찰이 사실대로 발표했을 경우 문재인 후보를 찍었을 것이라고 응답했다는 것이다. 리서치뷰 측은 "이러한 결과를 두 후보의 최종득표율에 반영할 경우 박근혜 후보는 51.55→47.27%, 문재인 후보는 48.02%→52.3%로 나타났다"라고 밝혔다.<ref>[http://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112763 "경찰 제대로 수사발표했으면 문재인이 당선됐을 것"] 미디어오늘, 2013년 10월 28일</ref>
         한편, 세월호 사고 수습 방안의 하나로 청와대와 내각의 인적쇄신이 단행되었는데, 이는 후보자의 잇따른 낙마로 인하여 인사 파동이라는 말까지 발생하게 하였다. 5월 19일 대국민담화 이후 5월 22일 내정한 안대희 국무총리 후보자가 과다 수임료 논란으로 일주일 만에 사퇴하였고, 6월 10일 내정한 문창극 국무총리 후보자는 부적절한 교회 강연 발언 논란으로 2주일 만에 사퇴하였다. 박근혜는 결국 6월 28일 정홍원 국무총리를 유임하겠다고 대변인을 통하여 발표하였다. 잇따른 총리 후보자의 낙마는 큰 논란이 되었으며, 매스컴의 많은 문제제기 및 여론의 강한 비판을 불러왔다. 또한, 6월 13일 개각에서 내정한 7명의 장관 내정자 중 2명이 7월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제기된 각종 의혹 등으로 인하여 사퇴하였다.
         여야는 6월 세월호 사고 관련 국정조사에 합의하였다. 그러나 6월 말 실시하기 시작한 국정조사는 고성과 막말 속에 흐지부지 종료되었으며, 7월 중순부터는 세월호 조사위원회에 수사권과 기소권을 주는 특별법 제정을 요구하는 야당측과 세월호 사고 유가족의 국회 내 농성, 거리 행진, 데모 등이 벌어졌다. 이러한 도중에 실시된 7월 30일 재보궐선거에서는 새누리당이 승리하였고, 8월 초 새누리당 이완구-새정치민주연합 박영선 원내대표는 세월호 조사위원회 구성 등을 담은 소위 세월호 특별법에 대하여 합의하였다. 그러나 이에 대하여 야당 내부의 반발이 벌어지면서 여야간의 합의는 파기되었다.
         한편, 세월호 사고 유가족 김영오가 7월 중순부터 단식농성에 들어가 매스컴의 관심을 받았다. 김영오는 광화문광장에서 40여일 간 단식을 진행하면서 청와대 앞에서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욕설 등을 퍼붓기도 하였다. 김영오의 단식에는 문재인 민주당 의원, 가수 김장훈 등이 호응하여서 동조하기도 하였다. 또한 김영오의 단식에 대하여 한겨레, 오마이뉴스 등 좌파성향 매스컴이 옹호, 지지를 표하며 집중적으로 조명하였다.
         2014년 6월 13일 개각으로 내정된 경제부총리 최경환은 7월 중순 취임하였다. 최경환은 취임 직후부터 금융완화, 부동산규제 완화, 가계소득 증대 및 적극적인 재정 투입을 통하여 세월호 사고 영향으로 침체된 경제를 회복시키겠다고 발표하였다. 그의 이러한 적극적인 경제정책에 대하여 언론에서는 [[초이노믹스]]라 부르고 있다. 정부의 경제정책에 대하여 대통령의 이름이 아니라 장관의 이름을 붙이는 것은 대단히 이례적인 일로서, 최경환이 박근혜 대통령의 신임을 받는다는 점, 최경환이 추진하는 경제정책이 정부의 핵심 경제정책이라는 점 등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최경환의 취임 이후 종합주가지수 역시 크게 상승하였다.
         초이노믹스는 7월 30일 보궐선거에서 여당이 승리하게 하는 데 기여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8월 1일 최경환은 DTI, LTV 등 부동산규제를 완화하였다. 또한 9월 1일 부동산대책을 관계부처 합동으로 발표하여 적극적인 부동산 경기 활성화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그러나 상승하였던 주가가 이후 하락하고, 경기 회복세가 미약하여서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기획재정부는 10월 말 5조원 규모의 추가 경기부양책을 발표하였다.
         국가정보원에서 특수활동비를 상납받고 옛 새누리당 공천 과정에 개입한 혐의에 대한 재판도 받고 있다. [[2018년]] [[7월 20일]] 1심을 맡은 [[서울중앙지방법원|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32부(성창호 부장판사)는 국정원 특활비 수수 혐의에 징역 6년과 추징금 33억원, 공천 개입 혐의에는 징역 2년, 총 징역 8년 및 추징금 33억 원을 선고했다. 국정원 특활비를 받은 부분에 대해서는 국고 손실 혐의만 유죄로 인정했으며, 뇌물 수수 혐의는 무죄로 판단했다. 유죄로 인정한 금액도 2016년 9월 전달된 2억원을 제외한 33억원이다.<ref name=":1" />
         박근혜는 원칙, 신뢰, 약속을 지킨다는 이미지가 장점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녀는 세종시 문제, 2007년 대선 후보 경선 등을 통해 한 번 약속한 것은 반드시 지킨다거나 원칙을 중시한다는 이미지를 얻었다. 2012년 대선에 출마한 후보로서, 이러한 이미지는 국정운영에서의 안정감에 대한 기대로 연결된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러한 이미지는 지지층에서만 통할 뿐이며, 변화를 바라는 사람들에겐 소통도 안 되고 감동도 없는 사람으로 보인다고 평가되기도 했다.<ref name="mk1">[http://news.mk.co.kr/newsRead.php?year=2012&no=199680 <매경이 만난 사람> 공천 탈락후 정계은퇴 선언한 강봉균 3선의원]매일경제, 2012년 3월 30일</ref><ref name="mk">[http://news.mk.co.kr/newsRead.php?year=2012&no=425368 원칙·소신 두각 vs 불통·신비주의 한계] 매일경제, 2012년 7월 11일</ref><ref>[http://news.mk.co.kr/newsRead.php?year=2012&no=629300 박근혜·문재인·안철수 SWOT분석] 매일경제, 2012년 9월 28일</ref><ref>[http://news.sbs.co.kr/section_news/news_read.jsp?news_id=N1001391745 SWOT 분석으로 본 대선 주자들…장단점은?] 서울방송 8시뉴스, 2012년 9월 20일</ref><ref name="kh">[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208272200245&code=910402 [새누리 후보 박근혜 뒤집어보기](1) 원칙인가, 독선인가] 경향신문, 2012년 8월 27일</ref> 대통령이 된 이후에는 일부 대선 공약을 수정해 반대 진영으로부터 비판을 받고 있다.<ref>[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310161539471&code=940100]</ref>
         2019년 4월 11일 통계청이 새롭게 공개한 소득분배지표에서 2011~2017년 한국의 분배 상황이 개선된 것으로 나타났다. 과거 보수정권에서 소득분배가 지속적으로 악화됐기 때문에 소득주도성장이 필요하다는 문재인 정부의 주장과 상반되는 결과가 나온 것이다. 2019년 4월 11일 통계청이 처음 공개한 가계금융복지조사 소득분배 부문 추가 지표에 따르면 한국의 팔마비율(Palma ratio·처분가능소득 기준)은 2011년 1.74배에서 2017년 1.44배까지 하락했다. 팔마비율은 호세 가브리엘 팔마 영국 케임브리지대 교수가 개발한 소득 불평등 지표로 소득 상위 10% 인구의 소득 점유율을 하위 40% 인구의 소득 점유율로 나눈 값이다. 숫자가 낮아졌다는 것은 소득 불평등이 개선됐다는 의미다. 또 다른 분배지표인 소득 10분위 경곗값 비율(P90/P10)도 2011년 6.42에서 2017년 5.79까지 떨어졌다. `소득 10분위 경곗값 비율`은 처분가능소득 기준 가계소득 상위 10% 경곗값을 하위 10% 경곗값으로 나눈 수치다. 이날 공개한 다른 2개의 소득분배지표(P90/P50, P50/P10) 모두에서도 역시 2011~2017년 소득분배가 개선된 것으로 집계됐다. 이 기간은 이명박 정권 중반기인 2011년부터 약 6년 반 동안 보수 정권이 이어진 후 마지막 반년 가량 동안에는 진보 정권인 문재인정부 집권기에 해당한다. 민주당 이해찬 대표는 2018년 8월 19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기자간담회를 열고 소득주도 성장을 내세우면서 최저임금을 급속도로 인상해 일어난 '고용 참사'의 책임이 이명박·박근혜 정부에 있다고 주장했다. 이 대표는 "지난 10년간 이명박·박근혜 정부 때 성장잠재력이 매우 낮아져서 그 결과가 지금 나타나고 있는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노무현 정부에서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을 지낸 김진표 더불어민주당 의원도 역시 2018년 8월 24일 "양극화가 유례없이 심화된 것은 이명박·박근혜 정권의 경제정책이 역주행한 것에 근본 원인이 있다"고 말한 바 있고 그 근거를 묻는 질문에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한국의 소득불평등이 최근 10년간 악화됐다는 보고서를 본 기억이 있어 그렇게 말했다"고 설명했다. 홍남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2018년 12월 인사청문회에서 “박근혜 정부에서 양극화가 지속됐다”고 말했다.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1월 신년회견에서 "우리는 부의 양극화와 경제적 불평등이 세계에서 가장 극심한 나라"라고 언급하는 등 진보 진영에서는 지난 두 차례의 보수 정권 집권기간에 분배 상황이 악화됐다고 주장해 왔다. 이두원 연세대 경제학과 교수는 "한국에서는 보수와 진보 정권을 가리지 않고 복지 확대 정책을 펼쳐 왔다. 보수 정권에서 불평등이 심화될 것이라는 진보 세력의 주장은 이 같은 정책 요인을 전혀 감안하지 못한 것"이라고 설명했다.<ref>https://www.hankyung.com/economy/article/2019041161511</ref><ref>https://www.mk.co.kr/news/economy/view/2019/04/224437/</ref>
         박근혜는 자신이 가진 독단적인 이미지 때문에 많은 비판을 받았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2012년 7월 11일 [[김문수 (1951년)|김문수]] [[새누리당]] 대선 경선후보의 예방에 "박근혜는 아무 것도 아니다, 칠푼이다"라고 말했다.<ref>[http://newslink.media.daum.net/news/20120711205713287], 황철환 기자, 김영삼 "박근혜 별것 아니다..칠푼이다" 혹평, 연합뉴스, 2012.7.11.</ref> 칠푼이는 지능이 조금 모자라는 사람을 놀림조로 이르는 말인데, 과거 이명박 대통령이나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의 독재, 독단적인 면에 대해서도 칠푼이라 표현한 적이 있어 박근혜 의원과 친박계의 독선적인 당 운영에 대한 비판적 표현<ref>[http://www.sisaon.co.kr/news/articleView.html?idxno=13628] 정세운 기자, '칠푼이=독재자'를 왜곡하는 언론, 시사오늘, 2012.7.11.</ref> 으로 보는 시각이 있다. 일각에서는 이를 '차남 [[김현철 (1959년)|김현철]]이 총선 때 [[새누리당]]의 공천을 못 받은 것에 대한 감정적 발언'<ref>[http://media.daum.net/politics/others/newsview?newsid=20120717224011214], 오윤환, 박근혜가 유신 2인자? YS 부자의 '멘붕', 데일리안, 2012.7.17</ref> 으로 보기도 한다.
         박근혜는 2012년 7월 16일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초청 토론회에서 [[5·16 군사 정변]]에 대하여 "돌아가신 아버지로서는 불가피하게 최선의 선택을 한 게 아닌가라고 생각한다"는 발언을 하였다.<ref>[http://news.donga.com/3/all/20120716/47794426/1 박근혜 "5·16 아버지의 불가피한 최선의 선택" 《동아닷컴》, 2012년 7월 16일 작성]</ref> 이후 일부 여론조사에서 응답자의 49.9%가 박근혜의 발언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결과가 나오는 등 많은 논란을 낳았다.<ref>[http://www.hani.co.kr/arti/politics/politics_general/544734.html 5·16 옹호 박근혜 발언 국민 절반이 "동의 못한다"《한겨레》, 2012년 7월 29일 작성]</ref> 논란이 심해지자 8월 7일 한 토론회에서 '5·16이 정상적인 것은 아니다'라는 취지의 발언을 하였고,<ref>[http://www.hankyung.com/news/app/newsview.php?aid=2012080736231&sid=0106&nid=009<ype=1 한 발 뺀 박근혜 "5·16이 정상적인 것은 아니다" 《한국경제》, 2012년 8월 7일 작성]</ref> 역시 이를 두고 정치권의 다양한 해석이 분분하였다.<ref>[http://www.asiae.co.kr/news/view.htm?idxno=2012080722081464158 박근혜, "5·16 정상적인건 아니지않나" 해석분분 《아시아경제》, 2012년 8월 7일 작성]</ref> [[5·16 군사 정변]]에 대한 박근혜의 발언에 대하여 5·16을 두고 박근혜를 공격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해석<ref>[http://www.newdaily.co.kr/news/article.html?no=119933 연좌제 피해자들이 연좌제를 써먹는대서야 《뉴데일리》, 2012년 8월 19일 작성]</ref> 도 있지만, 대체로 민주주의 국가에서 쿠데타를 옹호하는 듯한 발언은 부적절했다는 평이 지배적이다.{{출처|날짜=2008-06-16}}
         이러한 입장에 대하여 언론과 정치권을 비롯한 각계로부터 많은 비판이 제기되었다. 박 후보의 대법원 판결이 두 가지로 나오지 않았느냐는 발언은 헌정절차가 정지된 유신 때 이뤄진 유죄 판결과 민주화 이후 사법부가 무죄로 교정한 판결의 효력을 동일시한 것이며, 이미 역사적, 사법적 판단이 내려진 사안까지 수용하지 않는 것으로 해석되었기 때문이다.<ref>[http://media.daum.net/issue/365/newsview?issueId=365&newsid=20120910220812478 박근혜 "인혁당 대법 판결은 2개" 헌정무시] 경향신문, 2012년 9월 11일</ref><ref name="박근혜 인혁당 판결 두개 논란···'통합' 걸림돌될까">[http://www.mt.co.kr/view/mtview.php?type=1&no=2012091010501209509&outlink=1 박근혜 "인혁당 판결 두개" 논란···'통합' 걸림돌될까] 머니투데이, 2012년 9월 10일</ref><ref>[http://news.mk.co.kr/newsRead.php?year=2012&no=580865 박근혜 "인혁당에 대한 대법원 판결은 두가지" 발언 논란] 매일경제, 2012년 9월 11일</ref>
         [[경향신문]]과 [[한겨레]], [[한국일보]] 등의 언론들은 사설을 통하여 재심으로 유신 당시의 대법원 판결은 취소되었으며 "지금 이 순간 인혁당 사건이 무죄라는 점은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법적인 사실"이라는 점을 지적하였다.<ref>[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209102116085&code=990101 <사설>'인혁당 판결이 두 개'라는 박근혜 후보의 법치 인식]경향신문, 2012년 9월 11일</ref><ref>[http://www.hani.co.kr/arti/opinion/editorial/551011.html <사설> 박근혜, 인혁당 사건에 대한 분명한 입장 밝혀야]한겨레, 2012년 9월 11일</ref> 특히, 한국일보는 사설에서, "사실상의 헌법중단 상태인 유신 치하의 원판결과 민주화 이후의 재심 판결에 똑같이 '정치 상황'이란 잣대를 들이댄 결과라면 실로 심각하다"면서 그럴 경우 "대한민국의 사법절차, 나아가 헌정질서에 대한 근본적 도전"이라고 비판했다.<ref>[http://news.hankooki.com/lpage/opinion/201209/h2012091121052376070.htm <사설/9월 12일> 박근혜 후보 언제까지 "역사 판단" 타령인가] {{웨이백|url=http://news.hankooki.com/lpage/opinion/201209/h2012091121052376070.htm# |date=20121116012015 }}한국일보, 2012년 9월 12일</ref>
  • 송병구 . . . . 48회 일치
         * 2007년 7월 14일 곰TV 2007 2nd 결승전 5경기 김택용 승
         * 2007년 7월 14일 곰TV 2007 2nd 결승전 4경기 송병구 승
         * 2007년 7월 14일 곰TV 2007 2nd 결승전 3경기 김택용 승
         * 2007년 7월 14일 곰TV 2007 2nd 결승전 2경기 송병구 승
         * 2007년 7월 14일 곰TV 2007 2nd 결승전 1경기 김택용 승
         * 2009년 07월 04일 신한은행 프로리그 08~09 5R 삼성전자 vs 화승 3세트 송병구 승
         * 2007년 08월 11일 e스타즈 월드토너먼트 8강 3경기 이제동 승
         * 2007년 08월 11일 스타즈 월드토너먼트 8강 2경기 이제동 승
         * 2007년 08월 11일 e스타즈 월드토너먼트 8강 1경기 송병구 승
         * 2007년 7월 18일 다음 스타리그 2007 3, 4위전 1경기 송병구 승
         * 2007년 7월 18일 다음 스타리그 2007 3, 4위전 2경기 송병구 승
         * 2007년 7월 18일 다음 스타리그 2007 3, 4위전 3경기 송병구 승
         * 2011년 7월 22일 진에어 스타리그 2011 16강 B조 4경기 이영호 승
         * 2012년 2월 11일 SK플래닛 프로리그 11-12 시즌1 2라운드 삼성전자 vs KT 4세트 이영호 승
         * 2010년 7월 28일 대한항공 2010 2nd 16강 D조 1경기 송병구 승
         * 2009년 7월 10일 박카스 스타리그 2009 16강 B조 6경기 정명훈 승
         * 2005년 1월 11일 Cyon 2004 3차 챌린지 E조 3경기 송병구 승
         * 2009년 1월 11일 신한은행 프로리그 08~09 2R 삼성 vs MBC게임 3세트 염보성 승
         * 2008년 5월 11일 신한은행 프로리그 2008 삼성전자 vs MBC게임 4세트 송병구 승
         * 2007년 7월 5일 곰TV MSL 시즌2 4강 A조 1경기 송병구 승
  • 정형돈 . . . . 37회 일치
         '''정형돈'''([[1978년]] [[2월 7일]]<ref>[https://entertain.v.daum.net/v/20160730070104091 정형돈, "시간을 최대한 활용해야 하는 시기"]</ref><ref>[https://www.fncent.com/JHD/b/introduce/10713 음력 1978년 2월 7일, 양력 1978년 3월 15일]</ref> ~ )은 [[대한민국]]의 [[희극 배우|희극인]], [[사회자]]이다. 본관은 [[동래 정씨|동래]].
         [[2012년]] [[12월 11일]] 오전 6시11분, 13분에 태어난 두 딸(유주, 유하)의 아버지가 되었다.<ref>{{뉴스 인용|제목=[단독] 정형돈, 쌍둥이 아빠 되다.. 딸부자 등극|url=http://cast.wowtv.co.kr/20121211/A201212110127.html|출판사=|저자=한국경제TV 기자|날짜=2011-12-11|확인날짜=2012-12-11|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121214052956/http://cast.wowtv.co.kr/20121211/A201212110127.html|보존날짜=2012-12-14|깨진링크=예}}</ref> [[2016년]] [[10월 5일]], [[주간 아이돌]]로 전격 복귀하였으며, [[신현준 (1968년)|신현준]]과 한중 합작 영화 시나리오 공동 집필을 시작으로 작가로서의 데뷔를 알렸다.
         * [[KBS]] 《야한밤에 147회 (6월 11일) : 게스트》
         * [[KBS]] 《TV는 사랑을 싣고 461회 (7월 13일) : 게스트》
         * [[KBS]] 《TV 오디션 60초 9회 (7월 25일) : 게스트》
         * [[KBS]] 《해피투게더 프렌즈 11회 (7월 14일) : 게스트》
         * [[MBC]] 《말달리자 13회 (7월 24일) : 게스트》
         * [[Mnet]] 《M Super Concert - 진주산업대학교에서 (9월 11일) : MC》
         * [[SBS]] 《야심만만 190회 (12월 11일) : 게스트》
         * [[SBS]] 《야심만만 218회 (7월 2일) : 게스트》
         * [[KBS]] 《스타골든벨 140, 141, 143회 (7월 7일, 14일, 28일) : 게스트》
         * ETN 《투캅스 6회 (7월 1일) : 게스트》
         * [[KBS]] 《미녀들의 수다 127회 (5월 11일) : 게스트》
         * [[SBS]] 《추석 특집 - 토끼열전 (10월 11일) : 게스트》
         * [[올리브 네트워크|O'liveTV]] 《2009 스타일 아이콘 어워즈 시상식 (11월 11일) : 시상자》
         * [[KBS]] 《스타골든벨 - 시즌2 9회 (7월 10일) : 게스트》
         * [[MBC]] 《MBC 스페셜 509회 - 일곱살 인생 (2월 11일) : 내레이션》<ref>{{뉴스 인용|제목=정형돈, 다큐 ‘일곱살 인생’ 첫 내레이션 호평 “재미+감동”|url=http://media.daum.net/entertain/broadcast/view.html?cateid=1032&newsid=20110212143606182&p=seoul|출판사=서울신문NTN|저자=연예뉴스팀|날짜=2011-02-12}}</ref>
         * [[MBC]] 《MBC 뉴스데스크 (7월 31일) : 제53회 STX컵 전국 조정선수권대회 현장》
         * [[KBS]] 《바라던 바다 1, 2, 3회 (9월 11일, 18일, 25일) : MC》<ref>{{뉴스 인용|제목=정형돈 신현준 성규 KBS 요트 예능 합류, 집단가출 콘셉트”|url=http://www.newsen.com/news_view.php?uid=201308221434460910|출판사=뉴스엔|저자=전원|날짜=2013-08-22}}</ref>
         * [[KBS]] 《[[인간의 조건]] : 나트륨 줄이며 살기 - 70회 (7월 19일) : 인터뷰》
  • 정용화 . . . . 26회 일치
         * [[2009년]] [[12월 6일]]부터 [[2010년]] [[3월]]까지 [[문화방송|MBC]] 《[[우리들의 일밤|일요일 일요일 밤에]] - [[헌터스]] : [[헌터스|에코하우스]]》를 시작으로 예능활동을 시작하였다. [[2010년]] [[2월]]부터 [[2011년]] [[4월]]까지 [[문화방송|MBC]] 《[[우리 결혼했어요]] 시즌 2》에 고정출연하였고, [[2010년]] [[7월]]부터 [[2011년]] [[3월]]까지는 [[SBS]] 《[[인기가요]]》 [[사회자|MC]]를 맡았다.<ref name="ingi">[http://seoulntn.com/cindex.php?c=news&m=view&idx=41989 정용화-조권, '인기가요' 새 MC 발탁..'관심집중'], 《서울신문NTN》, 2010년 7월 18일 작성.</ref> 또한, [[2009년]], [[2010년]] 2년 연속 《[[SBS 가요대전]]》 MC로 활동하였다.<ref name="gayo1" /><ref name="gayo2" /> 이러한 고정 출연 외에도 [[황금어장]], [[런닝맨]] -게스트로 최다출연기록을 세웠다, [[강심장]], [[명받았습니다]], [[승승장구]], [[놀러와]], [[해피투게더 (텔레비전 프로그램)|해피투게더]], [[청춘불패]], [[대국민 토크쇼 안녕하세요]] 등 여러 예능 프로그램에 게스트로 출연하였다.
         * [[2010년]] [[7월 31일]]에는 서울에서 「Listen to the CNBLUE」이란 타이틀로 한국에서의 첫 단독콘서트를 진행하였다.<ref>{{뉴스 인용|제목=씨엔블루, 데뷔 첫 단독 콘서트 `Listen to the CNBLUE` 개최|url=http://www.hankyung.com/news/app/newsview.php?aid=2010061670037|출판사=한국경제|날짜=[[2010년]] [[6월 16일]]}}</ref>
         * [[2011년]] [[1월 9일]], 일본에서 세 번째 싱글 ''[[RE-MAINTENANCE]]''를 발매하였다. 타이틀 "Try again, Smile again"을 작곡 및 작사하였고 오리콘 싱글차트 데일리 2위에 올랐다.<ref>{{뉴스 인용 |제목 = '씨엔블루' 日 투어 전석 매진 신기록…오리콘 챠트 2위 겹경사 |url = http://mystar.mdtoday.co.kr/mystar/index.html?no=426803 |출판사 = 마이스타뉴스 |날짜 = [[2011년]] [[1월 10일]] |확인날짜 = 2012년 8월 19일 |보존url = https://archive.today/20130111191550/http://mystar.mdtoday.co.kr/mystar/index.html?no=426803 |보존날짜 = 2013년 1월 11일 |깨진링크 = 예 }}</ref>
         * [[2011년]] [[10월 19일]]에 2년여 시간의 인디즈 생활을 마감하고 《[[In My Head]]》로 메이저 데뷔를 하였다.<ref>{{뉴스 인용|제목 = 씨엔블루, 워너 뮤직 재팬과 계약 체결…日 메이저 사냥 나선다|url = http://tvdaily.mk.co.kr/read.php3?aid=1314836363197901011|출판사 = 티브이데일리|날짜 = [[2011년]] [[9월 1일]]|확인날짜 = 2012년 8월 19일|보존url = https://archive.today/20120720005549/http://tvdaily.mk.co.kr/read.php3?aid=1314836363197901011|보존날짜 = 2012년 7월 20일|깨진링크 = 예}}</ref><ref>{{뉴스 인용|제목 = 씨엔블루, 10월19일 'In my head' 발매 日정식데뷔 |url=http://star.mt.co.kr/view/stview.php?no=2011090609394071723&type=1&outlink=1|출판사 = 스타뉴스 |날짜 = [[2011년]] [[9월 6일]]}}</ref>《[[In My Head]]》의 타이틀 "In My Head" 를 작곡 하였고 "Mr.K.I.A(Know It All)" 작사 및 작곡, "In My Head(Inst.)" 작곡하였다. 이 앨범은 첫 날 오리콘 싱글 데일리 차트 3위를 하였다.<ref>{{뉴스 인용|제목= `씨엔블루, 日메이저 데뷔곡 '인 마이 헤드' 오리콘 3위 '쾌거' |url=http://www.mydaily.co.kr/news/read.html?newsid=201110200945231137&ext=na|출판사 = 마이데일리|날짜 = [[2011년]] [[10월 20일]]}}</ref> 메이저 음반 발매 기념으로 한 이벤트에 1만4000여명이 참가했다.<ref>{{뉴스 인용|제목= 씨엔블루 이벤트 1만4000명 동원 ‘日 메이저 데뷔 성공적’|url= http://news.donga.com/Culture/Music/3/0710/20111025/41382723/1|출판사= 스포츠동아|날짜= [[2011년]] [[10월 25일]]}}{{깨진 링크|url=http://news.donga.com/Culture/Music/3/0710/20111025/41382723/1 }}</ref>
         * 오리콘 싱글 위클리 차트에 일주일 만에 7만 1200장을 팔아 치우고 일본 메이저 데뷔를 했다.<ref>{{뉴스 인용|제목= 씨엔블루, 日 데뷔싱글 일주일 만에 7만장 판매|url=http://sports.chosun.com/news/utype.htm?id=201110270100197960017298&ServiceDate=20111026|출판사 = 스포츠조선|날짜 = [[2011년]] [[10월 26일]]}}</ref><ref>{{뉴스 인용 |제목= 씨엔블루 '인 마이 헤드', 日 오리콘 주간 차트 4위 랭크 |url= http://tvdaily.mk.co.kr/read.php3?aid=1319589921221164011 |출판사= 티브이데일리 |날짜= [[2011년]] [[10월 26일]] |확인날짜= 2012년 8월 19일 |보존url= https://archive.today/20120715225340/http://tvdaily.mk.co.kr/read.php3?aid=1319589921221164011 |보존날짜= 2012년 7월 15일 |깨진링크= 예 }}</ref> 《[[In My Head]]》는 [[2011년]][[11월 10일]]에 일본 레코드 협회에서 선정하는 골드 레코드가 되었다.<ref>{{뉴스 인용|제목= 씨엔블루 일본 데뷔싱글 10만장 넘겨, 日 '골드 레코드' 선정|url= http://tvdaily.mk.co.kr/read.php3?aid=1321064770229443011|출판사= 티브이데일리|날짜= [[2011년]] [[11월 12일]]|확인날짜= 2012년 8월 19일|보존url= https://archive.today/20130112003527/http://tvdaily.mk.co.kr/read.php3?aid=1321064770229443011|보존날짜= 2013년 1월 12일|깨진링크= 예}}</ref>
         * [[2012년]]은 첫 주부터 아시아투어를 하였다. [[2012년]] [[1월 7일]]~[[1월 8일]]을 시작으로 홍콩에서 씨엔블루의 아시아투어 첫 콘서트가 열렸다.<ref>{{뉴스 인용|제목= 씨엔블루, 일본 이어 홍콩도 녹였다 '8000 구름팬 운집'|url= http://tvdaily.mk.co.kr/read.php3?aid=1326249160257638011|출판사= 티브이데일리|날짜= [[2012년]] [[1월 11일]]|확인날짜= 2012년 8월 19일|보존url= https://web.archive.org/web/20120119163458/http://tvdaily.mk.co.kr/read.php3?aid=1326249160257638011|보존날짜= 2012년 1월 19일|깨진링크= 예}}</ref><ref>{{뉴스 인용|제목= 씨엔블루, 홍콩에서 아시아투어 화려한 출발|url=http://sportsworldi.segye.com/Articles/EntCulture/Article.asp?aid=20120111001281&subctg1=10&subctg2=00|출판사 = 스포츠월드|날짜 = [[2012년]] [[1월 11일]]}}</ref> 이번 홍콩콘서트는 1회를 추가하여 총 이틀에 걸쳐 콘서트가 진행되었다.<ref>{{뉴스 인용|제목= 씨엔블루 홍콩콘서트, 1시간만에 매진|url=http://sportsworldi.segye.com/Articles/EntCulture/Article.asp?aid=20111021001089&subctg1=10&subctg2=00|출판사 = 스포츠월드|날짜 = [[2011년]] [[10월 21일]]}}</ref>
         * [[2012년]] [[7월]]부터 [[2011년]] [[6월]]부터 [[8월]]까지 방영된 [[문화방송 수목 미니시리즈|MBC 수목 미니시리즈]] 《[[넌 내게 반했어]]》가 일본 공중파 후지TV에 방영을 시작하게 되었다.<ref>{{뉴스 인용|제목= 정용화, 일본 인기 파워 실감- ‘넌 내게 반했어’ 일본 공중파 입성 |url=http://nanumnews.com/sub_read.html?uid=42246§ion=sc208|출판사 = 나눔뉴스|날짜 = [[2012년]] [[5월 16일]]}}</ref><ref>{{뉴스 인용|제목= 정용화 출연작 '넌 내게 반했어' 日 후지TV 진출 '경사났네' |url=http://www.tvreport.co.kr/?c=news&m=newsview&idx=226944TM=news&SM=4101&idxno=587637|출판사 = TV리포트 |날짜 = [[2012년]] [[5월 16일]]}}</ref> 또한, 공중파 방영 전에 [[2012년]] [[7월 16일]]에 일본에서 공식적인 팬미팅을 개최하였으며,<ref>{{뉴스 인용|제목= 정용화 박신혜, 日 '넌 내게 반했어' 방영 앞두고 팬미팅 개최 |url=http://www.etoday.co.kr/news/section/newsview.php?TM=news&SM=4101&idxno=595980|출판사 = 이투데이|날짜 = [[2012년]] [[6월 13일]]}}</ref><ref>{{뉴스 인용 |제목= 정용화-박신혜, '넌 내게 반했어' 日 팬미팅 성료 |url= http://thestar.chosun.com/site/data/html_dir/2012/07/17/2012071701006.html |출판사= 조선일보 |날짜= [[2012년]] [[7월 17일]] }}{{깨진 링크|url=http://thestar.chosun.com/site/data/html_dir/2012/07/17/2012071701006.html }}</ref> 티켓이 모두 매진되는 기염을 토했다.<ref>{{뉴스 인용|제목= 정용화·박신혜, ′넌 내게 반했어′ 日팬미팅 1만석 매진 ″현지 열기 후끈″ |url=http://www.asiatoday.co.kr/news/view.asp?seq=667085|출판사 = 아시아투데이|날짜 = [[2012년]] [[7월 11일]]}}</ref>
         * [[2012년]] [[7월 30일]]에 본인이 모델로 있는 T.G.I프라이데이스 브랜드송을 발표하였다.<ref>{{뉴스 인용|제목= 씨엔블루 정용화, 자작곡 T.G.I프라이데이스 브랜드송 공개 |url=http://www.segye.com/Articles/SPN/ENTERTAINMENTS/Article.asp?aid=20120731021547&subctg1=&subctg2=|출판사 = 세계일보|날짜 = [[2012년]] [[7월 31일]]}}</ref>
         * [[2012년]] [[7월 30일]]에 같은 소속사 가수 AOA의 데뷔앨범에 자작곡 'Love is only you'를 선물했다.<ref>{{뉴스 인용 |제목= 정용화, [[AOA (음악 그룹)|AOA]]에 자작곡 'Love is only you' 선물…'종횡무진 활약' |url= http://xportsnews.hankyung.com/?ac=article_view&entry_id=245461 |출판사= 엑스포츠뉴스 |날짜= [[2012년]] [[7월 27일]] |확인날짜= 2012-11-26 |보존url= https://web.archive.org/web/20130129230835/http://xportsnews.hankyung.com/?ac=article_view&entry_id=245461 |보존날짜= 2013-01-29 |깨진링크= 예 }}</ref><ref>{{뉴스 인용|제목= 정용화, 걸그룹 AOA 지원사격..자작곡 선물로 '실력 입증'|url=http://www.tvreport.co.kr/?c=news&m=newsview&idx=248643|출판사 = TV리포트|날짜 = [[2012년]] [[7월 28일]]}}</ref>
         * [[2012년]] [[8월 1일]]에 일본에서 세 번째 싱글앨범인 ''[[Come On]]''를 발매하였고 타이틀인 "Come On"를 작사하고 "Wake up"를 작사 및 작곡하고 "My miracle"을 작사하였다.<ref>{{뉴스 인용|제목= 씨엔블루, 日 싱글 ′Come on′ 8월 1일 발매|url=http://www.asiatoday.co.kr/news/view.asp?seq=667993|출판사 = 아시아투데이|날짜 = [[2012년]] [[7월 12일]]}}</ref> 또한, [[2012년]] [[7월 30일]]부터 [[8월 5일]]까지 일본 전국에 걸쳐 팬사인회를 진행하였다.<ref>{{뉴스 인용 |제목= 씨엔블루, 세 번째 日 싱글 'Come on' 발매 기념 팬사인회 '성료' |url= http://thestar.chosun.com/site/data/html_dir/2012/08/02/2012080201321.html |출판사= 조선일보 |날짜= [[2012년]] [[8월 2일]] |확인날짜= 2012-11-26 |보존url= https://web.archive.org/web/20160125165532/http://thestar.chosun.com/site/data/html_dir/2012/08/02/2012080201321.html |보존날짜= 2016-01-25 |깨진링크= 예 }}</ref>
         * [[2012년]] [[9월 10일]]에 일본 파시피코 요코하마에서 일본 첫 번째 정규 음반 ‘코드 네임 블루’ 발매 기념 이벤트를 진행했다.<ref>{{뉴스 인용 |제목= 씨엔블루, 日 요코하마 이벤트 대성황 |url= http://news.hankooki.com/lpage/culture/201209/h20120911151020111780.htm |출판사= 한국일보 |날짜= [[2012년]] [[9월 11일]] |확인날짜= 2012-11-26 |보존url= https://web.archive.org/web/20131212114241/http://news.hankooki.com/lpage/culture/201209/h20120911151020111780.htm |보존날짜= 2013-12-12 |깨진링크= 예 }}</ref>
         * 앨범발매로 바쁜 와중에 [[2013년]] [[1월 15일]] 말레이시아에서 진행된 제27회 골든디스크시상식의 MC를 맡아 진행했다.<ref>{{뉴스 인용|제목= 정용화-니콜, 이홍기-다솜 ‘골든디스크 시상식’ MC 확정|url= http://isplus.live.joinsmsn.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10392989&cloc=|출판사= 일간스포츠|날짜= [[2013년]] [[1월 11일]]}}{{깨진 링크|url=http://isplus.live.joinsmsn.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10392989&cloc= }}</ref><ref>{{뉴스 인용|제목= 말레이시아 팬들, ‘골든 MC’ 정용화-니콜 “환상의 커플” 극찬
         | [[그리워서]]<ref name="t3">[http://music.naver.com/album/index.nhn?albumId=201206 넌 내게 반했어 OST Part 3 발매], 《네이버 뮤직》, 2011년 7월 13일 발매.</ref>
         |align="center"|[[2010년]] [[7월 17일]] ~ [[2011년]] [[3월 13일]]<ref name="ingi" />
         |align="center"|[[2010년]] [[11월 15일]] ~ [[2011년]] [[7월 4일]]<ref name="night">[http://news.mk.co.kr/v3/view.php?sc=50500004&cm=%B9%E6%BC%DB%A1%A4%BF%AC%BF%B9&year=2010&no=555407&relatedcode=000100050&sID=505 정용화-유이-대성 `밤이면 밤마다` MC 낙점‥아이돌라인 형성], 《매일경제 & mk.co.kr》, 2010년 10월 13일 작성.</ref>
          |날짜 = 2013년 1월 11일
  • 김형준(배우,가수) . . . . 22회 일치
          * 여담으로 'Never again' 활동 때 몸무게가 58kg 이었다고 한다. 181에 58kg... 도 아니었다. '''54 ~ 56kg'''이었다고 본인이 직접 김천경찰서 페이스북 라이브 방송에서 밝혔다. 이 시절엔 '뼈였다'고 표현하기도. 지금(2018년 하반기)은 72kg이라고 한다. [[https://youtu.be/wcUIufXF_5c|2018년 7월 20일 방송. 1:33:18부터.]]
          * 7월 10일 SS501 전원과 함께 자유선언 주먹이 운다에 출연했다.
          * 2월 11일부터 3월 25일까지 [[SS501의 키워줘서 고마워]]에 출연했다.
          * 11월 11일, 18일 SS501 전원과 함께 [[느낌표(MBC)|느낌표]]에 출연했다.
          * 7월 13일 SS501 전원과 함께 [[우리 결혼했어요]]에 출연했다.
          * 1월 11일 허영생, 김규종과 함께 로드쇼 퀴즈 원정대에 출연했다.
          * 6월 5일부터 7월 31일까지 [[식신로드]]를 진행했다.
          * 12월 11일 SS501, [[카라(아이돌)|카라]] 전원이 모두 절친노트에 출연했다. 그동안 억울하고(?) 못했던 말들을 폭로했다. 박정민과 싸웠던 일을 이야기 했는데 목격자인 허영생의 중언에 따르며 진짜 별것도 아닌일에 싸웠다고 한다. --욕도 귀엽게 한다고한다 야 개미 똥구멍아--
          * 12월 11일, 18일 김규종과 함께 [[식신로드]]에 출연했다.
          * 6월 11일 [[우리 결혼했어요]]에 출연해 [[K.WILL|케이윌]]과 함께 [[김원준]], [[박소현(배우)|박소현]] 신혼집에 초대되어 방문을 하였고 식사도 하고 집수리도 도와줬다.
          * 7월 14일 세바퀴에 출연했다.
          * 3월 11일, 18일 더블에스301 멤버들과 함께 쇼비즈 코리아에 출연했다.
          * 7월 5일 더블에스301 멤버들과 함께 쇼 챔피언 비하인드에 출연했다.
          * 7월 10일, 17일 더블에스301 멤버들과 함께 [[판타스틱 듀오]]에 패널로 출연했다.
          * 2005년 7월 9일 허영생, 박정민과 함께 [[서민정]]의 기쁜우리 젊은날 출연
          * 2012년 7월 24일 최화정의 파워타임 출연
          * 2011년 7월 17일 홍콩에서 팬사인회를 개최했다.
          * 2015년 7월 3일 서울 중구 롯데백화점 영플라자에서 열린 커스텀주얼리 브랜드 ES.DEW 론칭 행사에 김규종과 함께 참석했다.
          * 2015년 7월 4일 일본 도쿄 마이하마 엠피 시어터에서 단독 콘서트 2015 김형준 FNL in Japan을 열었다.
          * 2015년 7월 31일 멕시코에서 월드투어 FNL를 개최했다.
  • 희빈 장씨 . . . . 22회 일치
         |출생일 = 효종 10년(1659) 음력 9월 19일
         |사망일 = 숙종 27년(1701) 음력 10월 8일 ~ 10일<!--사망 발표가 10일 오전이었음-->
         '''희빈 장씨'''(禧嬪 張氏, [[1659년]]<ref>숙종 35권, 27년(1701 신사 / 청 강희(康熙) 40년) 9월 28일(임자) 2번째 기사</ref> [[11월 3일]] ([[음력 9월 19일]])<ref>승정원일기 숙종 15년~19년</ref> ~ [[1701년]] [[11월 7일]] ([[음력 10월 8일]])), '''장희빈'''(張禧嬪) 또는 '''옥산부대빈 장씨'''(玉山府大嬪 張氏)는 조선의 제19대 왕 [[조선 숙종|숙종]]의 [[빈 (지위)|빈(嬪)]]으로, 제20대 왕 [[조선 경종|경종]](景宗)의 어머니이다. [[조선 숙종|숙종]] 임금보다는 2년 연상이다. 본명은 '''장옥정'''(張玉貞)<ref>[http://yoksa.aks.ac.kr/jsp/aa/ImageView.jsp?aa10up=kh2_je_a_vsu_30613_000&aa10no=kh2_je_a_vsu_30613_001&aa15no=&aa20no=&pageno=&imgnum=JE_A_30613_001_000042&imgsize= 《단암만록》]/[[민진원]] 著</ref>, 본관은 [[인동 장씨|인동]](仁同)이다. 아버지는 [[역관]] 출신인 [[장형 (조선)|장형]](張炯)이며, 어머니는 [[장형 (조선)|장형]]의 계실인 윤씨이다. 역관(驛官) [[장현 (조선)|장현]](張炫)의 [[종질녀]]이다. [[조선 왕조]] 역사상 유일하게 [[궁녀]] 출신으로 왕비까지 오른 입지전적인 여인이다.
         숙종은 [[인현왕후]]와 [[영빈 김씨|김씨]]에게서 장씨를 떨어뜨리기 위해 중궁전과 후궁의 처소가 있는 [[창덕궁]]이 아닌 [[창경궁]]에 비밀리에 인부를 불러 장씨의 처소를 새로 건축하였다. 같은 해 12월에 숙종이 직접 장씨를 종4품 숙원으로 봉해 정식 후궁으로 만듦<ref group="주">승은궁녀에게 첩지를 내리는 것은 내명부 수장인 중전의 고유권한이었다.</ref> 으로서 인현왕후의 처지를 위해 장씨의 출궁을 종용하던 서인은 더이상 숙종에게 장씨를 출궁시킬 것을 강력히 요구할 수 없게 된다. 하지만 장씨를 숙원으로 봉하며 하사하기로 한 노비 100명과 전답은 흉년을 이유로 무기한 연기하도록 하였다.<ref group="주">[[조선 숙종|숙종]]이 [[장희재 (조선)|장희재]]에게 최초로 관직을 내린 것은 원자 명호를 취소할 것을 주장한 [[송시열]]의 상소로 인해 [[남인]]이 정계로 돌아온 후이며, 승진이 아닌 부서 이동에 불과했던 것으로 미루어 장씨가 후궁이 되고도 친정이 혜택을 받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숙종 15년 2월 11일 (기유) 원본333책/탈초본17책 (5/26)』</ref>
         [[1689년]] 1월 11일, [[조선 숙종|숙종]]은 아들 윤에게 원자(元子: 왕의 큰아들)<ref group="주">원자는 공식적인 왕의 장자(=장남)로서, 조선은 장자상속을 원칙으로 했다. 이에 후궁 소생이라 할 지라도 원자로 정해지면 왕비가 뒤이어 낳은 왕자는 엄연한 적장자임에도 불구하고 차자가 되어 왕위 계승에서 뒤로 밀려난다.</ref> 명호를 내릴 뜻을 알린다. [[조선 경종|왕자 윤]]이 후궁 소생이라는 사실에 방심<ref group="주">숙종 시대까지 조선 왕실 역사에 후궁 소생이 원자가 된 경우는 없었다. [[조선 중종|중종]]의 아들 [[복성군]]은 장자임에도 불구하고 6살 연하인 [[조선 인종|인종]]이 원자가 되었고, [[조선 선조|선조]]의 장자 [[임해군]]은 평생 원자는커녕 세자도 되지 못했다.
         숙종 15년(1689) 2월 1일에 [[인현왕후]]의 외가 친척이기도 한 [[송시열]]이 이미 종묘에 고한 원자 정호를 철회하라는 비판상소를 올리자 [[조선 숙종|숙종]]은 진노하여 [[송시열]]을 치죄하라는 명을 내리지만 [[서인]]으로 이루어진 [[승정원]]에서 명을 받들지 않았다. 앞서 [[조선 숙종|숙종]]이 [[김만중]]의 치죄를 명할 당시와 흡사한 배경<ref group="주">[[김만중]]을 추포하여 문초하라는 명을 내렸지만 승정원에서 항명하여 전지를 봉입하지 않았다. 이에 [[조선 숙종|숙종]]은 입직한 승지에게 전지를 쓰라고 명하였지만 붓이 없다는 핑계로 거절되었으며 사관 [[송상기]]는 붓을 빌려주라는 [[조선 숙종|숙종]]의 어명을 거부했다.</ref><ref>숙종실록 13년(1687 정묘 / 청 강희(康熙) 26년) 9월 11일(병술) 3번째기사</ref> 이었기에 [[조선 숙종|숙종]]은 분개하여 삼사와 [[승정원]], [[사간원]] 등 왕의 최측근 요직에 있던 서인을 파직하고 경신환국 때 실권하여 은신 중이었던 [[남인]]을 조정으로 불러 교체해버린다. 동시에 [[조선 숙종|숙종]]은 2월 2일 장씨의 선조 3대를 정승으로 추증(追贈)했다.<ref group="주">추증은 위로 올라갈수록 한 등급씩 감하는 것이 관례여서 장씨의 아버지 [[장형 (조선)|장형]](張炯)에게 영의정을 증직하면, 조부에게는 종1품 찬성(贊成)을 증직해야 했다. 숙종은 “사체(事體)가 다름이 있으니, 모두 의정(議政)을 증직하라”고 명해 [[장형 (조선)|장형]]은 영의정, 장수(張壽)는 좌의정, 장응인(張應仁)은 우의정에 증직되었다. 3대가 모두 정승에 증직된 드문 경우였다.</ref> 다음 달 3월엔 그녀의 외조부인 일본어 역관 윤성립을 2품 정경으로 추증하고, 외삼촌인 윤정석에게 사포별제<ref group="주">품계로는 6품에 이르나 녹봉이 없는 무록관이다.</ref> 직을 내려 장씨가 더이상 비천한 역관에 불가한 가문 출신이라는 손가락질을 받지 않도록 하였다.
         1690년 7월 19일, 중전 장씨가 숙종의 차자(次子)이자 첫 대군(大君)인 성수(盛壽)를 출산하였다.<ref group="주">한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박영규 저)에 장씨의 차자가 여자로 기록되어 있지만 이는 [[오류]]이다. [[조선 숙종|숙종]]의 딸은 인경왕후 소생의 조졸한 공주 2명 뿐이다.</ref>
         숙종실록에는 장씨 소생의 왕자가 9월 16일에 사망하였는데 태어난지 열흘이 지났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승정원일기의 기록에 따르면 6월에 이미 [[산실청]]이 설치되었으며 7월 19일 중궁전(장씨)이 해만(解娩: 해산)한 후 약방(藥房)과 정원(政院), 옥당(玉堂)이 대전과 중궁전의 안부를 물었다.<ref>[[승정원일기]] 숙종 16년 7월 19일 (무신) 원본342책/탈초본18책 (10/14)</ref> 다음 날인 7월 20일, 중전 장씨의 해만 상태와 산후 기후가 편안하다는 보고가 있으며 2품 이상 관원들이 문안을 올렸다. 22일에는 장씨의 유즙(乳汁: 젖)이 나오지 않아 약을 의논하는 기사가 있다. 7월 26일에는 산실청 의관이 입진하여 중궁전(장씨를 말한다)이 해만(解娩: 해산)한 지 제7일이 되었으니 산실을 철파(撤罷)하겠다는 계를 올렸다.<ref>승정원일기 숙종 16년 7월 26일 (을묘) 원본342책/탈초본18책 (8/13)</ref> 같은 날 [[조선 숙종|숙종]]은 산실청 전(前) [[도제조]]와 [[우의정]] 및 여러 관원과 의관들에게 각 [[말]] 한 필과 안장을 하사하였다. 다음 날 27일에는 산실청 담당 의관이었던 [[김유현]] 등에게 숭록(崇祿: 종1품 문무관 관직)을 제수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반대로 수령(守令)<ref group="주">고려ㆍ조선 시대에, 각 고을을 맡아 다스리던 지방관들을 통틀어 이르는 말. [[절도사]], [[관찰사]], [[부윤]], [[목사]], [[부사]], [[군수]], [[현감]], [[현령]] 따위를 이른다.</ref> 직을 제수하였는데, 이는 [[조선 숙종|숙종]]이 의관에게 종1품 숭록의 위를 제수할 만큼 대군의 탄생을 각별히 기뻐했음을 알 수 있다.<ref group="주">이 기록 역시 숙종실록에는 누락되어 있는데 반면에 [[숙빈 최씨]]가 [[조선 영조|영조]]를 출산하자 [[조선 숙종|숙종]]이 [[호산청]] 담당 내시와 [[의관]]에게 말을 하사한 것은 강조하여 기록하였다.</ref> 이러한 승정원일기의 기록은 장씨가 출산한 왕자가 9월 10일 경에 탄생된 것으로 기록한 숙종실록의 기사가 허위임을 증명한다.
         갑술환국이 발발 후 12일 째가 된 1694년 4월 11일, [[조선 숙종|숙종]]은 돌연 [[장희재 (조선)|장희재]]를 긴급구속하고, 훗날 길일을 잡아 서궁([[덕수궁]])으로 입처할 폐비 민씨([[인현왕후]])의 서궁 입처를 길일과 상관없이 당장 다음날로 할 것을 명하며 민씨의 사가에 수직(호위)를 붙였다. 그리고 다음날 폐비 민씨가 서궁으로 입처했다는 소식이 전달되자 "민씨가 스스로 죄를 간절히 뉘우치고 있으며, 두 자전(慈殿: [[장렬왕후]]와 [[명성왕후]])의 삼년상을 함께 보낸 아내이니 쫓아냈던 것은 지나친 처사<ref group="주">삼불거를 뜻한다. 칠거지악을 범한 아내일 지라도 삼불거에 해당되면 소박할 수 없으며, 이미 소박하여 새로이 혼인을 하였더라도 전처가 국가에 소송하면 이혼이 취소되어 새로운 아내는 첩으로 강등되거나 친정으로 돌아가야 한다.</ref> 였다."며 민씨를 중전으로 복위하고 "백성에게 두 임금이 없는 것은 고금을 통하는 의리이다"며 중전 장씨의 왕후새수(王后璽綬)를 거둬 희빈(禧嬪)의 옛 작호를 돌리고 거처를 옛처소인 창경궁 취선당으로 옮기라는 비망기를 내린다. 이에 대해 환국을 위해 투합했던 [[노론]]과 [[소론]]이 강경히 대립하게 되는데, 이는 [[노론]]은 [[인현왕후]]의 복위를 목적했고, [[소론]]은 희빈 장씨를 왕비로 둔 채 [[인현왕후]]를 폐서인인 상태로 별궁에 모셔 편안한 여생을 맞기만을 목적했던 탓이다.
         [[1701년]] [[음력 8월 14일]], 오랜 지병을 앓던 [[인현왕후]]가 사망하였다. 조정은 [[인현왕후]]를 위한 국상이 준비함과 동시에 조정 한 편에선 희빈 장씨를 다시 왕비로 복위시키는 움직임이 전개되었다. 이는 당연한 수순이었지만 [[노론]]과 [[숙빈 최씨]]에게 치명적인 상황이었으며 [[조선 숙종|숙종]]에게도 좋지 않은 상황이었다.
         하지만 《[[숙종실록]]》과 《승정원일기》에 사사설을 부정하는 기록이 존재한다. [[조선 숙종|숙종]]이 [[승정원]]에 명하여 정식으로 장씨의 자진을 명한<ref>《조선왕조실록》숙종 35권, 27년(1701 신사 / 청 강희(康熙) 40년) 10월 8일(신유) 8번째기사</ref> 1701년 음력 10월 8일의 유시(酉時), 판중추부사 [[서문중]]·우의정 [[신완]]·이조판서 [[이여]]가 [[조선 숙종|숙종]]을 청대하여 마지막으로 희빈 장씨의 구명을 청하였고, [[조선 숙종|숙종]]의 뜻이 완고하여 자진의 명을 번복할 수 없을 깨닫자 구명을 포기하고 희빈 장씨를 자진시키는 수단에 대해 물었다. 이에 [[조선 숙종|숙종]]이 사약 이외에는 달리 방도가 없다고 답하자 [[서문중]] 들이 말하길, 왕세자를 낳고 기른 사친에게 유사(攸司)의 형벌을 쓰는 것은 《주례(周禮)》에서 금한 것이며, 궁 안에선 사사를 할 수 없으니 사제로 내보내 사약을 써야 하는데 이는 유사의 형벌이 되는 것이라 지적하고 ‘공족(公族)의 사죄(死罪)는 전인(甸人)에게 넘겨 목매어 죽인다’고 간언하였다. 자리에 함께한 모든 대신에게 사실 여부를 확인한 [[조선 숙종|숙종]]은 자진을 명한 것은 유사의 형벌을 쓰려고 한 것이 아니었다고 답하였으며, 앞서 [[승정원]]에 명하여 장씨에게 자진을 명하는 교지를 적어 장씨에게 내리도록 했던 어명 역시 유사의 형벌이라는 [[서문중]]들의 지적에 따라 즉시 회수토록 하고 대신 다음날 조보(朝報)에 자진의 명이 있었음을 싣도록 하였다.<ref>《조선왕조실록》숙종 35권, 27년(1701 신사 / 청 강희(康熙) 40년) 10월 8일(신유) 11번째기사, 《승정원일기》숙종 27년 10월 8일 (신유) 원본400책/탈초본21책 (38/38)</ref><ref group="주">《숙종실록》의 해당 기사에는 간략하게 편집되어 있으며 자세한 내용은 《승정원일기》의 해당 기사에서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승정원일기》에는 《숙종실록》에서 누락된 내용인 [[조선 숙종|숙종]]이 승정원에 교지를 쓰라는 어명을 회수토록 한 이후에도 서문중 들이 이제 사친을 잃을 세자의 마음을 헤아려 줄 것과 보호해줄 것을 간언하고 약속받는 내용이 있다.</ref> 이는 희빈 장씨가 사사되었을 가능성이 사실상 희박함을 증명한다.
         1701년 10월 10일, [[조선 숙종|숙종]]은 이미 장씨가 자진하였음을 통보하며 아들인 [[조선 경종|세자 윤]] 부부에게 상주로서 거애식에 참여하여 망곡례를 행할 것을 명한다. 다음 날인 10월 11일에는 [[조선 경종|세자 윤]] 부부의 상복에 대한 논의가 있었고 '서자(庶子)로서 아버지의 후사가 된 자는 그 어머니를 위해서 시마복(緦麻服)3개월복)을 입는다.'는 예조의 말에 따라 그대로 시행하라 명을 했지만 이후 숙종은 이를 번복하여 장씨를 위해 3년복을 입도록 한다.<ref group="주">정확히는 3년복이 아닌, 3년이 되기 며칠 전에 상복을 벗게하라고 명한다. 이는 왕후와 차별을 두기 위함임을 알 수 있는데 왕비 아래 후궁 이상이었던 장씨의 신분을 다시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이다. [[조선 영조|영조]]는 생모 숙빈 최씨를 위해 시마복을 입었으며 장례를 마친지 닷새 후에 이마저 벗으라는 어명을 받아야 했다. 덧붙여 영빈이씨(사도세자 사친)와 수빈박씨(순조 사친)의 성복은 시마복이었다.</ref>
         1717년 12월, 장씨의 묘가 용맥(龍脈)은 있으나 혈(穴)이 없고 수법(水法)도 합당하지 못하여 완전한 곳이 아닌 것 같다는 함일해의 상소가 올라왔다. 1718년, 숙종은 노론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인장리 묘의 천장(=이장)을 명하였다. 예조참의가 지사로 이름난 자 10여 명을 대동하여 1년 간 기내(畿內) 길지(吉地)를 간심한 끝에 가장 평가가 우수한 광주 진해촌으로 와병 중인 숙종이 직접 택점하였다. 1719년에 치루어진 천장식 역시 궁에서 주관하였으며 숙종이 왕세자 부부에게 망곡례를 명함으로써 노론의 극렬한 반발이 있었다.<ref group="주">인장리(仁章里)에서 영구(靈柩)가 발인(發靷)하여 진해촌(眞海村) 신산(新山)으로 향하였는데, 세자가 경현당(景賢堂)에서 망곡(望哭)하고, 세자빈(世子嬪)도 궐내(厥內)에서 망곡례(望哭禮)를 거행하였다.『조선왕조실록 숙종 45년 4월 5일 기사』당시 대리청정을 하고 있는 세자(경종)가 정사를 보던 경현당에서 망곡례를 하는 것을 맹비난하던 노론은 경현당은 대리청정 업무를 보는 곳으로 곧 법전(法殿)과 차이가 없는데 세자의 사친(희빈)을 위한 예절이 지나치다고 비판</ref> <ref group="주">이러한 숙종의 처사는 숙종의 사후에도 논란이 되어 영조시대에도 경종이 숙종의 적자이며 희빈 장씨가 숙종의 제2계비로 기록한 서적이 발간되기에 이르렀다. 경종이 즉위한 후 유학 조중우는 숙종의 처사가 아들인 경종이 희빈 장씨를 추존하라는 은밀한 뜻이었다고 주장하였다.『조선왕조실록 경종즉위년 7월 21일 기사』 이에 반해 영조가 즉위한 후 노론은 숙종의 처사를 다시 거론하며 맹렬히 비난하였다. 『조선왕조실록 영조1년 3월 25일 기사』</ref> 천장지 또한 초상 때와 마찬가지로 종친부 1품의 예장으로 단장되었으며 청룡(靑龍: 주산(主山)의 좌향(坐向)에서 본 좌측의 산맥)에 앞서 자리하고 있던 종친의 묘와 많은 민전도 모두 값을 치루어 옮기도록 하였다.
         **** 차남<ref group="주">조선왕조실록 숙종 16년 9월 16일 2번째 기사에 새로 태어난 왕자가 죽었는데, 이가 장씨의 아들이라 기록되어 있고, 《선원계보기략》 또한 성수를 남자(男)라고 기록하고 있다.</ref><ref group="주">중궁전(장씨)이 해산한 뒤 약방에서 대전등의 안부를 물음 『1690년 숙종16년 7월19일 승정원일기』
         중궁전이 해산한뒤 7일째이므로 산실청을 철폐하겠다는 계 『1690년 숙종16년 7월 26일 승정원일기』<br />
         산실청 전도제조 이하에게 말과 안장 등을 사급하거나 가자하라는 비망기 『1690년 숙종16년 7월26일 승정원일기』<br />
         산실청의관 김유현에게 종1품 숭록대부직을 내린다는 비망기 『1690년 숙종16년 7월26일 승정원일기』<br />
  • 대한민국 FA컵/2016시즌 . . . . 21회 일치
         || 52 || 2016년 05월 11일 || 코레일 || : || [[울산 현대]] || 0:2 ||
         || 53 || 2016년 05월 11일 || [[포항 스틸러스]] || : || [[부천 FC]] || 0:2 ||
         || 54 || 2016년 05월 11일 || [[수원 삼성]] || : || 경주한국수력원자력(주) || 1:0 ||
         || 55 || 2016년 05월 11일 || [[FC 서울]] || : || [[대구 FC]] || 4:2 ||
         || 56 || 2016년 05월 11일 || [[제주 유나이티드]] || : || [[광주 FC]] || 1:1(3:5) ||
         || 57 || 2016년 05월 11일 || [[대전시티즌]] || : || [[수원 FC]] || 1:1(3:1) ||
         || 58 || 2016년 05월 11일 || [[성남FC]] || : || 경북영남대 || 1:0 ||
         || 59 || 2016년 05월 11일 || 용인시청 || : || 강릉시청 || 1:1(4:3) ||
         || 60 || 2016년 05월 11일 || [[부산아이파크]] || : || 부산교통공사 || 3:0 ||
         || 61 || 2016년 05월 11일 || [[FC안양]] || : || [[전북 현대]] || 1:4 ||
         || 62 || 2016년 05월 11일 || 포천시민축구단 || : || 경주시민축구단 || 1:2 ||
         || 63 || 2016년 05월 11일 || [[상주 상무]] || : || 충남단국대 || 1:2 ||
         || 64 || 2016년 05월 11일 || [[서울 이랜드]] || : || 경기성균관대 || 2:2(1:3) ||
         || 65 || 2016년 05월 11일 || [[인천 유나이티드]] || : || 청주CITYFC || 1:0 ||
         || 66 || 2016년 05월 11일 || [[전남 드래곤즈]] || : || [[강원 FC]] || 4:0 ||
         || 67 || 2016년 05월 11일 || [[안산 무궁화]] || : || 충북건국대 || 3:2 ||
         || 76 || 2016년 07월 13일 || 71번 경기의 승자 || : || 69번 경기의 승자 || 0:0 ||
         || 77 || 2016년 07월 13일 || 70번 경기의 승자 || : || 73번 경기의 승자 || 0:0 ||
         || 78 || 2016년 07월 13일 || 68번 경기의 승자 || : || 75번 경기의 승자 || 0:0 ||
         || 79 || 2016년 07월 13일 || 74번 경기의 승자 || : || 72번 경기의 승자 || 0:0 ||
  • 문무왕 . . . . 19회 일치
         |재위=[[661년]] [[7월]]~[[681년]] [[7월 21일]]
         '''문무왕'''(文武王, [[626년]]~[[681년]] [[7월 21일]] ([[음력 7월 1일]]))은 [[신라]] 제30대 [[군주|왕]](<small>재위:</small> [[661년]] [[음력 6월]] ~ [[681년]] [[음력 7월 1일]])이다.
         2년([[662년]]) 봄 정월에 당은 문무왕을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 상주국(上柱國) 낙랑군왕(樂浪郡王) [[신라]]왕으로 책봉했다. 2월에는 [[탐라국]] 임금 도동음률(徒冬音律)이 항복해 와 신라의 속국이 되었다.<ref name="삼국사기-662"/> 이때 [[신라]]에서는 [[백제]]에 주둔하고 [[고구려]]를 치는 당군의 요청이 들어올 때마다 식량을 보내고 옷을 보내고 하느라 창고에 쌓아둔 양식은 고갈되고, 농사 때를 망쳐 백성들이 풀뿌리도 오히려 부족할 지경이었지만, 반대로 [[웅진도독부]]에 있는 당군의 군량 창고에는 쌀이 남아돌다 못해 썩어나고 있었고 [[웅진도독부]]에서는 그 뒤로도 수시로 [[신라]]에 군량을 요구하였다. 3월에 내린 대사면령은 이러한 가운데서 오는 민심이반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고 추정된다.{{출처|날짜=2018-06-27}} 7월 왕은 왕제(王弟) [[김인문|인문]](仁門)을 사신으로 당에 보내는 한편, [[웅진도독부]]의 당군은 지라성(支羅城)과 윤성(尹城), 대산(大山)과 사정(沙井)의 [[백제]] 목책을 깨뜨리고 [[신라]]군과 합세해 진현성(眞峴城)을 공격해 함락시키고 [[신라]]의 군량수송로를 열었다. 8월<ref group="주">《[[동사강목]]》에는 7월로 표기됨</ref>에는 [[김흠순|흠순]] 등 19장군을 시켜 내사지성(內斯只城)의 [[백제]] 부흥군을 깨뜨렸고, 대당(大幢) 총관(摠管) 진주(眞珠)와 남천주(南川州) 총관 진흠(眞欽)이 병을 핑계로 한가로이 지내며 나랏일을 돌보지 않는다는 죄를 물어 처형하고 그 일족까지 멸했다.<ref name="삼국사기-662"/>
         백제를 멸망시킨 문무왕이 처음으로 고구려 공략에 나선 것은 문무왕 4년([[664년]]) 가을 7월, 왕제 [[김인문]]과 [[김품일]], [[한산주]](漢山州) [[도독]](都督) [[김군관]], 수약주(首若州) 총관(摠管) [[김문영]] 등에게 [[일선주|일선]](一善)·[[한산주|한산]] 두 주의 군사를 이끌고 웅진도독부 소속 당병과 함께 돌사성(突沙城)을 쳐서 멸하면서부터였다.<ref name="삼국사기-664"/>
         7년([[667년]]) 7월에 3일 동안 큰 잔치를 베풀었고, 당에서는 신라의 장군 지경(智鏡)과 개원(愷元)을 장군으로 발탁하고 대아찬 일원(日原)은 당의 운휘장군(雲麾將軍)으로 임명되었는데, 문무왕은 지경과 개원에게 각각 파진찬과 [[대아찬]]의 관등을 주고, 일원을 운휘장군으로 명한다는 고종의 칙명은 왕궁 뜰에서 받도록 명하였다.<ref name="삼국사기-667">《삼국사기》 권제6 신라본기 제6 문무왕 7년(667)</ref> 또한, 같은 달 고종은 유인원과 신라의 [[태종무열왕#가계|김인태]](金仁泰)에게 명하여 비열성(卑列城)<ref group="주">지금의 [[강원도]] [[안변군]]</ref>의 길을 따라, 신라 병사를 징발해 다곡(多谷)·해곡(海谷) 두 길을 따라 평양으로 모이도록 하였다.<ref name="삼국사기-667"/> 가을 8월에 문무왕은 [[대각간]] 김유신 등 30명의 장군을 거느리고 서라벌을 출발해 9월에는 한성정(漢城停)에 도착해 이적(李勣)과 합류하기 위해 기다렸다.<ref name="삼국사기-667"/> 이때 신라군은 당군을 배제한 단독 작전수행 대신 정탐을 세 번이나 보내면서 배를 계속 띄워 당군의 동정을 살폈고, 당군이 아직 평양에 도달하지 않았음을 알고 먼저 고구려의 칠중성(七重城)을 쳐서 먼저 고구려로 갈 길을 뚫기로 했다.<ref name="삼국사기-671"/> 하지만 칠중성을 치기 전, 겨울 10월 2일에 평양성 북쪽 2백리 지점에 도착한 이적은 신라측 이동혜(尒同兮) 촌주(村主) 대나마 강심(江深)에게 부쳐, 한성에 주둔하고 있던 신라군에게 “칠중성을 공격할 필요없이 곧바로 평양으로 와서 당군에 군량을 공급하라”는 편지를 보내왔다. 이에 신라군은 칠중성 공격을 포기하고 수곡성(水谷城)으로 향했지만,<ref name="삼국사기-671"/> [[11월 11일]]에 장새(獐塞)에 이르렀을 때 이적은 어느새 돌아가버렸고, 신라군도 그냥 돌아왔다.<ref name="삼국사기-667"/> 12월에 당은 다시 웅진도독부의 유진장군(留鎭將軍) 유인원을 보내어 고구려 정벌을 돕게 하면서 문무왕에게 대장군의 정절(旌節)을 주었다.<ref name="삼국사기-667"/>
         [[7월 16일]]에 한성에 도착한 왕은 여러 총관들에게 당군과 회합할 것을 명했다. 한편 비열성주행군총관 김문영 등은 사천(蛇川)의 벌판에서<ref name="삼국사기-668"/> 고구려의 [[태대막리지]] 남건이 거느리고 온 군사와 충돌했는데, 함께 있던 당의 번병들이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는 와중에 김문영의 신라군은 앞으로 나서서 고구려군과 맞서 크게 이겼고, 신라군이 이기는 것을 보고 난 다음에야 당병은 겨우 고구려군과 싸웠다고 한다.{{출처|날짜=2018-06-27}} 이 사천에서의 싸움에서 공을 세운 대당소감(大幢小監) 본득(本得)은 훗날 문무왕에 의해 일길찬 관등과 조 1천 섬을 은상으로 받았고, 전사한 한산주소감(漢山州小監) 김상경(金相京)도 그와 준하는 상이 내려졌다. 다만 아술(牙述)의 사찬 구율(求律)은 다리 아래로 내려가 물을 건너가서 적과 싸워 크게 이겼음에도, 군령을 받지 않고 스스로 위험한 곳에 들어갔다 하여 포상에서는 제외되었다.<ref name="삼국사기-668"/>
         10년([[670년]]) 봄 정월, 당 고종은 신라의 사신 김흠순에게는 귀국을 허락하였지만 김양도는 억류하여 감옥에 가두었는데 마침내 감옥에서 죽었다. 이것은 신라가 백제의 땅과 유민을 취한 데 대한 보복 조치였다.<ref name="삼국사기-670">《삼국사기》 권제6 신라본기 제6 문무왕 10년(670)</ref> 3월, 사찬 [[설오유]](薛烏儒)가 고구려 [[태대형]] [[고연무]]와 함께 각각 병사 1만 씩을 거느리고 [[압록강]]을 건너서 옥골(屋骨)에 이르렀다. [[4월 4일]] 개돈양(皆敦壤)에 주둔하고 있던 [[말갈족]]<ref group="주">당나라의 지휘를 받고 있었다</ref>과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다. 이후 당나라가 병력을 지속적으로 충원하자 백성(白城)<ref group="주">지금의 [[경기도]] [[안성]] 일대</ref>으로 후퇴했다.<ref name="삼국사기-670"/> [[6월]]에는 고구려 대형(大兄) [[검모잠]]이 당나라 관리와 승려 법안(法安) 등을 죽이고 신라로 향하였다. 검모잠은 [[안승]](보덕왕)을 왕으로 추대하고 신라에 충성을 약속했다. 문무왕은 이들을 금마저(金馬渚)<ref group="주">지금의 [[전라북도]] [[익산]]</ref>에 머물게 하였다. 7월, 백제의 남은 세력이 배반할까 의심하여 대아찬 김유돈(金儒敦)과 옛 백제의 주부(主簿) 수미(首彌)·장귀(長貴)를 웅진도독부로 보내, 신뢰 차원에서 양측간의 인질 교환을 제의했다. 웅진도독부는 이에 응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군사와 말을 모아 신라군에 대한 야간 기습을 수차례 반복했다.<ref name="삼국사기-671"/> 한편 김흠순 등이 귀국해 당에서 가져온 지도를 바쳤는데, 그 지도는 신라가 차지하게 되어있던 옛 백제령을 모두 백제(웅진도독부)에 돌려주도록 하는 것이었다.<ref name="삼국사기-671"/> 신라는 이를 빌미로 앞서 웅진도독부에서 파견한 백제의 사마(司馬) 예군(禰軍)을 첩자의 혐의를 물어 억류하고, 군사를 일으켜 웅진도독부를 쳐서 땅을 빼앗았다. 이때 신라 장수들 중 싸우지 않고 퇴각한 이들도 있었는데, 이들에 대해서는 특별히 처벌 대신 면직으로 매듭지었다.<ref name="삼국사기-670"/> 같은 달, 사찬 수미산(須彌山)을 보내 안승을 고구려 왕으로 ‘책봉’했다.<ref name="삼국사기-670"/> 12월, 한성주(漢城州) 총관(摠管) 수세(藪世)가 반란을 도모하려 하자, 대아찬(大阿湌) 진주(眞珠)를 보내 목을 베었다.<ref name="삼국사기-670"/>
         11년([[671년]]) 군사를 일으켜 웅진도독부를 침공하였다. 당의 지휘를 받던 말갈병이 설구성(舌口城)을 포위했다가 물러가는 것을 후방에서 쳐서 3백 명을 죽이고, 당군이 백제를 구원하러 올 것에 대비해 대아찬 진공(眞功) 등을 시켜 수군으로 옹포(甕浦)를 지키게 했다.<ref name="삼국사기-671"/> 또한 6월에 장군인 화랑 죽지 등을 시켜 군사를 거느리고 백제 가림성(加林城)의 벼를 짓밟게 했으며, 당병과 석성(石城)에서 싸워 5,300명을 죽이고 백제 장군 두 명과 당의 과의(果毅) 여섯 명을 사로잡는 전과를 거두었다.<ref name="삼국사기-671"/> 7월에 당은 행군총관 설인귀를 신라에 파견했는데, 왕은 사신을 맞아 위로하는 대신 강가의 풀이 우거진 낮은 언덕에 군사를 숨기고 강 어귀에는 무기를 감춰둔 채, 수풀 사이를 오가며 틈을 노려 기습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설인귀는 26일에 당이 신라를 도와서 백제와 고구려를 멸해주었는데 신라가 그 은혜를 잊고, 고구려를 도와 당을 치고 있다며 항의하는 내용과 함께 마음만 먹으면 당이 신라를 집어삼킬 수도 있음을 은근히 협박하는 내용의 편지를 적어 법사 임윤(琳潤)을 시켜 왕에게 보냈다.<ref name="삼국사기-671"/> 문무왕은 설인귀에게 신라가 선왕 때로부터 당에 협조하고 여러 번 신라의 백성이 헐벗고 굶주리는 지경이 되는 것도 마다하지 않고 국고를 내어 번번이 당군을 지원했던 사실과 당이 처음 신라와 했던 약속들을 어기고 신라가 점령하여 지배하던 땅을 무단으로 거둬들인 일을 비난하며 자신의 입장을 표명하였다.<ref name="삼국사기-671"/> 같은 날, 백제 수도였던 사비성에 소부리주(所夫里州)를 설치하고 아찬 진왕(眞王)을 도독으로 삼았다. [[10월 6일]] 당의 조운선(漕運船) 70여 척을 공격하여 낭장(郞將) 겸이대후(鉗耳大侯)와 병사 100여 명을 사로잡는 등 큰 전과를 올렸다.<ref name="삼국사기-671"/>
         12년([[672년]]) 당나라는 대군을 동원해 신라에 대한 침략을 개시했다. 이에 맞서 신라는 봄 정월에 백제 고성성(古省城)을 쳐서 이기고, 2월에는 다시 백제의 가림성 공격을 시도했다.<ref name="삼국사기-672">《삼국사기》 권제7 신라본기 제7 문무왕 12년(672)</ref> 7월, 당나라 장수 고간(高侃)의 한병(漢兵) 1만, 말갈족 출신의 이근행이 거느린 말갈병 3만이 함께 평양에 이르러 여덟 곳에 군영(軍營)을 설치하고 머물렀다.<ref name="삼국사기-672"/> 이들은 8월부터 한시성(韓始城)과 마읍성(馬邑城)을 쳐서 이기고 백수성(白水城) 5백 보 거리까지 전진해 주둔하는 등 신라 땅을 침식해왔다.<ref name="삼국사기-672"/> 신라는 고구려 부흥군과 연합해 이들을 쳐서 이기고, 추격하는 당병을 석문(石門) 벌판까지 뒤쫓아가 싸웠지만, 군 내부에서의 논공행상 및 전략에 대한 견해차로 분열된 사이에<ref name="김원술">《삼국사기》 권제43 열전 제3 김유신전 부록 원술(元述)</ref> 당병의 반격을 받아 크게 패하고 대아찬 효천(曉川), 사찬 의문(義文)·산세(山世), 아찬 능신(能申)·두선(豆善), 일길찬 안나함(安那含)·양신(良臣) 등이 죽었다.<ref name="삼국사기-672"/> 태대각간 김유신의 아들인 [[김원술|원술]]도 여기에 참전했다가 목숨을 건져 돌아왔는데, 아버지 유신은 자신의 아들을 군법으로 처형해야 한다며 왕에게 아뢰었으나 왕은 듣지 않았다.<ref name="김원술"/> 한편 각자 맡은 곳을 지키며 방어전으로 전략을 변경하자는 유신의 진언에 따라, 한산주에 둘레 4,360보 되는 주장성(晝長城)을 쌓는 등 방어진지를 구축했다.<ref name="삼국사기-672"/> 9월에는 앞서 신라 땅에 억류하고 있던 웅진도독부 소속의 백제인 관원들과 앞서의 전투에서 사로잡은 포로들을 당으로 돌려보내면서 왕이 직접 표문과 많은 물품을 바치는 등 당에 대해 유화책을 폈다.<ref name="삼국사기-672"/>
         16년([[676년]]) 7월 당군이 도림성(道臨城)을 공격해 현령(縣令) 거시지(居尸知)를 죽였다.<ref name="삼국사기-676">《삼국사기》 권제7 신라본기 제7 문무왕 16년(676)</ref> 11월에 사찬 [[시득]](施得)이 수군을 거느리고 설인귀와 소부리주 [[기벌포 해전|기벌포]](伎伐浦)에서 싸웠다. 이 싸움에서 신라는 패했지만, 다시 나아가 22회에 걸친 크고 작은 싸움에서 모두 승리하여 당군 4천여 명을 목베었다.<ref name="삼국사기-676"/> 이후 당은 백제령 안에 있던 웅진도독부를 [[요동]]의 [[건안성]](建安城)으로 옮기고, 평양에 두었던 안동도호부도 [[요동성]](遼東城)을 거쳐 신성(新城)으로 옮기는 등 한반도에서 자국의 병사들을 철수시켰다.<ref name="자치통감-677">《자치통감》 권202 唐紀十八高宗天皇大聖大弘孝皇帝 儀鳳 2년(677)</ref>
         [[681년]] [[7월 1일]]에 56세로 서거하였다. 유조(遺詔)에 따라 시신은 화장하였고, [[경주 감은사지|경주 감은사]](感恩寺) 동쪽 바다 대왕암(大王岩)<ref group="주">대왕석(大王石)이라고도 한다.</ref> 위에 장사하였다. 문무왕의 유조는 다음과 같다.
  • 한규복 (1881년) . . . . 19회 일치
         '''한규복'''(韓圭復, <small>일본식 이름:</small> 井垣圭復, [[1885년|1881년]] [[7월 7일]] ~ [[1967년]] [[9월 13일]])은 [[대한제국]]의 관료, 통역관, 화가, 서예가이자 [[일제 강점기]]의 관료, 화가, 서예가로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도 지냈다. [[일제 강점기]]의 신념형 친일파의 한 사람이었다.
         [[1875년|1881년]](고종 17년) [[7월 7일]] [[한성부]] 평동(平洞) 19번지에서 주사 한만홍(韓晩洪)과 평산 백씨(平山白氏)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형 한규호는 구한 말 군인으로 활동, [[보병]][[참위]]와 [[보병]][[부장]]을 지냈고 통정대부에 이르렀으며, 퇴역 후 [[1908년]](융희 2년) [[기호흥학회]]의 창립에 참여, 회보인 기호흥학회월보의 후원자의 한 사람이 되었으며 기업인으로도 활동하여 1908년 6월 4일 [[한성]]의 연강목선운륜(沿江木船運輸) 주식회사의 중역으로 활동하였다.
         [[1899년]](광무 2년) 초, 그해의 정부 관비유학생으로 뽑혀 [[4월]] [[일본]] [[도쿄]]로 유학, 그해 [[9월]] [[도쿄]] 신전중학교(神田中學校)에 편입학하였다. [[1900년]] [[3월]] [[신전중학교]]를 졸업하고 [[도쿄 전문학교]]에 입학했다. 동경 전문학교를 거쳐 [[1901년]] [[9월 11일]] [[와세다 대학]](早稻田大學) 정치경제학과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1903년]](광무 6년) [[7월 15일]] 3학년 재학 중 [[와세다 대학]] 정치경제과를 수료하고 [[7월]] 정부의 명으로 귀국하여, [[대한제국]]의 관리로 근무를 시작했다.
         [[1917년]] [[경상남도지방토지조사위원회]] 조사위원이 되고, [[1917년]] 진주군수 재직 중 [[고등관]] 5등(高等官5等)으로 승진했다. [[1918년]] [[7월 1일]] [[동래군|동래]][[군수]] 고등관 5등(東萊郡守 高等官5等)으로 발령받았다. [[1921년]] [[2월 12일]]에는 [[충청남도]] 참여관(慶尙北道參與官) 고등관 4등(高等官4等)으로 승진하였다. [[7월 22일]] 다시 [[충청남도]] [[참여관]]으로 임명되었다. [[1922년]] [[5월 30일]]에는 [[만주]]로 출장갔다가 [[10월]]에는 [[동양협회]] 시찰단의 한 사람이 되어 [[일본]]을 시찰하고 [[1923년]]초 되돌아왔다. [[1923년]] [[11월]] [[충청남도]] [[참여관]]으로 재직 중 [[충청남도음악협회]]회장에 선출되었다. [[1924년]] [[2월 11일]]에 [[경상북도]] 참여관으로 옮겼다. [[12월]] [[경상북도]] 참여관 재직 중 [[고등관]] 3등(高等官3等)으로 승진하였다.
         [[1933년]] [[7월 21일]]에는 중추원 시정조사위원회 학예부장이 되었다. [[10월 21일]]에는 소작농심의위원회 위원이 되었다. [[1934년]] 경성부 교화단체연합회 서부교화지구위원장(京城府敎化團體聯合會 西部敎化地區委員長)이 되었다. [[1934년]] [[7월 14일]] [[금융]]단체의 연합회인 [[금융조합연합회]] 창립에 참여, 자문상담역<ref>"금조연합회, 자문기관 설치", 조선중앙일보 1934년 07월 22일자 4면</ref>에 위촉되었다. [[7월 21일]] [[금융조합연합회]] [[경기도]]지역 참여에 임명되었다. [[1934년]] 여름 홍수로 [[조선]] 삼남 지방에 수해가 심해지자, 그해 [[8월 30일]] [[조선총독부]]에서 [[치소조사위원회]]를 설치할 때 그는 민간측 위원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였다.
         [[1937년]] [[1월]] [[방송선전협의회]](放送宣傳協議會) 위원으로 위촉되어 수양강좌·부인강좌·상식강좌의 강사로 출연하였고, [[7월]] [[중추원]] 주최 행사에 참여하였다. 동년 [[조선총독부]]에서 조선인들의 소득을 조사할 목적으로 국민소득조사위원회를 구성하자, 한규복은 국민소득조사위원회 경성지역 관내 위원으로 선임되었다. [[8월 3일]]부터는 [[10월]]까지 총독부 학무국에서 지나사변 이후 흉흉한 민심을 수습하고자 순회시국강연위원회를 조직할 때 연사가 되어 [[서울]]과 각지에 시국강연을 다녔다. [[8월 16일]]에는 [[경상남도]] [[함양군]]에서 시국강연을 하였다. [[9월 10일]]에는 용인공보교 대강당에서 [[용인군]] 지역 시국강연회를 주최하였다.
         [[1938년]] [[8월]] 설치된 총독부내 시국대책조사위원회 위원 97명 가운데 한규복은 [[김연수 (1896년)|김연수]](金秊洙), 박영철(朴榮喆), [[박중양]], [[박흥식 (1903년)|박흥식]], [[윤덕영]], 이기린(李基燐), [[이승우]](李升雨), [[최린]](崔麟), [[한상룡]](韓相龍), [[현준호]](玄俊鎬) 등과 함께 조선인 위원 11명 가운데 1명으로 선임되기도 하였다. 그해 [[육군특별지원병령]]이 공포, 시행되자 한규복은 윤치호, 이승우, 조병상, 조성근 등과 함께 지원병제 축하회 구성을 위한 타협발기인회를 열고 실행위원진을 구성하였다. [[7월 8일]] [[국민정신총동원연맹]] 경성지회 설립에 참여하고 이사가 되었다. [[10월 7일]]에는 [[중일전쟁]] 등 부상병을 위문하기 위해 [[용산육군병원]]을 방문하고 [[금일봉]]을 지급하였다.<ref>"中樞院參議 傷病兵慰問", 동아일보 1938년 10월 07일자 2면, 사회면</ref>
         [[1950년]]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대구로 갔다. 한동안 한국곡자 운영과 종친회 일 이외에는 사양하며 칩거하였다. [[1960년]] [[7월 2일]]에는 주간종합잡지 [[주간대중]](週刊大衆) 지의 동인이자 필진으로 참여하였다.<ref>"週刊大衆" 創刊, 동아일보 1960년07월 02일자 4면, 생활/문화면</ref> [[1967년]] [[9월 13일]] [[서울]]에서 사망했다.
         ** 삼남 : 한용주(韓鏞柱, [[1941년]] [[8월 11일]] - )
         ** 사남 : 한용석(韓鏞晳, [[1943년]] [[7월 27일]] - )
         한규복만큼 영달한 사람은 많지 않았지만 초기에 고도간에 다녔던 조선인 학생들은 거의 다 저항보다 체제 순응을 선호했다.<ref>인물과사상사, 《인물과 사상 2004년 7월호》 (인물과사상사, 2004) 212페이지</ref>
  • 추경호 . . . . 16회 일치
         '''추경호'''(秋慶鎬, [[1960년]] [[7월 29일]] ~ )는 [[대한민국]]의 [[정치가]]이다.
         추경호는 [[1960년]] [[7월 29일]]에 [[대구광역시|대구]]에서 태어났다. [[계성고등학교 (대구)|대구계성고]]를 졸업했고 [[1986년]]에 [[고려대학교]] 경영학과를 졸업했다. 미국 오리건대학교 대학원에서 경제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2013년 [[대한민국의 기획재정부 차관|기획재정부 제1차관]]으로 다시 돌아왔다. 2014년 7월 장관급인 [[국무조정실장]]에 임명됐다.
         * 2002년 7월: [[재정경제부]] 기획관리실 행정법무담당관
         * 2013년 3월 ~ 2014년 7월: [[기획재정부]] 제1차관
         * 2014년 7월 ~ 2016년 1월: [[국무조정실]] 실장
         * 2016년 7월: 제20대 국회 전반기 기획재정위원회 조세소위원회 위원
         * 2016년 7월 ~ 2018년 5월 : 제20대 국회 전반기 기획재정위원회 경제재정소위원회 위원
         * 2017년 3월 ~ 2017년 7월: 여의도연구원 원장
         * 2018년 7월 : 제20대 국회 후반기 기획재정위원회 위원
         * 2018년 7월 ~ : 제20대 국회 후반기 기획재정위원회 간사
         * 2019년 7월 ~ : 자유한국당 미디어특별위원회 위원
         * 2019년 7월 ~ : 자유한국당 日수출규제 대책 특별위원회 위원
         |임기 = 2013년 3월 25일 ~ 2014년 7월
         |임기 = 2014년 7월 14일 ~ 2016년 1월 12일
         |임기 = 2017년 3월 27일 ~ 2017년 7월 14일
  • 전인범 . . . . 15회 일치
         '''전인범'''(全仁釩, [[1958년]] [[9월 6일]] ~ )은 [[대한민국]]의 [[군인]]이다. 1981년 4월 육군사관학교 37기로 임관하여 30사단 90연대 15중대 소대장으로 군 생활을 시작한 이래 9사단 29연대장, 합동참모본부 전략기획부 전작권 전환 추진단장, 27사단장, 한미연합군사령부 작전참모차장, 유엔군사령부 군사정전위원회 수석대표, 특수전사령관 등을 역임하고 2016년 7월 육군 중장으로 예편하였다.
         1986년 30사단 90연대 2대대 중대장 시절에는 육군의 우수 전투중대장에게 주는 [[강재구|재구상]]을 받기도 했다. 당시 초급 지휘관으로 중대원들의 사격 훈련 중 소총 사격 영점을 못 잡는 병사를 데려다가 실탄을 주고 자신은 표적지 앞에 서서 사격을 하게 해 영점을 잡게 했다는 일화가 있다.<ref name="c">[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81&aid=0002742447 ‘제설작업 하고, 전역사병에게 경례’ ‘괴짜장군’의 퇴임식], 《서울신문》, 2016년 7월 29일</ref> 군사정권 시절 그가 중대장을 역임한 부대는 대학생들의 데모가 일어나면 연세대학교를 점령하는 부대였는데, 그는 국민을 보호해야하는 군인이 대학생을 진압하라는 명령에 많은 갈등을 했다. 그래서 원래는 데모 때 중대장이 맨 뒤에 서서 진압을 지시하게 돼 있는데 그는 맨 앞으로 나가서 돌 맞더라도 제일 먼저 맞고 죽으려고 했다고 과거를 회고하였다.<ref name="b">[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47&aid=0002140702 [단독] 전인범 "내 문제, 문재인에게 부담 안 돼... 아내, 구시대 법에 걸려든 것"], 《오마이뉴스》, 2017년 2월 9일</ref> [[소령]]으로 진급한 뒤에는 육군참모총장실에서 정책장교 및 군사외교협력장교 보직을 받아 많은 통번역 임무를 수행하였고, 이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아 1992년 한미연합사령관 [[:en:Robert W. RisCassi|로버트 리즈카시]] 대장으로부터 [[:en:Commendation Medal#Army|육군표창훈장]](Army Commendation Medal)을 받았다. [[중령]] 때에는 한미연합사 작전참모부 연습처 을지포커스렌즈 연습장교를 맡아 세계에서 가장 규모가 큰 연합모의 연습을 기획하고 실행한 공로로 2002년 [[:en:Meritorious Service Medal (United States)|근무공로훈장]](Meritorious Service Medal)을 받았다.
         2004년 12월에는 [[:en:Multi-National Force – Iraq|이라크 다국적군사령부]] 선거지원과장으로 근무하면서 공정한 선거업무의 주역으로 외국군(미국, 영국, 호주, 루마니아)을 지휘·감독, 이라크 민주주의 탄생에 기여한 것으로 평가받았다. 한국이 [[이라크 전쟁|이라크전]] 때 세 번째로 많은 병력을 보냈는데 다국적군사령부 참모 중에 한국군이 그 외에는 없어 처음에는 직속 부하들이 자신을 무시했다고 느낀 그였다. 그래서 바쁘다는 외국군 장군들 대신 브리핑을 하는 등 좋은 평가를 받고자 노력해 점차 조직을 장악하였다고 밝혔다.<ref name="a"/> 그는 [[:en:United States Armed Forces|미군]]과 [[:en:British Armed Forces|영국군]], [[:en:Australian Defence Force|호주군]] 장교 10여 명을 지휘해 5400개 선거구에서 치러지는 이라크 유권자 1400만 명의 투표를 지원 및 감독하였으며, 3500t에 이르는 선거 관련 물자를 각 투표소에 공급하고 치안 유지를 지원하는 일도 맡았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81&aid=0000030323 이라크 총선지원 전인범 대령 “이라크 민주주의 탄생 기여에 자부심”], 《서울신문》, 2005년 1월 31일</ref> 선거가 무사히 끝난 뒤 이라크 평화정착에 기여한 공로로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화랑무공훈장]]을, [[대한민국 국군|한국 군인]]으로서는 최초로 [[미국 정부]]로부터 [[:en:Bronze Star Medal|동성훈장]](Bronze Star Medal)을 받았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1&aid=0001046950 노 대통령 전 이라크 다국적군사령부 선거지원과장], 《연합뉴스》, 2005년 7월 11일</ref><ref>[http://kookbang.dema.mil.kr/kookbangWeb/view.do?ntt_writ_date=20050706&parent_no=7&bbs_id=BBSMSTR_000000000004 이라크 총선 성공지원 공로, 전인범 육군 대령 美 동성무공훈장 받아], 《국방일보》, 2005년 7월 6일</ref>
         2007년 7월 국제 테러단체인 [[탈레반]]에 의한 [[탈레반 한국인 납치 사건|아프간 한국인 납치 사건]]이 발생했을 때 대한민국 정부를 대표한 카불 군사협조단장으로 급파, 인질 구출작전을 지휘하여 사건 발생 43일 만에 21명의 인질을 구출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의 임무는 군사협조단 단장으로서 [[:en:International Security Assistance Force|국제안보지원군사령부]]에 파견돼 협조체계를 구축하는 것으로, 외국군을 설득할 논리가 부족하니 그들에게 인간적으로 다가가자고 생각하였다. 우선 [[:en:Swedish Armed Forces|스웨덴군]] 소장에게 ‘사람들 살려야 한다’, ‘사무실이 필요하다’, ‘상황실 출입을 허가해달라’, ‘인터넷, 유선전화, 휴대전화 쓰게 해달라’, ‘숙식 제공해달라’ 등을 부탁했다. 상황실에서는 유학시절에 알고 지낸 [[:en:Bundeswehr|독일군]], 미군을 만나 사람들이 죽고 사는 문제이니 많이 도와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ref name="a"/> 이렇게 군사협조단을 통해 수집된 인질 및 탈레반 세력의 동향 첩보 등은 정부가 대책을 마련하는데 기초자료가 됐고, 특히 인질 억류지역에서 동맹군의 불필요한 군사행동을 억제한 노력은 인질의 생명을 보호하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것으로 평가되었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1&aid=0001743352 <軍, 아프간 인질 석방 숨은 공로자>-1,2], 《연합뉴스》, 2007년 9월 2일</ref> 이 공로로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ref>[http://kookbang.dema.mil.kr/kookbangWeb/view.do?ntt_writ_date=20080303&parent_no=8&bbs_id=BBSMSTR_000000000138 아프간 인질석방 공로 군인 '훈·포장' 수여], 《국방일보》, 2008년 3월 3일</ref>
         특전사령관 취임 후 부대의 장비 구입을 위한 예산 확보, 새로운 장비의 개발, 해외 특수부대와의 교류협력 등 특전사의 전투력 강화를 위한 개혁을 주도하고 있다는 평을 받았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81&aid=0002476150 [이일우의 밀리터리 talk] ‘괴짜 사령관’과 특전사의 환골탈태], 《서울신문》, 2014년 10월 23일</ref> [[:en:Picatinny rail|피카티니 레일]]이나 광학장비와 같이 관행적으로 몰래 사용하던 사제 장비들의 사용을 허용하는 등 기존의 과도한 제재 규정들은 폐지시켰으며, 특히 헬기 사격, 천리행군 인증제 도입과 같이 과거에 하지 않던 실전적 훈련들을 대거 강화하였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33&aid=0000028778 [한국군 코멘터리] 불굴의 ‘지옥훈련’ 더 독해진 특전사], 《주간경향》, 2014년 12월 17일</ref> 우선 일반 병사보다 3배 정도 총을 더 쏘는 특전사 요원의 사격량을 5배로 늘렸고 전진하면서 사격할 때 탄피받이를 못 쓰게 하였다. 탄피 하나 없어지면 전 부대원이 나서서 찾아야 하는 것이 매우 비생산적인 일이라고 생각한 그는 대신 탄피를 주울 필요가 없도록 전진 사격 훈련시 1명이 뒤따라가게 하여 실제 몇 발을 쏘는지 세게 하였다. 또한 사령관 취임 당시 특전사에 체계적인 체력 증진 프로그램이 없어 특전사에서 35년간 복무했고 체력 단련과 관련해 박사 학위를 받은 한 원사에게 12개 코스의 프로그램을 만들도록 지시했다. 그 결과 특전사 요원의 허벅지가 평균 1cm 커졌고 체력 프로그램 시행 후 6개월 뒤 미군 특전사 요원들과 경기를 해 수영을 제외한 나머지 종목을 한국 특전사 요원들이 다 이기게 하기도 하였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23&aid=0003210074 [Why] "특전사 허벅지 1cm 굵어졌다, 그게 내 자랑"], 《조선일보》, 2016년 9월 10일</ref> 이와 같은 훈련들은 특전사의 실제 전투력을 극대화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ref>[http://www.asiatoday.co.kr/view.php?key=20150108010004329 왜 우릴 특전용사라고 부르는가?], 《아시아투데이》, 2015년 1월 8일</ref><ref>[http://www.breaknews.com/sub_read.html?uid=344947§ion=sc2 육군 특수전사령부 설한지 극복-생존훈련], 《브레이크뉴스》, 2015년 1월 9일</ref> 그리고 긴박한 전장상황에서 오역 가능성을 최소화하고 한미 연합작전 수행능력 향상을 위해 전군 최초로 한국군은 영어로, 미군은 한국어로 브리핑하는 제도를 시행했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1&aid=0007500588 특전사 창설 57주년 기념식… 내년 2월 이천시대 개막], 《연합뉴스》, 2014년 4월 1일</ref> 전 사령관은 이러한 자신의 개혁적인 행보에 관해 “모든 3성 장군은 4성 장군이 되고 싶어하고 4성 장군이 되는 게 군인으로서 더 없는 영광이라는 것을 나 역시 알고 있다. 일각에선 내가 부대 훈련을 실전적으로 바꾸고 개혁을 하면서 무리수를 두어 4성 장군이 되지 못할 것이라고 걱정한다. 하지만 나는 특수전사령관이고 내 임무는 4성 장군이 되는 것이 아니라 싸워서 백전백승 할 수 있는 세계 최고의 특수전 부대를 만드는 게 나의 사명이다”라고 밝혔다.<ref>[http://www.newdaily.co.kr/news/article.html?no=317906 전인범 전 특수전사령관, 영원한 특전맨이자 진정한 군인의 퇴임], 《뉴데일리》, 2016년 7월 28일</ref> 훗날 그가 사령관을 이임한 뒤 특전사에 부대장비 및 개인물자를 납품하고 연구하는 특전사 출신의 한 예비역 대위는 “우리 군은 지나치게 ‘군복제 규정’에 얽매여 있다. 전인범 前 특전사령관은 유연한 사고를 가진 지휘관이었다. 그는 “‘군복제 규정’보다 임무와 전술향상이 더 중요하다. 사고를 유연히 하고 우수 장비라면 사제라도 활용하라”라고 이야기하면서 전술장비 및 피복의 사용과 발전을 장려했지만, 그가 교체되면서 이런 유연한 사고는 다시 움츠러들었다. 우리 군의 유연한 사고는 지휘관에 따라 들쑥날쑥 하다”며 아쉬움을 소회했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28&aid=0002286112 [무기와 사회] 한국군 전투복], 《한겨레》, 2015년 8월 19일</ref> 뉴데일리 군사전문기자 태상호는 “전인범 前 특수전사령관 같은 깨어 있는 특수전 지휘관들이 (특수부대의 역량을 강화시키기 위해) 고군분투를 했지만 특수작전에 대한 군내외부의 중요성 인식 부족과 비대칭 전력을 이해하지 못하고 큰 군(Big Army)만 중요시 하는 풍토로 인해 그 노력은 수포로 돌아갔다”라고 현 한국군에 대해 비판했다.<ref>[http://www.newdaily.co.kr/news/article.html?no=301915 [컬럼] 프로 대접을 못 받는 한국의 특수부대], 《뉴데일리》, 2016년 2월 22일</ref>
         2016년 7월 28일 특수전사령부 연병장에서 35년간의 군 생활을 마치는 전역식을 가졌고 같은 달 31일 전역하였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1&aid=0008572276 전인범 전 특수전사령관 이천 특전사서 전역], 《연합뉴스》, 2016년 7월 28일</ref><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23&aid=0003199207 [카드뉴스] "국회의원이 오든지 말든지, 병사들 고생시키지 말라"], 《조선일보》, 2016년 8월 5일</ref> 이날 전역식에는 한미연합사령관 [[:en:Vincent K. Brooks|빈센트 브룩스]] 대장, 미 8군사령관 토마스 밴달 중장, 미 2사단장 테드 마틴 소장 등 [[주한미군]] 수뇌부와 이기백, [[정호용]], [[김동진 (1938년)|김동진]], [[김태영 (1949년)|김태영]] 전 [[대한민국의 국방부 장관|국방부 장관]] 등 한미 양국 군 관계자들이 참석해 전 중장의 전역을 축하했다.<ref>[http://www.huffingtonpost.kr/heebum-hong/story_b_11295018.html 어느 ‘특별한 별’ 이야기 │ 전인범 중장 전역식], 《허핑턴포스트》, 2016년 8월 2일</ref><ref name="c"/> 그는 이 자리에서 국가안전보장에 기여한 공로로 한국 정부의 [[대한민국의_훈장#보국훈장|보국훈장 국선장]]과 한미동맹 강화에 기여한 공로로 미국 정부의 공로훈장을 각각 받았으며, 특히 보국훈장 국선장은 그가 중위 시절 합참의장으로 모셨던 이기백 전 국방장관이 걸어주었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55&aid=0000435078 33년 전 목숨 건 구출… 다시 만난 장군과 중위], 《SBS》, 2016년 7월 28일</ref> 전 중장은 전역사에서 선배 장군들과 미군 장성들, 동기, 후배들을 거론하면서 최선을 다했지만 부족했던 자신에게 아낌없는 지원과 후원을 보내준 것에 고마움을 표했다.<ref>[http://www.asiatoday.co.kr/view.php?key=20160728010013908 전인범 중장 전역식 "부하 잘 보살피면 부하들이 알아서 윗사람 보살핀다"], 《아시아투데이》, 2016년 7월 28일</ref> 그는 “군인들이 진급할 때마다 ‘국가와 국민을 보호하기 위하여 헌법을 수호하고 봉사와 헌신의 자세로 부여된 임무를 완수하고, 상관의 명령에 복종하겠다’고 약속하는데 저는 여러분과 함께 이 약속을 지켰다. 감사하다”고 말했으며, 마지막으로 “안 되면 되게 하라 검은 베레 영원하라”는 특전 정신을 외치며 전역사를 마쳤다.<ref>[https://www.youtube.com/watch?v=po9JyXV5Hyo 전인범 장군 전역사 영상(discharge speech of LTG. INBUM CHUN)], 《YouTube》, 2016년 7월 28일</ref>
         2018년 6월 예비역 신분인 그의 주도로 국회의원회관에서 특수작전 전술 및 장비 현대화를 위한 세미나 ‘제1회 특수작전 세미나’가 개최되었다. 그간 국가 안보전략과 국방 관련 정책 토론회는 많았으나, 일선 전투원들과 직접적으로 연관된 전술 및 장비 관련 세미나가 공개적으로 개최된 적은 없었기에 눈길을 끌었다.<ref>[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14&aid=0004045225 창끝 전투원들을 위한 '제1회 특수작전 세미나' 큰 호응], 《파이낸셜뉴스》, 2018년 6월 24일</ref> 세미나에서 전인범 전 특전사령관은 효율적인 강한 군대를 만들기 위해서는 육군의 특전사를 비롯해 수색·특공부대, 해군 및 해병대, 공군의 지상작전 부대의 정예화가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를 위해서는 해외의 사례를 우리 상황에 맞게 적용할 수 있을지를 심도 있게 연구해야 한다”면서 “실전에 맞지 않는 전술 및 장비소요(구매 요청 및 구매)는 과감하게 개선돼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전 중장은 세미나 참석자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유도하기 위해 형식과 틀을 깬 어법과 행동으로 참석자들로부터 박수를 받기도 하였다. 해당 세미나는 특수·지상작전연구회, 군사전문지 플래툰 등 민간이 주도한 최초의 개방형 군사 세미나로, 세미나 준비를 해온 특수·지상작전연구회 소속 정진만 아세아항공전문학교 교수는 “당초 100명 미만의 규모로 세미나를 준비했는데 150여 명 이상이 참석했고 상당수 인원이 참석을 원했는데 장소가 비좁아서 받을 수 없어 안타까웠다”고 말했다. 같은 달 [[한국자유총연맹]] 부총재에 임명, 9월에는 그를 단장으로 하는 자유총연맹 대표단이 [[:en:West Potomac Park|웨스트 포토맥 공원]] 내 한국전참전기념공원에 들어 설 한국전쟁 미군 참전용사 추모벽 건립에 1만 달러를 기증했다.<ref>[http://dckoreannews.com/featured/%ED%95%9C%EA%B5%AD%EC%9E%90%EC%9C%A0%EC%B4%9D%EC%97%B0%EB%A7%B9-%EB%AF%B8%EA%B5%AD-%EC%9B%8C%EC%8B%B1%ED%84%B4%EC%97%90%EC%84%9C-%EB%8F%99%ED%8F%AC%EA%B0%84%EB%8B%B4%ED%9A%8C-%EA%B0%9C%EC%B5%9C/ [한국자유총연맹] 미국 워싱턴에서 동포간담회 개최], 《워싱턴코리안뉴스》, 2018년 9월 12일</ref><ref>[http://www.worldkorean.net/news/articleView.html?idxno=32597 한국자유총연맹, 한국전 참전용사 ‘추모의 벽’ 건립지원금 1만 달러 기탁], 《월드코리안뉴스》, 2018년 9월 13일</ref> 그는 “한국전참전기념공원에 추모의 벽이 설치된다는 이야기를 듣고 한국자유총연맹 중앙회 차원에서 1만 달러를 즉석에서 마련, 기탁하게 됐다”면서 “한국자유총연맹은 특정정파에 치우치지 않고 정치 중립을 지키면서 국가에 이익이 되고 국민에게 행복을 주는 국리민복을 기본 가치로 하고 있다”고 밝혔다.<ref>[http://www.koreatimes.com/article/1202198 한국전 참전 ‘추모의 벽 건립’ 1만달러 기증], 《미주한국일보》, 2018년 9월 11일</ref>
         *** 내종형 : [[:en:Howard Koh|고경주]]<ref>[http://article.joins.com/news/article/olink.asp?aid=14888937&serviceday=20140721 사명, 목적 있는 삶… 나를 이끈 건 부모 가르침], 《중앙일보》, 2014년 7월 21일</ref> (高京珠, 1952년 ~ , [[:en:United States Assistant Secretary for Health|미국 보건복지부 보건담당 차관보]])
         * 배우자 : [[심화진]]<ref>[http://news.mk.co.kr/news_forward.php?no=402303&year=2010 [女 세상의 중심] 심화진 성신여대 총장], 《매일경제》, 2010년 7월 29일</ref> (沈和珍, 1956년 ~ , [[성신여자대학교]] 총장)
  • 폐비 윤씨 . . . . 15회 일치
         |출생일 = 단종 3년(1455) 음력 윤 6월 1일
         |사망일 = 성종 13년(1482) 음력 8월 16일
         '''폐비 윤씨'''(廢妃 尹氏, [[1455년]] [[7월 15일]] ([[음력]] [[윤달|윤]] [[6월 1일]])<ref name="tae">폐비 윤씨 태실의 태지에 기록된 내용이다. [[현재 폐비 윤씨]] 태실 등은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소장 중이며, 관련 내용을 국립중앙박물관의 전시 자료 [http://www.museum.go.kr/NMK_DATA/redfish/cutator/2011/cu-253/book.html] 에서 일부 확인 가능하다.</ref><ref name="ja">{{서적 인용
         }}</ref> ~ [[1482년]] [[8월 29일]] ([[음력 8월 16일]]))는 [[봉상시]] 판사(奉常寺 判事) [[윤기견]](尹起畎, 또는 윤기무, 尹起畝)<ref>조선왕조실록에는 둘 모두 쓰였으나, 윤기무라는 이름이 비교적 적게 등장하므로 {{출처|날짜=2009-03-14|윤기견의 오기로 보는 설이 유력하다.}} 한편 작가 [[신봉승]]은 자신이 집필한 드라마 《[[한명회 (드라마)|한명회]]》의 제94회에서, 윤기무는 윤기견의 아우로 슬하에 자식이 없었음이 [[함안 윤씨]]의 세보에 기록되어 있다고 하고, 이를 드라마를 통해서라도 바로 잡아야 한다고 밝히고 있다.</ref> 와 고령 신씨(申氏)의 딸로 [[조선]]의 제9대 임금 [[조선 성종|성종]]의 계비이자 둘째부인으로 투기와 남편인 [[조선 성종|성종]]의 용안에 상처를 내어 폐위되었다.
         흔히 생년이 불분명한 것으로 알려져있으나, [[국립고궁박물관]]에 소장된 폐비 윤씨 태실의 태지에는 그녀가 [[1455년]] [[음력 6월 1일]]에 태어난 것이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다<ref name="tae"/><ref name="ja"/>.
         윤씨는 [[성종]] 4년(1473년) 4월 15일(음력 3월 19일)에 후궁간택으로 숙의(淑儀)에 봉해졌다.
         [[성종]] 5년(1474년)에 [[성종]]의 첫 번째 왕비인 [[공혜왕후]]가 승하하자 [[성종]]은 2년 뒤 [[공혜왕후]]의 3년상을 마치고 [[1476년]] [[7월 31일]]([[음력 7월 11일]])에 숙의(淑儀)였던 윤씨를 왕비(王妃)로 삼을 것을 전교하였다.
         당시 윤씨는 임신 중인 몸으로, [[8월 27일]]([[음력 8월 9일]]) 왕비(王妃)로 책봉되어 3개월 뒤인 [[11월 23일]]([[음력 11월 7일]])에 적통대군인 [[조선 연산군|원자]]를 낳아 중전(中殿)의 위치는 더욱 확고해졌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 등으로 인해 윤씨는 마침내 [[1479년]], 자신의 생일 바로 다음날인 [[음력 6월 2일]](양력 [[6월 21일]])에 왕비(王妃)에서 폐위되었다.
         결국 윤씨는 [[1482년]] [[8월 29일]]([[음력 8월 16일]]) [[사약]]을 받아 사사되고 말았다. 윤씨의 나이 28살이었으며, 윤씨는 죽기 전 자신의 피가 묻은 금삼을 친정어머니 신씨에게 "세자가 자라거든 이를 전달해 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죽었다.
  • 권혁 . . . . 14회 일치
         그러나 이후부터는 페이스를 좀 되찾은 모양인지 ~~왠일로~~ 호투하면서 살아나는가 했더니, 8월 24일 청주 한화전에서 8회 3:2로 앞선 상황에서 나와 미친듯이 처맞고 1사 만루에서 강판, 바로 교체한 안지만이 그의 뒷처리를 하려다 오히려 역전을 허용하고 패전투수가 되었다. 가뜩이나 타선 침체로 인해 3연패에 빠져 있었던 팀을 오히려 4연패로 몰아넣고... 결국 이날 안일하게 경기 운영하다 경기를 내준 [[류중일]], 9회말 흔들리던 [[데니 바티스타|바티스타]]를 상대로 영웅스윙을 시전하다 폭풍삼진당한 [[채태인]]과 함께 삼성 팬들에게 개같이 까였다.[* 2011시즌 권혁의 성적은 1승 3패인데 '''3패가 모두 한화전'''이다. 그 때문이었을까 삼성은 이 시즌에 유일하게 한화에게 상대전적에서 뒤졌다. 1승은 7월 19일 SK전.] 역시 이놈은 [[답이 없다]]...라고 생각하던 차 8월 26일 [[두산 베어스]]와의 경기에서는 8회에 등판하여 또 ~~왠일로~~ 호투하면서 2연승의 밑거름을 다져놓았다. 좀 들쑥날쑥해도 두산에게만큼은 강한 점도 있었는데다가 무엇보다 이날은 구속이 어느정도 돌아와서 고무적이었다. 올시즌 내내 원래 부족한 제구에 구속까지 안나와서 고전하던 차에 나온 이날 호투는 [[나름]]대로의 의미가 있었다.
         5월 4일 NC전에는 첫 타자에게 안타를 맞고 내려갔으나, [[507 대첩|5월 7일 SK전]]에는 4:0으로 지고 있는 상황에 등판하여 제구는 불안했으나 1이닝을 막았다. 그리고 9회에 팀이 [[박정배|SK의]] [[박희수|필승조]]를 탈탈 털며 뜬금없이 승리 투수가 되었다. 시즌 첫 승리이자 2012년 7월 12일 이후 664일만의 승.
         6월 27일 [[김현우(야구선수)|김현우]]와 1군에 복귀했다. 이후 7월 5일 두산전에 등판하여 나쁘지 않은 투구를 보여줬다.
         7월 24일 경기에서도 등판하였는데, 2이닝동안 전성기 수준의 피칭을 보여 삼팬들을 설레게 하였다. 유일하게 맞은 안타 하나가 [[전준우]]의 홈런인 것도 고무적, 그리고 7회초, 메가라이온즈포가 터지며 시즌 2승째를 챙겼다. 팬들은 이러한 활약에 후반기 삼성 불펜의 핵으로 재강림하기를 기대하는 중.
         7월 25일 대구 NC전에서 10:6으로 앞선 9회초에 등판해 삼진 1개 포함 삼자범퇴를 기록하며 경기를 마무리했다. 이날 속구 최고구속은 149km/h.
         7월 27일에는 1:1 동점 상황에서 등판해 1안타와 1볼넷을 기록했으나 삼진만 2개를 잡았다. 삼진/볼넷 비율이 4를 왔다갔다 할 정도로 안정적인 모습. [[차우찬]]의 페이스가 떨어지는 상황에서 ~~좌우놀이를 사랑하는 감독 특성상~~ 왼손 투수로 필승조에 포함될 듯 하다.
         8월 11일 넥센전에선 [[이택근]]에게 2루타를 맞았으나 두 타자를 무사히 잡아내고 팀의 역전승을 견인했다.
         6월 11일 삼성전에서 1점 앞선 8회 등판했으나 1아웃을 겨우 잡은 뒤 연속 안타와 볼넷으로 만루를 만든 뒤 강판당했고, 심수창과 장민석이 환장스럽게 모든 주자를 불러들이면서 비야누에바의 선발승을 날린 것은 물론 본인도 패전 투수가 되었다. 지들이 좋아하는 감독 하나 빠졌다고 팀이 지라고 저주를 퍼붓고 비웃어대는 미치광이들이야 "신나게 퍼졌다"고 "믿음직스럽지 못하다"며 비웃고 있지만 재작년과 작년의 혹사를 당하고 수술 후 반년도 안 되어 복귀했음을 아는 한화 팬들은 차마 욕하지 못하고 있다. --야갤에서도 송창식, 권혁은 안건드리는데-- 올해는 확실히 쉬어가줘야 하는 느낌. 참고로 경기 종료 시점에서 '''권혁의 FIP는 송은범보다 높다.''' (...)
         7월 5일 넥센전에서 이동걸이 방화를 저지르자 등판하였으나 안타 2개를 맞고 1실점을 기록한다 물론 김원석의 수비도 아쉽긴 하였으나 확실히 예전보다 기복이 심하고 구위도 저하된 듯 하다 겨우 3점대로 내린 방어율도 다시 4점대로 치솟은건 덤
         7월 8일 강승현이 주자 1,3루를 만든 뒤 희생플라이로 실점한 8회 1사 상황에서 등판해 삼진-안타-유땅으로 2아웃을 잡고 홀드를 기록했다.
         7월 12일 1.2이닝 2실점으로 역전을 허용하며 패전투수가 되었다. 팬들은 작년 혹사를 기억하며 까지도 못하고 감싸지도 못하며 안절부절하는 모습.
         7월 23일 두산 베어스와의 원정경기에서 4-3으로 앞선 7회말에 등판하였으나, [[윤규진]]이 남겨놓은 승계주자를 실점시키며 비야누에바의 승리를 날려먹는 '''블론세이브'''를 범했고 팀이 8회초에 역전을 시켜 승리투수 요건을 갖췄으나, 김재환에게 홈런을 얻어맞고 8회 2아웃 상황에서 [[정우람]]에게 바통을 넘겼다. 이날 기록은 1이닝 1실점.
         7월 29일과 30일 감독대행이 연투를 시키자 보란듯이 연일 홈런을 맞고 말았다. 특히 30일 [[이형종|현 단장과의 다툼 끝에 임의탈퇴 후 복귀한 선수]]에게 맞은 만루홈런은 치명적. 팬들은 이제 그만 던져도 되니 제발 쉬고 오라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7월 19일 게재된 [[최계훈]] 2군 코치의 [[http://naver.me/xNOThHc9|인터뷰]]에 의하면 재활이 순조로운 것인지 육성군으로 이동했다고 한다.
  • 우규민 . . . . 14회 일치
         2007년에도 7월 10일 전까지는 1승 0패 24세이브 ERA 1.20, WHIP는 1도 되지 않는 호성적으로 [[오승환]]과 세이브왕 경쟁을 하고 있었는데, 8월 2일 [[채태인]]이 대타로 나와 ~~방망이가 나가다가 띵 하고 맞아서~~프로 첫 홈런을 때려낸 후부터는 어째 [[블론세이브]]의 왕이 되었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816 대첩]]. 이후부터 부상으로 인한 [[스프링캠프]] 불참의 여파가 나타나 방화 비율이 높아지다가 결국 13블론세이브를 달성, 1시즌 최대 기록을 세우고 말았다. 이 시즌 30개의 세이브로 오승환의 뒤를 이어 세이브 2위에 올랐는데, 13블론의 임팩트가 너무 컸던지라 방화범 이미지가 확립되었다. ERA도 2.65로 크게 상승했다.
         7월 18일 SK전에서 세이브를 만들어냈다.
         7월 11일 잠실 NC전에서 6⅔이닝동안 1실점으로 호투하여 7승을 올리며 팀의 스윕을 이끌었다.
         7월 17일 사직 롯데전에서는 ~~1+1알바 행사~~ 불펜으로 나와 7~8회는 호투했으나, 9회에는 난타 당해 솔로홈런 후 1사 1, 2루 상황을 만들고 봉중근에게 마운드를 넘겼다. 하지만 승계주자 분식으로 인해 3실점 ~~봉중근: 내 승리를 날려먹었던 업보다~~
         7월 25일 잠실 KIA전에서 7이닝 동안 무실점 2안타 경기를 펼치며 팀 승리를 이끌었다. 이로써 시즌 8승째를 수확하며 이 부문 팀 내 단독 선두에 올라섰고, 최근 선발 6연승을 이어가며 평균자책점을 3.39까지 끌어내렸다.
         8월 11일 기준의 성적은 아래와 같다.
         그 이후 부진하다가 7월 1일 6이닝 2실점으로 잘했다. 그러나 승리는 기록하지 못했다. 팀은 역전승.
         7월 7일 넥센 전 5.1이닝 2피홈런 6실점으로 신나게 털렸다. 현재까지 s-war가 -0.22다. 완벽한 먹튀.
         7월 22일 대구 LG전 선발로 나와 최경철과 영혼의 배터리를 이룰 뻔했으나 우취로 무산되었다. ~~4분 뒤 비 그쳤다~~
         7월 29일 넥센 전 5이닝 9피안타 3피홈런 5실점으로 탈탈 털렸다.
         그러나 8월 11일 6피안타 2볼넷 6실점으로 털렸다. 한화타자들의 집중력에 못당한게 원인인듯. 그러나 누가봐도 객관적인 기량이 떨어진 것은 사실이다.
         7월 12일 전반기 최종전 5회초에 등판하여 2이닝동안 17구 3k로 롯데타선을 완벽하게 막으며 홀드1개를 적립했다. 전반기 최종 성적은 31.1이닝 7홀드 ERA 3.45 로 의외로 나쁘지 않은 성적을 거두었다.
         그런데 7월 27일 KIA전에서 연장전에 등판해 1이닝 2자책(...)을 기록하고도 팀이 '''끝내기 보크'''로 승리를 거두며 ~~의문의~~ 1승을 챙겨갔다.
  • 현진건 . . . . 14회 일치
         국권 피탈 뒤인 [[1915년]], 16세의 나이로 당시 경주 향리의 부호인 [[진사]] 이길우(李吉宇)의 딸 순득(順得)과 혼인하여 [[대구부]] 수정(竪町) 255번지(지금의 대구광역시 중구 인교동)에 있던 처가에서 신혼생활을 하였다. 그 해 [[11월]]에 [[보성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가 2학년 재학 중인 이듬해 [[7월]]에 자퇴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세이소쿠 영어학교]](正則英語學敎)에 입학하였다.
         [[1917년]] 다시 귀국하였는데, 이때 대구에서 [[백기만]](白基萬) · [[이상화 (시인)|이상화]](李相和) 등과 습작 동인지 『거화(炬火)』를 발간하였다. 이것이 그가 처음으로 시작한 '문학'이었다(다만 본격적인 동인지는 아니고 작문지 정도의 수준이었다고<ref>양진오, 「조선혼의 발견과 민족의 상상 - 현진건의 학술적 평전과 문학 연구」(도서출판 역락, 2008), p.44. 대구대학교 인문과학연구총서24.</ref>). 4월에 현진건은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의 5년제 세이조 중학교(成城中學校)에 3학년으로 편입하였다. [[1918년]] 3월에 다시 귀국하였는데<ref>일본 학자 시라카와 유타카에 의해 세이조 중학교 3학년 성적대장 일람표에서 현진건의 이름이 확인되어, 그가 1917년 4월부터 1918년 3월까지 실제 이 학교에 재적했음을 고증할 수 있었다. 양진오, 「조선혼의 발견과 민족의 상상 - 현진건의 학술적 평전과 문학 연구」(도서출판 역락, 2008), p.43. 대구대학교 인문과학연구총서24.</ref>, 얼마간 대구에 머물다가 집안 몰래 형 정건이 있던 [[중화민국|중국]] [[상하이]](上海)로 건너 가서 [[후장 대학]](扈江大學) 독일어 전문부에 입학한다. 조선에서 일어난 [[3.1 운동]]의 여파가 상하이에까지 커져 상하이에서도 만세운동이 벌어지고, [[대한민국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가 수립되던 해인 [[1919년]] 다시 귀국하여, 당시 육군 공병 영관을 지낸 당숙 현보운(玄普運)의 양자로 들어가게 되면서 서울로 상경, 지금의 종로구 관훈동 52번지에서 살았는데, 현보운은 1919년 음력 9월 10일에 사망하고 그가 호주가 되었다. 12월에 첫딸 경숙(慶淑)이 태어났으나 이듬해에 죽고 만다.
         이 전해부터 [[휘문고등학교]] 출신의 젊은 문인인 [[박종화]](朴鍾和) · [[나도향|나빈]](羅彬) · [[홍사용]](洪思容) · 이상화 · 박영희(朴英熙) 등과 함께 잡지 『백조(白潮)』의 동인이 되어, 『개벽』과 『백조』 두 잡지 사이를 오가며 『백조』 1호지에 수필 「영춘류(迎春柳)」, 2호지에 단편소설 「유린」을 발표하고, 또 기행문 「몽롱한 기억」을 기고하면서, 7월에 『개벽』에 다시 번안소설 「고향」(치리코프 원작)과 「가을의 하룻밤」(고르키 원작)을 각각 발표하였다.
         [[1925년]] 1월, 현진건은 『개벽』에 단편 「불」을 발표하였다. 이때 그는 「시대일보」의 사회부장이 되었으나 「시대일보」가 폐간되면서 동아일보사로 전직하여야 했다. 3월 1일자 『개벽』 제57호에는 이때의 현진건의 근황에 대해 "근래에 빙허(憑虛) 군은 신문사 일도 뜻대로 되지 않으므로 더 많은 독서와 연구에 노력하겠다 한다. 늘 군은 조선의 평론계가 아무 보잘 것 없는 것을 매우 분개해서 앞으로는 논문도 쓰실 작정이라고. 고마운 일이며 즐거운 일이며 마음히 든든해지는 일이다."라고 짤막하게 소개하고 있다.<ref>「文壇雜談」 1925년 3월 1일자 『개벽』제57호.</ref> 그리고 박문서관에서 그의 중편 「지새는 안개」가 단행본으로 간행되었다. 또한 2월에 단편 「[[B사감과 러브레터]]」를 『조선문단』에 발표하고<ref>현진건이 『조선문단』에 작품을 싣기 시작한 것은 『개벽』이 점점 '계급주의 문학'을 외치는 [[카프]]에 동조하는 모습을 보이면서부터였다는 지적이 있다. 양진오, 「조선혼의 발견과 민족의 상상 - 현진건의 학술적 평전과 문학 연구」(도서출판 역락, 2008), p.91. 대구대학교 인문과학총서24.</ref>, 4월과 5월에는 수필 「목도리의 복면」과 「설 때의 유쾌와 낳을 때의 고통」을 각각 기고하였다. 7월에는 「조선문단과 나」라는 기고에서 작가는 삼삼오오 짝을 짓고 당을 나누어 서로 갈라서서 싸우는 존재가 아니라 작가 하나하나가 독립적인 개체라는 "일인일당(一人一黨)주의'라는 용어를 써가며, 계급주의 문학을 옹호하는 카프의 주장에 맞서 내용적 가치와 계급적 가치란 별개임을 주장하였다. 또한 『조선문단』에서 만든 조선문단합평회의 정기회원으로서, 10월에는 『조선문단』 신추문예(新秋文藝)에 응모한 작품들의 심사를 맡아 처음으로 평론을 싣기도 했다.
         [[1929년]] 7월 8일부터 12일까지 [[신라]](新羅)의 고도였던 [[경주]](慶州)를 답사하고, 그 기행문 「고도순례 경주」를 7월 18일부터 8월 19일까지 「동아일보」에 연재하였다(이 고도기행은 당초 경주뿐 아니라 [[공주]](公州)와 [[부여]](扶餘), [[평양]](平壤)까지도 계획에 넣고 있었던 것 같지만 경주 이후로 고도기행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또한 『문예공론』 7월호에 단편 「신문지와 철창」을 기고하였으며, 12월에는 『신소설』에 「정조와 약가(藥價)」를 발표하였다.
         [[1930년]] 2월과 12월에는 장편 「웃는 포사」를 『신소설』과 『해방』에 연재하다 4회만에 중단하고, [[1931년]] 10월에 단편 「서투른 도적」을 『삼천리』에, 11월에는 『신동아』에 「연애의 청산」을 발표하였다. [[1932년]] 7월 8일부터 23일까지 단군(檀君)의 전승이 남아있는 [[안주군|안주]](安州), [[묘향산]](妙香山), 평양, [[황해도]](黃海島), [[강화도]](江華島) 등지를 답사하고 그 기행문 「단군 성적(聖跡) 순례」를 7월 29일부터 『동아일보』에 연재하였다(~11.9). 그러나 이 해, 3년의 옥살이를 마치고 6월 10일에 출소한 형 현정건은 현진건이 『동아일보』지면에 장편소설 「적도(赤道)」를 연재하기 시작한지 열흘 뒤인 12월 30일에 옥살이의 후유증으로 숨을 거두고, 이듬해 형수(현정건의 부인) 윤덕경(尹德卿)도 자결하는 등 현진건에게 개인사적 비극이 잇따랐다(「적도」는 [[1934년]] 6월 17일에 완결되었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일본 대표로 출전해 1등을 차지한 조선인 선수 [[손기정]](孫基禎)의 유니폼에 그려진 [[일장기]]를 지워버린 채 신문에 실은 사건으로([[일장기 말소 사건]]) 현진건은 기소되어 1년간 복역해야 했으며, 이듬해 출옥하면서 동아일보사를 사직하고 관훈동에서 서대문구 부암동 325-5번지로 이사하여<ref>당시 부암동은 서울에서도 사람들의 발길이 별로 닿지 않는 곳이었다. 양진오, 「조선혼의 발견과 민족의 상상 - 현진건의 학술적 평전과 문학 연구」(도서출판 역락, 2008), p.156. 대구대학교 인문과학연구총서24.</ref> 그곳에서 땅을 빌려 양계 사업을 시작한 한편, [[1938년]] 7월 20일부터 다시 「동아일보」지면에 장편역사소설 「무영탑(無影塔)」을 연재한다.(~ 1939년 2월 7일) [[1939년]] [[7월]]에 「동아일보」 학예부장으로 복직되었으며, 같은 해 10월 25일부터 「동아일보」에 역사소설 「흑치상지(黑齒常之)」 연재를 시작하는데, 이 와중에 문예지 「문장」과 가진 인터뷰에서<ref>「침묵의 거장 현진건 씨의 문학종횡담」, 『문장』 1939년 11월. p.116~120.</ref> 현진건은 당시의 소설들에 대해서 "(자신이 처음 글을 쓰던 때에 비해) 문장이라든가 소설 만드는 기술은 가히 괄목할 만큼 진보.... 그러나 구상의 도약이 드뭅니다"라며 "동경(東京) 문단의 말기적인 신변잡기 같은 것에 안주하려는 경향"에 대해 경계하고, 또한 현재가 여러 면에서 세계적인 문학의 빈곤시대가 아닌가 싶다며 "문은 실상 기(氣)이며 기가 없으면 아무리 진주같다 해도 곧 사회"라는 견해를 피력했다. 그리고 12월에는 같은 잡지에 또 한 번 「역사소설의 제(諸)문제」라는 글을 기고하여 역사소설이라는 것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였다.
         부친 경운의 첫 부인이자 현진건의 친어머니인 완산 이씨 정효(貞孝)는 진건을 비롯한 네 명의 아들을 낳은 뒤 막내 진건의 나이 열 살 때인 [[1910년]] 6월 13일에 죽고, 경운은 정선(旌善) 전씨를 후처로 맞아들여 또 한 명의 아들을 두었다. 진건의 큰형 '''홍건(鴻健)'''은 러시아 사관학교 출신으로 대한 제국의 육군 참령을 지냈다. 한때 러시아 대사관에서 통역을 맡기도 했으며, 《각사등록》과 《승정원일기》 등의 문헌에 따르면 광무 6년([[1902년]])에 외국어학교(外國語學校) 부교관(副敎官)과<ref>《각사등록》 광무 6년(1902년) 7월 28일조. 이듬해인 광무 7년(1903년) 4월 23일(양력 5월 19일)에 면관되었음이 《승정원일기》에 수록되어 있다.</ref> 칭경시(稱慶寺)의 예식사무위원(禮式事務委員)을 잠시 맡기도 했다<ref>《승정원일기》 광무 6년([[1902년]]) 6월 24일조. 그러나 광무 7년(1903년) 2월 28일(양력 3월 26일)에 해임되었다(《승정원일기》 같은 날 기록).</ref> 말년의 행적은 잘 알려지지 않았으며 [[미소공동위원회|미(美)·소(蘇) 공동위원회]] 시절에 납북되었다는 설도 있다.<ref>양진오, 「조선혼의 발견과 민족의 상상 - 현진건의 학술적 평전과 문학 연구」(도서출판 역락, 2008), p.34, 대구대학교 인문과학연구총서24.</ref> 둘째 형 '''석건(奭健)'''은 일본 메이지 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하고 대구에서 변호사로 근무했으며, 아우 정건이 독립운동 혐의로 체포되어 재판을 받을 때 변호를 맡기도 했다. 셋째 형 '''[[현정건|정건]](鼎健)'''은 [[사회주의]] 독립운동가로 유명하다.
         이들 형제는 현진건이 5촌 당숙 '''현보운'''([[1875년]]~[[1919년]])의 양자로 [[입양]]되어 들어간 뒤 법적으로는 친형제에서 6촌 형제로 바뀌었다. 관립 일어학교 출신의 보운은 고종 33년인 [[건양]](建陽) 원년([[1896년]]) 8월 3일에 외국어학교의 교관(敎官)이 되었고, 광무 3년([[1899년]])에는 궁내부 번역관, 광무 4년([[1900년]]) 12월 24일에는 예식원 참리관으로 임명되어 봉직하다가 [[러일전쟁]]이 일어난 광무 7년(1903년) 11월 11일에 주일공사관 이등참서관이 되었고, 광무 8년(1904년) 일본 보병대 수원(隨員)으로 일본으로부터 즈이호오 4등 훈장을 받기도 했다. 광무 9년(1905년)에는 [[병조|군부]] 군무국 포병과로 옮겨 정위가 되었다.
         * [[1932년]] 7월 1일자 『삼천리』기사에서, '만일 금주법이 실시된다면'이라는 질문에 현진건은 "돈이 없어서 못 먹으니 차라리 끊어 버리는 것도 나을 듯 싶어서 벌써부터 끊으려고 하는데요. 그런데도 세상 사람들은 날 보고 애주가로 인증하니 참 딱한 일입니다. 우선 귀사에서도 많은 인사를 제쳐 놓고 나에게 물어 보시는 것은 내가 술을 좋아한다고 해서 구태여 물어보시는 줄 암니다. 혹 먹고 싶으면 어떻게 하겠느냐고? 배운 재주라 그렇케 쉽게 버릴까 하는 것도 의문은 됩니다. 정, 먹고 싶으면 [[카포네]] 노릇이나 해야 먹게 될 줄 압니다."라고 대답하기도 했다.
  • 김관용 . . . . 13회 일치
         |임기 = 2006년 7월 1일 ~ 2018년 6월 30일
         * 1971년 7월: 제10회 행정고시 합격
         * 1989년 7월: 경상북도 구미세무서 서장
         * 1999년 7월: 경상북도 시장, 군수 협의회 회장
         * 1999년 7월: 전국시장·군수·구청장협의회 공동의장
         * 2006년 7월 ~ 2018년 6월: [[경상북도지사]] (민선4·5·6기)
         * 2006년 7월 ~ 2018년 6월: 제2대 [[한국국학진흥원]] 이사장
         * 2017년 7월 ~ 2018년 6월: 제2대 중부권정책협의회 회장
         * 2017년 7월 ~ 2018년 6월: 제11대 전국 시도지사 협의회장
         |임기 = 1995년 7월 1일 ~ 2006년 2월 27일
         |임기 = 2006년 7월 1일 ~ 2018년 6월 30일
         |임기 = 2012년 10월 11일 ~ 2013년 10월 17일
         |임기 = 2017년 7월 26일 ~ 2018년 6월 30일
  • 흥친왕 . . . . 13회 일치
         |출생일 = [[1845년]] [[8월 22일]]([[음력 7월 20일]])
         '''흥친왕 이재면'''(興親王 李載冕, 완흥군(完興君), [[1845년]] [[8월 22일]]([[음력 7월 20일]]) ~ [[1912년]] [[9월 9일]])은 조선 말기의 왕족·군인·정치인이자 [[대한제국]]의 황족·군인으로, [[흥선대원군]]의 적장자(嫡長子)이자 [[대한제국 고종|고종]]의 친형이며 [[영선군 이준]]의 아버지이다. 대한제국 성립 후 완흥군(完興君)에 책봉되었다가 [[1910년]] 흥친왕(興親王)으로 진봉되었다.
         흥친왕 이재면은 [[1845년]] [[8월 22일]]([[음력 7월 20일]]) [[한성부]] 사동(寺洞) 사저에서 [[흥선대원군]]과 [[여흥부대부인 민씨]]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처음 이름은 재록(載錄)이었다가 뒤에 재면으로 고쳤다. [[조선총독부]]가 작성한 [[이희공실록]]에 의하면 그가 태어나자마자 지어진 이름은 재록이었다 한다. [[조선]] [[조선 헌종|헌종]]과 [[조선 철종|철종]]이 연이어 후사 없이 사망하면서 이재면 역시 유력 왕위계승권자로 지목되었으나, [[조선 철종|철종]]이 사망할 무렵 그는 성인이었기에 왕위계승권 서열에서 밀리게 되었다.
         [[1882년]] 7월에 아버지 [[흥선대원군]]이 납치되어 [[청나라]]에 호송, [[톈진]]의 보정부(保定府)에 억류되어 감금생활을 한다는 소식을 접하다. 그는 대원군의 [[텐진]] 납치기간 중 아버지와 서신 연락을 주고받았다.
         {{인용문|여기서부터 내일 아침에 떠나 출발하면 이틀만에 천진에 도착할 수 있다. 왕복에 7~8일이 허비하리라 한다. 이 배에서 다 말하기를 오늘날 태공(흥선대원군을 지칭)이 천조에 들어가는 것이 크게 다행이라 한다. 총총이 겨우 써서 숨겨두고, 전편(傳便)을 기다려 부칠 생각이다. 동하지(충동당하지) 말고 안정하라<br /><br />1884년 음력 7월 15일 청나라로 끌려가는 배 안에서 몰래 쓴 편지<ref name="문사1"/>}}
         {{인용문|다시 뵈옵도 못하고 세상이 올이지 않이하리신이 지필을 다해야 한심하오니다. 태평히지니시옵기 니니 발아옵니다. - 보정부 안치죄 이상서<br />(다시 뵙도 못하고 이승에서 내 목숨이 오래지 못하겠으니 종이와 붓을 마주 대하기 한심하옵니다. 내내 태평히 지내시기를 바라옵니다. - 보정부 안치죄 이상서<br /><br />1884년 음력 10월 12일 보정부에서 몰래 쓴 편지<ref name="문사1"/>}}
         [[1893년]] 그는 동학 농민군이 상경하여 [[경복궁]] 앞에서 복합상소운동을 벌이는 기회를 이용하여 [[이준용]]을 왕으로 추대하려 하였다. [[정교]]는 1893년 [[2월 11일]]부터 [[2월 13일]]까지 3일간 박광호를 소두로 하는 약 50명의 동학교도들이 상경하여 궁궐 앞에서 교조 신원을 탄원하며 연좌시위를 벌인 사건을 대원군이 시킨 일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때 [[정교]]는 대원군이 은밀히 동학당 수만 명을 서울로 불러 모임을 갖고 장차 불궤를 도모하여 그의 손자 이준용을 (왕으로) 추대하려 했으나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고 하였다.<ref name="p316">오영섭 《한국 근현대사를 수놓은 인물들(1)》(오영섭 저, 2007.4, 경인문화사) 315~316쪽.</ref>
         [[1894년]] [[6월]] 일본군의 경복궁 쿠데타로 대원군이 집정하자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의 동문사당상경리사(同文司堂上經理事)가 되었다.<ref name="daum1"/> [[7월 14일]] 특별 가자되어 상보국숭록대부(上輔國崇祿大夫)의 품계를 받고, [[7월 15일]] 궁내부 대신에 임명됐다. [[8월 13일]] 영돈녕원사(領敦寧院事)에 임명되었다. 이어 궁내부 대신을 거쳐 [[1895년]] [[8월]]에 다시 궁내부 대신에 임명되었다.
  • 김강민 . . . . 12회 일치
         [[2010년]] [[12월 11일]], [[두산 베어스|두산]]의 김현수, [[이종욱(야구선수)|이종욱]]과 함께 2010 시즌 외야수 부문 골든글러브를 수상했다.
         6월 28일 [[대구시민운동장 야구장]]에서 열린 [[삼성 라이온즈]]전에서 스코어 0:2로 삼성이 앞서고 있는 3회 말 2사 만루 상황에서, [[조동찬]]의 뜬공을 제대로 잡지 못해[* 머리 뒤로 공이 떨어지고 말았다. 직접적인 원인은 조명탑 라이트인 듯. ~~[[정수빈#s-1|김명탑]] 등극~~] 이닝 종료 찬스를 날려먹고 3점을 허용하는 사태가 일어났다. 결국 김강민은 멘붕하고~~[[식빵]]!~~, SK는 0:6으로 패배했다. 공교롭게도 그날부터 7월 7일 한화전까지 SK는 6연패에 빠졌다. ~~조명탑의 저주?~~
         7월말부터 간간히 톱타자로 나오기 시작하더니 8월 들어서 1번 타자로 완전히 자리를 잡았고, 타순이 변경되자, 타격도 이전보다 훨씬 좋아졌다. 대신 [[정근우]]가 6번 타자로 내려갔는데 정근우도 6번 타순에 정착한 후에 타격이 개선되는 WIN-WIN효과가 나타났다.
         그 이후 잔부상으로 인해 잠깐 부진을 겪어 타율이 .295 정도까지 떨어지다가 7월 9일 현재 다시 페이스가 돌아와서 타율 .312를 마크 중.
         6월 11일엔 대타로 나와서 추격하는 솔로포를 터뜨리고 호수비를 선보였으나 팀은 7:6으로 아깝게 패했다.
         7월 6일 [[한화 이글스]]와 경기에서 6회 2사 주자 없을때 [[안영명]]을 상대로 [[윤정우]]가 SK 와이번스 소속으로 첫 홈런을 치자 김강민 역시 시즌 1호 백투백 홈런을 쳤다.
         7월 10일 [[LG 트윈스]]전에서 결승 쓰리런 포함 3안타 3타점으로 맹타를 휘둘렀다. 팀은 이에 힘입어 10:3으로 완승. 이로써 4위와의 게임차를 더욱 벌려놓았다.
         전반기 마지막 경기인 7월 12일에도 4타수 2안타 2타점에 호수비, 3루 도루 등 다방면으로 활약해 승리의 주역이 되었다.
         후반기 첫 경기인 7월 17일 [[NC 다이노스]]와의 경기에서도 9번타자 중견수로 선발출전하여 5년만의 연타석 홈런을 치는 등 맹활약했다.
         7월 22일 [[사직 야구장]]에서 열린 [[롯데 자이언츠]]와의 경기에서 1번 중견수로 선발출장해 1회 [[브룩스 레일리]]를 상대로 초구를 받아쳐 좌중간 담장을 넘어가는 리드오프 홈런을 쳤다.
         7월 24일 인천SK 행복드림구장에서 열린 [[두산 베어스]] 전에서 중견수로 선발 출전하여 3타수 2안타 1볼넷을 기록했고 3회말 도루에도 성공했다. 다음날인 25일 두산전에서는 9회말 [[노수광]]과 교체되어 대수비로 출전했다. 26일에는 [[김동엽(1990)|김동엽]]과 교체되어 대수비로 출전했고 1타수 1안타를 기록했다. 팀은 3763일 만에 [[두산 베어스]]를 상대로 스윕을 달성했다.
         7월 27일 마산에서 열린 [[NC 다이노스]]와의 경기에서 중견수로 선발 출전하여 2타수 1안타 2볼넷을 기록했다. 팀은 [[이원재(1989)|이원재]]의 끝나기 안타로 인해 0-1로 패배하였다. 다음날인 28일에서도 중견수로 선발 출전했다. 5타수 2안타(1홈런) 1타점을 기록했고 2회 초에 상대투수 [[베렛]]을 상대로 시즌 6호 홈런을 달성했다.
  • 김승대 . . . . 12회 일치
          * 2013년 7월 3일, 서울전에서 K리그 클래식 첫 도움을 기록하였다.
          * 2013년 7월 10일, 성남전에서 프로 선수로는 첫 FA컵 경기를 치뤘다.
          * 2014년 3월 11일, 부리람전에서 ACL 데뷔골을 기록하였다.
          * 2016년 7월 16일, 장쑤 쑤닝전에서 C리그 첫 도움을 기록했다.
          * 2017년 7월 15일, 수원전에서 복귀 후 첫 경기를 치렀다.
          * 2017년 7월 19일, 대구전에서 복귀 후 첫 풀타임 경기를 치렀다.
          * 2018년 3월 11일, 전남전에서 도움을 기록하며 K리그 통산 98경기 [[20-20 클럽#s-2|24득점 20도움]]을 달성했다.
         신진호와 황진성의 공백을 훌륭히 메꾸고 7월 2일 서울전에서는 [[고무열]]의 결승골을 어시스트 하는 활약을 보이면서 '포항 유스는 역시 미드필더 화수분'이라는 찬사를 받게 만들었다.
         이런 감독의 기대에 부응함인지, 김승대는 7월부터는 어느정도 활약을 하고 있다. 7월 9일 [[상하이 선화]]전에서 한골을 터트렸고, 7월 16일, [[최용수]]가 지휘하는 [[장쑤 쑤닝]]전에서 1골 1어시스트를 기록, 옌볜이 3:0으로 승리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또한 7월 23일에는 [[광저우 푸리]]전에서도 [[윤빛가람]]과 함께 대활약, 3-1 승리를 이끌었다. 이로서 팀은 3연승, 김승대는 3게임 연속골을 넣었다. 이 세팀은 모두 상위스플릿에 있는 강팀들로서, 옌볜은 10위 밖의 하위권에서 일약 8위 안으로 뛰어 올라 중위권으로 발돋움 했고, 김승대의 위상도 높아졌다.
  • 이승엽 . . . . 12회 일치
         '''이승엽'''(李承燁, [[1976년]] [[10월 11일]] ~ )은 [[대한민국]]의 은퇴한 [[야구]] 선수로 전 [[KBO 리그]] [[삼성 라이온즈]]의 [[내야수]], [[지명타자]]이다. 본관은 [[광주 이씨|광주]]이다.
         1995년 한국프로야구 신인 드래프트를 통해 계약금 1억 3200만원, 연봉 1,000만원의 조건으로 투수로 입단하였다. 좌완 투수 유망주였으나 시절 당했던 팔꿈치 부상으로 인해<ref>[[문화일보]] - 2009년 9월 기사 [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2009091701032230073002 "이의수의 마흔 이후 남자의 생존법 - 실패는 성공을 잉태한다"]</ref><ref>[[동아일보]] - 2010년 8월 기사 [http://news.donga.com/3/all/20100820/30624874/1 "투수 → 타자 변신 성공시대… 타자 → 투수는 왜 잘 안 될까"]</ref> 입단 초기부터 투수 훈련에 애를 먹은 그는 첫 스프링 캠프에서 당시 타격코치였던 [[박승호 (야구인)|박승호]]로부터 1년만에 타자로 뛸 것을 권유받았고, 이후 좋은 반응을 보여 1루수로 완전히 전향했다.<ref>[[마이 데일리]] - 2010년 8월 기사 [http://www1.mydaily.co.kr/news/read.html?newsid=201008101138562229 "이대호·이승엽·추신수, ‘잘 던져야 잘 친다’… 투수 출신들 맹활약"] {{웨이백|url=http://www1.mydaily.co.kr/news/read.html?newsid=201008101138562229# |date=20140814152842 }}</ref> 그가 타자로 전향하자 ‘좌승엽 우승관’으로 불리며 기대를 받았던 입단 동기 내야수 [[김승관]]은<ref>엑스포츠 - 2010년 7월 기사 [http://xportsnews.hankyung.com/?ac=article_view&entry_id=123613 "추신수와 부산고의 황금 시대를 이끈 한화의 김백만"]{{깨진 링크|url=http://xportsnews.hankyung.com/?ac=article_view&entry_id=123613 }}</ref> 상대적으로 기회가 줄어 [[2004년]] [[롯데 자이언츠|롯데]]에 트레이드된 후 [[2007년]]에 방출돼 그 해를 끝으로 은퇴했다. 타자로 완전히 적응하며 프로 첫 해부터 가능성 있는 모습을 보였다. 점차 그는 거포로서의 재능을 뽐내며 붙박이 3번 타자 겸 1루수로 자리매김했지만 내야수 [[이동수 (야구인)|이동수]]에게 밀려 데뷔 첫 해에 신인왕 수상에는 실패했다. 프로 입단 3년차인 [[1997년]]부터 본격적으로 그의 타격이 정점을 찍기 시작하면서 그는 아시아 프로 야구 역사상 최고의 타자로 거듭났다.<ref>스포츠 춘추 - 2009년 12월 박동희의 칼럼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7&oid=295&aid=0000000338 "양준혁이 말하는 ‘선구안 향상법’"]</ref>
         * [[2003년]] [[6월 22일]] [[SK 와이번스|SK]] 투수 [[김원형]]을 상대로 솔로 홈런을 기록하여 일본의 [[오 사다하루]](27세 3개월 11일)와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MLB]] [[알렉스 로드리게스]](27세 8개월 6일)를 제치고 세계 최연소 300호 홈런 고지(26세 10개월 4일)에 올랐다. 그리고 같은 해 [[10월 2일]] [[롯데 자이언츠|롯데]]전에서 투수 [[이정민 (1979년)|이정민]]을 상대로 56번째 홈런을 쳐내며 대한민국 프로야구 시즌 최다 홈런 기록이자 아시아 신기록을 세웠다.
         그가 기록한 [[2006년]] 성적은 타율 2위, 타점 1위(108), 홈런 1위(41개<ref>실제로 [[2006년]] 그는 155개의 공을 펜스 너머로 넘겼지만, 이 중 [[2006년]] [[6월 11일]] [[지바 롯데 마린스]]와의 대결에서 상대 선발 투수 [[와타나베 슌스케]]로부터 친 홈런이 심판이 당시 1루 주자 [[오제키 데쓰야]]가 3루를 밟지 않고 홈에 들어왔다고 판단해 단타로 처리되며 공식 기록은 41개가 됐다{{뉴스 인용|제목=<nowiki>[스포츠 10대 해프닝②]</nowiki> 이승엽, 도둑 맞은 19호 홈런|url=http://media.daum.net/breakingnews/sports/view.html?cateid=1071&newsid=20061221135010895&p=joynews24|출판사=조이뉴스24|저자=최정희|날짜=2006-12-21|확인날짜=2008-09-22}}</ref>)를 기록해 공격 전 부문에서 리그 정상급의 활약을 펼쳤다. 특히 홈런에서는 일본 진출 이후 최다 홈런을 기록했는데 6월에는 44홈런을 몰아치며 리그 홈런 1위에 올라섰다. 그러나 8월 중순 경 발생한 무릎 부상 이후 홈런 페이스가 주춤했고, 시즌 중반부터 페이스를 높여 온 [[주니치 드래곤즈]]의 [[타이론 우즈]]에게 홈런 숫자에서 추월당해 결국 리그 최다 홈런 2위로 시즌을 마감했다. 타율은 [[주니치 드래곤즈]]의 후쿠도메에게 밀리고 홈런과 타점은 [[타이론 우즈]]에게 밀렸지만 시즌 내내 도루를 제외한 타격 전 부문에서 최상위권을 유지하며 최정상급의 기량을 뽐냈다.
         이듬해 [[2007년]] 1월, 모친상 소식을 일본에서 전해 들었고 왼쪽 엄지손가락에 염증이 생기는 부상 등 시즌 내내 고전했다. 외다리 타법을<ref name="sword"/> 고쳐보기도 했지만 성적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7월 중에는 스스로 2군행을 자처하기도 했다. 시즌 후반기에는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스|요코하마]]와의 첫 대구에서 연타석 홈런을 치는 등 부진에서 벗어나는 모습을 보였으며, 시즌 후반에는 승부에 결정적 기여를 한 홈런을 여러 개 쳐 내며 팀이 플레이오프에 진출하는 데에 크게 기여했다. 그러나 챔피언 결정전에서는 홈런을 한 개도 치지 못하는 등 장타력이 실종된 모습을 보이며 시즌을 마감했다.<ref name=world>{{뉴스 인용|제목=이승엽 2007년 시즌 결산, 모친 타계… 부상… 악재의 연속|url=http://media.paran.com/snews/newsview.php?dirnews=2246545&year=2007|출판사=세계일보|저자=강구열|날짜=2007-10-22|확인날짜=2008-06-01}}{{깨진 링크|url=http://media.paran.com/snews/newsview.php?dirnews=2246545&year=2007 }}</ref> 종합적으로 2007 시즌에는 타율 0.274, 30홈런, 74타점을 기록하였다.
         전년도 시즌을 아주 저조한 성적으로 마친 그는 스스로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WBC]] 불참을 선언하며 시범 대구에서만 8홈런을 기록하는 등 [[2009년]] 시즌에 대한 기대를 하게 했다. 기대에 부응하듯 시즌 초 3할 타율, 장타율 1위 등에도 오르는 등 나아진 모습을 보였으나 갈수록 페이스가 떨어졌고, 7월에는 시즌 처음으로 2군에 내려갈 정도로 컨디션이 좋지 않았다. 팀이 정규 시즌 우승 헹가래를 칠 때도 자리에 없었고, 결국엔 2군에서 정규 시즌을 마감했다. [[2009년 일본 시리즈|일본 시리즈]]에서는 2대구에 선발 출장을 했으며, 그 외의 경기엔 대타로 주로 출전했다.
         [[2014년]]에는 타격 자세 교정을 받았고, 그 결과 전년도의 부진을 털고 역대 최고령 3할 - 30홈런 - 100타점을 달성하며 국민 타자의 부활을 알렸다. [[2014년]] [[6월 17일]] [[SK 와이번스]]전에서는 3연타석 홈런을 기록하였고, [[7월 24일]] [[롯데 자이언츠]]전에서는 7타점을 기록했다. 또한 [[9월 10일]] [[NC 다이노스]]전에서는 역대 최고령 30홈런을, 한 달 후 [[10월 11일]] [[KIA 타이거즈]]전에서는 연타석 홈런으로 최고령 시즌 100타점을 돌파했다. [[2014년 한국시리즈]]에서는 부진하였지만 2차전에서 홈런을 쳐 내며 [[타이론 우즈]]를 제치고 포스트시즌 역대 통산 최다 홈런 신기록을 수립했다. 시즌 기록은 3할대 타율, 32홈런, 101타점을 기록하며 2년만에 지명타자 골든글러브를 수상했다. 이는 1루수로써 7번 받은 것을 포함해 총 9번을 수상하며 역대 골든글러브 최다 수상 신기록을 경신했다.
         그는 시즌 시작 전 이번 시즌을 끝으로 은퇴를 선언했다. [[2017년]] [[5월 21일]] [[송창식 (야구 선수)|송창식]]을 상대로 [[KBO 리그]] 첫 450호 홈런을 기록했고<ref>[http://starin.edaily.co.kr/news/NewsRead.edy?SCD=EB21&newsid=01666246615931216&DCD=A20102 '이승엽, 통산 450홈런'삼성, 661일만에 시리즈 스윕(종합)] - 이데일리</ref>, 2달 뒤인 [[7월 29일]]에는 [[김성민 (1994년)|김성민]]을 상대로 [[KBO 리그]] 최초로 4000루타를 달성했다.<ref>[http://www.mydaily.co.kr/new_yk/html/read.php?newsid=201707291933932974&ext=na '라이언킹' 삼성 이승엽, KBO리그 최초 4000루타 돌파] - 마이데일리</ref> 시즌 후반기부터 소속 팀을 제외한 9개 구단에서 그를 위해 은퇴 투어를 진행했고 그 여정이 끝난 [[10월 3일]] [[넥센 히어로즈]]와의 대구를 끝으로 공식 은퇴했다. 그 대구에서 [[한현희]]를 상대로 연타석 홈런을 기록하며 그의 은퇴를 바라보는 이들을 아쉽게 만들었다. 대구 후 팀은 그에 대한 성대한 은퇴식을 열었고, 그의 등번호인 '36번'은 구단 역대 세번째로 영구 결번 처리됐다.<ref>[http://www.newsen.com/news_view.php?uid=201612121051081031 ‘일구대상’ 이승엽 “마지막 1년, 떠날 때 후회없도록”(일구상 시상식)]</ref> 그는 은퇴 후에는 야구 관련 직종에 종사할 것이라는 계획을 밝히며 "야구장 안팎에서 야구 관련 일을 하겠다"고 말했다.<ref>[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7/01/13/0200000000AKR20170113128700007.HTML?input=1195m 이승엽 "은퇴 이후 일? 야구 관련 아니면 안 한다"]</ref>
         ** [[여유만만]] - 역대 연봉 스포츠 스타로 키운 사연 (2009년 7월 31일)
         * [[2012년]] [[7월 29일]] : 한·일 통산 500 홈런, 목동 넥센전 상대 투수 4회 [[앤디 밴 헤켄]]
         * 일본 통산 100호 홈런 달성 : [[2007년]] [[7월 1일]], 대 [[히로시마 도요 카프]] 9차전([[히로시마 시민 구장]], 상대 투수 [[아오키 디카히로]])
  • 한확 . . . . 12회 일치
         |임기 = 1439년 음력 4월 25일 ~ 1439년 음력 7월 6일
         |사망일= [[1456년]] [[음력 9월 11일]]
         '''한확'''(韓確, [[1400년]]<ref>1403년생 설도 있다.</ref> ~ [[1456년]] [[음력 9월 11일]])은 [[조선]]전기의 문신이자 외척, 외교관이며 [[명나라]]의 문신이다.<ref>{{브리태니커|b24h3077a|한확}}</ref> 자는 자유(子柔), 호는 간이재(簡易齋), 본관은 [[청주 한씨|청주]](淸州)이며 시호는 양절(襄節)이다. [[조선 덕종|덕종]]의 비이자 [[월산대군]]· [[조선 성종|성종]]의 모후인 [[인수대비]]와 [[조선 세종|세종]] 서자 [[계양군 (왕족)|계양군]]의 부인인 [[정선군부인]]의 친정아버지이다.
         귀국길에 올라 세조의 책봉 고명을 받아 돌아오던 중, 칠가령(七家嶺)에 이르러 병을 얻어, 귀환하는 도중에 [[음력 9월 11일]] 사하포(沙河浦)에서 갑작스럽게 객사하였다. 당시 향년 56세였다.<ref>1400년생 설을 따를 경우</ref> 사망 당시 가사에 대한 말은 한마디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의 둘째 딸은 [[세종]]의 서자 [[계양군]] 증에게 출가했고, 여섯째 딸은 [[소혜왕후|인수대비]]로 [[조선 덕종|덕종]]의 비이며 [[월산대군]]· [[조선 성종|성종]]의 어머니였다.
         |임기 = 1439년 음력 4월 25일 ~ 1439년 음력 7월 6일
  • 마재윤 . . . . 11회 일치
         Spris MSL 2004에 진출한 때와 비슷한 시기인 2004년 7월 13일, 마재윤은 [[KTF 매직엔스]]와의 [[팀리그]] 승자전 4강 경기에 선봉으로 출전한다. 당시 KTF 매직엔스는 주요 대회 우승, 준우승자 출신인 [[홍진호]], [[강민 (프로게이머)|강민]], [[박정석]], [[변길섭]], [[조용호]] 등이 포진한 최고의 팀이었으며, 이미 2004년 2월 팀리그에서 준우승을 차지한 강팀이었다.
         [[우주닷컴 MSL 2005]]에서 박정석(당시 KTF 매직엔스,현 [[KT Rolster]])을 꺾고 첫 우승을 차지한 이래<ref>([http://www.fomos.kr/board/board.php?mode=read&keyno=87478&db=issue&cate=001&page=8&field=&kwrd= e스포츠 타임머신 마재윤, 우주배 MSL 우승 등] [[포모스]], 2008년 8월 6일)</ref> MSL 3회 우승<ref>[http://gmnews.afreeca.com:8109/app/index.php?board=news_esports&b_no=14659&c_no=2&control=view CJ 마재윤 ‘본좌론’에 종지부 찍었다!(종합)] [[파이터포럼]], 2006년 11월 11일)</ref> 을 차지한데 이어, 2007년 2월에는 MSL 5회 연속 결승 진출하여 [[김택용]]과 대결하게 되었다.<ref>([http://gmnews.afreeca.com:8109/app/index.php?board=news_esports&b_no=16411&c_no=2&control=view CJ 마재윤V, 패스트 디파일러-럴커 러시로 5회 연속 MSL 결승 진출] [[파이터포럼]], 2007년 2월 15일)</ref>
         마재윤의 기량 난조는 2008년 상반기까지 이어졌다. 양대 리그 조기 탈락에 이어 오프라인 예선까지 추락하는 것은 물론, 프로리그 08시즌에서도 부진에 부진을 거듭하면서 가끔씩 팀플에서만 활약하는데 그쳤다. 결국 2008년 6월, CJ 엔투스는 특단의 조치로 마재윤에게 2군 강등을 통보했다.<ref>[http://gmnews.afreeca.com:8109/app/index.php?board=news_esports&b_no=26292&c_no=5&control=view [[파이터포럼]], 2007년 7월 7일]</ref> 이후 3주간 2군 숙소에서 훈련을 소화한 마재윤은 그 성과와 태도가 인정되어 2008년 7월 21일부로 1군에 전격 복귀하였다.<ref>[http://gmnews.afreeca.com:8109/app/index.php?board=news_esports&b_no=26545&c_no=5&control=view [[파이터포럼]], 2007년 7월 21일]</ref>
         이후에 [[인크루트 스타리그 2008]]에 이어 [[BATOO 스타리그 08~09]]에서도 예선전에서 떨어졌고, [[클럽데이 온라인 MSL 2008]]에서는 [[온게임넷 스파키즈]]의 신예 [[임원기]]를 잡고 복귀했지만, 32강 최종전에서 이윤열에게 또다시 패배하면서 16강 진출에 분루를 삼켜야 했다. 하지만 이후 [[로스트사가 MSL 2009]]에서 다시 32강에 진출, 사상 유례없는 MSL 11연속 진출을 달성했다<ref>[http://www.fomos.kr/board/board.php?mode=read&keyno=90893&db=news [[포모스]], 2008년 12월 18일]</ref>(KPGA시절까지 포함하면 이윤열, 조용호등이 있으나 순수 MSL만 따질 경우 마재윤이 최초이다). 2008년 10월 11일에 펼쳐진 블리즈컨 2008에서는 [[박지수]]와 [[허영무]]를 잡고 결승 진출에 성공했고, 12일에 치러진 결승전에서 이윤열을 만나 2:0으로 승리를 거두고 블리즈컨 2연속 제패에 성공했다.
         [[신한은행 위너스리그 09-10|신한은행 위너스리그 08-09]]에서 마재윤은 2번 연속 3킬을 기록하며 팀의 승리를 이끌어 마삼킬이란 별명과 함께 팬들에게 기대를 안겨주었고 로스트사가 MSL 2009 16강에서도 신희승에게 압승을 거두며 부활의 모습을 보였다. 또한 2009년 7월에는 e스타즈 스타크래프트 헤리티지 대회에서 이윤열을 2:1로 꺾고 우승까지 하였으나 위너스리그 종료 이후 점차 기세가 꺾이기 시작했다. 스타리그 예선을 계속 뚫지 못하며 본선 진출에 실패했으며, 저그전에서는 기량 난조를 보였다. 그러나 10월 29일 서바이버 토너먼트를 뛰어난 경기력으로 전승 통과하며 13시즌 연속 MSL진출이라는 대기록을 세웠다. 하지만 이어지는 [[NATE MSL 2009]]에서 32강 2패로 초반 탈락하며 오프라인 예선으로 떨어졌다. 그 이후 양대리그 예선에서 모두 탈락하였고, 프로리그에서도 출전할 때마다 어이없는 졸전을 펼치며 전부 다 연패하는 등 데뷔 이후 최악의 부진을 겪었다. 그리고 2010년 3월에는 로스터에서 말소 되는 등 최악의 분위기가 계속 이어졌다.
         이성은 선수가 처음으로 주목을 받은 것은 2007년 7월 곰TV MSL 시즌 2 8강이었다. 이성은은 이날 1세트에서 절대 뒤집을 수 없었던 것 처럼 보이던 경기를 배틀크루져와 메딕의 리스토레이션 기술을 사용하며 역전승을 일구어냈고, 마지막 5세트에서 몰래 3배럭 이후 무난한 운영으로 승리를 이끌어냈다. 이 승리 이후 이성은은 마재윤의 부스 앞에서 노홍철의 저질댄스를 구사하였다.
         ** 2007년 11월 11일 이성은 승 vs 마재윤 패 - 신한은행 프로리그 2007 후기리그 In Katrina
         ** 2009년 07월 01일 김명운 승 vs 마재윤 패 - 신한은행 프로리그 08-09 5R In Outsider 1.0
         [[강민 (프로게이머)|강민]]과의 첫만남인 MBC Movies배 팀리그 KTF전 3경기에서는 강민이 승리, 구룡쟁배 듀얼토너먼트 1라운드 F조 4경기에서도 강민이 승리했다. 그러나 [[CYON MSL 2005]] 16강 1경기에서는 마재윤이 승리, 비공식전인 [[엘리트 학생복 MSL 올스타리그]] 대구투어 결승에서는 1:2 패배 준우승, 다시 공식전인 [[프링글스 MSL 시즌1]] 결승전에서 만났는데, 마재윤이 3:1로 승리하고 우승했다. 그해 8월 [[WEF 2006]] 4강에서 마재윤이 2:0 승리, 다시 공식전인 [[프링글스 MSL 시즌2]] 4강 B조 경기에서 다시 만나 또 마재윤이 3:1로 승리하고 결승에 진출했다. 이어 [[곰TV MSL 시즌1]] 8강 B조 2경기에서도 마재윤이 승리했다. 하지만 [[신한은행 프로리그 2007 전기리그]] 1라운드 KTF전 2세트에서는 강민에 패했다. 비공식전인 2007 [[블리즈컨]] 월드와이드 4강 8강에서 2:1 승리, 다음날 최종 결승전에서 2:0 승리, 2년 뒤 7월, [[헤리티지]] 10강 B조 5경기도 마재윤이 승리하였다. 상대전적은 공식전만으로는 8:5, 비공식전까지 포함하여 18:8로 마재윤이 강세.
  • 박진성(시인) . . . . 11회 일치
         박진성 시인이 이후에 공개한 카카오톡 내용을 보면 익명으로 폭로한 최초 폭로자는 박진성 시인이 자신이 누구인지 알아차리자 "그럼 본명 말해도 돼요?"라고 실명 폭로할 것임을 협박하며, "주실려면 저는 돈이 좋습니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 발견된다.[[http://www.news-paper.co.kr/news/articleView.html?idxno=6537|#]] 전형적인 [[꽃뱀]]의 수법으로 보인다.[* 이후 사건 전개 과정에서 성희롱을 당했다는 본인이 그 트윗 내용을 스스로 삭제했다. 이는 허위 사실 적시 명예훼손으로 처벌받을 것이 두려워 스스로 삭제한 것으로 알려졌다. 최초 폭로자가 한 말과 [[탁수정]]이 한 말이 비슷한 내용이라 혼동하는 사람이 많은데, 박진성 시인은 2018년 2월엔 [[https://twitter.com/poetone78/status/967662925585432576|최초 폭로자는 의혹이 언론에 보도되자 계정을 폭파했다]]고 했고 7월 22일엔 이 사람이 김○○이라고 밝혔다(이름을 밝히게 된 것은 7월 19일에 자신이 그 최초 폭로자였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나타나 사과를 했는데 이 트위터 계정이 박 시인의 다중계정 중 하나라는 의혹이 제기되었기 때문이다. 이 의혹에 대한 자세한 건 '자살 시도와 이와 관련된 그의 이후 행적'을 참조.).]
         이 주장을 처음으로 기사화한 것은 [[한국일보]] 소속의 황수현 기자이며, [[http://www.hankookilbo.com/v/0564032fc2164032b7c5c3af3f668c50|이 기사]]([[https://archive.is/uTwCo|@]])를 보면 [[메갈리아]] 성향의 [[페미니스트]]로 보인다. 위의 보도 이후로는 대표적인 [[기레기]]로 평가되고 있다. 박 시인은 2017년 2월에 한국일보와 황 기자를 상대로 정정보도 및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시작했다. 2018년 4월 27일에 말하길 26일이 1심 6차 변론 기일이었는데, 한국일보 측이 정정보도를 할 것은 확실해졌고 손해배상의 규모 정도만이 남은 기일 동안 정해질 것 같다고 한다.[[https://twitter.com/poetone78/status/989895731627474944|#]] 그리고 7월 18일에 1심에서 승소, 한국일보와 황수현 측이 정정보도와 함께 5천만원의 배상금을 지불하라는 판결이 나왔다.[[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004&oid=006&aid=0000092780|#]]
         2016년 11월 11일, 박진성 시인은 해당 사안에 대하여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며 그것을 입증할 증거가 있음을 밝힌다. [[http://www.news-paper.co.kr/news/articleView.html?idxno=6537|해당 기사 링크]]
         2017년 11월에 시인의 아버지가 쓴 글에 따르면, 성폭행 혐의로 보도가 난 이후 집 앞에서 피켓 시위가 일어나기도 하고, 지인들의 연락이 모두 끊겼으며, 출판사는 책을 내주지 않는 등 결론이 나기도 전에 보도만으로 이미 사회적으로 매장당한 것과 같은 피해를 입었다고 한다. 어떤 지인은 '한국일보 같은 신문사에서 성폭행을 했다고 기사를 썼으니 사실 아니겠냐'며 면전에서 면박을 주기도 했다고 한다. 또한 박진성 시인의 출판을 담당했던 출판사는 사건이 나자, 무죄여부 확인 과정없이 일주일 만에 출판 계약 해지에, 출판된 시집은 출고 정지 처분을 내렸다. 그리고 '관련된 소송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명분으로 출고 정지 처분을 풀지 않고 있는데, 계약 해지에 대해 물었더니 "아직 시인으로부터 계약 해지를 요구받은 적이 없다. 언제든지 연락을 주신다면 논의하겠다”고 답했다. [[http://www.newspost.kr/news/articleView.html?idxno=59082|해당 기사 출처]][* 이 기사에선 출판사 이름이 나오지 않는데, 박 시인 아버지의 글에선 [[문학과지성사]]라고 나온다.] 2018년 3월 21일에 [[https://blog.naver.com/poetone/221233628914|문제의 출판사와는 결국 계약을 해지]]했으나, 무슨 문제가 있는지 7월에 박 시인이 밝히기를, 문제의 시집은 아직도 출고정지 상태라고 한다.[* 이 사실을 처음 밝힐 때 박 시인이 여러 시집의 계약을 이행하라는 언급도 한 것과 2016년 당시 출간 예정이었던 산문집의 글은 2018년 3월 계약해지를 알린 후에 산문집 '이후의 삶'에 포함되어 출간된 걸 보면, 기존의 시집과 당시 출간 예정이었던 시집과 관련된 계약을 해지하는데 문제가 있는 듯하다.] 이에 대해 민사소송을 진행할 계획이라고 한다.[[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5&aid=0001115546|#]]
         사실 박진성 시인도 소송을 건 사람 중 한 명이나, 아래의 자살 시도 이후 부질없이 느껴져서 취하했다. 2018년 4월 11일에 박 시인이 [[탁수정]]에게 [[https://twitter.com/poetone78/status/983923802202488832|메인 트윗에 올린 자신과의 카카오톡 대화를 내리라고 요구]]했을 때, 이때 몇몇 트위터리안들이 대화의 전문을 트위터에 올리는 것을 건의하자, 박진성 시인은 진실이라는 명분으로 자신의 사생활이 만천하에 공개되는 것은 원치 않는다며 해당 건의를 거절하면서 그 대화록은 법원에 제출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4월 19일엔 메인 트윗을 내려줄 것을 다시 요청했는데, 이 때는 '오늘까지 기다린다'는 말([[https://twitter.com/poetone78/status/986803521419755520|#]])까지 한 걸로 보아 당시엔 탁수정과의 소송전 재개도 생각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 대신, 한국일보와 황 기자와의 정정보도 요구 소송의 1심 판결문 중 [[https://twitter.com/poetone78/status/1020315951638564865|해당 대화를 성희롱으로 보기 어렵다]]고 한 부분을 7월 20일에 공개했다.
          2월 19~20일에 그는 이 상황을 보면서 부정적으로 반응하는 트위터리안들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했고[* 대다수는 그를 비난하거나 비아냥거린 거였지만, 비난하는 게 아닌 경우에도 민감하게 반응했기 때문에 그에게 트위터를 잠깐 쉬는 게 좋을 거 같다고 멘션을 보낸 트위터리안도 있다. 당시 위에서 설명한 무혐의 처분 결정을 탁수정이 공개하고 박진성 시인이 탁수정의 이중잣대를 지적한 탓에, 트위터 내에서 이 설전에 대한 관심이 높은 편이었다.], 마녀사냥을 그만하라는 의미로 [[https://twitter.com/poetone78/status/965692582637453312|자신의 손목에 남아 있는 흉터를 공개]]하기까지 했다.[* 박진성 시인이 카톡 대화 전문 공개 등을 요구하는 것에 대해, [[탁수정]]이 이에 대해 자살 시도까지 비꼬는 투로 그러면 병원 영수증을 내놓으라는 식으로 공격하자 2월 28일엔 병원 의무기록지를 공개했다(저 공격을 하기 전에 탁수정과 탁수정을 지지하는 측이 그의 자살 시도에 대해 부정적으로 반응하고 있었기 때문에 단순히 공개하라고 해서 한 것이라기보다는, 이에 대해 더 이상 공격하지 말라는 의미로 굳이 공개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 말하자면 최후의 카드였던 셈.). 이후 그녀는 자신은 떳떳하니까 전문 공개하려면 하라고는 했으나 병원 의무기록지를 공개한 것 자체에 대해서는 별 다른 반응을 하지 않았다.] 2018년 4월 11일에는 [[https://twitter.com/poetone78/status/983915291196342273|다시 자해를 시도]]하기까지 했다. 여전히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는 중으로 [[리스트컷 증후군]]도 의심해볼 수 있는 상황. 이 일 때문에 입원하게 된다면 자신이 진행 중인 싸움이 전부 중지되기 때문에 버티고 있었지만, 며칠 뒤에 [[당뇨병]] 악화라는 다른 이유로 한동안 입원했었다.[* 탁수정이 또 영수증을 요구할까봐 미리 공개했다. [[https://twitter.com/poetone78/status/985796927143927808|#]]]
          * 2018년 7월 13일 [[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22&aid=000328887|세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그간 21개월 동안 '[[남혐]]주의자'들에게 공격당했음을 밝히며, 자신과 같은 피해를 당한 성폭력 무고 및 남혐 피해자들을 지원하는 활동을 시작하겠다고 말했다. 아직 초기라서 개인적으로 하는 정도지만 뜻이 있는 변호사와 각계의 전문가들을 모아 연대체를 만들어 본격적으로 대응할 계획이라고.
          참고로 박 시인은 자신을 공격한 이들과 7월 현재까지 소송 중인데, 무고 피해자들을 지원하겠다는 것과 관련해 웃긴대학의 일부 회원에게 강하게 비난을 받자 정신적으로 힘들었던 건지 17일 오전에 페이스북에다 자살을 암시하는 글과 동영상을 올렸다. 다행히 지인이 이 게시물을 보고 신고해, 신고를 받은 경찰에 의해 병원에 가 안정제를 맞았다고 한다. 자세한 건 [[웃긴대학/사건 및 사고#s-6|한국 래디컬 페미니즘 동조자들의 박진성 시인 자살 유도 사건]] 참조.
          * 7월 19일에 자신이 그 최초 폭로자였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https://twitter.com/ugeWQfbFleFEVyh|'그 발언은 관심을 끌기 위해 장난삼아 한 거짓이며 죄송하다']]([[http://archive.is/hcuSe|@]])는 내용의 트윗을 올렸는데, 탁수정은 최초 폭로자에게서 이 트윗이 자신이 쓴 게 아니라는 연락을 받았다고 말한 뒤 해당 트위터 계정과 박 시인을 옹호하는 어떤 계정에 등록된 전화번호 끝자리가 박 시인의 트위터 계정에 등록된 전화번호 끝자리 04와 같다는 점을 들어 두 계정이 박 시인의 다중계정일 가능성을 제기했다.[[https://twitter.com/Bookistak/status/1020219141146341377|#]] 22일에 이 의혹에 대해 [[트페미]]들이 이야기하는 걸 본 박 시인은 한 트페미에게 최초 폭로자가 04로 끝나는 휴대폰 번호까지 개통해 조작을 하는 걸 거라고 말했는데, 그 트페미는 그가 여러 계정을 운영한다는 내용이 있는 트위터 신고 결과가 있다고 말했다.[[https://twitter.com/poetone78/status/1020861907266228226|#]] 그러자 박 시인은 여러 계정을 운영했다는 이유로 제재당한 적 없다고 말했다.[[https://twitter.com/poetone78/status/1020873415547224064|#]]
  • 백정현 . . . . 11회 일치
         ||<:> '''생년월일''' || [[1987년]] [[7월 13일]] ||
         비록 1군에서는 실망스러운 모습이었지만 9월 11일까지 2군에서 40경기에 등판해 1.69의 평균자책점과 42⅔이닝 동안 57개의 탈삼진을 기록하는 등, 전에 비해 월등히 성장한 모습을 보이면서[* 그동안 백정현은 2군에서 1점대는 커녕 3점대 평균자책점도 기록한 적이 없었다. 2007, 2011 시즌에 1점대 평균자책점을 기록한 적이 있지만 두 시즌 모두 재활로 인해 등판한 건 각각 5경기 뿐.] 9월 12일 팔꿈치 통증으로 2군으로 내려간 [[권오준]]을 대신해 1군으로 올라왔다.
         6월 16일 아침에 목욕탕을 갔다온 후 갑자기 허리 통증을 호소해 1군 엔트리에서 제외됐고, 대신 [[김현우(야구선수)|김현우]]가 올라왔다. [[이병훈(야구)|이병훈]] 해설위원 말로는 이날 목욕탕에서 자빠졌다고 한다. 6월 26일 1군에 복귀했다. 그러나 허리 부상의 여파로 밸런스가 무너진 모습을 보이면서 7월 17일 1군 엔트리에서 제외됐고, 7월 30일 1군에 복귀했다. 7월 31일 두산전에서 1이닝 2실점, 8월 10일 넥센전에서 0⅓이닝 2실점 등 2경기 연속 부진했다. 8월 13일 다시 1군 엔트리에서 제외됐고, [[권오준]]이 대신 올라왔다.
         7월 14일 롯데전 3번째 투수로 등판해 무려 '''11경기 연속 출전을 달성했다!''' ~~대전 모 팀 감독님도 이런 짓은 안 하시는데...~~ 박근홍이 부진으로 2군에 내려갔는데, 이닝 쪼개기와 좌우놀이를 즐겨 하는 코칭스태프의 성향상 팀 내 유일한 좌완 계투인 백정현이 휴식일 외에는 계속하며 등판하고 있으며 선수는 선수대로 연투에 지쳐서 성적이 떨어지고 있다.
         중간에 올스타 브레이크가 있긴 했지만 7월 19일에 또 올라와서 0.1이닝 투구수 6개를 기록하였다. 이로써 12경기 연속 등판을 달성하였다!! ~~좋은 거냐 나쁜 거냐~~
         7월 21일, 두산과의 3차전에서 7회에 또 등판. 선두타자 김재환을 김상수의 실책으로 내보냈고, 이어 폭투로 김재환을 2루에 보내며 무사 2루의 위기를 맞았다. 허나 민병헌-오재일-양의지에게 '''147km'''에 육박하는 공을 던지며 세 타자 모두를 뜬공으로 잡아내고 이닝을 무실점으로 틀어막으며 시즌 6번째 홀드를 기록해 냈다. 이후 꾸준히 필승조로 나오다 팀내 선발진 붕괴로 인해 9월 들어 선발진에 편입되었다.
         7월 19일 기아전에서는 제구가 많이 흔들리기는 했지만 위기를 적절히 막으며 5이닝 2실점을 기록했다.
         7월 26일 LG전에 등판하여 5이닝 4실점으로 꾸역투를 선보이며 겨우겨우 승리투수요건을 채웠으나 9회 심창민이 오지환에게 끝내기홈런을 맞아 승리가 날아갔다.
         [[이사만루2017]]에서는 17 백정현카드가 K.O.M으로도 나와있으며, 7월 베스트로도 있다.
  • 이소선 . . . . 11회 일치
         이소선은 1929년 12월 30일 [[경상북도]] [[대구시]] [[대구광역시]] 에서 빈농인 이성조와 김분이 사이의 1남 2녀 중 막내 딸로 태어났다. 호적에는 1930년에 올렸다.<ref name="오마이뉴스연재8">[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985085 이소선의 어린 시절, 그녀는 빈농의 둘째 딸], 오마이뉴스 연재 - 이소선 평전 <어머니의 길> (8), 2014.06.12</ref> 아버지는 "딸 아이를 보니 무릉도원에 온 것 같이 마음이 편안해 지고 아무 생각이 들지 않는다"며 이름을 소선(小仙)이라고 지었다.<ref name="경향신문기획연재2">[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901071742395&code=210000&s_code=af077 "2009 특별기획" 이소선의 80년, 살아온 이야기 (2) - 이 아이 이름은 작은 선녀], 경향신문, 2009년 1월 7일</ref> 이소선이 서너살 때 아버지 이성조는 항일 농촌 운동을 하다 일제에게 발각되어 끌려갔다.<ref name="오마이뉴스연재8" /> 이소선은 아버지가 산으로 끌려가 학살되었다고 회고하였지만<ref name="경향신문기획연재2" />, 관련 기록은 [[한국 전쟁]]을 거치며 소실되었다.<ref name="경향신문기획연재3">[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901081752445&code=210000&s_code=af077 "2009 특별기획" 이소선의 80년, 살아온 이야기 (3) - 네 살 때 멈춘 ‘아버지 기억’], 경향신문, 2009년 1월 8일</ref> 아버지가 죽은 뒤 소작할 땅마저 떼이자 가족들은 감천리에서 더 이상 살 수 없게 되었다. 어머니는 가족을 대리고 나오며 집에 불을 질렀다. 이소선은 평생 아버지가 없는 외로움을 느꼈다.<ref>[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901111829475&code=210100&s_code=af077 이소선의 80년, 살아온 이야기 (4) - 금지된 말이 된 ‘아버지], 경향신문, 2009년 1월 11일</ref> 이소선의 가족은 산 속 상엿집에 머무는 등 이곳 저곳을 전전하다 [[와룡산]] 기슭의 홀어미 집에 더부살이를 하였다.<ref>[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901141753535&code=210000&s_code=af077 이소선의 80년, 살아온 이야기 (5) - 와룡산 아래 더부살이], 경향신문, 2009년 1월 14일</ref>
         이소선은 1947년 전상수와 결혼하였다. 전상수의 아버지는 대구시 남산동에서 포목상을 하였다. 전상수는 의류 제조 공장에 다니다 [[9월 총파업]]과 [[대구 10·1 사건]]에 가담하였다. [[미군정]]과 경찰의 잔혹한 탄압으로 사건이 마무리 된 후 공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재봉틀을 마련하여 직접 옷을 만들어 팔았다. 이소선은 중매로 결혼하였고 결혼 전에야 신랑의 얼굴을 처음 보았다.<ref>[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903041805215&code=210000&s_code=af077 "2009 특별기획" 이소선의 80년, 살아온 이야기 (25) - 결혼하기 싫어 사흘 굶어], 경향신문, 2009년 2월 25일</ref> 이소선은 남편에게 그리 정이 가지 않았다. 1948년 음력 8월 24일 첫 아들 [[전태일]]을 낳았다. 전태일을 갖을 때 잉어가 구슬을 가슴에 안겨주는 태몽을 꾸었다고 한다.<ref>[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985093 "시집가기 싫어"... 아버지 산소로 도망가다], 오마이뉴스 연재 - 이소선 평전 <어머니의 길> (14), 2014.06.12</ref>
         이소선은 2011년 7월 18일 심장마비로 입원하였다. 바로 그 때까지도 이소선은 [[김진숙]]의 고공농성을 지지하기 위한 [[희망버스]]를 타고 창원으로 내려가려고 하였다. 그해 1월에는 김진숙에게 보내는 영상 편지를 통해 살아서 싸워야지 죽으면 안된다고 당부하기도 하였다. 2011년 9월 3일 이소선은 결국 회복되지 못하고 별세하였다.<ref>[http://worknworld.kctu.org/news/articleView.html?idxno=240677 이소선 어머니 3일 오전 한일병원서 별세], 노동과 세계, 2011년 9월 3일</ref> 장례는 9월 7일 유가족과 노동계를 비롯한 많은 시민이 함께 하는 가운데 민주사회장으로 치러졌으며<ref>[http://nodong.org/statement/642547 노동자의 어머니 이소선 민주사회장 장례위원회], 민주노총, 2011년 9월 4일</ref> 마석 모란공원에 있는 전태일 묘소의 뒷편에 묻혔다.<ref>[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623409 이소선, 41년 만에 아들 전태일과 함께 잠들다], 오마이뉴스, 2011년 9월 7일</ref> 이소선의 민주사회장에는 민주노총과 한국노총 모두가 장례위원으로 참여하였다.<ref>[http://labor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106263 양대 노총 “어머니 마지막 길, 노동자들이 함께”], 매일노동뉴스, 2011년 9월 6일</ref>
         * 1948년 8월 6일(음력) 장남 태일 태어남.
         * 1950년 6월 15일(음력) 차남 태삼 태어남.
         * 1954년 5월 5일(음력) 장녀 순옥 태어남.
         * 1960년 4월 15일(음력) 차녀 순덕 태어남.
         * 1979년 8월 11일 YH노동자 신민당상에서 농성, 이날 새벽 김경숙 숨짐.
         * 1987년 7월 12일 청계노조 사무실 탈환코저 진입하다 경찰한테 맞아 실신, 병원에 입원.
         * 1987년 7월 15일 청계노조 사무실 탈환함.
         * 2011년 7월 18일 심장이상으로 병원 이송.
  • 이시종 . . . . 11회 일치
         |임기 = 2010년 7월 1일 ~
         * 1995년 7월 ~ 2003년 12월: 제28·29·30대 [[충주시|충주시장]]
         * 2010년 7월 ~ : 제33대 [[충청북도지사]]
         * 2014년 7월 ~ 2015년 10월 : 제8대 [[전국시도지사협의회]] 회장
         * 2014년 7월 ~ 2018년 6월: 제34대 충청북도지사
         * 2018년 7월 ~ : 제35대 충청북도지사
         |임기 = 1981년 7월 6일 ~ 1982년 1월 22일
         |임기 = 1995년 7월 1일 ~ 2003년 12월 17일
         |임기 = 2010년 7월 1일 ~
         |임기 = 2014년 7월 25일 ~ 2015년 10월 15일
         |임기 = 2018년 7월 1일 ~ 2018년 8월 13일
  • 장헌식 . . . . 11회 일치
         '''장헌식'''(張憲植, [[1869년]] [[음력 9월 21일]] ~ [[1950년]] 양력 [[8월 20일]])은 [[대한제국]] 말기부터 [[일제 강점기]] 동안 관료를 지냈다. [[경기도]] [[용인시|용인]] 출신.<ref name="실록친일파">{{서적 인용
         [[1869년]] [[음력 9월 21일]] [[용인군]] [[현내면]](縣內面)에서 성급(成汲)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는 한문(漢文)을 수학하다가 18세 되던 해 경성으로 올라와 한성부 중서(中署) 수진방 전동(壽進坊 磚洞) 13통 11호로 주소를 옮겼다. 1935년 무렵 [[평안남도]] [[평양부]]로 이사했다가 다시 [[경성부]] 가회동(嘉會洞) 4번지로 주소를 옮기고, 정착하였다.
         1896년 7월 25일 게이오의숙 보통과를 졸업하고, [[게이오 의숙]] 고등과에 들어갔다. 당시 게이오의숙은 조선인 유학생이 급증함에 따라 조선인 특별 고등과를 설치하였다. 1897년 4월 25일 게이오의숙 고등과를 졸업하였다. [[1897년]] [[5월]]부터 [[12월]]까지 그는 [[일본 사법성]] 행정사무급재판소 병설 검사국 견습사무원이 되었다. 그는 [[게의오의숙]]을 졸업하고 사법 부문의 근대 문물을 배우기 위해 일본 사법성의 재판소 검사부에서 견습 사무원으로 일했고, [[1898년]] [[1월]]부터 [[10월]]까지는 일본 [[교토부]] [[가나가와현]] 요코하마항 지방재판소(神奈川縣 橫濱港地方裁判所) 검사국의 견습사무원으로 재직했다.
         견습사무원으로 재직하면서 그는 [[도쿄 제국대학]]에 진학, [[1898년]] [[10월]] [[도쿄 제국대학]] 법과대학교 법과에서 [[행정법]]을 전공하며 행정법 전문가로 일본 대장성 총무국에서 견습 근무했다. [[1902년]] [[7월 11일]] [[도쿄 제국대학]] 법과대학교 법과를 졸업하였다. [[1902년]] [[10월 21일]] [[도쿄 제국대학]]의 대학원에 진학했으나 [[1903년]] [[3월]] 중퇴하였다. [[1902년]] [[11월]] 그는 일본 도쿄에 있는 [[대장성]] 총무국 사무견습 겸 사무촉탁이 되었다, 같은 달 그는 대장성 사무견습 통신사(大藏省 事務見習通信事)로 발령되어 [[1903년]] [[3월]]까지 근무했다.
         8년간의 유학 생활을 마치고 [[1903년]] [[3월]] 학부의 훈령으로 귀국한 뒤로는 대한제국의 [[궁내부]]에서 주사로 관직을 시작했다. [[1904년]] [[8월]] 궁내부 어홍원 주사(宮內府御供院主事), [[10월]] [[궁내부]] 제실제도정리국 비서관(帝室制度整釐局祕書官)을 거쳐 [[1905년]] [[7월 13일]] [[일본]] 시찰 수행원의 한사람으로 선발되어 일본을 다녀왔다.
         [[1907년]] [[7월]] [[역대 한성판윤|한성부윤]](漢城府尹)으로 부임했다. [[1907년]](광무 10년) [[7월]] [[대한제국 고종|고종]]이 강제로 퇴위하였을 때는 [[훈3등]] [[팔괘장]]을 받았고, 1907년 10월 한성부민회 설립에 참여하였다. [[한성부윤]]으로 근무할 때인 [[1909년]]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살해하자 이토 추도회를 여러 차례 여는 등 [[한일 병합 조약]] 체결 이전부터 적극적인 친일파로 활동했다.
         [[1910년]] [[10월 2일]] 한일 병합 조약 체결 후에는 [[조선총독부]]에서 그를 [[평안남도]] 초대 참여관 고등관 3등(平安南道 參與官 高等官三等)에 임명하였고, 1910년 12월 27일 종5위(從五位)로 승급한 뒤 1912년 8월 1일 일한병합기념장, 1915년 11월 10일 대례기념장(大禮記念章)을 수여받았다. 1916년 3월 31일 정5위(正五位)로 승급하였다. 이후 훈3등(勳三等), [[1917년]] [[6월 12일]]에 [[충청북도]] 장관(도지사) 고등관 2등(忠淸北道 長官 高等官二等)으로 승진한 뒤 도장관이 도지사로 관직 명칭이 바뀌자 그대로 [[충청북도지사]]로 유임되었다. [[1920년]] [[7월 31일]] 훈2등(勳二等)에 올라 서보장(瑞寳章)을 하사받고 [[1920년]] [[9월 27일]] 고등관 1등(高等官一等)에 올랐다. [[1920년]] [[6월 24일]] 청주청년회 발족에 참여하였다.
         [[1921년]] [[2월 12일]] [[조선총독부]] 사무관(朝鮮總督府 事務官)이 되고, 3월 10일 종4위(從四位)로 승급하였다. [[1921년]] [[3월 18일]] 조선총독부 총독관방실(總督官房室) 행정관이 되었다. 1921년 3월 20일 칙임사무관(勅任事務官) 민정시찰관에 임명되어 4월 7일부터 6월 19일 [[평안남도]], [[평안북도]] 일대를 민정시찰하였고, [[10월 16일]]부터 [[12월 27일]]까지는 민정시찰관으로 [[함경남도]]와 [[함경북도]]를 민정시찰을 다녀왔다. 이때 그는 관용 차량이 주어졌지만 거부하고 열차와 대중교통으로 시찰을 다녔다. [[1922년]] [[2월 15일]]에는 [[전라남도]]를 [[3월 5일]]부터는 [[전라북도]]를, [[7월]]에는 [[강원도]]를 시찰다닌 뒤 [[7월 22일]] 귀환하였다. [[9월 4일]]에는 [[황해도]] 수해현장을 시찰하고 돌아왔다.
  • 김형기 (법조인) . . . . 10회 일치
         |임기 = 1984년 7월 20일 ~ 1988년 7월
         1927년 [[대구광역시]]에서 태어난 김형기는 [[경복고등학교]]와 [[서울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하고 1955년 제7회 [[고등고시]] 사법과에 합격해 1960년 대구지방법원 판사에 임용되었다. 문학과 고서화에 높은 안목을 가지고 있던 김형기는 서울형사지방법원, 서울민사지방법원, 서울고등법원 등에서 부장판사를 하다가 1981년에 임명된 서울형사지방법원장에 임명되었다. 법원장으로 재직하다가 [[김중서]]의 정년 퇴임으로 공적이 된 대법원 판사에 1984년 7월 20일 [[전두환]] 대통령에 의해 임명되었다.<ref>매일경제 1984년 7월 17일자 동아일보 1984년 7월 18일자</ref>
         * 서울형사지방법원 합의7부 재판장으로 재직하던 1972년 9월 27일에 필화사건으로 기소된 동아일보 의정부 주재기자 장봉진에게 공갈죄를 적용해 징역9월 집행유예1년을 선고하면서 [[반공법]]위반에 대해서는 "송고 시간이 급박했고 오보된 기사의 정정을 위해 노력한 점으로 보아 이적 목적을 인정할 수 없다"며 무죄를 선고했다.<ref>경향신문 1972년 9월 27일자</ref> 10월 4일 폭력행위 처벌에 관한 법률과 [[도로교통법]]위반으로 기소된 영화배우 [[박노식]]에 대해 "실형을 선고해야 마땅하나 연예계에서 차지하고 있는 위치나 반공극에 공헌한 점을 참작했다"며 징역10월 집행유예2년을 선고했다.<ref>동아일보 1972년 10월 4일자</ref> 12월 21일에 북한에서 의약업자를 하다가 귀순하여 국가보건원 직원들에게 국가시험 정답지를 20만원~100만원을 주고 빼낸 피고인 20명 중에서 1명만 무죄를 선고하고 징역1년~벌금5만원을 선고했다.<ref>경향신문 1972년 12월 21일자</ref> 1973년 5월 16일에 [[대한민국 제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서울 동대문 선거구 공화당 후보에게 사전 투표를 하여 구속된 피고인에게 징역1년6월~10월을 각각 선고했다.<ref>경향신문 1973년 5월 16일자</ref> 7월 24일에 일본에서 지내던 중에 북한 공작원에게 포섭되어 2차례 평양에서 밀봉교육을 받고 합작투자로 위장하여 국내 경제계, 군부 등에 침투하려 했던 재일교포 사와모도 산지(한국명 한삼차)에게 "사형을 선고해야 마땅하나 피고인이 일본에 귀화했고 인생의 황혼기에서 범죄사실을 모두 자백한 점 등을 참작했다"며 [[국가보안법]], [[반공법]], 간첩죄를 적용해 무기징역을 선고했다.<ref>경향신문 1973년 7월 24일자</ref><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73072400209207006&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73-07-24&officeId=00020&pageNo=7&printNo=15941&publishType=00020 동아일보 1973년 7월 24일자]</ref>
         * 서울형사지방법원 합의11부 재판장으로 재직하던 1981년 2월 4일에 문공부 종무과장으로 있으면서 해외여행의 편의, 불교계 분규 수습에 있어 선처 등을 조건으로 불교계 관계자로부터 200여만원을 받아 구속된 한영수에게 [[특가법]] 뇌물죄를 적용해 징역1년6월 집행유예3년 추징금 217만원을 선고했다.<ref>경향신문 1981년 2월 5일자</ref> 4월 11일에 1965년 8월 남파된 삼촌에게 포섭되어 입북하여 노동당에 입당하고 남파돼종로구청 세무과 직원으로 근무하면서 국가기밀 수집 등으로 간첩활동을 했던 정춘상에게 사형을 선고했다.<ref>동아일보 1981년 4월 11일자</ref>
  • 배영수 . . . . 10회 일치
         '''잃어버린 10km'''로 표현하는 그의 구속을 2009 시즌 들어서도 되찾지 않자 자신감을 잃어버렸고, 성적마저 나빠지자 결국 5월, 1승 7패의 상태에서 계투로 강등되었다. 그리고 6월 11일에는 결국 2군으로 내려갔다. 7월 초 다시 1군에 합류했지만 전혀 나아지지 않자, 결국 8월 18일에 시즌 아웃 판정을 받았다.[[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41&oid=018&aid=0002144793|#]]
         계투진에서도 다소간 불안한 모습을 보이면서 또다시 부진의 늪으로 빠지는게 아닌가 했던 배영수였지만, 여름이 되면서 구속이 오르자 반등하기 시작했다. 6월 11일 대구에서 열린 넥센과의 홈경기에서 선발 장원삼이 3이닝만에 5실점하며 조기강판되자, 4회부터 마운드에 오른 배영수는 8회까지 이닝을 책임지며 5이닝 동안 3실점의 투구내용을 보여주었다. 당시 등판에서 비록 8피안타(1피홈런)를 허용하기는 했으나, 사사구가 하나도 없으며 어느정도 살아난 구위와 날카로운 변화구로 공격적인 피칭을 하면서 효율적인 투구수로 5이닝을 책임져 준 것이 위안 삼을만한 부분이었다. 이어 6월 16일 사직에서 열린 롯데와의 원정경기에서 선발 [[이우선]]이 3이닝만에 6실점으로 무너지자, 4회부터 마운드에 오른 배영수는 3⅓이닝 동안 3탈삼진 무실점 투구내용을 보여주며 이 후 삼성으로 경기를 가져오도록 하는 중요한 역할을 해냈다. --역시 [[로나쌩 클럽]] 회원-- 이 경기로 인해 배영수는 3일 뒤인 6월 19일 대구에서 열린 한화와의 홈경기에서 선발로 복귀하여 등판했는데 5이닝 2실점의 투구내용을 보이며 괜찮은 흐름을 계속 이어나가게 된다. 3일만의 등판이었기 때문에 4회, 5회에 피안타가 늘어난 것이 아쉬운 부분이었다.
         선발진 복귀 이 후 4선발 정도의 역할로써 다소 퐁당퐁당하는 피칭을 보여주다가, 7월 15일 대구에서 열린 두산과의 선발로 나온 경기에서 [[김상수(타자)|김상수]]가 5회에만 악송구와 쉬운 땅볼타구를 잡지 못하는 클러치 실책을 두 번이나 하자 [[https://www.youtube.com/watch?v=yujwfjfTcX4|'상수야 상수야']] 이름 두 번 부르고 괜찮다고 고개 한 번 끄덕이고 다시 돌아가는 대인배적 면모를 보이기도 했다. 이 날 경기에서는 5이닝 동안 3실점(1자책)의 투구를 보이며 시즌 5승을 올리게 되었는데, 이전의 두산전 투구보다 훨씬 양호한 내용을 보여주었기에 남은 시즌의 등판에서도 좋은 모습을 보여줄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이 후 5경기의 선발 등판에서 1번의 ND와 4번의 패전을 떠안게 되는데, 8월 11일 사직 롯데전의 3이닝 7실점을 제외하면 선발로써 최소한의 역할은 해냈지만, 유난히 배영수의 선발 등판 때 상대팀 역시 에이스를 출격시키면서 타선의 지원을 --여름삼성 치고는-- 적절히 받지 못한 것이 패를 쌓게 된 부분이기도 했다. 선동열 감독은 이후 배영수를 다시 계투로써 활용하며 컨디션 조절을 하도록 했고, 8월 22일 무등에서 열린 기아와의 원정경기에서 선발 차우찬이 3⅓이닝 만에 6사사구를 남발하며 투구수가 폭발하자 다음 투수로 구원등판해 2⅔이닝 동안 4탈삼진 무실점 투구를 하며 시즌 6승을 챙겼다. 특히 전광판에 시속 146km까지 찍히기도 했다. 진짜 잃어버린 구속 10km를 드디어 찾는 것인가...!
         팀이 시리즈 전적 1승 2패로 지던 10일 11일 [[잠실 야구장]]에서 열린 [[두산 베어스]]와의 플레이오프 4차전에서 스코어 8:7로 불안한 리드를 지키고 있던 8회말 2사 3루 상황에서 7번째 투수로 등판하여 1⅓이닝 17투구수 2탈삼진 무실점 을 기록했고, 한 점차를 지키는 퍼펙트한 피칭을 보여준 배영수는 시리즈 전적 2승 2패를 만드는 중요한 세이브를 따냈다, 이 경기에서 거의 전성기급 구속인 최고 구속 '''147km/h''', 포크볼은 '''140km/h'''까지 찍어서 삼성 팬들에게 큰 감동을 안겨주었다.
         5월 말까지 벌써 5승이나 올리면서 좋은성적으로 선발진에 큰 힘을 보태주고 있었으나, 6월부터 슬슬 부진하기 시작하더니 7월 말까지 이 기간에만 승리 없이 3패를 떠안게 된다. 평균자책점도 3점대 중반에서 5점대 중반까지 상승하고 말았다. 사실 이 기간 중에 QS도 2번을 기록 했으나 5이닝을 채우지 못하고 조기강판 된 경기 또한 4번이나 되었기에 본인 입장으로서도 매우 아쉬웠을 듯 하다.
         5월 11일 NC전에서 7이닝 2실점으로 퀄리티 스타트 플러스를 기록했다. 추가로 역대 5번째 2100이닝을 달성했다. 이 역시 현역 최다. 그러나 9회말에야 김태균의 동점 투런포가 터져 노디시전.
         이후 KBO측에서 [[http://sports.naver.com/kbaseball/news/read.nhn?oid=076&aid=0003140133|부정투구가 맞으며]] 차후 적발시 엄중조치를 취하겠다고 입장을 밝혔다. 배영수는 몰랐다고 주장하지만, 이미 7월 12일 경기에서 [[http://live.sports.media.daum.net/video/kbo/322960/324897|로진백으로 2루심에게 지적받은 사실이 밝혀졌다]].
          * 배영수 아줌마,[* 현지 대구쪽의 삼성팬들이 부르는 애칭은 영수아지매.] 배영수 이모, 꽹가리 이모 등등의 별명으로 불리는 유명한 팬이 있다.[* 원래는 [[김실]]의 팬이어서 실이아줌마라고도 불렸었다.] ~~직관팬들은 시끄럽다고 싫어하는 사람도 많다~~ 항상 배영수 유니폼을 입고 와서 꽹가리를 두들기며 응원하는 중년 여성으로 예전에는 [[김실]]을 응원하셨으며, 이 후에는 아들이 배영수와 동갑이라서 배영수를 응원했다고 한다. 삼성팬들에게 워낙 유명인사였던 지라 2014년 7월 29일 경기에서는 삼성 구단에서 이 배영수 이모를 시구자로 선정하기도 했다.[[http://sports.news.naver.com/sports/index.nhn?category=kbo&ctg=news&mod=read&office_id=111&article_id=0000388502|#]] 하지만 이 날 경기는 [[차우찬]]이 [[차르봄바|핵폭발]] 하면서 패배... 이 분은 배영수 이적 후 [[김상수(타자)|김상수]]로 갈아타셨다고 한다. ~~이젠 상수아지매~~
  • 서유리 . . . . 10회 일치
         2016년 7월 1일 ~ 15일까지, [[괴리성 밀리언 아서]]와 콜라보레이션을 했는데, 이벤트 페이지 제목 옆의 깨알같은 '열파참'부터 시작해서, 대문짝만한 '파이어 웨이브 블래스트[* 번역하면 '열파참'...]'까지... [[https://twitter.com/yuri_voice/status/748471284871237633|이에 대한 서유리의 반응은... ]]
         2017년 7월 경부터 [[삼성전자]]의 인공지능 소프트웨어 [[빅스비]]보이스의 안내음성을 맡았다. 그러나 정작 본인의 스마트폰은 [[갤럭시 S7]]이라 [[갤럭시 S8]]에 탑재되는 빅스비를 쓰지 못한다고... [[https://twitter.com/yuri_voice/status/887607114205609985|#]] 그리고 나중에 갤8을 샀다.
          * 2015년 7월에 [[위너]]의 [[송민호]]의 논란이 된 힙합 가사(산부인과처럼 다 벌려)를 보고 비판하는 트윗을 올렸는데 일부 송민호 팬들과 꼴마초 들에게 [[http://m.entertain.naver.com/ranking/read?oid=015&aid=0003380279&rankingType=memo&rankingDate=20150713|악플 세례]]를 받았다. 서유리는 송민호의 사진도 실명도 게재하지 않았는데 사진까지 올리며 저격했다는 허황된 내용에 오히려 악플러들이 역풍을 맞는 중. 대부분의 누리꾼들은''' '정말 일반적인 사고와 상식선에서 너무 나간 것 아닌가''''라는 서유리의 말에 동의했고, '''대한산부인과의사회에서 송민호에게 직접 비판 성명문을 발표'''하는 등 서유리가 소신 있게 문제점을 지적한 것이 옳았음이 증명되었다. 자세한 사항은 [[송민호 산부인과 비하 가사 논란]] 참조
          * [[마이 리틀 텔레비전/방영 목록/MLT-06~MLT-10#s-3.4|마리텔 7월 18일자 TV 방송분]]에서 [[김영만(교수)|김영만]] 선생님이 종이접기 하는 모습을 세트장 밖에서 기웃거리면서 잠깐 봤다.[* 자막에는 '그 시절 자란 미스 마리테도 기웃'이라 썼다.] 그리고 잠깐 웃기도 했을 정도. 서유리가 3~4살이던 해에 김영만 선생님이 처음 TV에 모습을 드러냈으니 그녀 역시 어린 시절은 김영만 선생님과 함께한 셈.
          * 현장토크쇼 TAXI 2015년 8월 11일편에 홍수아와 같이 게스트로 나왔는데 취미가 [[코스프레]][* 고향인 대구 지역을 중심으로 로즈마리, 아이비라는 코스튬플레이어와 레인이라는 팀을 결성해서 활동하였으며 그 당시 네임드 코스튬플레이어 중 한명이였다.]뿐만 아니라 [[구체관절인형]] 수집이란다.
         그리고 라이엇 게임사에서 2012년 7월 6일 8시부터 11시까지 서유리와 롤 GM들이 팀을 이루어 유저들과 경기를 하는 이벤트를 마련했다.[[http://leagueoflegends.co.kr/News/notice_view.php?idx=62806&vnum=394&page=1&keyfield=&keyword=|이벤트 페이지]] 이를 [[http://leagueoflegends.co.kr/News/notice_view.php?idx=62921&vnum=397&page=1&keyfield=&keyword=|아프리카TV로 방송]]하고 있는데 본방은 가득 차고 중계방이 네 곳이나 돌아갈 정도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이때 꽤 흥했는지 7월 16일부터 8월 27일까지 라이엇 주체로 열린 '서유리와 룬테라의 여기는 섬머 캠프'를 진행하게 되었다.[[http://leagueoflegends.co.kr/News/notice_view.php?idx=65925|이벤트 페이지]]
         7월 20일에 [[롤갤]]에 [[http://gall.dcgame.in/list.php?id=leagueoflegends&no=3636210|롤 관련 일로 처음 돈을 받아 롤갤 정모를 이끌 뻔 했으나]] [[http://gall.dcgame.in/list.php?id=leagueoflegends&no=3636578|기프티콘 증정으로 변경했다.]]
         [[2013년]] [[7월 16일]] 오후 11시경 경기도 분당 서현역 부근에서 교통사고를 당했다. 이 사고로 서유리는 목과 허리 등을 심하게 다쳤고 에어백이 터지면서 팔에 화상도 입었다. 하지만 스케줄로 인해 입원 치료를 하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그런데 상태가 악화돼 19일 다시 병원을 찾을 예정이라고 한다. 하지만 20일에 방영된 SNL 코리아 20화에 문제없이 출연했다.
         2016년 1월 11일 본인이 본인의 차를 긁어먹는 접촉사고를 냈다. 그후 보험회사 직원과 나눈 문자를 트위터에 공개했는데 ' 다친곳 없냐'는 보험회사 직원의 말에 ' 전혀요, 마음이 아프죠 돈 나가서' 라는 대답이 눈에 띈다. 하지만 몇몇 사람들은 이 글이 피해자와 나눈 대화라 오해해 (애초에 혼자 낸 교통사고였음에도) 일부 커뮤니티에선 서유리와 관련된 루머들이 줄을 잇게 된다 .
  • 이시영(배우) . . . . 10회 일치
         2013년 7월 중순경에는 황금어장 - 무릎팍도사 이시영편에 출연해 여러 토크를 풀어놓았다. 그중 우결 촬영당시 프라모델에 관한 언급이 있었는데 전부 본인 소장품에 본인 집에서 직접 촬영한 것이라고. 프라모델을 다른 집으로 옮겨 촬영해야 한다는 말에 그냥 자기네 집에서 하자고 제안했다고 한다. 덕분에 출연료 외에 장소사용료도 쏠쏠하게 받았다고 한다. 이때 성형과 복싱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했는데, 주변에서는 성형한 얼굴인데 복싱을 해도 괜찮냐고 많이 물어보지만 정작 본인은 성형한 얼굴로 10년을 살아서 자기가 성형수술을 했다는 사실도 까먹고 살고 있었단다. 가족에 대한 이야기도 했는데, 아무래도 딸이라서인지 복싱을 시작하고 처음으로 패배했을 때 '이제는 그만 두겠지'하는 마음에 부모님이 파티를 벌였다고 한다.
         2017년 7월 13일 [[속도위반|임신]] 4개월이라 밝히며 9월에 결혼한다는 소식을 전했다. [[http://m.entertain.naver.com/read?oid=108&aid=0002629502&gid=999339&cid=1066270|#]]
         2012년 7월 7일 제42회 서울시장배 아마추어복싱대회 겸 제93회 전국체육대회 서울시 복싱대표 선발전에서 여자부 48kg 급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다만, 해당 체급에 출전 선수는 3명뿐이었다는 점에서, 빈약한 여자 복싱의 상황을 엿볼수 있다. 어쨌든, 두명의 선수를 각각 준결승에서 20-0, 결승에서 21-7 이라는 큰 점수 차이로 이기며 우승을 차지했다. 이 대회는 이름 그대로 [[전국체육대회]](전국체전) 서울시 복싱대표 선발전을 겸하고 있기 때문에, 우승시 전국체전에 나갈수 있는 자격이 부여되어야 하는데, 출전이 불투명하다고 한다. 그 이유는 전국체전에 여자부 48kg 급이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 대회의 51kg 급 우승자와 평가전을 추진하여 전국체전 출전권을 노릴 예정이라고 하지만, 어떻게 될지는 미지수. [[http://m.sports.naver.com/general/news/read.nhn?oid=109&aid=0002377618|관련기사]] 전국체전에는 출전할 계획이 없다고 한다. 한국체대 소속의 국가대표 선수와 대전할 만한 수준은 아니기 때문이라고 한다. [[http://m.sports.naver.com/general/news/read.nhn?oid=382&aid=0000053399|관련기사]]
         2012년 7월 26일 제33회 회장배전국복싱대회 에서 여자부 48Kg 급에서 '''우승'''했다. 참고로 이 체급의 출전 선수는 6명 --이시영 외 나머지 5명이 여고생이라는 것은 넘어가자.-- 대진 뽑기운은 없는지 3전을 치뤄야 했고, 모두 승리하며 우승했다.
         2012년 12월 7~11일 제66회 전국아마추어복싱선수권대회 겸 2013 국가대표 1차선발대회 에 여자부 48kg 급에 출전했다. 같은 체급의 출전 선수는 5명인데, 대진 뽑기운은 정말 없는지 부전승 없이 3전을 치룬다. [* 출전 선수가 5명이므로 3명은 부전승으로 바로 준결승행이지만, 나머지 2명은 한 경기 더 치뤄야 하는데 그 2명중 1명에 걸렸다.] 12월 7일 1차전에서 18-16으로 승리했고, 12월 10일 준결승에서는 7-1로 승리했다. 12월 11일 결승전에서는 박초롱 선수에게 4-10으로 판정패 하면서, '''준우승'''을 차지했다. 공식전 첫패배이며 현재까지 공식전적은 9전 8승 1패. 국가 대표 선발은 1차전 1,2위, 2차전 1,2위가 크로스토너먼트를 통해서 이루어지며, 이시영은 2위 자격으로 국가대표 최종 선발전에 진출하게 됐다. [[http://www.yonhapnews.co.kr/sports/2012/12/11/1007000000AKR20121211108251007.HTML|관련기사]]
         7월 1일 이시영과 소속사는 이는 '''사실무근'''이고 루머로 인해 이시영의 명예가 훼손됐다며 최초의 루머 유포자를 처벌해 달라며 형사고발했다. 검찰은 이에 즉시 수사에 착수했다. [[http://m.entertain.naver.com/read?oid=003&aid=0006612507&gid=999339&cid=1004159|관련기사]]
         7월 2일 이시영과 소속사는 '''공식입장'''을 발표했다. [[http://m.entertain.naver.com/read?oid=109&aid=0003103320&gid=999339&cid=1004169|공식전문]]
         7월 24일 검찰은 전/현직 기자, 국회의원 보좌관, 대기업 직원 등 찌라시 유포자들을 대상으로 압수수색을 벌였다. 최초 유포자에 상당히 근접했다는 해석이 나오고 있다.[[http://news.jtbc.joins.com/html/051/NB10976051.html|관련기사]]
         7월 25일 검찰은 동영상을 정밀 감식한 결과 '''동영상의 주인공은 이시영이 아니라고 결론''' 내렸다. 또한, 최초 유포자는 계속 수사 중이며 카톡을 지우는 등 증거 인멸 정황이 포착되었다고 말했다. [[http://news.jtbc.joins.com/html/605/NB10974605.html|관련기사]]
  • 정인욱 . . . . 10회 일치
         [[5월 3일]]에 1군에 올라온 적이 있으나, 2군에서도 한창 안 좋았을 때니 잘할리가 만무했다. 4일만에 경산행. 2군에서도 6점대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할 정도로 고전하면서 잔류군(3군)으로 강등되기도 하고, [[중간계투]]로 보직이 바뀌기도 했다. [[중간계투]]로서 그럭저럭 좋은 모습을 보여 다시 선발로 복귀했고, 점점 좋아져 7월 1달 동안은 4경기에 선발로 등판해 24이닝 동안 4실점(3자책)을 기록했다. [[8월 2일]] [[차우찬]] 대신 1군으로 올라와 [[중간계투]]로 합류했다.
         원래 개막전 엔트리에서는 빠졌다가 4월 3일 선발 투수로 내정되면서 당일날 1군 엔트리에 포함됐다. 그런데 막상 경기는 비 때문에 취소됐다. 4월 5일 [[콜린 벨레스터]]가 볼질 끝에 강판된 후 두 번째 투수로 등판해 3⅓이닝 5피안타 3실점을 했다. 벨레스터보다는 그나마 나았지만 구속이나 제구 모두 시범경기 때와 별반 달라진 게 없었다. 4월 9일에는 선발 투수로 등판했으나 투구수가 많아 2⅔이닝 6피안타 2실점을 기록하고 강판됐다. [[장원삼]]의 부상으로 인해 불과 사흘밖에 쉬지 못하고 나오긴 했지만 투구 내용만 보면 대량 실점하지 않은 게 다행이었을 정도. 4월 11일 1군 엔트리에서 제외됐다. 원래라면 한참이나 2군에 머물러야 했겠지만 [[차우찬]]의 부상으로 4월 22일 kt전 선발로 내정되면서 1군에 복귀했다. 9일날 경기와 별반 다를 것 없이, 3⅓이닝 5실점을 기록하면서 패전투수가 됐다. 4월 23일 [[권오준]], [[조현근]]과 함께 1군 엔트리에서 제외됐다.
         [[김현욱(야구)|김현욱]] BB 아크 코치와 함께 투구폼 개조에 나서면서 5월 11일에서야 2군 경기에 등판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투구폼 적응 문제인지 그냥 실력이 퇴화하는 것인지 3경기에 등판해 6⅔이닝 ERA 12.15로 그야말로 처참한 성적을 기록했다. 21일 SK 2군전에서는 선발로 등판해 '''1⅔이닝 7실점'''을 기록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5월 25일 [[안규현]]과 함께 1군에 등록됐다.
         다시 3군에서 가다듬다가 1군에서 제외된지 거의 2달만인 7월 26일 한화 2군전에 선발로 등판해 4⅓이닝 1실점을 기록했다. [[앤서니 레나도]]의 시즌 아웃과 이에 따른 대체 선발 후보였던 [[김기태(1987)|김기태]][* 허리디스크 수술 후 재활하다 7월 30일 SK 2군전에 선발 등판했는데 2이닝 4실점을 했다.]와 [[최지광]][* 허리 통증에서 복귀한 7월 25일 한화 2군전에서는 2⅓이닝 무실점을 기록했지만 7월 31일 롯데 2군전에서는 2이닝 4실점을 기록했다.]이 부진하면서 8월 2일 두산전 선발 투수로 내정됐다.
         7월 1일 다시 1군에 등록돼 6일 두산전에서 등판했다.
         7월 24일 공을 맞고 부상으로 내려간 이승현을 대신해 6이닝 2아웃 때 올라왔다. 유강남을 포수 플라이 아웃으로 처리. 마지막 9회에도 등판, 만루 위기를 맞았지만 두 타자를 모두 잡아내면서 2 1/3이닝 무실점을 달성했다. 특히 8회에는 145km정도의 직구와 130km 후반대의 스트라이크존에서 살짝 떨어지는 슬라이더로 삼진을 2개나 잡으며 마치 11년 커리어하이 시절을 보여주는듯 했다.
         7월 29일 KIA전 7:1로 앞선 8회 1사에 올라와 5타자를 모두 범타 처리하고 경기를 끝냈다. 팀은 13:1로 승리.
  • 정칠성 . . . . 10회 일치
         정칠성은 정종명, 오수덕 등과 함께 종래의 소극적 여성운동을 극복하고자 여성해방단체조직에 착수하였다.<ref name="dispose"/> 당시 여성의 사회활동이란 생소한 것이었기에, 정칠성은 일반 부인을 대상으로 직접 회원모집에 나섰다.<ref name="dispose"/> 이후 그는 각지의 순회강연과 칼럼, 기고를 통해 여성 계몽운동에 나섰고, 경성에서 다른 여성단체의 일을 보면서도 [[1925년]] [[3월]]까지 대구여자청년회 집행위원을 겸직하였다. [[1924년]] [[7월 20일]] [[조선여성동우회]] 집행위원으로, 인천노동총동맹회 상무위원(仁川勞働總同盟會常務委員)에 선출, 겸임하였다. 또한 대구여자청년회 집행위원 일도 겸하였다.
         [[1926년]] [[7월 7일]] [[경성]]의 [[동아청년회]] 창립에 참여하고 회원이 되었다. 1927년 다시 귀국하여 [[1927년]] [[2월]] [[신간회]]에 창립발기인으로 참여하여 [[신간회]]의 창립멤버가 되었다. 곧 [[신간회]] 경성지회 조직에도 참여하여, [[신간회]] 경성지회 중앙위원과 신간회 중앙위원회 위원의 한 사람이 되었다. 한편으로 그는 여성단체 조직에 착수하였다.
         정칠성은 근우회 제1회 창립준비위원회에서 회원모집의 업무를 맡았고, 이후 근우회 창립대회에서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다.<ref name="dispose"/> 창립대회장에서 정칠성은 "여자의 날(당시 4월16일) 제정기념으로 시위를 하자" 는 의견을 내었으나 감시중이던 일본경관들의 저지로 시행할 수 없었다.<ref name="dispose"/> [[5월 27일]] [[근우회]] 선전조직부 위원, [[5월 29일]] [[근우회]] 중앙집행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27년]] [[7월]] [[근우회]] 중앙집행위원장이 되었다.
         그해 7월 근우회(槿友會) 중앙집행위원장이 되었다. [[1927년]] [[7월 15일]] [[근우회]]에서 매월 15일을 선전홍보일로 정하였고, 그날 경성 각지 선전위원을 선출할 때 그는 근우회 종로4정목(鍾路四丁目) 담당 선전위원이 되었다.
         [[9월]]에는 경상남북도 출신으로 구성된 영남친목회(嶺南親睦會)가 구성되자 정칠성은 지방열과 지방 감정을 조장할 우려가 있다 하여 반대하였다. [[9월 11일]] 정칠성은 이원혁(李源赫) 등 74명과 공동 명의로 지역 친목회 조직 반대에 서명하였다. [[9월 14일]] [[동아일보]]사 [[송진우 (정치인)|송진우]] 사장의 초빙으로 [[동아일보]] 주최 동복편물강습대회의 강사로 참여하였다.
         [[7월 7일]] [[경성부]] 도화동예배당에서 열린 동아청년회 2주년 기념식에서 '노동청년의 할일'이라는 주제로 강연하였다.
         그는 근우회 본부요원으로 7월 16일부터 18일까지 3일간 개최된 근우회 임시전국대회 행사를 주관하였다. [[7월 16일]] 경성부 경운동 천도교회관에서 열린 근우회 임시전국대회에서 유각경, 황신덕 등과 함께 대의원자격심사위원에 선출되었다. [[7월 17일]]에는 근우회 집행위원의 한 사람에 선출되었다.
  • 태종무열왕 . . . . 10회 일치
         |사망일 = [[661년]] 음력 6월 향년 59세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 [[603년]]~[[661년]] [[음력 6월]])은 [[신라]](新羅)의 제29대 [[임금]](<small>재위:</small> [[654년]]~[[661년]])이다. '''무열왕'''(武烈王)으로 불리기도 한다.
         당에도 즉위를 알리는 사신을 파견하여, 무열왕 즉위년에 [[당 고종|고종]](高宗)으로부터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 · 신라왕의 책봉을 받았으며,<ref name="신라-654"/> 무열왕 2년(655년)에 당에 사신을 보내어, 고구려가 백제와 말갈과 더불어 군사를 연합하여 신라의 북쪽 변경의 33개 성을 탈취하였음을 전하면서 구원을 요청하였고, 당은 3월, 영주도독(營州都督) [[정명진]](程名振)과 좌우위중랑장(左右衛中郞將) [[소정방]](蘇定方)을 보내어 고구려를 공격하였다.<ref name="신라-655"/> 또한 무열왕 3년([[656년]])에는 {{출처|날짜=2018-06-30|1=신라의 개국 공신인 사로 6촌장을 왕으로 추존하였고,}} 당에서 귀국한 김인문을 [[군주]](軍主)로 삼았으며, 가을 7월에는 김문왕을 다시 당에 보내 조공하게 하였다.<ref name="신라-656">《삼국사기》 권제5 신라본기 제5 태종 무열왕 3년(656)</ref> 귀국한 뒤 문왕은 무열왕 5년([[658년]]) 정월에 부왕으로부터 집사부의 [[중시]](中侍)로 임명되고,<ref name="신라-658">《삼국사기》 권제5 신라본기 제5 태종 무열왕 5년(658)</ref> 김인문도 무열왕 6년([[659년]]) 여름 4월에 백제를 치기 위한 원병 파병을 요청하는 사신으로서 당에 파견되는 등,<ref name="신라-659">《삼국사기》 권제5 신라본기 제5 태종 무열왕 6년(659)</ref> 친족 중심의 내각을 구성하여 왕권을 안정시켰다. 즉위에 절대적으로 기여한 김유신에 대해서는 무열왕 7년([[660년]]) 정월에 [[상대등]](上大等)으로 임명해<ref name="신라-660">《삼국사기》 권제5 신라본기 제5 태종 무열왕 7년(660)</ref> 왕권을 보다 전제화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었다.
         무열왕 7년([[660년]]) 3월, 신라의 요청을 받아들인 당은 좌무위대장군(左武衛大將軍) 신구도행군대총관(神丘道行軍大摠管) 소정방과 좌효위장군(左驍衛將軍) 유백영(劉伯英) 등이 인솔한 수륙 13만 군사를 파병하였다. 원병을 요청하러 보낸 김인문은 소정방이 이끄는 신구도행군의 부대총관(副大摠管) 자격으로 귀국하였고, 무열왕에게도 우이도행군총관(嵎夷道行軍總管)이라는 지위가 더해졌다.<ref name="신라-660"/> 무열왕은 바다를 건너온 당군을 영접하기 위해 [[5월 26일]], 대장군 [[김유신]]과 [[김진주 (신라)|김진주]](金眞珠){{.cw}}김천존(金天存) 등과 함께 5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서라벌을 출발하여 [[6월 18일]]에 남천정(南川停)<ref group="주">신라 10정(十停) 중 하나로, 현재 [[경기도]] [[이천시]]에 있던 부대</ref>에 이르렀고, 21일에 태자 김법민을 보내 병선(兵船) 1백 척을 거느리고 [[덕적도|덕물도]](德物島)에서 소정방을 맞아, [[7월 10일]]에 백제의 [[사비성]](泗沘城) 앞에서 합류하기로 약속을 정했다. 당군과 함께 백제를 공격할 5만 신라군의 지휘는 태자 김법민과 대장군 김유신, 장군 [[김품일|김품일]](金品日)과 [[김흠순|김흠춘]](金欽春) 등이 맡고, 왕은 금돌성(今突城)에서 머물렀다.<ref name="신라-660"/>
         [[7월 9일]]에 김유신 등이 이끄는 신라군이 [[황산벌 전투|황산벌]]에서 백제군을 격파하고, 당군도 백제군의 저지를 뚫고 [[기벌포 해전|기벌포]]로 상륙하여, [[7월 13일]]에 사비성이 함락되고, [[7월 18일]]에는 웅진성으로 도망쳤던 [[의자왕]]도 항복하여 백제는 멸망하였다.<ref name="신라-660"/> 사비성을 함락했을 때 [[김법민]]은 백제의 왕자 [[부여융]](扶餘隆)을 말 앞에 꿇어 앉히고 얼굴에 침을 뱉으며 “예전에 네놈의 아비가 내 누이를 억울하게 죽여 옥중에 묻었고 그 일 때문에 내가 20년 동안 마음 아프고 골치를 앓았었는데, 오늘 너의 목숨은 내 손 안에 있구나!”라고 꾸짖었다.<ref name="신라-660"/> 의자왕의 항복 소식을 듣고 29일에 금돌성에서 소부리성(所夫里城)으로 온 무열왕은 제감(弟監) 천복(天福)을 당에 보내 승리한 사실을 고하였다. 8월 2일에는 앞서 대야성이 백제에 함락될 때 신라측에서 내응했던 모척(毛尺)과 검일(黔日)을 잡아 처형하고, 주연(酒宴)을 베풀어 장병들을 위로하였다. 이때 의자왕과 그 아들 융(隆)을 마룻바닥에 앉혀 놓고 때로 의자왕에게 술을 따르게 하니, 백제의 여러 신하들 중 목메어 울지 않는 자가 없었다.<ref name="신라-660"/>
         무열왕 8년([[661년]]) 음력 6월 59세로 사망하였다. 시호(諡號)를 무열(武烈)이라 하고, 영경사(永敬寺)의 북쪽에 장사를 지냈으며, 묘호(廟號)를 올려서 태종(太宗)이라고 하였다. [[당 고종]]은 무열왕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낙성문(洛城門)에서 애도식을 거행하였다.<ref name="신라-661"/>
         [[남북국 시대]]론을 지지하였으며 《조선상고사감》을 저술하기도 했던 [[안재홍]]도 [[신라]]가 당을 끌어들여 [[백제]]와 [[고구려]]를 멸한 것은 [[평양]]이나 [[관북]] 일대를 비롯한 대부분의 북방 영토를 방기한 데다 당의 명령을 빌어 외세의 힘을 이용한 [[신라]]의 행동에서 후세 역사에 등장한 소위 '[[사대주의]]'의 대부분이 여기서 비롯되었다고 평하였다.<ref>"新羅가 唐을 聯하야 麗濟를 깨뜨리매 渤海가 北方에서 再興하야 비록 南北朝 200년의 歷史를 나타내엇스나 分裂의 形勢는 드듸어 나흘 수가 업섯고 朝鮮의 勢力은 더욱 減殺됨이 잇섯다. 金庚信이 太宗 武烈王을 도아 統三의 業을 이루엇다 하지마는 당시의 記錄은 平壤이 오히려 茂草를 悲嘆하엿고 關北의 地 太半 荒廢하엿슴을 전하엿다. 하물며 唐의 誥命을 빌고 그의 節度에 應하는 등 外力을 이용하는 後世 所謂 事大政策은 이때부터 大部이나 作俑된 觀이 만타." 1926년 7월 1일자 〈[[개벽 (잡지)|개벽]]〉 제71호 「한양조 5백년 총평(漢陽朝五百年總評)」</ref>
         [[백제]]의 영토를 흡수하고 [[한반도]]의 중남부 지역을 차지하게 된 신라는 후대의 한반도 통일국가인 [[고려]], [[조선]]의 모태가 되었기 때문에 7세기 말에 신라인들이 사용했던 '삼한일통'이나 '삼국통일'과 같은 말은 [[19세기]]까지 별 거부감 없이 받아들여져 계속 쓰였다.<ref>박노자, [http://legacy.h21.hani.co.kr/section-021163000/2008/07/021163000200807160719009.html 신라는 민족의 배신자인가]. 《한겨레21》 제719호 (2008년07월16일)</ref>
  • 현이와 덕이 . . . . 10회 일치
         * 2014년 7월 7일 신인가수 [[김나영 (가수)|김나영]], [[이은하]]와 KBS 2TV 월화드라마 [[트로트의 연인]] OST 참여 : 장덕 작곡 · [[이은하]] 노래 <미소를 띄우며 나를 보낸 그 모습처럼> [[리메이크]] 수록
         * 2014년 7월 <[[MBN]] [[TV]] [[아궁이]]> - 파란만장 가족사 ; 현이와 덕이
         1977년 4월 고등학교 1학년의 장덕은 명보극장에서 개봉된 임원식 [[감독]]의 [[영화]] <[[내 마음 나도 몰라]]>에서 [[주연]]으로 출연한다. 장덕은 몇몇 영화에서 단역을 맡아 본 적은 있었지만 주연으로 출연한 것은 이 영화가 처음이었다. 한달 뒤(5월) 장덕이 어머니와 함께 살던 때 이사로 인해 집들이에 참석한 가수 [[송창식 (가수)|송창식]]은 장덕이 중학교 2학년(만 14세) 때 작사 · 작곡한 <[[소녀와 가로등]]> 을 [[장현]]이 기타 연주와 함께 노래를 불러주자 감탄을 하며 이후 서울국제가요제에 출품할 것을 적극 권한다. 결국 [[송창식]]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장덕은 <[[소녀와 가로등]]>을 곧 데뷔하게 되는 신인가수 [[진미령]]에게 주며 [[작사]] · [[작곡가]]로서 제1회 [[MBC]] [[MBC 서울국제가요제|서울가요제]](제 2회 대회부터는 [[MBC 서울국제가요제|서울가요제]]에서 [[MBC 서울국제가요제|서울국제가요제]]로 이름이 바뀐다.)에 출전한다. 당시 가요제 규정상 작곡가도 가수가 함께 무대를 꾸며야 했기 때문에 장덕은 빵모자를 눌러 쓴 깜찍한 모습으로 나와서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는 진풍경을 연출하였고 많은 사랑을 받게 된다(입상). 같은 해 7월 명보극장에서 개봉한 박태원 [[감독]]의 [[영화]] <[[선생님 안녕]]>에서 [[장현]]은 [[임예진]]과 함께 주연으로 출연하였다. 이 영화는 삼각관계가 얽힌 영화로 비록 단역이지만 장덕 또한 [[장현]]의 동생 역으로 출연하였다. 현이와 덕이는 이 영화에서 [[사운드트랙]] <정말>도 싣게 된다.
         1978년 4월 장덕은 1970년대 하이틴 [[영화]]의 붐을 주도했던 세 명의 명[[감독]] [[김응천]] · [[석래명]] · [[문여송]]이 모여 [[옴니버스]] 형식으로 만든 [[영화]] <[[우리들의 고교시대]]> 제1화에서 다시 [[주연]]으로 출연, 음악을 전공하는 청순한 여고생 역을 맡아 열연하며 하이틴 [[스타]]로 거듭난다. 당시 그녀는 자신을 짝사랑한 팬들에게 다섯 번씩이나 납치를 당했을 정도로 대단한 큰 인기를 누렸다. 가는 곳마다 밀려든 팬들의 사인 요청이 이어졌다(10여 편의 [[영화]]에 [[주연]] 또는 [[조연]]으로 출연). 그 해 7월 장덕은 제1회 [[MBC]] [[MBC 서울국제가요제|서울국제가요제]]에서 오빠 [[장현]]이 부른 <더욱 큰 사랑>의 [[작사]]/[[작곡가]]로서 출전, 2년 연속 [[MBC]] [[MBC 서울국제가요제|서울국제가요제]]에서 입상하게 된다. 이 시기 오빠 장현은 오라오라에 출연했을 때 부터 알게 된 부산연예협회지부장이자 왕년의 작사가였던 천봉의 딸 천인실과 극도로 가까워지면서 결혼까지 하게 되고 아이까지 갖게 된다. 그리고 장덕은 결혼한 오빠의 집에서 같이 살게 된다. (1978년 [[현이와덕이]] 정규1집 <[[순진한 아이]]>가 발표 되었다. <[[순진한 아이]]>, <꼬마인형>, <일기장>, <[[소녀와 가로등]]>, <정말>, <작은소녀의 사랑 이야기> 등 11곡+경음악1곡 수록, 같은 해 <크리스마스 캐롤집> 발표)
         1983년 10월 이혼을 하게 된 장덕은 가수 생활의 추억, 그리고 아버지 · 오빠 · 친구에 대한 그리움 등으로 고국에 대한 향수병에 걸려서 어머니에게 말 한마디도 하지 않은 채 메모 한장만을 남기고 한국으로 귀국해 한남동에서 자취생활을 시작한다. <ref>[http://www.mbn.co.kr/pages/vod/programContents.php?progCode=613&menuCode=3439 아궁이 65회 - 파란만장 가족사] "MBN 2014년 7월 11일 방송 참조"</ref> 그리고 한달 뒤(11월) 그녀는 어렵게 서라벌레코드와 3년간 1000만원이라는 금액에 전속계약을 맺고(그녀는 오랫동안 공백을 가진 스타였기 때문에 좋은 조건으로는 계약이 쉽지 않았다.) 타이틀곡 <날 찾지 말아요>를 비롯 <안녕히 계세요>, <가을에 만난 소녀>, <철없는 안녕> 등의 곡들이 수록된 정규 1집 《[[날 찾지 말아요]]》를 발표한다. 그리고 이 앨범에서 <날 찾지 말아요>가 발표한 지 6달 만에 PCI(인기가요순위 조사연구소) 집계 한 달(1984년 5월) 동안 방송을 가장 많이 탄 노래 부문 3까지 오른다. 많은 방송활동을 하지 않는 장덕으로서는 좋은 결과였다. 하지만 그녀 본인이 당시 방송을 꺼려한 탓인 지는 몰라도 방송을 가장 많이 탄 가수 부문에서는 순위에 오르지 못하게 된다. 이사이(1984년 2월) 장덕은 새 음반을 내는 자매듀엣 국보자매에게 <백치미>, <사랑하고 있나봐요>를 작사/작곡하여 주기도 한다. 그리고 국보자매는 현이와 덕이, 그리고 장덕에 의해 각각 발표된 바 있는 <끝없는 마음이야>, <첫사랑>까지도 리메이크 하여 자신들의 새 음반에 수록한다.
         1987년 7월 장덕은 타이틀곡 <이런게 아니었는데>를 비롯 <이별인줄 알았어요>, <이 노래를 들을때면> 등의 곡들이 수록된 정규 4집《[[이런게 아니었는데]]》를 발표한다. 이 앨범은 두봉엔터프라이즈를 통해 발매되었으며 재킷에 <골든앨범1집>이란 타이틀이 표기되어 발매되었다. 이 앨범에서는 <이별인줄 알았어요>가 가요톱10 등 가요 순위에 오르며 좋은 반응을 얻었다. (이 시기 장덕의 오빠 장현도 타이틀곡 <마지막 진실>을 비롯 <연민>, <어느날>, <만날 수 없는 사랑> 등의 곡들이 수록된 솔로 데뷔 음반 《마지막 진실》을 발표하게 된다. 수록곡들은 대부분 장덕 작사/작곡의 곡들로 채워져 있어 장덕이 오빠 장현을 위해 만든 앨범으로도 여겨진다.) 9월 장덕은 [[말레이시아]]에서 열린 제 3회 [[ABU]](아시아 태평양 방송연합) 가요제에 한국 대표로 참가하게 되는데, 당시 불렀던 노래 <너를 기다릴거야>는 1989년 발매된 장덕의 정규 6집 《[[예정된 시간을 위해]]》에 재편곡되어 수록되게 된다.
         오빠 장현이 설암으로 쓰러지고 가수활동을 중단하며 오빠의 병간호를 하던 장덕은 점점 수면제 없이는 잠을 이루지 못하며 심한 우울증에 시달리게 된다. 1990년 1월 21일 장덕은 모처럼 가요 프로그램 [[토요일 토요일은 즐거워]]에 출연하는데 이것이 장덕이 대중 앞에 선 마지막 모습이었다. 1990년 2월 4일 오전 3시 마포구 염리동 진주아파트 2동 1008호 안방에서 장덕은 다량의 수면제와 기관지 확장제 등 세가지 약을 일시에 복용, 이상증세를 보이며 신음 중이었는데, 이것을 본 의상 담당 문인옥씨가 발견하고 장덕의 아버지에게 연락, 서대문 고려병원으로 옮겼으나 상승작용에 의한 쇼크로 장덕은 세상을 떠나고 만다. 향년 28세였다. 문인옥씨에 따르면 장덕은 불면증을 겪고 있었다고 한다. 당시 경찰은 장덕이 설암으로 시한부 인생을 살고있는 오빠 장현의 병간호를 오래 해왔으며 최근 이은하 · 조영남 · 최진희 · 변진섭 · 김승진 · 하춘화 등 동료 가수들에게 곡 의뢰를 받고 신곡 작업까지 하는 등 빽빽한 일정으로 무리를 해왔다는 주변의 진술에 따라 과로와 감기증세 때문에 과다복용한 약이 부작용을 일으켜 숨진 것으로 판명했다.<ref>이상열 앵커 [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90/1830767_13421.html 가수 장덕, 수면제 과용으로 사망], 《[[MBC 뉴스데스크]]》, 1990년 2월 4일 작성, 1990년 2월 4일 확인.</ref> 하지만 수면제 과다 복용으로 알려진 그녀의 죽음에 대해 충격과 더불어 자살설까지 나돌며 세간의 관심이 불거졌다. 이후 그녀의 유작 앨범은 자신의 운명을 예언한 것이라는 소문과 함께 호기심을 증폭시켰다. 동생 장덕이 세상을 떠나자 장현은 인터뷰에서 "동생의 죽음이 자신을 대신하는 것 같은 죄책감이 앞선다"고 고백했다. 봉천동 자택에서 거행된 영결식은 가수 이태원의 사회로 남궁옥분 등 50여명의 동료 가수들의 오열 속에 진행되었다. 그 해 6월 장덕 · 장현 남매의 매니저로서 그들이 죽는 날 까지 항상 함께 했던 김철한의 기획하에 [[전영록]], [[이선희]], [[김범룡]], [[박혜성]], [[최성수]], [[진미령]], [[임종환]], 위일청, 지예, 양하영, [[임지훈]] 등 11명의 동료가수들이 참여한 장덕 추모앨범 《[[예정된 시간을 위하여]]》가 발표된다. 이 음반은 장덕이 생전 발표한 기존 곡들을 리메이크 하고 있는 형태이지만 <일어나> 등 악보로만 남아있던 미발표곡들도 수록되어 있으며 동명 타이틀곡 <예정된 시간을 위하여>는 1990년 한해 총결산 가요순위 톱10 안에 들게 된다. 설암으로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던 [[장현]]은 7월 중순경 병세가 악화돼 경기도 성남시 성남병원으로 병원으로 옮겨졌고 혼수상태에서 인공호흡으로 연명했지만 8월 16일 오후 4시 20분경 11살난 아들 원이를 남겨둔 채 어머니가 지켜 보는 앞에서 향년 34세의 젊은 나이로 별세하고 말았다.<ref>{{웹 인용 |url = http://www.etoday.co.kr/news/section/newsview.php?idxno=704533|제목 = ‘불후의 명곡’ 고 장덕 추모 특집…요절한 가수 장덕은 누구?|저자 = 이투데이|날짜 = 2013년 3월 16일|확인날짜 = 2013년 4월 14일}}</ref> 남매의 연이은 비극적 죽음을 접한 대중의 충격은 너무나 컸다.
         * 2014년 7월 7일 신인가수 [[김나영 (가수)|김나영]], [[이은하]]와 KBS 2TV 월화드라마 [[트로트의 연인]] OST 참여 : 장덕 작곡 · [[이은하]] 노래 <미소를 띄우며 나를 보낸 그 모습처럼> [[리메이크]] 수록
         * 2014년 7월 <[[MBN]] [[TV]] [[아궁이]]> - 파란만장 가족사 ; 현이와 덕이
  • 경주시 . . . . 8회 일치
         |align="center"|[[1936년]] [[7월 23일]]
         |align="center"|[[1974년]] [[7월 22일]]
         |align="center"|[[1980년]] [[7월 23일]]
         |align="center"|[[1974년]] [[7월 7일]]
         |align="center"|[[1959년]] [[7월 28일]]
         |align="center"|[[1950년]] [[7월 14일]]
         |align="center"|[[1944년]] [[8월 11일]]
         |align="center"|[[1989년]] [[7월 22일]]
  • 손승락 . . . . 8회 일치
         ||<:> '''등장곡''' || [[나다]] - King pin (Feat. [[쿤타]], [[던밀스]])~~19금 노래다~~[* 2018년 5월 1일부터 [[KBO리그 응원가 저작권 사태]]의 일환으로 개인 등장곡을 틀지 않기로 했는데 7월부터 치어리더의 공연 형식으로 노래를 튼다.] ||
         그의 최고의 무기는 최고 152km/h, 평균 146km/h에 달하는 빠른공이다. 주 변화구는 평속 140km/h에 컨디션이 좋으면 140km/h 중반대까지 나오는 커터와 130km/h중반에서 140km/h 초반까지 구속이 나오는 슬라이더다. 포크볼도 간간히 던졌으나 거의 쓰지 읺았으나 2018년 5월말에 부진을 하고 2군에 내려갔다 온 이후부터는 본격적으로 던지고 있다. 그리고 7월 부터는 포크볼 외에 커브도 섞어던진다.
         7월 3일 목동 야구장에서 열린 한화 이글스와의 경기에서 4대2로 앞선 9회초에 등판했다. 오선진과 정범모는 삼진으로, 이대수는 뜬공으로 처리했다. 시즌 17번째 세이브.
         7월 11일 문학 야구장에서 열린 SK 와이번스와의 경기에서 7대2로 크게 앞선 9회초 1사 이후에 등판하여, 김재현은 유격수 앞 땅볼로, 정근우를 3루수 라인드라이브로 처리했다. 비 때문에 오랫동안 등판할 수 없어서 몸 상태 점검 차원에서 마운드에 올렸는데, 공을 3개밖에 못 던졌다.(…)
         7월 17일 목동 야구장에서 열린 롯데 자이언츠와의 경기에서 6대3으로 앞선 9회초에 등판했다. 이승화는 3루수 앞 땅볼, 황재균은 삼진, 정훈은 삼진으로 처리했다. 시즌 18번째 세이브.
         7월 19일 목동 야구장에서 열린 롯데 자이언츠와의 경기에서 5대3으로 앞선 8회초 2사 이후에 등판했다. 황재균은 뜬공, 박준서는 2루수 앞 땅볼, 이승화는 뜬공, 전준우는 3루수 앞 땅볼로 처리하면서 세이브를 기록했다. 시즌 19번째 세이브.
         2016년 7월 29일 수원 [[KT 위즈|kt]] 원정 당시 연패 중이던 팀 분위기를 무시하고 [[윤길현]]과 새벽까지 나가 놀았던 것을 같은 숙소에 자리잡은 팬이 보았고, 심지어 그 팬과 배달 음식 때문에 실랑이를 벌였다는 주장이 나왔다. 선수가 시킨 음식과 팬이 시킨 음식 둘 다 1층 로비에 있었는데 손승락과 윤길현이 팬의 음식을 자신의 것으로 잘못 알고 들고 갔고, 팬이 이를 알리자 "우리 층으로 오라"라는 적반하장식의 반응을 보였던데다 이후 내려와서도 무례한 행동을 했다는 것. [[http://gall.dcinside.com/board/view/?id=giants_new1&no=3703421&page=1&exception_mode=recommend|당시 썰]]. 당시 사진까지 첨부되어 있어 신빙성이 매우 높은 썰로 이 사실이 알려지자 팬들은 [[http://gall.dcinside.com/board/view/?id=giants_new1&no=3703613&page=1&exception_mode=recommend|500원 듀오]]라고 부르며[* 팬이 시킨 음식은 4만 500원 짜리였고 자신들이 시킨 음식은 4만 원 짜리여서 500원 더 냈다는 말을 팬에게 수 차례 했다고 한다.] 매우 큰 실망을 안겼다. 이는 [[http://sports.news.naver.com/kbaseball/news/read.nhn?oid=081&aid=0002743161|족발 게이트]]로 회자되고 있다.
  • 윤덕주 (농구인) . . . . 8회 일치
         '''윤덕주'''(尹德珠, [[1921년]] [[6월 23일]] - [[2005년]] [[7월 8일]])는 [[일제 강점기]]와 대한민국의 [[농구]] 선수이자, 대한체육협회 부회장, 명예회장을 역임했다. 구한말의 계몽 운동가 [[윤필오]]의 손녀이자, [[남조선과도입법위원회]] 의원 [[윤홍열]]의 딸이다. 4,5대 국회의원과 재무부 차관, [[호남정유]]사장을 지낸 [[서정귀]]의 부인이다.
         * [[1998년]] [[7월 16일]] 대한체육회 후원회 창립발기인<ref>[http://sports.news.naver.com/sports/index.nhn?category=sports_general&ctg=news&mod=read&office_id=001&article_id=0004285725 대한체육회 후원회 28일 창립]</ref>
         * [[1999년]] [[2월 11일]] [[대한농구협회]] 명예회장<ref>[http://sports.news.naver.com/sports/index.nhn?category=kbl&ctg=news&mod=read&office_id=001&article_id=0004425319 대한농구협회, 최희암감독 사면 복권]</ref>
         * [[2005년]] [[7월 8일]] 사망
         * 할아버지 : [[윤필오]](尹弼五, [[1860년]] [[음력 9월 10일]] ~ [[1924년]] 양력 [[3월 30일]])
         *** 외당숙모 : [[권기옥]](權基玉, [[1901년]] [[1월 11일]] ~ [[1988년]] [[4월 19일]], '''이상정'''(李相定)의 부인. 여성 비행사, [[대한독립군]] [[대령]])
         * [[1996년]] [[7월]] 올림픽훈장
         * [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20050709010117330060022 윤덕주 농구協 명예회장 별세] 문화일보 2005년 07월 09일자
  • 이선희 . . . . 8회 일치
         '''이선희'''(李仙姬, [[1964년]] [[12월 14일]]([[1964년]] [[음력 11월 11일]]) ~ )는 [[대한민국]]의 [[가수]] 겸 [[작사가]]이고 [[작곡가]]이다.
         * [[7월 29일]] 제5회 [[MBC 강변가요제]] 대상 수상 ('J에게')
         * [[3월]] ~ [[7월]] '알고 싶어요' TV가이드 뮤직박스, DJ연합회 등 상반기 최고 인기가요 선정, MBC RADIO 총 15주 1위
         * [[7월]] [7집 앨범] '그대가 나를 사랑하신다면' 출반 (서울음반)
         * [[8월 11일]] [내 여자친구는 구미호 OST Part.1] '여우비' 발매
         ** [[5월 11일]] [[KBS]] 《[[가요톱텐]]》 1위
         ** [[2월 11일]] [[KBS]] 《[[가요톱텐]]》 1위
  • 효령대군 . . . . 8회 일치
         '''효령대군'''(孝寧大君, [[1396년]] [[1월 6일]] ([[음력]] [[1395년]] [[12월 11일]]) ~ [[1486년]] [[6월 12일]]([[음력 5월 11일]]))은 [[조선]]시대 전기의 [[왕자]], [[왕족]], [[서예|서예가]], [[정치가]]이다.
         [[1395년]] [[음력 12월 11일]]에 태어나 92세의 천수를 다하고 [[1486년]](성종 17, 丙午年) [[음력 5월 11일]]에 세상을 떠났다. 현재의 [[서울특별시]] [[서초구]] 방배동에 예장되었다. 묘소는 [[1972년]]에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12호로 지정되었다. 현 사당은 [[1736년]](영조 12)에 왕명으로 효령대군 묘 앞에 처음 세우면서 '청권사'라고 하였다.
  • 김보름 . . . . 7회 일치
         2009년 2월 10일 탄천종합운동장빙상장에서 열린 제90회 전국동계체육대회 1500m에서 김보름(정화여고 1학년)은 2분35초64로 5위를 차지했다.<ref>{{웹 인용|url=http://result.sports.or.kr/sk/schedule_result.jsp?classCd=2&toCd=200902&detailClassCd=04&rhCd=9&page=16&gameDate=&baseClassName=1500M&rhName=%EA%B2%B0%EC%8A%B9&kindCd=08&kindNm=%EC%97%AC%EC%9E%90%EA%B3%A0%EB%93%B1%EB%B6%80&pcntGbn=I&useGbn=|제목=정보제공 _ 대한빙상경기연맹|확인날짜=2017-04-04}}</ref> 11일 열린 3000m에서는 김보름이 6분19초03으로 동메달을 차지했다.<ref>{{웹 인용|url=http://result.sports.or.kr/sk/schedule_result.jsp?classCd=2&toCd=200902&detailClassCd=05&rhCd=9&page=16&gameDate=&baseClassName=3000M&rhName=%EA%B2%B0%EC%8A%B9&kindCd=08&kindNm=%EC%97%AC%EC%9E%90%EA%B3%A0%EB%93%B1%EB%B6%80&pcntGbn=I&useGbn=|제목=정보제공 _ 대한빙상경기연맹|확인날짜=2017-04-04}}</ref>
         2011년 11월 18일 러시아 첼랴빈스크에서 열린 2011-2012 국제빙상경기연맹 스피드스케이팅월드컵 1차 대회 3000m 디비전B에서 김보름은 4분12초38로 2위를 차지했다. 19일 열린 1500m 디비전B에서는 김보름이 2분01초39로 4위를 차지했다. 20일 열린 팀추월에서는 이주연, 노선영, 김보름이 3분05초79로 4위를 차지했다. 2011년 11월 25일 카자흐스탄 아스타나에서 열린 2차 대회 3000m 디비전A에서 김보름은 4분13초61로 20위를 차지했다. 26일 열린 1500m 디비전A에서는 김보름이 2분02초58로 20위를 차지했다.<ref name=":24" /> 27일 열린 매스스타트에서는 김보름(한국체대)이 7분26초85의 기록으로 첫 동메달을 따냈다.<ref>{{뉴스 인용|url=http://news.sbs.co.kr/news/endPage.do?news_id=N1001033550|제목=이승훈, 매스스타트 금메달|날짜=2011-11-28|뉴스=SBS NEWS|언어=ko|확인날짜=2017-03-06}}</ref> 2011년 12월 2일 네덜란드 히렌빈에서 열린 월드컵 3차 대회 5000m 디비전B에서 김보름은 7분26초10으로 12위를 차지했다. 3일 열린 1500m 디비전B에서는 김보름이 2분01초39로 5위를 차지했다.<ref name=":24" /> 4일 열린 팀추월에서는 이주연(동두천시청)-노선영(한국체대)-김보름으로 구성된 대표팀이 3분03초18의 기록으로 캐나다(3분00초01)와 러시아(3분02초38)에 이어 3위에 올랐다. 한국 스피드스케이팅이 월드컵 시리즈 팀 추월에서 메달을 딴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ref name=":17">{{웹 인용|url=http://m.yeongnam.com/jsp/view.jsp?depth1=3&depth2=4&nkey=20111206.010260719320001|제목=한국 빙속 팀추월 사상 첫 메달|성=영남일보|확인날짜=2017-03-06}}</ref> 2012년 2월 12일 노르웨이 하마르에서 끝난 월드컵 5차 대회 팀추월 경기에서 이주연(25)과 노선영(23), 김보름(18)이 출전하여 3분05초65의 기록으로 폴란드(3분05초57)에 이어 동메달을 차지했다. 3000m에 출전한 김보름은 4분15초66의 기록으로 16위에 머물렀다.<ref name=":2">{{뉴스 인용|url=http://www.icenews.co.kr/entry/%EB%B9%99%EC%86%8D-%EC%9B%94%EB%93%9C%EC%BB%B5-5%EC%B0%A8%EB%8C%80%ED%9A%8C-%ED%8C%80-%EC%B6%94%EC%9B%94-%EB%82%A8%EB%85%80-%E9%8A%80-%E9%8A%85|제목=빙속 월드컵 5차대회, 팀 추월 남녀 銀, 銅|날짜=2012-02-13|뉴스=아이스뉴스|확인날짜=2017-03-06}}</ref> 1500m 디비전A에서는 김보름이 2분00초24로 10위를 기록했다. 디비전B에서는 이주연(동두천시청)과 노선영(한체대)이 각각 1위(2분01초53)와 3위(2분01초82)를 차지했다.<ref>{{뉴스 인용|url=http://www.icenews.co.kr/entry/%EC%9D%B4%EC%8A%B9%ED%9B%88-%EB%B9%99%EC%86%8D%EC%9B%94%EB%93%9C%EC%BB%B5-5000m-13%EC%9C%84-%EA%B9%80%EB%B3%B4%EB%A6%84-%EC%97%AC%EC%9E%90%EB%B6%80-1500m-10%EC%9C%84|제목=이승훈 '빙속월드컵' 5000m 13위... 김보름 여자부 1500m 10위|날짜=2012-02-12|뉴스=아이스뉴스|확인날짜=2017-03-11}}</ref> 2012년 3월 10일 독일 베를린에서 열린 월드컵 파이널 1500m에서 김보름은 1분59초52로 12위를 차지하며 73점 22위로 시즌을 마쳤다. 11일 열린 매스스타트에서는 김보름이 8분53초69로 7위를 차지하며 110점 7위로 시즌을 마쳤다. 팀추월에서는 김보름, 이주연, 노선영이 3분03초29로 은메달을 차지하며 320점 3위로 시즌을 마쳤다.<ref name=":24" />
         2016년 2월 11일 러시아 콜롬나에서 열린 2016 국제빙상경기연맹 종목별스피드스케이팅세계선수권대회 3000m에서 김보름은 4분08초14로 7위를 차지했다.<ref name=":24" /> 14일 열린 매스스타트에서는 김보름(강원도청)이 8분17초66을 기록, 우승을 차지한 캐나다의 이바니 블롱댕(8분17초53)에 0.13초 차로 뒤져 금메달을 내주고 은메달을 차지했다. 김보름은 레이스 중반까지 치고 나가지 않고 기회를 엿봤다. 마지막 1바퀴를 남기고 스피드를 낸 김보름은 5위에 올랐다. 마지막 코너에서 막판 스퍼트에 나선 김보름은 앞선 세 명의 선수를 제치고 블롱댕에 이어 2위로 결승선을 통과하며 은메달을 확정했다. 함께 나선 박도영(동두천시청)은 12위를 기록했다.<ref name=":21" />
         2016년 11월 11일 중국 하얼빈에서 열린 2016-2017 국제빙상경기연맹 스피드스케이팅월드컵 1차 대회 3000m 디비전B에서 김보름은 4분12초21로 3위를 차지했다.<ref name=":24" /> 12일 열린 팀추월에서 이승훈과 김보름이 힘을 보탠 남녀 팀추월 대표팀이 동메달을 나란히 수확했다. 13일 열린 매스스타트에서는 이승훈이 남자부 금메달, 김보름이 여자부 동메달을 목에 걸며 메달 사냥의 본격적인 시동을 걸었다.<ref>{{뉴스 인용|url=http://d.kbs.co.kr/news/view.do?ncd=3380743|제목=이승훈·김보름, 매스스타트서 ‘맹활약’|뉴스=KBS 뉴스|언어=ko|확인날짜=2017-03-27}}</ref> 2016년 11월 18일 일본 나가노에서 열린 월드컵 2차 대회 3000m 디비전A에서 김보름은 4분05초91로 16명 가운데 6위에 올랐다. 자신의 최고 기록(4분04초62)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2016년 11월 11일 중국 하얼빈에서 열린 월드컵 1차 대회 디비전B에서 세운 4분12초21보다 6초30 빨랐다. 우승은 체코의 마르티나 사블리코바가 4분03초56으로 차지했다. 그 뒤는 안토이네트 데 용(네덜란드-4분04초53), 안나 유라코바(러시아-4분05초24)가 이었다. 3000m 디비전B의 박지우(의정부여고)는 4분18초88로 20명 가운데 16위에 자리했다.<ref>{{웹 인용|url=http://www.msn.com/ko-kr/news/sports/%EB%B9%99%EC%83%81-%EA%B9%80%EB%B3%B4%EB%A6%84-%EC%8A%A4%ED%94%BC%EB%93%9C%EC%8A%A4%EC%BC%80%EC%9D%B4%ED%8C%85-2%EC%B0%A8-%EC%9B%94%EB%93%9C%EC%BB%B5-%EF%A6%81-3000m-6%EC%9C%84/ar-AAkrY2E|제목=[빙상] 김보름, 스피드스케이팅 2차 월드컵 女 3000m 6위|확인날짜=2017-03-27}}</ref> 19일 열린 팀추월 결승에서는 대한민국(노선영, 김보름, 박지우)이 3분05초01로 5위를 차지했다. 20일 김보름은 박지우와 함께 23명이 출전한 매스스타트 결승에서 8분15초02의 기록으로 가장 먼저 골인하면서 금메달을 획득하였고 박지우는 8분22초85로 18위를 기록했다. 1500m 디비전B에서는 김보름이 1분59초65로 2위에 올랐고 박지우는 2분01초89로 16위를 차지했다.<ref>{{뉴스 인용|url=http://m.blog.naver.com/ufo5405/220866296406|제목=김보름 매스스타트 금메달(2016~2017 ISU 스피드스케이팅 월드컵 2차 대회)|뉴스=네이버 블로그 {{!}} 자유 평화 사랑|언어=ko|확인날짜=2017-03-27}}</ref> 2016년 12월 2일 카자흐스탄 아스타나에서 열린 월드컵 3차 대회 3000m 디비전A에서 김보름은 4분10초61로 14위를 차지했다. 3일 열린 팀추월에서는 박지우, 노선영, 김보름이 3분04초62로 6위를 차지했다.<ref name=":24" /> 5일 열린 매스스타트에서는 김보름이 8분29초51로 결승선을 통과하며 2차 대회 우승자인 캐나다의 이바니 블롱댕(8분29초28)과 일본의 다카기 나나(8분29초46)에 이어 3위를 차지했다. 이번 대회에서 랭킹 포인트 70점을 획득한 김보름은 총점 240점으로 블롱댕(랭킹포인트 280점)에 이어 월드컵 랭킹 2위를 유지했다.<ref>{{뉴스 인용|url=http://mn.kbs.co.kr/news/view.do?ncd=3388523|제목=이승훈·김보름, 3차 대회 매스스타트 동메달|뉴스=KBS 뉴스|언어=ko|확인날짜=2017-03-27}}</ref> 2016년 12월 9일 네덜란드 헤렌벤에서 벌어진 월드컵 4차 대회 팀추월에서 박지우, 노선영, 김보름은 3분06초42로 7위를 차지했다. 10일 열린 1500m 디비전A에서는 김보름이 2분00초71로 19위를 차지했다.<ref name=":24" /> 10일 열린 매스스타트에서 김보름은 8분31초73의 기록으로 이린 쇼우텐(네덜란드)을 0.09초 차로 제치고 정상에 올랐다. 이로써 김보름은 일본 나가노에서 열렸던 2차 대회에 이어 시즌 월드컵 시리즈에서 두번째 금메달을 차지하며 월드컵 랭킹 점수에서도 340점을 확보, 이바니 블롱댕(캐나다, 308점)을 제치고 선두로 올라섰다. 중국 하얼빈에서 열린 1차 대회와 카자흐스탄 아스타나에서 열린 3차 대회에서 금메달, 2차 대회에서 은메달을 차지했던 블롱댕은 8분33초59로 10위로 밀려나면서 4회 연속 메달 사냥에 실패하고 김보름에게 월드컵 랭킹 선두 자리를 내줬다. 함께 김보름과 매스스타트에 출전한 박지우(의정부여고)는 8분41초67의 기록으로 14위에 올랐다. 박지우는 3차 대회 13위에 이어 4차 대회에서도 줄곧 중위권을 유지하며 월드컵랭킹 52점으로 18위로 올라섰다.<ref>{{뉴스 인용|url=http://m.sportsq.co.kr/news/articleView.html?idxno=215576|제목=김보름 매스스타트 '동-금-동-금 행진', 이젠 당당한 평창 우승 후보|날짜=2016-12-11|언어=ko|확인날짜=2017-03-27}}</ref> 11일 열린 5000m 디비전A에서 7분17초89로 12위를 차지했다.<ref name=":24" /> 2017년 3월 12일 노르웨이 스타방에르에서 열린 월드컵 파이널 매스스타트에서 김보름은 8분45초75의 기록으로 결승선을 통과해 네덜란드의 이린 쇼우턴(8분45초69)에 단 0.06초 뒤지는 2위에 그쳤다. 3위는 이탈리아의 프란체스카 롤로브리기다(8분45초78)가 차지했다. 매스스타트 랭킹 포인트 120점을 획득한 김보름은 합계 460점으로 364점의 롤로브리기다를 여유 있게 제치고 시즌 1위 자리를 지켜냈다.<ref>{{뉴스 인용|url=http://news1.kr/articles/?2934262|제목=[빙속] ISU 월드컵 파이널 매스스타트 이승훈金-김보름銀|날짜=2017-03-13|뉴스=뉴스1|언어=ko|확인날짜=2017-03-31}}</ref>
         11월 11일 네덜란드 헤이렌베인 티알프 인도어 아이스링크에서 열린 2017-2018 국제빙상경기연맹 스피드스케이팅 월드컵 1차 대회 팀추월에 출전한 김보름(강원도청), 박지우(한국체대), 노선영(콜핑팀)은 3분2초66으로 5위에 올랐다. 다카기 미호, 다카기 나나, 사토 아야노로 구성된 일본 대표팀은 2분55초77의 세계신기록을 수립하며 우승을 차지했다.<ref>{{뉴스 인용|url=http://news.joins.com/article/22105384|제목=日 빙속 女추월팀, 평창 앞두고 '무서운 질주'…ISU 월드컵서 '세계新' 우승|날짜=2017-11-11|뉴스=중앙일보|언어=ko|확인날짜=2017-12-12}}</ref> 여자 매스스타트 예선에서 김보름은 넘어져 결승 진출에 실패했다.<ref>{{뉴스 인용|url=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7/11/12/0200000000AKR20171112002800007.HTML|제목=빙속 이승훈, 월드컵 매스스타트 금메달…대회 2관왕(종합)|성=김경윤|날짜=2017-11-12|뉴스=연합뉴스|언어=ko|확인날짜=2017-12-12}}</ref> 노르웨이에서 개최되는 2차대회에 김보름은 출전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김보름은 1차대회 1일차 매스스타트 준결승 경기 도중 다른 선수의 스키이트 날에 걸려 넘어 졌으며, 경기 후 허리에 통증을 느껴 1차대회 다른 경기 출전도 포기했었다.<ref>{{뉴스 인용|url=http://www.xn--q20b51t9le1sh.com/sub_read.html?uid=19371§ion=sc51|제목=[전남방송] 스피드 김보름 선수, 월드컵 2차대회 출전 포기|뉴스=전남방송|확인날짜=2017-12-12}}</ref> 12월 2일 캐나다 캘거리에서 열린 3차대회 여자 3,000m 디비전A(1부리그)에서 김보름은 4분06초41의 기록으로 16명의 출전 선수 가운데 14위를 차지했다. 3,000m에서는 다카기 미호(일본)가 3분57초09의 일본 신기록으로 우승했다.<ref>{{뉴스 인용|url=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7/12/02/0200000000AKR20171202034500007.HTML|제목=김보름, 스피드스케이팅 월드컵 3차 대회 3,000m 14위|성=이영호|날짜=2017-12-02|뉴스=연합뉴스|언어=ko|확인날짜=2017-12-12}}</ref> 4일 열린 여자부 매스스타트에 나선 김보름은 11위에 그치면서 메달을 따내지 못했다. 김보름은 경기 초반 후미 그룹에서 기회를 엿보다가 6바퀴를 남기고 속도를 끌어올렸지만 먼저 치고 나간 선두 그룹을 다라잡지 못했다. 하위권에서 막판 스퍼트를 노렸지만 이미 선두권과 격차가 너무 벌여져 결국 11위의 성적표를 받았다. 하편, 독일의 백전노장인 45세의 플라우디아 페히슈타인(독일)은 매스스타트에서 깜짝 우승을 차지했다.<ref>{{뉴스 인용|url=http://www.hankookilbo.com/v/49929a51806c4912ad5ee75e37e3b0d5|제목=이승훈ㆍ김보름, 월드컵 매스스타트에서 동반 부진|뉴스=한국일보|언어=ko|확인날짜=2017-12-12}}</ref> 12월 10일 미국 솔트레이크시티 유타 올림픽 오벌에서 열린 4차 대회 매스스타트에서 9분00초72의 기록으로 3위를 기록했다. 일치감치 선두그룹을 만들어 질주한 프란테스카 롤로브리지다(이탈리아)가 8분 53초49로 금메달, 중국의 궈단이 8분57초54로 은베달을 목에 걸었다.<ref>{{웹 인용|url=http://sports.chosun.com/news/utype.htm?id=201712110100073520005174&ServiceDate=20171210|제목='컨디션 회복'김보름 월드컵 4차 대회 매스스타트 동메달: 스포츠조선|확인날짜=2017-12-12}}</ref>
  • 김성민 (1994년) . . . . 7회 일치
         [[대구옥산초등학교]]와 [[경복중학교]]를 거쳐 [[대구상원고등학교]]에 입학했다. [[제66회 청룡기 전국고교야구 선수권대회|2011년 청룡기]]에서 당시 고등학교 2학년이었던 그는 3승, 평균자책점 0을 기록하며 팀의 우승을 이끌었고, 대회 MVP에 선정되었다.<ref>[http://sports.news.naver.com/general/news/read.nhn?oid=109&aid=0002239733 청룡기 MVP 김성민, "류현진 같은 선수 되고 싶다"], 《OSEN》, 2011년 8월 11일.</ref> 이러한 활약을 기반으로 고교야구 아시아 시리즈 대표에 선정되었고 [[2012년 한국프로야구 신인 드래프트|2012년 신인 드래프트]]에서 [[NC 다이노스]]의 특별지명 선수로도 거론됐다.<ref>[http://sports.news.naver.com/general/news/read.nhn?oid=008&aid=0002694959 성탄절, 고교야구아시아시리즈와 함께...일본·대만과 격돌], 《머니투데이》, 2011년 12월 21일.</ref> 이러한 활약을 기반으로 국외 스카우트들도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였고 [[2012년]] [[1월 31일]] 계약금 55만 달러를 받고 [[볼티모어 오리올스]]와 마이너 리그 계약을 체결하였다.<ref>[http://sports.news.naver.com/general/news/read.nhn?oid=001&aid=0005489936 고교 2학년 선수, 미국프로야구 입단 논란], 《연합뉴스》, 2012년 1월 31일.</ref>
         이 과정에서 엄청난 논란이 발생하였는데 [[볼티모어 오리올스]]가 그와 계약을 맺는 과정에서 [[KBO (야구)|KBO]]에 신분조회를 요청하지 않아 [[KBO (야구)|KBO]]에서도 그의 계약을 몰랐다. 왜냐하면 고등학교를 졸업하지 않은 선수와의 계약은 금지였기 때문이었다. 2001년 7월에 개정된 한·미 선수계약협정서에는 메이저 리그 구단이 선수를 영입할 때는 신분 조회 절차를 밟아야 한다고 명시되어 있고 고등학교를 졸업하지 않은 선수와의 접촉도 불가능했다. 이러한 비난 속에서 [[일구회]]는 [[2월 2일]]에 [[볼티모어 오리올스]]의 행동을 규탄하는 성명을 발표하였고,<ref>[http://sports.news.naver.com/general/news/read.nhn?oid=018&aid=0002553523 일구회, MLB 무분별 스카우트 규탄 성명], 《이데일리》, 2012년 2월 2일.</ref> [[2월 8일]]에는 [[대한야구협회]]에서 상벌위원회를 열고 그에게 무기한 자격 정지 처분이라는 중징계를 내렸고 이어 [[2월 9일]]에는 [[볼티모어 오리올스]] 스카우트의 경기장 출입금지 조치를 내렸다.<ref>[http://sports.news.naver.com/general/news/read.nhn?oid=396&aid=0000007832 야구협회, MLB 볼티모어 입단 김성민 무기한 자격정지 중징계], 《스포츠월드》, 2012년 2월 8일.</ref><ref>[http://sports.news.naver.com/general/news/read.nhn?oid=018&aid=0002557063 대한야구협회, 볼티모어 스카우트 출입금지 조치], 《이데일리》, 2012년 2월 9일.</ref> 이러한 과정에서 볼티모어의 단장인 [[댄 듀켓]]은 그와의 계약이 문제가 없다고 항변하였고 그도 인터뷰를 통해 '본인의 인생을 건 선택'이라고 언급하며 실력으로 모든 걸 이겨내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ref>[http://sports.news.naver.com/general/news/read.nhn?oid=111&aid=0000268235 볼티모어 단장 "김성민 계약 뭐가 문제냐?"], 《조이뉴스24》, 2012년 2월 3일.</ref><ref>[http://sports.news.naver.com/wbaseball/news/read.nhn?oid=382&aid=0000031009 <nowiki>[단독인터뷰]</nowiki> 미국 진출 논란 김성민 “내 인생을 건 선택”], 《스포츠동아》, 2012년 2월 9일.</ref>
         이후 [[KBO (야구)|KBO]]가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MLB]] 측에 공식적인 항의 서신을 보내자 [[볼티모어 오리올스]]에서도 이러한 규정 위반에 대해 공식 사과문을 발표하였고 [[2월 15일]]에는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MLB]] 사무국에서 [[볼티모어 오리올스]]에 벌금 징계를 부과하였고 그와의 계약을 30일 간 잠정적으로 승인하지 않겠다고 밝혔다.<ref>[http://sports.news.naver.com/general/news/read.nhn?oid=382&aid=0000031426 美볼티모어 부사장 “김성민 계약 파문 공식 사과”], 《스포츠동아》, 2012년 2월 13일.</ref><ref>[http://sports.news.naver.com/kbaseball/news/read.nhn?oid=112&aid=0002272362 MLB 사무국, 김성민 영입 볼티모어에 벌금 징계], 《해럴드POP》, 2012년 2월 16일.</ref> 이러한 과정에서 그의 계약은 미루어졌고 결국 [[6월 12일]] [[볼티모어 오리올스]]가 그와의 계약 불발을 보도하면서 [[7월 7일]]에 공식적인 계약 포기를 선언함에 따라 그는 국제 미아가 되었다.<ref>[http://sports.news.naver.com/general/news/read.nhn?oid=076&aid=0002196271 볼티모어, 김성민 계약 위해 MLB 승인 기다려], 《스포츠조선》, 2012년 3월 23일.</ref><ref>[http://sports.news.naver.com/general/news/read.nhn?oid=109&aid=0002364872 '스카우트 파동' 김성민, 볼티모어 오리올스와 재계약 실패], 《OSEN》, 2012년 6월 13일.</ref><ref>[http://sports.news.naver.com/general/news/read.nhn?oid=109&aid=0002377999 댄 듀켓, “김성민과 계약하고 싶지 않다”], 《OSEN》, 2012년 7월 8일.</ref> 결국 한국에서의 선수 생활이 불가능해진 그는 2013년 초에 일본의 [[후쿠오카 경제대학]]에 입학하였다. <ref>[http://sports.news.naver.com/general/news/read.nhn?oid=214&aid=0000227125 고교야구 유망주 김성민 일본 대학 입학 왜?], 《MBC》, 2013년 1월 11일.</ref>
         이후 [[5월 18일]]에 당시 [[넥센 히어로즈]] 소속이었던 [[김택형]]과의 1:1 트레이드로 [[넥센 히어로즈]]로 이적하였다. 이에 관해 [[고형욱]] 단장은 이전부터 그를 지켜봐 왔다고 밝히면서 즉시 전력감으로 활용할 수 있고 컨디션과 실전 감각이 대학 시절만큼 회복된다면 더 좋은 모습을 보여줄 수 있다고 평가하였다. <ref>[http://sports.news.naver.com/general/news/read.nhn?oid=529&aid=0000001214 <nowiki>[배지헌의 브러시백]</nowiki> 넥센은 왜 김택형 대신 김성민을 택했나], 《엠스플뉴스》, 2017년 5월 18일.</ref> [[2017년]] [[5월 28일]] [[삼성 라이온즈]]와의 경기에서 데뷔 첫 선발 투수로 등판하여 4이닝 무실점을 기록했다. [[2017년]] [[7월 2일]] [[kt 위즈]]와의 경기에서 5이닝 1실점으로 승리 투수 요건을 갖췄고, 6회에도 올라왔으나 경기가 강우 콜드로 끝나면서 완투승으로 데뷔 첫 승을 기록하였다.<ref>[http://news1.kr/articles/?3036995 '김성민 데뷔 첫 승' 넥센, kt에 6회 강우콜드 승리] 《뉴스1》, 2017년 7월 2일.</ref>
  • 이장우 (1871년) . . . . 7회 일치
         [[1898년]] [[7월 10일]]부터 [[7월 11일]]까지 봉상사 주사로 근무한 경력이 있다. [[1899년]] [[7월 30일]] 대구지방대에서 대한제국 육군 보병 참위로 근무했으며 [[1903년]] [[3월 21일]] 진위(鎭衛) 제3연대 제1대대에서 복무했다. [[1903년]] [[4월 6일]]부터 [[1907년]] [[9월 3일]] [[대한제국 군대 해산]] 이전까지 육군 보병 부위(副尉)로 복무했다.
         [[1909년]] 경상농공은행 감사역으로 임명되었으며 [[대구은행]] 창립 발기인(1912년 12월)과 대구지주조합 창립위원(1913년 5월), 대구자제단 발기인(1919년 4월 7일)으로 참여했다. 대구은행 감사역(1915년)과 경일은행 감사역(1918년, 1925년 ~ 1927년), 대구주조주식회사 취체역(1919년 10월 3일 ~ 1921년), 대구상업회의소 상무위원(1919년 12월 16일)으로 근무했고 대구부 도시계획 위원회 제6부 위원(1923년 1월 30일)과 대구상업회의소 특별위원(1926년)을 역임했다. [[1918년]] 7월과 [[1920년]] 12월 대구부 협의회원으로 선출되었으며 [[1926년]] 10월과 [[1930년]] 7월 대구소년보호소에 5,000원을 기부했다.
         [[1926년]] [[9월 4일]] 경상북도 관선 도평의회원으로 선출되었으며 [[1928년]] [[8월 31일]] 일본 정부로부터 쇼와 대례 기념장을 받았다. [[1933년]] 11월 [[고려대학교|보성전문학교]] 창립 30주년 기념사업회 실행위원을 지냈으며 영남명덕회(嶺南明德會) 대구지부 부지부장(1933년), 조선농회 통상의원(1934년, 1938년 5월 18일), 경상북도농회 부회장(1934년 4월 20일, 1938년 4월 13일), 경북미곡통제연합회 부회장(1936년 11월 18일), 조선나예방협회 평의원(1938년)을 역임했다. [[1941년]] [[9월 11일]] [[조선임전보국단]] 발기인으로 참여했고 [[1943년]] [[8월 3일]]부터 [[1944년]] [[1월 16일]]까지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를 지냈다.
  • 정종원 . . . . 7회 일치
         민 씨 가문은 1957년 하반기부터 1958년 상반기까지 조흥은행 주식을 대거 처분한다.<ref>동아일보 1957년 7월 20일 3면</ref> 조흥은행에서 소수주주로 전락해버렸다. 그럼에도 불구 조선맥주은 주세체납 등으로 은행관리로 넘어가게 됐다.<ref>매일경제 1968년 7월 2일 7면 빚만 늘어가는 조선맥주</ref> 앞서 민 씨 가문은 일제 강점기 당시 조흥은행 대표취체역(대표이사)으로 [[민규식]]을 배출한 바 있다. 일본인 행장이 따로 있었고 실권은 없는 자리였다. 이어 해방 후 초대 한국인 조흥은행장은 정재학의 손자인 정운용이 맡았고 정재학의 3남인 정종원이 5대 행장을 역임했다.
         1950년대 중반 [[정재학]] 가문과 [[민영휘]] 가문의 [[조흥은행]] 최대주주 경쟁이 치열한 가운데 삼성그룹 창업주 [[이병철]]이 급부상한다. 이병철은 장내 외에서 조흥은행 주식을 대량 매수하여 무려 50%를 확보한다. 그뿐 아니라 한일은행 80%, 상업은행 30% 등 주요 시중은행 주식까지 대거 차지했다. 금융계를 독점하려는 재벌들의 치열한 경쟁이 시작된 것이다.<ref>경향신문 1982년 7월 27일 5면 삼성총수 이병철</ref> 기타 은행 지분까지 사들이며 이병철은 전체 시중은행의 주식 50%를 확보하게 된다. 그럼에도 정종원 행장은 행장 자리를 유지했다.
         이병철은 정재학의 3남이자 조흥은행장인 정종원과 다각도로 교류하고 있었고 언론을 통해 정씨 가문에 대해 우호적인 입장을 내비치기도 했다.<ref>동아일보 1957년 6월20일 1면 이병철씨 조은주 양도 거부</ref><ref>동아일보 1957년 7월21일 3면 은행주 불하 경위와 금후 문제점</ref> 이병철은 1956~1957년 진행된 은행 [[귀속주]] 불하과정에서 민 씨가문과 정씨가문 간 지분경쟁에서 정씨측에 힘을 실어줬다.
         이병철은 당시 대구에서 서울 장충동1가 110번지 <ref>매일경제 1974년 9월 11일 7면 고액재산세 부과대상자</ref> 로 거처를 옮겼다. 정종원 자택 인근이었다.<ref>경향신문 1981년 6월 22일 9면 경제인록 22 재벌전횡 부른 귀속주 공매</ref><ref>매일경제 1987년 11월 20일 11면 이병철 그의 생애와 경영반세기</ref> 이웃이 된 이후 정종원과 이병철의 부인들은 친분이 두터워졌고 그로 인해 자손들은 유대관계를 맺어왔다. 정종원의 막내사위인 [[장유상]] KDI정책대학원 교수 (전 보스턴대 교수)는 삼성 이병철 회장의 자문역을 맡으면서 삼성의 미국 진출에 기여했다.<ref>매일경제 2011년 1월 16일</ref>
         정종원 행장이 5.16쿠데타 직전 은행경영 일선에서 물러난 것은 어쩌면 행운인지도 모른다. 박정희 정부는 은행을 정부 경제성장전략의 들러리로 전락시켰기 때문이다. 은행은 대출심사권을 통해 자본을 효율적으로 배분하는 사회적 역할이 있다. 하지만 과거 우리나라 은행은 그렇지 못했다. 시장은 철저히 통제됐고, 사실상 제대로 된 경영이란 찾아볼 수 없었다.<ref>경향신문 1965년 3월 11일 시은경영태세 대전환 필요</ref><ref>매일경제 1970년 11월 3일 3면 금융은 정상화될까</ref><ref>매일경제 1979년 5월 1일 1면 관치에 밀리는 자율화</ref>
         법시는 다른 불교전문 잡지들이 사찰 등의 후원을 받아 발행된 데 비해 선종불교에 심취한 정종원 전 조흥은행장이 이사장으로서 재정지원에 나서 눈길을 끌었다. 또한 [[김세련]] 전 한국은행총재, [[문종건]] 전 조흥은행도 후원자로 참여했다.<ref>경향신문 1967년 7월 8일 5면</ref> 불교계는 1960년 초부터 불교전문 잡지가 창간됐으나 법시를 1960년대 들어 최초의 발간된 불교잡지로 인정하고 있다. '법시'에 앞서 창간된 잡지들은 몇 해를 넘기지 못하고 폐간됐기 때문이다.
  • 최공웅 . . . . 7회 일치
         |임기2 = 2000년 7월 31일 ~ 2003년 7월 30일
         서울형사지방법원 항소3부 재판부 판사로 재직하던 1971년 7월 27일 밤에 같은 재판부 구성원인 이범렬 부장판사와 동부서기 이남영과 함께 "1심에서 징역3년 자격정지3년이 선고된 제주 김녕중학교 교장 이방택의 [[국가보안법]], [[반공법]]위반 피고사건의 항소심 증인 심문을 위해 제주도에 갈 때 피고인의 하경철 변호사로부터 왕복 항공료 3만3천원과 향응 비용 등 9만7천원을 받았다"는 이유로 법조 사상 최초로 현직 판사로서 뇌물수수 혐의로 구속영장이 신청되었다.<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71072800099203007&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71-07-28&officeId=00009&pageNo=3&printNo=1657&publishType=00020 매일경제 1971년 7월 28일자]</ref> 이후 해당 피고인의 재판은 원심이 파기되어 징역1년6월 자격정지1년6월이 선고되었다.<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71072900209207004&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71-07-29&officeId=00020&pageNo=7&printNo=15326&publishType=00020 동아일보 1971년 7월 29일자]</ref> 관행으로 이루어진 변호사의 경비 부담에 대해 구속영장을 청구한 사건은 1차 [[사법파동]]으로 이어졌다.<ref>[http://www.newspim.com/news/view/20170721000060]</ref>
         * 대구지방법원 형사3부 재판장으로 재직하던 1980년 6월 11일에 가짜 중등교사 자격증을 갖고 교직 생활을 했던 10명의 피고인들에게 뇌물공여, 공문서 위조와 동행사죄로 각각 징역1년6월 집행유예3년을 선고했다.<ref>경향신문 1980년 6월 12일자</ref>
         * 서울고등법원 형사1부 재판장으로 재직하던 1988년 2월 5일에 1971년 4월 제7대 대통령 선거에서 후보 유세 중에 "[[박정희]] 대통령이 영구 집권을 위해 총통제를 기도하고 있다"는 등의 허위사실을 유포하여 1971년 7월 26일에 기소된 사건에 대해 "재판 시효가 지났다"는 이유로 면소 판결했다.<ref>동아일보 1988년 2월 5일자</ref> 3월 4일에 [[긴급조치]] 1호, 4호 위반, 법정모욕 등으로 1,2심 군법회의에서 징역10년 자격정지10년이 선고됐다가 대법원 상고심에서 이미 폐지된 [[긴급조치]] 면소에 대한 판단은 유보한 채 파기환송된 [[강신옥]]에게 "자유 민주주의 체제에서 형사 피고인에 대한 자유로운 방어권 행사없이 형식적인 변론만 인정한다면 사법권읜 근본적으로 파괴되고 말 것"이며 "공개재판에서 변론은 재판 방해를 하려는 폭력이 없는 한 처벌할 수 없다"며 무죄를 선고했다.<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8030400329211003&editNo=3&printCount=1&publishDate=1988-03-04&officeId=00032&pageNo=11&printNo=13056&publishType=00020 경향신문 1988년 3월 4일자]</ref> 5월 27일에 내란 예비죄 피고인인 [[박형규]] 목사에게 "10여명의 선동만으로 국가 전복을 우려한다는 것은 전혀 합리성이 없다"며 징역2년을 선고한 원심을 깨고 무죄를 선고했다.<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8052700329211001&editNo=3&printCount=1&publishDate=1988-05-27&officeId=00032&pageNo=11&printNo=13126&publishType=00020 경향신문 1988년 5월 27일자]</ref> 5월 31일에 1974년 세검정 동굴에서 북한방송을 듣고 [[민청학련 사건]] 관련자에 대해 "똑똑한 학생이 왜 나쁜 짓을 하겠느냐"고 말했다는 이유로 [[긴급조치]]위반으로 구속돼 1심에서 징역10년 자격정지10년을 선고받은 박규신 피고인에게 대법원에서 파기된지 13년만에 반공법위반 무죄, 긴급조치 위반은 면소 판결했다.<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8053100289107009&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88-05-31&officeId=00028&pageNo=7&printNo=14&publishType=00010 한겨레 1988년 5월 31일자]</ref>
  • 한명회 . . . . 7회 일치
         |출생일= [[1415년]] [[음력 10월 25일]]
         |사망일= [[1487년]] [[음력 11월 14일]] (73세)
         '''한명회'''(韓明澮, [[1415년]] [[11월 26일]] ([[음력 10월 25일]]) ~ [[1487년]] [[11월 28일]] ([[음력 11월 14일]]))는 [[조선]]시대 전기의 문신, 군인, 정치인이며 외척이다. 1475년에서 1476년까지 1년간 조선국 상급 국상 지위를 지낸 그의 본관은 [[청주 한씨|청주]], 자(字)는 자준(子濬), 호는 압구정(狎鷗亭)·압구(狎鷗)·사우당(四友堂)이며, 별칭은 칠삭동이<ref>7개월만에 출생하여 생애 초기에 칠삭동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ref>, 시호는 충성(忠成)이다. 일찍이 [[조선 태조]]때 학사로 [[명나라]]에서 [[조선]]이란 국호를 받아온 [[개국공신]] [[한상질]](韓尙質)의 손자이자 [[증직|증]] [[의정부]][[영의정]]에 추증된 [[한기]](韓起)의 아들이고, 이조참판과 직제학을 지낸 [[여주 이씨]] [[이척]]의 외손자이자 [[대제학]] 이행의 증외손이다. [[조선 예종|예종]]의 원비 [[장순왕후]]·[[조선 성종|성종]]의 원비 [[공혜왕후]]의 친정아버지이다. [[조선왕조실록]]에 그 이름이 2300건이나 등장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한상환(韓尙桓), 류태재(柳泰齋)의 문인이다. [[한성부]] 출신.
         압구정 한명회는 [[1415년]](태종 15년) [[음력 10월 25일]] [[한성부]]에서 [[조선]]의 개국공신으로 [[예문관]][[대제학]]을 지낸 [[한상질]](韓尙質)의 손자이며 [[사헌부]][[감찰]]을 지내고 사후에 [[증직]]으로 [[의정부]][[영의정]]에 [[추증]]된 한기(韓起)와 이초참판 겸 [[예문관]] 직제학 [[이척]](李逖)의 딸인 증 정경부인 [[여주 이씨]]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미숙아]]로 태어났는데, 모친 여주이씨 부인이 수태된 지 7개월만에 태어났다 하여 칠삭동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1487년]](성종 17년) 그가 병석에 눕게 되자 [[조선 성종|성종]]은 특별히 [[내의]]를 보내어 치료하게 하고 날마다 내관과 신하들을 보내 문병하게 하였다. 병세가 악화되자 [[승지]]를 보내어 하고 싶은 말을 묻자 임종 직전 남긴 유언에서 그는 "처음에는 부지런하고 나중에는 게으른 것이 사람의 상정이니 원컨대 나중을 삼가기를 처음처럼 하소서"라 하였다. 그해 [[음력 11월 14일]] 갑자기 사망하였다. 당시 향년 73세였다.
         임기= [[1475년]] [[6월 1일]] ~ [[1476년]] [[7월 25일]]
  • 홍진기 . . . . 7회 일치
         '''홍진기'''(洪璡基, [[1917년]] [[3월 13일]] ~ [[1986년]] [[7월 13일]])는 [[대한민국]]의 관료이자 언론인이다. 아호는 '''유민'''(維民)<ref>{{한국민족문화대백과|E0064442}}</ref> 배우자는 [[김윤남]](중추원 참의를 역임한 [[김신석]]의 딸)이다. 당시 천재라 불리었으며 일제 강점기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논문이 일본 학계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하지만 조선인 차별정책에 의해 그의 꿈인 교수가 될 수 없게되었고 이후 법을 공부하여 전주에서 판사를 역임하였다.
         법무부 차관이던 1954년 4월부터 7월까지 제네바에서 열린 [[제네바 정치회의]]에 대한민국 대표단의 일원으로 참석하였다.<ref>{{뉴스 인용 |url=http://shindonga.donga.com/docs/magazine/shin/2008/02/12/200802120500004/200802120500004_1.html | 제목=6·25 참전국 모두 모여 만든 ‘유일한 국제공인 통일원칙’| 저자=최운상 | 뉴스=신동아 | 출판사=동아일보 | 날짜=2008-02-01 | 보존url=http://archive.is/DTdrZ | 보존날짜=2016-08-18 }}</ref>
         | 장녀 || [[홍라희]] || [[1945년]] [[7월 15일]] || || [[리움]] 관장
         | 손자 || 홍정도 || [[1977년]] [[11월 11일]] || || [[JTBC]] 사장
         | 사위 || [[노철수]] || [[1956년]] [[7월 27일]] || || 애미커스 회장, 아버지 前 국무총리 [[노신영]]
         |임기 = [[1980년]] [[7월]] ~ [[1986년]] [[7월]]
  • 황치열 . . . . 7회 일치
         * 2008년 7월 15일 - 싱글 《PS영준 - The Romantic Story》 - 〈너 때문에〉 with PS영준(가수)
         * 2015년 7월 4일 - 《[[불후의 명곡 - 전설을 노래하다]]》 (김지애 & 문희옥편) - 〈정 때문에〉
         * 2015년 11월 11일 - 《[[투유 프로젝트 - 슈가맨]]》 Part 4 (박준하/에메랄드 캐슬 편) - 〈너를 처음 만난 그때〉 with [[백아연]]
         * 2016년 3월 11일 - 중국 나는 가수다 시즌4 9회 '''4위''' 《[http://www.mgtv.com/v/1/290525/c/3031806.html# 나보다 더 높은 곳에 니가 있을 뿐(你只是在比我高的地方)무대영상]》[http://m.weibo.cn/p/index?containerid=10151501_60246509 weibo 음원]
         * 2015년 9월 11일 [[알리]] 콘서트 게스트
         * 2016년 6월 11일 중국 심천 ALI LIVE 2016 뮤직페스티벌 게스트
         |2018년 1월11일 제32회 골든디스크 음반부문
  • 김동명(가수) . . . . 6회 일치
         || '''출생''' ||[[1983년]] [[7월 26일]] ([age(1983-07-26)]세)[br][[전라북도]] [[익산시]]||
         ||2015년 7월 19일 in 전북 고창||문화예술회관 3:00pm, 7:00pm||
         ||2015년 8월 29일 in 전북||문화예술회관 3:00pm, 7:00pm(원래 7월 4일에서 변경)||
         ||2016년 7월 15일 in 전북 익산, Friends||충무아트홀 8:00pm||
         ||2016년 7월 16일 in 전북 익산, Friends||충무아트홀 7:00pm||
         ||2016년 7월 17일 in 전북 익산, Friends||충무아트홀 4:00pm||
  • 김동한(가수) . . . . 6회 일치
         ||<:><#232323> {{{#FFFFFF ''' 출생 ''' }}} ||<(> [[1998년]] [[7월 3일]], [[대구광역시]] [[달서구]] ||
         7월 3일에 아리랑 TV 라디오에 같은 소속사 연습생인 [[장대현]]과 함께 출연하였다.
         MBC 해요 TV '[[프린식스의 사생활]]'로 7월 13일부터 8월 3일까지 매주 목요일 오후 9시에 생방송에 참여했다.[[http://www.xportsnews.com/jenter/?ac=article_view&entry_id=867340&_REFERER=https%3A%2F%2Fwww.google.co.uk%2F|#]] 다른 출연자는 [[권현빈]], [[김상균(JBJ)|김상균]], [[켄타(가수)|켄타]], [[이건희(1998)|이건희]], [[유선호(2002)|유선호]].
         7월 20일 오후 서울 강남구 신사동 LF 본사 서관에서 열린 'LF 코스메틱 오픈 행사 기념 포토월'에 참석했다.
         7월 25일 sbs plus Must Ear20([[정진운]] 진행) 9화(패스트푸드특집)에 [[노태현]]과 출연했다.[[http://tv.kakao.com/channel/2826388/cliplink/375203190?playlistId=105929&metaObjectType=Playlist|9화 클립영상모음]] 촬영중 팬들을 위해 인스타라이브가 진행되었다. [[https://youtu.be/Zb4_dL_3i4I|인스타라이브링크]]
         9월 11일 모해의 미앤미 영상이 공개되었다. [[http://tv.naver.com/v/2043490|영상 링크]]
  • 박신혜 . . . . 6회 일치
         박신혜는 2001년, [[이승환]]의 7집 앨범 타이틀곡 〈사랑하나요〉 뮤직 비디오로 출연하며 데뷔하였다. 이후 2003년에도 이승환의 〈꽃〉 뮤직 비디오에 출연하며 얼굴을 알린 박신혜는 당초 배우지망생이 아닌 가수를 꿈꾸는 연습생이었다. 하지만 우연한 기회에 오디션을 본 2003년 12월 첫 방영 된 드라마 《[[천국의 계단 (드라마)|천국의 계단]]》에서 [[최지우]]의 아역인 한정서 역을 맡아 브라운관에 데뷔하였다.<ref>{{웹 인용|url=http://globerove.com/south-korea/tree-of-heaven-korean-drama/3740|title=Tree of Heaven Korean Drama|publisher=GlobalRove|accessdate=2014-09-08|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140908015531/http://globerove.com/south-korea/tree-of-heaven-korean-drama/3740|보존날짜=2014-09-08|깨진링크=예}}</ref><ref name="hancinema1">{{웹 인용|url=http://www.hancinema.net/-tree-of-heaven--a-new-tryout-for-a-resurgence-of-korean-wave-5387.html|title='Tree of Heaven': a new tryout for a resurgence of Korean Wave|publisher=The Korea Herald via Hancinema|accessdate=2013-10-08}}</ref><ref name="hancinema2">{{웹 인용|url=http://www.hancinema.net/park-sin-hye-invited-to-photo-exhibition-for-korean-top-stars-6302.html|title=Park Shin-hye Invited to Photo Exhibition for Korean Top Stars|publisher=KBS Global via Hancinema|accessdate=2013-10-08}}</ref> 이 작품에서 그녀는 14살 이제 막 중학교에 입학한 어린 소녀라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싱그럽고 풋풋한 첫사랑 감정을 첫 연기라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출중한 연기를 선보이며, 안방극장의 뜨거운 사랑과 지지를 받았고 그 당시 이례적으로 아역들의 분량이 1회 늘어나기도 했다. [[SBS 연기대상]] 아역상을 수상하였다. 당시 연출을 맡은 이장수 감독은 박신혜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인용문2|“(박신혜씨 연기를) 정말 잘해요. 연기한 걸 직접 한 번 봐야하는데…우리나라 배우들이 자질이 정말 뛰어나다는 걸 신혜를 보면 느낄 수 있어요. 비록 신인이지만 잘 할 것으로 봐요”|MBN스타 2016년 7월 8일자 기사<ref name="mbn">{{뉴스 인용 |제목 =[M+TV피플] 박신혜, 꾸미지 않아 더 아름다운 |url =http://entertain.naver.com/read?oid=057&aid=0000989093|출판사 =MBN스타 |저자 =금빛나 |날짜 = 2016-07-08 |확인날짜 =2016-07-10 }}</ref> 중}}
         박신혜는 이후 단막극 《[[드라마시티]] - 첫차를 기다리며》(2004), 《[[MBC 베스트극장|베스트극장]] - 베리 메리 크리스마스》(2004), 《새 아빠는 스물 아홉》(2005)와 《한뼘 드라마》(2004), 《베스트극장 - 어느 멋진 날》(2005), 《드라마시티 - 키다리 아저씨》(2005)와 시트콤 《[[혼자가 아니야]]》(2004-05), 《[[귀엽거나 미치거나]]》(2005)에 출연하며 배우로서 연기력을 다져나갔다. 2004년부터 2005년까지 박신혜는 사전 제작 된 퓨전 사극 드라마 《[[비천무]]》에 캐스팅 되어 중국 로케 촬영하였다. 그리고 2006년 2월, 첫 방영한 드라마 《[[천국의 나무]]》에서 여주인공 하나 역에 캐스팅 되었고, ‘천국의 계단’에서 그녀를 발탁했던 이장수 감독은 여주인공으로 고등학생이었던 박신혜를 또다시 발탁했다.<ref>{{뉴스 인용 |제목 =<인터뷰> 드라마 '천국의 나무' 여주인공 박신혜 |url =http://entertain.naver.com/read?oid=001&aid=0001197151|출판사 =연합뉴스 |저자 =정열 |날짜 = 2006-01-16 |확인날짜 =2013-09-01 }}</ref> 같은 해 4월, 영화 《[[도마뱀 (영화)|도마뱀]]》으로 첫 스크린 데뷔를 하였다. 이듬해, 2007년 황인뢰 감독은 드라마 《[[비천무]]》의 제작 현장에서 눈여겨본 박신혜에게 드라마 《[[궁S]]》의 귀족 소녀 신세령 역으로 캐스팅했으나 이 드라마는 전작과 달리 진부한 내용과 설정으로 흥행에는 크게 실패하였다.<ref>{{뉴스 인용 |제목 =박신혜 잘 자라줘서 고마워 |url =http://entertain.naver.com/read?oid=312&aid=0000002569|출판사 =텐아시아 |저자 =최지은 |날짜 = 2009-10-28 |확인날짜 =2015-04-18 }}</ref> 같은 해 5월 개봉 된 호러 영화 《[[전설의 고향 (2007년 영화)|전설의 고향]]》과 드라마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몇 가지 질문]]》에 출연했다. 7월부터 방영 된 드라마 《[[깍두기 (MBC)|깍두기]]》에서는 절에서 자란 여주인공 장사야 역을 맡아 지금까지 고수해왔던 긴 머리카락을 짧게 자르는 등 파격 변신을 하였다.<ref>{{뉴스 인용 |제목 =박신혜, '문희' 후속 드라마 '깍두기' 주인공 확정 |url =http://entertain.naver.com/read?oid=109&aid=0000081490|출판사 =OSEN |저자 =김지연 |날짜 = 2007-07-19 |확인날짜 =2013-09-01 }}</ref> 박신혜는 2007년부터 2008년까지 예능 프로그램 《[[환상의 짝꿍]]》의 진행을 맡아 [[MBC 방송연예대상]] 쇼버라이어티부문 여자신인상을 수상했다.
         2008년 7월, 박신혜
         박신혜는 매년 팬미팅 수익금을 현지 NGO나 사회단체에 기부해오고 있다. 2007년, 박신혜는 드라마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몇 가지 질문》의 순수제작비를 제외한 작가, 연출자, 연기자들의 원고료와 연출료 및 출연료 전액 등의 수익금을 NGO 단체를 기부하는 것에 동참했다.<ref>{{뉴스 인용 |제목 =원고료-출연료 기부...첫 도네이션 극 방영 |url =http://entertain.naver.com/read?oid=213&aid=0000006327|출판사 =TV리포트 |저자 =김진도 |날짜 = 2007-05-14 |확인날짜 =2013-09-01 }}</ref> 2012년에는 한국 공식팬클럽 ‘별빛천사’와 함께 한 한국 팬미팅 티켓 판매금 전액을 팬들과 대표적인 [[NGO]] 단체 ‘기아대책’에 기부하며, 박신혜가 봉사를 다녀온 아프리카 가나의 별빛 천사 마을을 위해 후원하였다.<ref>{{뉴스 인용 |제목 =박신혜 노래선물, ‘팬 위한 노래’ 직접 작사한 곡 ‘최초 공개’ |url =http://entertain.naver.com/read?oid=038&aid=0002231659|출판사 =리뷰스타 |저자 =김숙희 |날짜 = 2012-02-20 |확인날짜 =2013-09-01 }}</ref> 같은 해 7월, 드라마 《[[넌 내게 반했어]]》의 후지TV 방송을 기념해 [[정용화]]와 함께 7월 15일과 16일 두 차례에 걸쳐 열린 팬미팅 행사를 성공리에 마쳤고, 팬미팅 수익의 일부를 국제기아대책기구를 통해 동일본대지진의 지원금으로 기부했다.<ref>{{뉴스 인용 |제목 =박신혜-정용화, '넌 내게 반했어' 日 팬미팅 수익금 기부 |url =http://entertain.naver.com/read?oid=076&aid=0002236717|출판사 =스포츠조선|저자 =김표향 |날짜 = 2012-07-17 |확인날짜 =2013-09-01 }}</ref> 2013년 일본 팬미팅 후에는 기아대책 일본지부에, 필리핀 팬미팅의 수익금도 현지에 되돌려 한류의 이미지 제고에 앞장서오고 있다.<ref>{{뉴스 인용 |제목 =박신혜, 中 반려동물 성금 기부… 경시풍조에 경종 |url =http://entertain.naver.com/read?oid=469&aid=0000056438|출판사 =한국일보 |저자 =이현아 |날짜 = 2015-04-05 |확인날짜 =2015-04-07 }}</ref> 같은 해 1월, 드라마 《[[이웃집 꽃미남]]》 제작발표회에서 팬들에게 받은 쌀 화환을 나눔의 집에 기부했고, 같은 해 2월, 한국 팬미팅 수익 전액과 일본 팬미팅 수익 일부를 기아 대책에 기부했다. 4월에는, 서울 영등포 타임스퀘어 CGV 스타리움에서 영화 《사랑의 가위바위보》의 쇼케이스 행사에 참석한 박신혜를 응원하기 위해 일본 팬클럽과 공식 팬클럽 회원들은 쌀 화환 520kg과 공식 팬클럽은 '별빛천사는 사랑의 가위바위보를 응원합니다' 등의 메시지를 적은 쌀 화환을 보내고, 이날 받은 쌀 화환 520kg은 박신혜가 지정하는 기부처로 전달돼 어려운 이웃을 위해 기부 되었다.<ref>{{뉴스 인용 |제목 =박신혜, 쌀 화환 520kg 어려운 이웃에 기부 |url =http://entertain.naver.com/read?oid=111&aid=0000330294|출판사 =조이뉴스24 |저자 =권혜림 |날짜 = 2013-04-30 |확인날짜 =2013-09-01 }}</ref> 6월 24일, 영화 《사랑의 가위바위보》의 청각장애인을 위한 한국어 대사와 해설 자막, 시각장애인을 위시·청각 장애인들도 비장애인과 함께 영화를 감상할 수 있게 제작한 배리어프리 버전 녹음을 진행했고, 박신혜는 영화의 앞부분에 내레이터로 재능 기부에 참여했다.<ref>{{뉴스 인용 |제목 =김지운 감독·박신혜, 시청각 장애인 위해 재능기부 |url =http://entertain.naver.com/read?oid=117&aid=0002348112|출판사 =마이데일리 |저자 =김미리 |날짜 = 2013-06-24 |확인날짜 =2013-09-01}}</ref>
         박신혜는 또한 2011년부터 기아대책 홍보대사로 활동, 서부 아프리카 가나에 있는 결연아동 아반네를 결연후원 해오고 있으며 팬들과 해외 빈곤국에 센터 세우는 일에 동참했다.<ref>{{뉴스 인용 |제목 =팬과 함께 봉사활동 나선 별들 |url =http://entertain.naver.com/read?oid=382&aid=0000196660|출판사 =스포츠동아 |저자 =김원겸 |날짜 = 2014-04-08 |확인날짜 =2014-04-09}}</ref> 국내외 팬들과 전 세계 빈곤국가 아이들의 교육적, 정서적 지원을 위한 ‘별빛천사마을’ 만들기 프로젝트를 진행해왔다. 1호 센터로 서부 아프리카 가나 ‘신혜센터(Shin Hye Center)’가 2013년 11월 완공되어 5백여 명의 학생들이 이용하고 있다.<ref>{{뉴스 인용 |제목 =기아대책 홍보대사 박신혜, ‘러브백’ 특별행사 참여 |url =http://www.newsen.com/news_view.php?uid=201405291628173210|출판사 =뉴스엔 |저자 =김찬미 |날짜 = 2014-05-29 |확인날짜 =2014-05-30}}</ref> 2014년에는 세월호 희생자 가족을 위해 희망브리지 전국재해구호협회를 통해 5,000만원을 기부했다.<ref>{{뉴스 인용 |제목 =박신혜 이어 소속사도 1000만원 기부 "작게나마 위로가 됐으면" |url =http://entertain.naver.com/read?oid=009&aid=0003189349|출판사 =매일경제 |저자 =이슈팀 |날짜 = 2014-04-23 |확인날짜 =2014-04-24}}</ref><ref>{{뉴스 인용 |제목 =박신혜 이어 소속사도 1000만원 기부 "작게나마 위로가 됐으면" |url =http://stoo.asiae.co.kr/news/view.htm?idxno=2014042515493577725|출판사 =스포츠투데이 |저자 =김은애 |날짜 = 2014-04-25 |확인날짜 =2014-04-26 }}</ref> 또한 자신의 SNS 트위터 프로필 사진을 노란리본 사진으로 변경, 노란리본 캠페인에도 동참했다.<ref>{{뉴스 인용 |제목 =박신혜, 기부 이어 노란리본 캠페인 동참 |url =http://entertain.naver.com/read?oid=144&aid=0000242446|출판사 =스포츠경향 |저자 =온라인뉴스팀 |날짜 = 2014-04-23 |확인날짜 =2014-04-24 }}</ref> 2015년, 박신혜는 ‘2015 Dream of Angel’ 타이틀로 아시아투어에 나섰고, 상해 팬미팅 수익을 [[NGO]] 단체 ’기아대책’의 별빛천사마을 만들기와 중국의 유기동물 보호단체 ‘타소원’에 기부했다.<ref>{{뉴스 인용 |제목 =박신혜, 상해 팬미팅 수익금 전액 기부.."한류스타 이례적 행보" |url =http://entertain.naver.com/read?oid=018&aid=0003217288|출판사 =이데일리 |저자 =강민정 |날짜 = 2015-03-30 |확인날짜 =2013-09-01 }}</ref> 4월, 박신혜는 큰 피해를 입은 [[네팔]] 국민들을 위해 국제구호단체 기아대책를 통해 3,000만원을 기부했다.<ref>{{뉴스 인용 |제목 =네팔 지진 희생자 위해 3천만원 후원 |url =http://entertain.naver.com/read?oid=109&aid=0003054697|출판사 =OSEN |저자 =정유진 |날짜 = 2015-04-30 |확인날짜 =2013-09-01 }}</ref> 2016년 7월, 박신혜는 아프리카 가나의 신혜센터에 이어 필리핀 마닐라에 신혜센터의 건립을 진행했다. 이에 박신혜와 소속사 솔트 엔터테인먼트 직원들은 센터건립에 앞서 필리핀 쌈빨록 지역의 아이들과 1:1 결연을 맺었고, 지난 3월 박신혜는 필리핀의 결연아동의 집을 직접 방문하고 아동결연센터 아이들과 함께 즐거운 시간을 가지며 센터 건립에 앞서 건축기념식을 가졌다.<ref>{{뉴스 인용|url=http://entertain.naver.com/read?oid=382&aid=0000489585|제목=박신혜가 또… 필리핀에 아동복지시설 ‘신혜센터’ 건립|출판사 =스포츠동아 |저자=홍세영|날짜 = 2016-07-22|확인날짜=2016-12-09}}</ref>
  • 서거정 . . . . 6회 일치
         |임기 = [[1467년]] [[음력 7월 3일]] ~ [[1469년]] [[음력 7월 26일]]
         |임기 = [[1478년]] [[음력 6월 2일]] ~ [[1478년]] [[음력 9월 24일]]
  • 손담비 . . . . 6회 일치
         EP 활동의 끝난 뒤인 2009년, 첫 정규 음반 ''[[Type-B]]''의 발매로 컴백을 준비했다. 음반 발매와 음원 공개에 앞서 총 3차에 걸친 티저를 선공개하였는데, 2009년 3월 19일 타이틀곡인 〈토요일밤에〉 1차 티저를 공개하였다.<ref>{{뉴스 인용|제목=손담비 ‘토요일밤에’ 티저영상, 팬들 반응 뜨거워|url=http://www.maxmovie.com/movie_info/ent_news_view.asp?mi_id=MI0083262026|출판사=맥스뉴스|날짜=2009-03-19 |확인날짜=2010-12-29}}</ref> 이어 20일에는 롤러스케이트 장으로 꾸며진 곳에서 1980년대 디스코풍의 2차 티저를 공개하였는데, 마지막에 '토요일 밤에'라는 문구가 등장에 더욱 궁굼증을 자아냈다.<ref>{{뉴스 인용|제목=손담비, '토요일밤에' 2차 티저 공개 이번엔 '롤러걸'|url=http://www.maxmovie.com/movie_info/ent_news_view.asp?mi_id=MI0083284482|출판사=맥스뉴스|날짜=2009-03-20 |확인날짜=2010-12-29}}</ref> 23일에는 백발의 손담비가 등장, 마지막 3차 티저를 공개하여 팬들의 눈길을 사로잡았다.<ref>{{뉴스 인용|제목='백발' 손담비, '토요일 밤에' 3차 티저 영상 공개 |url=http://www.maxmovie.com/movie_info/ent_news_view.asp?mi_id=MI0083340682|출판사=맥스뉴스|날짜=2009-03-23 |확인날짜=2010-12-29}}</ref> 다음날인 24일 타이틀곡 〈토요일밤에〉 음원이 공개된 후, 폭발적인 상승세로 바로 음원사이트 10위 권에 진입하며 또 다른 손담비 열풍을 예고하였다.<ref>{{뉴스 인용|제목= 손담비 '토요일밤에' 컴백, 그녀의 '인기몰이' 이미 예견된 수순|url=http://www.maxmovie.com/movie_info/ent_news_view.asp?mi_id=MI0083410074|출판사=맥스뉴스|날짜=2009-03-26|확인날짜=2010-12-29}}</ref> 〈토요일밤에〉는 80년대 디스코 복고풍으로 후렴구부분의 '하늘 찌르기춤'으로 인기를 얻었다.<ref name="하늘찌르기춤">{{뉴스 인용|제목= 손담비, 의자춤 이어 하늘찌르기춤 신드롬 일으킨다 |url=http://www.newsen.com/news_view.php?uid=200905032208311001|출판사=뉴스엔|저자=김형우 기자|날짜=2009-05-04}}</ref> 26일에는 첫 정규 음반 ''[[Type-B]]''가 발매되었다. 한편, 〈토요일 밤에〉가 발표된 뒤, 뜨거운 인기몰이를 하고있던 손담비는 2009년 4월 10일, [[KBS]] 《[[뮤직뱅크]]》에서 첫 1위를 하였고 《[[엠 카운트다운]]》,《[[인기가요]]》 등에서도 1위를 해 그 인기를 실감케하였다. 또한 CF계에서도 러브콜이 쇄도하여 광고 섭외순위가 0순위라는 말까지 떠돌았고,<ref>{{뉴스 인용|제목=이승기, 손담비…광고모델 섭외 0순위 드러내|url=http://www.obsnews.co.kr/EnterNews/316308|출판사=OBS 연예뉴스|저자=김광선 에디터|날짜=2009-10-23|확인날짜=}}{{깨진 링크|url=http://www.obsnews.co.kr/EnterNews/316308 }}</ref> 연말에는 MTN 2009 방송광고 페스티벌에서 여자 CF 모델상을 수상하기도 하였으며, 〈토요일밤에〉로 [[골든디스크]], [[서울가요대상]] 에서 수상을 하였다. 정규 앨범 활동이 끝나자 손담비는 [[2009년]] 7월부터 방영된 SBS 월화 드라마 《[[드림 (드라마)|드림]]》에서 박소연이라는 여자 주연으로 출연했지만, 상업적으로 큰 실패를 거두었고, 연기력 논란까지 일어났다. 하지만, [[SBS 연기대상]]에서 뉴 스타상을 받았다.<ref>{{뉴스 인용|제목='드림' 시청률 울상 손담비, 뉴스타상에 웃었다|url=http://www.newsen.com/news_view.php?uid=201001011306221001|출판사=뉴스엔|저자=김소희 기자|날짜=2010-01-21 |확인날짜=}}</ref>
         손담비는 2010년 5월 컴백을 앞두고 준비해왔지만, 같은 소속사 그룹인 [[애프터스쿨]]이 [[천안함 침몰 사건]]으로 인하여 활동을 제대로 하지 못해 활동이 미뤄졌다.<ref>{{뉴스 인용|제목= 손담비 컴백 연기..애프터스쿨 때문?|url=http://www.asiae.co.kr/news/view.htm?idxno=2010042809051209710|출판사=아시아 경제|저자=조범자 기자|날짜=2010-04-28|확인날짜=}}</ref> 한달 뒤인 2010년 6월 25일 손담비는 공식 사이트를 통해 컴백을 알렸다.<ref>{{뉴스 인용|제목='섹시디바' 손담비, 1년 3개월만의 컴백…움직임 포착!|url=http://autotimes.hankyung.com/article_view.php?id=81096|출판사=오토타임즈|저자=연예취재팀|날짜=2010-06-25|확인날짜=}}</ref> 7월 2일에는 음반의 수록곡 중 하나인 "Can't u see"를 공개해 많은 관심을 받았다.<ref>{{뉴스 인용|제목=손담비, '그림자댄스'로 서버다운까지? '히트예감'|url=http://ntn.seoul.co.kr/main.php?cmd=news/news_view&idx=39797|출판사=서울신문NTN|저자=오영경 인턴기자|날짜=2010-07-03|확인날짜=}}{{깨진 링크|url=http://ntn.seoul.co.kr/main.php?cmd=news%2Fnews_view&idx=39797 }}</ref> 음반 발매 하루 전 날에는 전곡이 유출되는 사고가 일어났다.<ref>{{뉴스 인용|제목=허무한 손담비, 컴백 하루전 음원유출|url=http://sportsworldi.segye.com/Articles/EntCulture/Article.asp?aid=20100708004612&subctg1=10&subctg2=00|출판사=스포츠월드|저자=김용호 기자|날짜=2010-07-09|확인날짜=2010-12-06}}</ref> 그리고 2010년 7월 8일 ''The Queen''을 발매했다. 이후 《[[뮤직뱅크]]》를 시작으로 《[[음악중심]]》, 《[[인기가요]]》에서 "Can't u see"와 "queen"을 선보이며 컴백 무대를 펼쳤다. 한편, 7월 결산 차트에서 손담비는 "Can't U See"와 "queen"이 20위권에 들면서 7월 상위 20위권 차트에서 유일하게 2곡 이상을 진입시킨 가수가 됐다.<ref>{{뉴스 인용|제목=손담비, 7월 음원 톱20 멀티히트 가수 '유일'|url=http://star.mt.co.kr/view/stview.php?no=2010080215133583882&type=1&outlink=1|출판사=머니투데이|저자=김관명 기자|날짜=2010-08-02|확인날짜=}}</ref> 이렇게 초반에는 좋은 출발을 했지만, 얼마 안 되어 "queen"의 MR을 제거한 영상이 올라오면서 처음으로 가창력 논란이 일어났다.<ref name="아츠">{{뉴스 인용|제목='표절논란' 손담비 '퀸(Queen)' MR제거, 무엇이 문제일까?|url=http://www.artsnews.co.kr/news/89424|출판사=아츠뉴스|저자=박진영 기자|날짜=2010-07-12}}</ref> 또한 "queen"의 뮤직비디오 일부분이 미국 드라마 《엘리스》의 장면과 매우 흡사하다는 표절논란을 빚어 소속사는 논란이 된 장면들을 모두 삭제키로 결정했다.<ref>{{뉴스 인용|제목=손담비, 뮤비 표절 논란 일부 장면 삭제|url=http://www.todaykorea.co.kr/news/articleView.html?idxno=116279|출판사=투데이코리아|저자=김민철 기자|날짜=2010-07-12}}{{깨진 링크|url=http://www.todaykorea.co.kr/news/articleView.html?idxno=116279 }}</ref> 2010년 8월, 손담비는 타이틀곡 활동을 마무리했다.<ref>{{뉴스 인용|제목=손담비 ‘퀸’ 활동 끝 ‘잠시만 안녕’ 모두다 이뤄졌나?|url=http://www.newsen.com/news_view.php?uid=201008201835291002|출판사=뉴스엔|저자=이언혁 기자|날짜=2010-08-20}}</ref> 이후 후속곡인 "[[dB Rider]]"로 9월부터 10월 초까지 활발하게 활동했지만, 크게 히트치지는 못했다.<ref>{{뉴스 인용|제목=‘라이더 변신’ 손담비, 파워풀한 섹시美 돋보인 후속곡 첫 무대 |url=http://www.mydaily.co.kr/news/read.html?newsid=201009171909341131&ext=na|출판사=마이데일리|저자=강선애 기자|날짜=2010-09-17|확인날짜=2010-10-12}}</ref>
  • 영천시 . . . . 6회 일치
         영천군 시절의 역사는 [[영천군]] 항목 참조. 이후 1981년 7월 1일 영천군 내에 있던 '영천읍'이 '영천시'로 승격되어 분리되었고, 1995년 1월 1일 영천시와 영천군이 통합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2010년대 들어 --대구를 제치고[* 사실 대구는 가로수길 조성 등 적극적인 수목정책에 힘입어 예전만큼의 혹독한 더위를 자랑(?)하진 않고 있다. --물론 그래도 여전히 덥긴 하다.--]-- 더위로 유명한 지역이 되었다. 심지어 2016년 8월 13일 최고기온 '''39.6도'''[* 기상관측소가 있는 망정동 쪽은 원래 시원한편인데도 이정도라면 시내인 완산동이나 인구가 많은 야사동이나 아파트가 밀집해있는 망정동 쪽은 40도를 넘겼을 수도 있다.]를 기록하면서 '''해방 이후 공식적으로 가장 높은 기온'''(...)을 기록했다. 다만 1년만인 2017년 7월 13일 '''[[경주시]]에 39.7도로 역전당했다.''' 인근의 경주, 포항, 울산, 경산과 함께 최근 '''[[대프리카]]의 아성을 위협하고 있는 지역''' 중 하나이다.
         그리고 [[2018년]] [[7월 27일]] 신녕면에서 '''40.4'''도를 기록했다. [[8월]]이 아닌 [[7월]]에 기록했다는 점이 [[흠좀무]]하다.
         시장통에 있는 말죽거리터에는 육군 공병대와 함께 [[6.25 전쟁]] 초반인 1950년 7월 미 25사단 산하 포로수용소가 설치되기도 했었다. 이곳에서는 친공포로와 반공포로를 수용했었지만 전쟁 중후반 친공포로와 반공포로의 대립이 절정에 달하자 문제를 인식한 미군이 친공포로와 반공포로를 분리수용하기 시작하면서 주로 반공포로와 민간인 포로를 수용하는 역할을 담당했었다. 이곳은 이승만 대통령이 시찰차 방문한 적이 있었고 훗날 반공포로 환영식도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개최되었었을 만큼 규모가 큰 수용소였는데 규모가 있는 수용소였던 만큼 탈도 많았는지 1952년 5월 29일에는 포로들의 폭동이 일어나기도 했었고 그 후에도 포로들의 시위가 간간히 있었다고 한다. 그 외에도 미군들이 공산당의 사주를 받아 폭동을 모의했다며 경북도의원을 무단 체포, 납치하는 사건도 발생해 지역민들의 빈축을 샀었다고. 그 외에도 격전지였던 영천전투에서 발생한 인민군 포로를 수용하기 위해서 현재의 영남대학교 영천병원 부지 근처에 임시수용소를 설치하기도 했었다고 한다.
         2018년 07월24일 우리나라에서 기상관측이 시작된 1917년 이후로 최고기온 기록을 40.2도로 갈아치웠다.[[http://news.joins.com/article/22829080?cloc=rss%7Cnews%7Ctotal_list|관련기사]]
  • 이만섭 . . . . 6회 일치
         |임기 = [[1997년]] [[7월 1일]] ~ [[1997년]] [[7월 20일]]
         |임기 = [[1999년]] [[7월 9일]] ~ [[2000년]] [[1월 20일]]
         |임기 = [[1967년]] [[7월 1일]] ~ [[1971년]] [[6월 30일]]
         |임기 = [[1981년]] [[4월 11일]] ~ [[1985년]] [[4월 10일]]
         |임기 = [[1985년]] [[4월 11일]] ~ [[1988년]] [[5월 29일]]
  • 이인 . . . . 6회 일치
         |출생일= [[1896년]] [[10월 26일]](음력 [[9월 20일]])
         '''이인'''(李仁, [[1896년]] [[10월 26일]] ~ [[1979년]] [[4월 5일]])은 [[한국]]의 독립운동가이며 법률가, 정치인이다. 자(字)는 자옥(子玉), 호(號)는 애산(愛山). [[일본]] 유학 후, [[1923년]] 변호사시험에 합격, 변호사를 개업하고 이후 [[일제 강점기]] 당시 [[김병로]], [[허헌]]과 함께 독립운동가 및 애국자, 사회저명인사들을 상대로 무료변호를 하여 등과 함께 '''3대 민족 인권 변호사'''로서 명망을 날렸다. 일제 강점기 말기에는 창씨개명을 거절하였고, 해방 후 우익 정치인으로 활동하다가 [[이승만]]의 단독정부 수립론에 가담하였다. [[1948년]] [[5월]] [[제헌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고, 정부수립 이후 국회의원과 법무부장관을 역임하였다. [[1949년]] 7월에 [[반민특위]] 위원장에 임명되어 반민특위를 와해, 해체시켰다.<ref>{{서적 인용
         [[1917년]] 귀국했다가 [[1919년]]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1922년]] 일본변호사시험에 합격했다. [[1923년]] 5월 [[경성부]]에서 [[변호사]]·[[변리사]] 개업을 하여 7월 첫 변론으로 [[의열단]] 사건 피고인들의 변호를 맡았다. 이후 계속 민족운동사건의 변론을 맡아 [[6·10 만세 운동]]·[[고려혁명당 사건]]·[[의열단]] 사건·[[원산총파업]]·[[통의부사건]]·[[정의부사건]]·[[신간회]]민중대회사건·[[수양동우회 사건]] 등과 각종 소작쟁의, 필화(筆禍)·설화(舌禍) 사건과 [[친일파]]나 일본관리의 암살사건 등의 변론을 맡았고, 자청하여 [[안창호]](安昌浩)의 변호를 맡기도 했다. 그가 맡은 변호만도 약 1천 5백여건에 달한다.
         1949년 3월 [[서울]] [[종로구]]의 국회의원인 [[장면]]이 주미대사 임명 관계로 국회의원직을 사퇴하자 그는 보궐선거에 출마하였다. 3월의 보궐선거에서 당선되어 제헌국회의원이 되었고, 6월에 법무부장관직을 사임하였다. [[1949년]] 6월 경찰의 [[반민특위]] 특경대 습격사건 이후 [[7월 7일]]에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위원장이 되었다. 이인은 [[반민특위]] 특경대를 해산시키고 신변보호를 담당하던 경찰마저도 모두 철수시켜 '더이상 반민족 행위자의 체포가 없을 것'임을 분명히 하였다.<ref>1949년 7월 16일자 [[조선일보]] 기사 발췌</ref> 나아가 이인은 반민특위 해체를 주요내용으로하는 반민법 개정안을 제출하였고, 그나마 기소된 [[친일파]]도 제대로 처벌하지 못하는 결과를 초래시켰다.
         |임기 = [[1960년]] [[7월 29일]] ~ [[1961년]] [[5월 16일]]
  • 임수정(탤런트) . . . . 6회 일치
         || '''출생''' ||<(> [[1979년]] [[7월 11일]]([age(1979-07-11)]세), [[전라북도]] [[임실군]] ||
         2007년 야심만만에서 [[슈퍼주니어]]의 멤버 [[기범]]이 두 차례 언급하였다. 7월 17일 방송분에서 언급한 내용은 꿈에서 3일 연속으로 미녀와 데이트를 했는데 그녀의 이름을 알아내고 꿈에서 깨서 인터넷에서 검색해보니 임수정이었다는 내용. 11월 26일 두번째 언급에는 그 발언 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직접 봤는데 앞에서 말한 내용 때문에 부끄러워서 마주칠수가 없었다는 내용. [[http://www.tvreport.co.kr/ArticleShellView.asp?art_id=200707170004|#]] [[http://www.tvreport.co.kr/ArticleShellView.asp?art_id=200711270004|#]]
          * 나이 : 그녀의 프로필은 1980년 7월 11일 생으로 되어있다. 그런데 그녀가 본격적으로 알려질때부터 사실은 그보다 나이가 더 많다는 주장이 있었다. 그리고 그녀와 친한것으로 알려진 공효진이 그녀를 언니라고 부른다. 공효진은 프로필상 1980년 4월 4일생으로 되어있어 생일도 더 빠르고 방송이나 영화데뷔도 공효진이 더 빠른데 그녀를 언니라고 부르는것이다. 2008년 10월 13일 놀러와 215회에서 공효진이 그녀를 지칭할때 언니라고 불렀다. [[http://ent.jknews.co.kr/article/news/20081014/0087269.htm|#]] 또한 소속사 홈페이지가 새 개장을 했을때 그녀의 영문 프로필에 출생년이 1979년으로 나왔다가 소속사가 다시 수정했다. 그런데 2011년 10월, 소속사를 옮기면서 아무런 언급도 없이 기습적으로 포털사이트에 있는 프로필에 '''1979년생으로 출생년도를 바꿨다.''' 아마 1980년은 전 소속사에서 고집하던 나이인듯.
         2010년 11월 11일 김종욱찾기 제작보고회에서 나이가 들은듯한 모습으로 나와서 [[http://www.mlbpark.com/bbs/view.php?bbs=mpark_bbs_bullpen09&idx=853799&cpage=1&s_work=search&select=stt&keyword=%C0%D3%BC%F6%C1%A4|#]] 이제는 더 이상 동안이 아니라는 논란이 있었지만 사실은 메이크업이 잘못 돼서 그런것. 같은날 영화 쇼케이스 때는 멀쩡하게 원래의 동안 모습으로 나왔다. [[http://www.mlbpark.com/bbs/view.php?bbs=mpark_bbs_bullpen09&idx=855328&cpage=1&s_work=search&select=stt&keyword=%C0%D3%BC%F6%C1%A4|#]]
  • 전여옥 . . . . 6회 일치
         2004년 [[한나라당]]에 입당했다. 2004년 5월 제17대 국회의원에 비례대표로 당선됐다. 2004년 7월 제17대 [[대한민국]] 국회 통일외교통상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다.
         2006년 7월 11일 [[새누리당|한나라당]] 제8차 전당대회에서 4위로 최고위원에 당선됐다. 2006년 12월 19일《폭풍전야》1,2권 출간했다. 2007년 4월 한나라당 최고위원직을 사퇴했다.
         2008년 4월 민주당 후보자였던 [[김영주]]는 전여옥의 허위 학력의혹을 제기하기도 했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3&aid=0002046055 김영주,'전여옥 의원의 학력,경력사항은 허위사실입니다' :: 네이버 뉴스<!-- 봇이 붙인 제목 -->]</ref><ref>[http://www.kukinews.com/news2/article/view.asp?page=1&gCode=soc&arcid=0920872939&cp=nv 4·9 끝났지만… 고소·고발 이제부터 시작 (국민일보) (쿠키뉴스) 2008년 04.11일자]</ref>
         2007년 4월 "박근혜 대표 주변사람들은 무슨 종교집단같다"고 발언했을 때 그의 변심은 이미 예고됐었다. 2005년 당시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 시절 대변인으로 활약하며 '[[박근혜]]의 입'이라 불리던 전여옥 의원은 2012년 1월 출간된 자신의 자서전에서 "대통령이 될 수도 없고 또 되어서도 안되는 후보라고 생각한다”며 박근혜를 힐난했다.<ref>[http://www.hani.co.kr/arti/politics/politics_general/563704.html 전여옥 “박근혜, 대통령 될 수도 되어서도 안된다"][[한겨레 신문]] 2012. 12. 5, 2016. 10. 26 확인</ref> 전여옥은 2007년 7월 12일 여의도 당사와 [[이명박]] 캠프 사무실에서 잇따라 기자회견을 갖고 "이명박 전 시장을 돕는 길만이 정권교체의 지름길이라 확신한다"며 이명박 후보 지지를 공개 선언했다. 그는 "박 전 대표와 함께 간다면 편할 수도 있었겠지만 5년 뒤 과연 국민이 어떤 평가를 내릴까를 생각했다"는 말로 박 전 대표와의 결별이유를 설명했다.<!--<ref>[http://news.kukinews.com/article/view.asp?page=1&gCode=kmi&arcid=0920596089&cp=nv 전여옥 결국 “이명박 지지”… 박근혜와 공식 결별]</ref>:국민일보 홈페이지로 연결됨--> [[박사모]]에서는 전여옥 의원을 "표절과 배신의 여인"으로 규정한 뒤, "정치인이 배신을 밥 먹듯 하는 것은 자신의 신념에 거짓말을 하는 것으로, 그 피해는 고스란히 그 사람을 찍어 준 영등포 구민이 입게 된다"며 낙선운동을 하면서 당위성을 주장했다.<ref>[http://www.viewsnnews.com/article/view.jsp?seq=32526 박사모, '전여옥 낙선운동' 본격 돌입] [[뷰스앤뉴스]] 2008. 4. 5, 2016. 10. 26 확인</ref>
         2009년 11월 9일 전여옥은 불교방송 '김재원의 아침저널'과의 인터뷰에서 “당시 한나라당 지도부는 행정도시건설특별법이 나라를 위해 옳지 않은 것이지만, 이 법에 반대할 경우 충청권 의원들이 다 탈당하겠다고 하는 등 위기의식을 느껴 일단은 합의를 해주고 정권을 잡으면 되돌리자는 아주 쓰라린 선택을 했다고 본다”라고 주장했다.<ref>[http://www.viewsnnews.com/article/view.jsp?seq=56546 전여옥의 "집권 후 세종시 되돌리자는 선택했다" 발언 파문] 뷰스앤뉴스, 2009년 11월 11일자.</ref>
  • 조원진 . . . . 6회 일치
         2017년 4월 11일 비상대책위원회에서 경선 후보로 단독 입후보한 조원진을 대선후보로 공식 확정했다.
         [[새누리당(2017년)|새누리당]] 소속을 유지한 채 7월 8일 [[대한애국당]] [[창당준비위원회]]를 만들었으며 8월 30일 정식 창당했다.
         초기 정치 경력은 잘 알려져 있지는 않은데, [[이인제]]가 이끌던 [[국민신당(대한민국)|국민신당]]에도 가담해서 대구 수성 갑 지구당위원장을 역임한 적도 있었지만, 1998년 7월 재보궐선거를 앞두고 국민신당을 탈당하고 북구 갑 지역에 무소속으로 출마하면서 처음 선거 경력을 시작했다. 이때는 4등으로 보기 좋게 낙선했고, 16대 총선에서도 다시 무소속으로 북구 갑에 출마했지만, 역시나 4등으로 낙선했다. 이때까지는 [[극우]] 성향은 아니었다. 그리고 중국에서 사업을 했는데, 이때 몽골까지 진출하고 (몽골 현지 법인의 대표 역임) 세계한인무역협회의 상임이사 겸 베이징회장을 지냈다.
         2017년 6월 30일 신당 창당을 결의했다고 한다. 7월 8일 [[대한애국당]]으로 공식 창당했다.
         단식투쟁~~을 핑계로 다이어트~~ 중 이다. 2017년 10월 23일 단식 투쟁 11일만에 단식을 포기하고 휠체어에 앉아 실려나갔다.
         2018년 7월, 국감을 진행하는 도중에 더불어민주당 의원인 [[강창일]]이 질의하는 도중에[* 강창일이 민갑룡 경찰청장 인사청문회 보고서 채택을 두고, 통과시킬지 말지를 자유한국당에 재촉하는 장면이었다.] 옆에서 말꼬리를 잡고 늘어지며 언쟁을 벌였고 격노한 강창일에게 양아치 소리를 들었다.[* 하긴 3년 전인 [[2015년]]에도 강창일과 말다툼을 벌였던 적이 있었다.] ~~"완전 양아치 수준이구만!". "욕해봐".~~
  • 하동부대부인 . . . . 6회 일치
         |출생일 = [[1522년]] [[음력]] [[9월 4일]]
         |사망일 = [[1567년]] [[음력]] [[5월 18일]]
         하동부대부인은 영의정 하동부원군 [[정인지]]의 증손녀이며, 판중추부사 [[증직|증]] [[대광보국숭록대부]] [[영의정]] [[정세호]]의 딸로 1522년(중종 17) [[9월 23일(음력 9월 4일)]]에 태어났다. [[조선 중종|중종]]의 서자<ref>창빈 안씨 소생으로 중종의 서9남</ref> [[덕흥대원군|덕흥군]]과 가례를 올리고 하동군부인(河東郡夫人)으로 제수되었다. 자녀로는 3남 1녀를 두었고, [[1567년]](명종 22) [[6월 24일(음력 5월 18일)]] 향년 46세 일기로 별세하니 [[왕비]] 부모를 장사지내는 예로 장사지냈으며, 같은 해 [[8월 9일]] 신주를 대원군 옆 이실(異室)에 모셨다.
         {{인용문|옛적에 우리 선조 대왕께서 즉위하신 지 3년째 되는 기사년에 덕흥군을 추승하여 덕흥 대원군으로 하였고, 부인 정씨(鄭氏)를 봉하여 하동 부부인(河東府夫人)으로 하였으며, 자손이 습직(襲職)하여 계속 대군(大君)의 예에 따랐습니다.|《조선왕조실록》인조 13권, 4년(1626 병인 / 명 천계(天啓) 6년) 7월 27일(정유) 1번째기사}}
         하동부부인이 하동부대부인으로 오인된 것은 [[조선 영조|영조]] 즉위년에 [[조선 영조|영조]]의 생모인 [[숙빈 최씨]]의 추보를 논의할 때 예조판서 [[이진검]]이 "선조(宣祖) 때에 덕흥군(德興君)을 높여서 ‘대원군(大院君)’이라고 하였고, 군부인(群夫人)을 ‘부대부인(府大夫人)’이라고 하였다."고 잘못 진달하였기 때문인데<ref>《조선왕조실록》영조 1권, 즉위년(1724 갑진 / 청 옹정(雍正) 2년) 9월 21일(신유) 2번째기사</ref>, 사실 이는 [[이진검]]의 잘못이라기보다 [[조선 경종|경종]]2년에 부제학 이명헌이 [[조선 경종|경종]]의 사친인 [[희빈 장씨]]를 추보할 것을 상소하며 "선조조(宣祖朝)에 덕흥 대원군(德興大院君)을 추숭(追崇)하였을 때에 선정신(先正臣) 이황(李滉)의 의논을 인용하여, 빈(嬪)자 위에 특별히 하나의 대(大)자를 더하고, 이어서 본관(本貫)을 취하여 모부대빈(某府大嬪)으로 삼을 것"을 시초로 한다.<ref>《조선왕조실록》경종 9권, 2년(1722 임인 / 청 강희(康熙) 61년) 7월 17일(경자) 1번째기사</ref> 당시 동석했던 [[이진검]]이 이명헌의 말을 잘못 기억하여 영조 즉위년에 잘못 진달하였을 가능성도 없진 않으나 예조판서인 [[이진검]]이 사실을 전혀 확인하지 않고 진달하였다는 것은 무리가 있는 만큼 [[조선 경종|경종]]의 각별한 충신이었던 [[이진검]]이 부대빈(府大嬪) 작호의 유지를 위해 고의적으로 잘못 진달하였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이로 인해 이후 정씨의 작위는 다시 본래의 작호인 하동부부인으로 정정되어 불리기도 하다가 하동부대부인·하동부인·대원군부인으로 섞여서 일컬어지기도 하였는데 이는 아들의 지위에 따라 어머니의 작호에 대(大)를 더할 수 있다는 세종14년 때의 법령과 이미 부대부인의 작호를 쓴 여성이 있었던 전례에 의거해 마땅히 부대부인으로 삼았어야 할 정씨를 부부인으로 삼은 것은 잘못되었음을 뒤늦게 깨달은 탓으로 짐작된다.<ref>《승정원일기》[http://sjw.history.go.kr/inspection/search_result_list.jsp?oflag=0&M=0&query=%E6%B2%B3%E6%9D%B1%E5%BA%9C%E5%A4%AB%E4%BA%BA&set_id=-1&selK=1&selT=1&query_ime=%3Cspan+class%3D%22newbatang%22%3E%E6%B2%B3%3C%2Fspan%3E%3Cspan+class%3D%22newbatang%22%3E%E6%9D%B1%3C%2Fspan%3E%3Cspan+class%3D%22newbatang%22%3E%E5%BA%9C%3C%2Fspan%3E%3Cspan+class%3D%22newbatang%22%3E%E5%A4%AB%3C%2Fspan%3E%3Cspan+class%3D%22newbatang%22%3E%E4%BA%BA%3C%2Fspan%3E 하동부부인], [http://sjw.history.go.kr/inspection/search_result_list.jsp?oflag=0&M=0&query=%E6%B2%B3%E6%9D%B1%E5%BA%9C%E5%A4%A7%E5%A4%AB%E4%BA%BA&set_id=596421&selK=1&selT=1&query_ime=%3Cspan+class%3D%22newbatang%22%3E%E6%B2%B3%3C%2Fspan%3E%3Cspan+class%3D%22newbatang%22%3E%E6%9D%B1%3C%2Fspan%3E%3Cspan+class%3D%22newbatang%22%3E%E5%BA%9C%E5%A4%A7%3C%2Fspan%3E%3Cspan+class%3D%22newbatang%22%3E%E5%A4%AB%3C%2Fspan%3E%3Cspan+class%3D%22newbatang%22%3E%E4%BA%BA%3C%2Fspan%3E 하동부대부인], [http://sjw.history.go.kr/inspection/insp_result_s.jsp?M=0&oflag=0&set_id=596427&selK=1&selT=1&query=%E5%A4%A7%E9%99%A2%E5%90%9B%E5%A4%AB%E4%BA%BA&query_Result=&sinfo=&list_per_page=10&chkID=0&opAll=0&opP=0&opA=0&opB=0&opR=0&opT=0&opG=0&opW=0&qAll=&qP=&qA=&qB=&qR=&qT=&qG=&qW=&idS=&idE=&tc=2&pc=2&cp=1&startpos=0&pos=0 대원군부인]</ref><ref>《조선왕조실록》영조 117권, 47년(1771 신묘 / 청 건륭(乾隆) 36년) 8월 9일(정축) 1번째기사 中 "그 사체에 있어서 창빈(昌嬪)·대원군(大院君)·하동 부인(河東夫人)을 대진한 후에 어떻게 합제(合祭)할 수 있겠는가?"</ref>
  • 한상대 (검사) . . . . 6회 일치
         * 2011년 8월 ~ 2012년 11월 [[검찰총장]]<ref>[http://economy.hankooki.com/lpage/politics/201107/e2011071517292593130.htm 한상대 검찰총장 내정자 프로필]《서울경제》2011년 7월 15일 김현수 기자</ref>
         한 후보자의 부인과 두 자녀는 각각 1998년 5월, 2002년 9월에 용산구 서빙고동에서 용산구 이촌동으로 주소지를 옮긴 것으로 나타났다.<ref>[http://www.hani.co.kr/arti/politics/politics_general/488181.html 한상대 검찰총장 후보 ‘재산 25억’]《한겨레》2011년 7월 19일 석진환 기자</ref> 위장전입 덕에 큰 딸은 이촌1동에 있는 중학교에 입학했고 이후 모 외고에 진학한 뒤 아버지와 같은 고려대를 나왔다. 둘째 딸은 그러나 성악을 희망, 일반중학교가 아닌 예술계중학교에 진학하는 바람에 위장전입 두 달 만인 같은 해 11월 주소를 다시 서빙고동으로 옮겼다. 한 내정자는 이같은 사실을 시인하며 "딸이 친한 친구와 함께, 같은 이웃학교에 다니고 싶다고 해서 아내가 주소를 이전했던 것"이라고 군색한 변명을 했다. 그는 그러나 "부동산 투기 등 다른 사유는 전혀 없다"며 자녀 진학을 위한 위장전입은 문제될 게 없다는 인식을 드러내면서도 "결과적으로 위장전입을 한 것이 돼 송구스럽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ref>[http://www.viewsnnews.com/article/view.jsp?seq=77147 "딸이 친구와 학교 다니고 싶어해", MB지명 총장 '전원 불법']《뷰스앤뉴스》2011년 7월 18일 김동현 기자</ref>
         김학재 의원은 한 후보자가 서울 행당동 대지를 2006년 공시지가의 4분의 1 수준으로 매각한 것을 두고 ‘다운 계약서’ 의혹을 제기했다. 한 후보자는 “모친이 관리한 땅이라 계약서 작성에 관여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한 후보자는 고교 동창이 운영하는 벤처회사의 비상장주식 1000주를 500만원에 매입했다가 2000만원에 팔아 수익을 냈다는 주장에 대해선 “실제론 주식을 2000만원에 구입했다. 500만원에 산 것으로 돼 있는 것은 해당 회사에서 회계편의상 액면가로 세무신고를 했기 때문”이라고 해명했다. 그러면서 땅 매도 당시 부동산 매매계약서, 토지측량 도면, 토지 매수자의 사실확인서를 공개했다.<ref>[http://news.sbs.co.kr/section_news/news_read.jsp?news_id=N1000955222 인사청문회 앞둔 한상대·권재진 '의혹 백화점']《SBS》2011년 7월 22일 정혜진 기자</ref>
         조선일보는 2011년 7월 21일자 6면 <권재진·한상대, 같은 시점에 제주 한동네 오피스텔 샀었다>는 기사를 통해 한상대 후보자의 부동산 투기 의혹을 제기했다. 경향신문은 2011년 7월 21일자 1면 <한상대 후보 양도세 탈루 의혹>이라는 기사에서 "한상대 검찰총장 후보자가 서울시내 도시개발구역으로 지정된 땅을 다운계약으로 헐값에 팔아 양도소득세를 탈루했다는 의혹이 20일 제기됐다"고 보도했다.<ref>[http://www.injournal.net/sub_read.html?uid=22642§ion=section3 MB와 끈끈한 한상대 양파 검찰총장?]《인터넷저널》2011년 8월 5일</ref>
  • 한필수 . . . . 6회 일치
         |출생일= [[1900년]] [[11월 6일]] 음력
         '''한필수'''(韓弼洙, [[태양태음력|음력]] [[1900년]] [[11월 6일]] ~ [[태양태음력|양력]] [[1986년]] [[4월 10일]])는 대한민국의 교육자이며 국회의원이었다.
         본관은 청주. 호는 동석(東石)이다. 서울 장교동에서 육군 정위 용호(龍鎬)의 둘째 아들로 [[태양태음력|음력]] [[1900년]] [[11월 6일]] 태어났다. 출생일과 출생지가 상이한 기록도 있으나 유가족을 통해 확인한 결과 1900년이며 장교동이 정확하다.
  • 함인섭 . . . . 6회 일치
         [[1952년]] [[3월 6일]] 제6대 농림부 장관이 되었다. 농림부 장관이 되자 그는 정부 수립 직후에 시행한 [[토지개혁]] 당시 농지보상금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고, 8·15 광복 직후에 발생한 토지관련 분쟁과 토지보상 문제를 해결하였다. 그러나 [[1952년]] [[8월 28일]], 1952년의 중석불 사건으로 인책 사임<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52102000329201001&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52-10-20&officeId=00032&pageNo=1&printNo=1947&publishType=00020 ]</ref>하였다. 그는 중석불 사건의 피해자라는 시각도 있다.<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5032200099109001&editNo=15&printCount=1&publishDate=1995-03-22&officeId=00009&pageNo=9&printNo=9047&publishType=00010 ]</ref> 그밖에 그는 강원도 노동위원회 공익위원, 강원도 교육위원 등으로도 위촉되었다. [[1956년]] [[9월 12일]] UN가입추진위원회 전원위원회 강원도지부 부위원장<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56091200329201003&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56-09-12&officeId=00032&pageNo=1&printNo=3366&publishType=00020 ]</ref>이 되었다. 1957년 4월 20일 춘천농과대학 학장이 되고 1957년 5월 12일부터 [[1960년]] [[7월 7일]]까지 문교부 중앙교육위원회 위원을 겸임하였다. 그는 또 [[1960년]] [[7월 5일]]까지 고등고시 전형위원에도 위촉되었다.
         [[1962년]] [[8월 11일]] 다시 춘천농과대학 학장이 되었다. 1967년 12월 29일부터 1972년까지 농대 학장으로 농과대학원 원장도 겸직했다. 1968년 1월 1일 [[강원도교육위원회]] 교육위원에 위촉되었다.<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68010600329207022&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68-01-*06&officeId=00032&pageNo=7&printNo=6842&publishType=00020 ]</ref> 1968년 1월 1일부터 다시 춘천농과대학 학장에 재선임되었다. 강원대학의 학장으로 있으면서 그는 교내에 학술림을 조성하는데도 기여하였다.
         * 1957년 3월 ~ 1960년 7월 5일 고등전형위원
         * 1957년 4월 20일 ~ 1960년 7월 10일 춘천농과대학 학장
         * 1957년 5월 12일 ~ 1960년 7월 7일 중앙교육위원회 위원 겸임
  • 헌경왕후 . . . . 6회 일치
         |출생일 = 영조 11년(1735) [[음력 6월 18일]]
         |사망일 = 순조 15년(1815) [[음력 12월 15일]] (80세)
         '''헌경왕후 홍씨'''(獻敬王后 洪氏, [[1735년]] [[8월 6일]]([[음력 6월 18일]]) ~ [[1816년]] [[1월 13일]]([[1815년]] [[음력 12월 15일]]))는 [[조선]]시대 후기의 왕세자빈, [[추존]]왕비로, [[대한제국]]의 추존황후이기도 하다. [[조선 영조|영조]]의 차남 [[조선 장조|장조]](莊祖, 사도세자)의 비이자, [[조선 정조|정조]]의 어머니이다. 원래 시호는 헌경혜빈(獻敬惠賓)이었으나,<ref>순조실록 19권, 순조 16년(1816 병자년 / 청 가경 21년) 1월 19일(기해) 1번째기사, "혜경궁 시책문"</ref> [[대한제국 고종|고종]]때 왕후로, 다시 황후로 추존되었다. [[시호]]는 '''효강자희정선휘목유정인철계성헌경왕후'''(孝康慈禧貞宣徽穆裕靖仁哲啓聖獻敬王后)로, 정조가 내린 궁호인 '''혜경궁'''(惠慶宮) 또는 '''혜경궁 홍씨'''(惠慶宮 洪氏)로도 알려져 있다.
         [[1762년]](영조 38년) [[7월 4일]](윤[[5월 13일]]) 부왕 영조는 사도세자를 폐하여 서인으로 삼고, [[뒤주]]에 가두는 참혹한 형벌을 내렸다.<ref>{{웹 인용|url=http://sillok.history.go.kr/viewer/viewtype1.jsp?id=kua_13805113_002&grp=&aid=&sid=247168&pos=5|제목=영조실록 99권 38년(1762년 임오 / 청 건륭(乾隆) 27년) 윤5월 13일(을묘) 2번째 기사|확인날짜= |저자= 영조실록|날짜 =|출판사=조선왕조실록|원본일자 = 1762-5-13|인용=}}</ref>
         [[1762년]](영조 38년) [[7월 12일]](윤[[5월 21일]]) 이러한 이유 때문에, 세자는 뒤주에서 나오지 못하고 폭염 속에서 사경을 헤매었고 결국 뒤주에 갇힌 지 8일 만에 아사(餓死)하였다. 영조가 세자에게 '사도(思悼)'라는 시호를 내리면서, 홍씨에게는 '혜빈(惠嬪)'의 호를 내렸다.<ref>{{웹 인용|url=http://sillok.history.go.kr/viewer/viewtype1.jsp?id=kua_13805121_002&grp=&aid=&sid=0&pos=0|제목=영조실록 99권 38년(1762년 임오 / 청 건륭(乾隆) 27년) 윤5월 21일(을묘) 2번째 기사|확인날짜= |저자= 영조실록|날짜 =|출판사=조선왕조실록|원본일자=1762-5-21|인용=}}</ref>
  • 현석문 . . . . 6회 일치
         |시복일 = [[1925년]] [[7월 5일]]
         며칠 후에 그의 새 집에서 포졸들이 손쉽게 그를 체포하였는데, 이삿짐을 나르던 인부들이 고발하였기 때문이었다. [[7월 11일]] 포졸들이 그 집을 급습할 때, [[김임이 테레사]]와 [[이간난 아가타]], [[정철염 카타리나]] 그리고 [[우술임 수산나]] 등 몇 명의 여성 신도도 있었으므로, 그들도 모두 함께 [[체포]]되었다. [[감옥]]에서 현석문은 교우 수감자들을 격려하였다.
         어떤 사람들은 현석문이 극심한 [[고문]]을 받았다고 했으며, 또 어떤 사람들은 그가 고문을 면제 받았다고 하였다. 어쨌든 그는 [[사형]]을 선고받았다. 관찬 기록(《[[헌종실록]]》)에 따르면, 현석문은 [[1846년]] [[9월 19일]]([[음력 7월 20일]])에 [[참수형]]을 선고받았다고 한다. 또 다른 관찬 기록(《[[승정원일기]]》)도 같은 이야기를 한다. 그는 [[군문효수형]]도 선고받았다고 전한다.
         현석문 가롤로는 [[1925년]] [[7월 5일]]에 [[로마]] [[성 베드로 광장]]에서 [[교황]] [[비오 11세]]가 집전한 79위<ref name=103saints_britannica>{{백과사전 인용
  • 현아 . . . . 6회 일치
         이후 2009년 [[큐브 엔터테인먼트]]로 소속사를 옮겨 [[포미닛]]의 멤버로 합류해 다시 활동하기 시작했다. 이후 2010년 1월에는 첫 솔로 싱글 〈[[Change (현아)|Change]]〉를 발매했고, 골반춤이라는 안무를 유행시키며 성공적인 솔로 데뷔를 했다. 이어 2011년 7월에는 첫 번째 EP 음반 《[[Bubble Pop!]]》을 발매했고, 동명의 타이틀곡인 〈Bubble Pop!〉은 차트에서 상위권을 유지했다. 그리고 같은 해 12월에는 [[장현승]]과 유닛 그룹 [[트러블 메이커 (음악 그룹)|트러블 메이커]]를 결성해 2014년까지 활동하였다. 2012년 10월 두 번째 EP 음반 《[[MELTING]]》을 발매해 타이틀곡 〈Ice Cream〉으로 활동했고, 2014년 7월 세 번째 EP 음반 《[[A Talk]]》를 발매해 타이틀곡 〈빨개요〉로 활동했다. 2015년 8월 네 번째 EP 음반 《[[A+]]》을 발매했다. 2016년 그룹 [[포미닛]] 해체 후 8월 1일 다섯 번째 EP 음반 《[[A`wesome]]》을 발매했다. 2017년 5월 [[펜타곤 (음악 그룹)|펜타곤]] 멤버 후이, 이던과 함께 [[트리플 H (음악 그룹)|트리플 H]]로 활동 하였다. 8월 29일 여섯 번째 EP 음반 《[[Following]]》을 발매했다. 12월 4일 두 번째 싱글 앨범 《[[Lip & Hip]]》을 발매했다.
         이후 [[현아]]는 [[JYP 엔터테인먼트]] 공개 오디션을 통해 [[원더걸스]]의 두 번째 멤버로 합류했고 그룹에서 랩퍼를 맡았다. 2007년 2월 [[원더걸스]]의 데뷔 싱글 〈[[The Wonder Begins]]〉를 발매했고, 타이틀 곡은 〈Irony〉였다. 파워풀한 랩과 춤으로 "야생마"라는 별명도 얻었다.<ref name="as">{{뉴스 인용|저자=남안우 기자|제목=‘원더걸스’ 김현아, 건강상의 이유로 팀 탈퇴|url=http://www.mydaily.co.kr/news/read.html?newsid=200707301751501137&ext=na|출판사=마이데일리|날짜=2007-07-30|확인날짜=2008-12-31}}</ref> 2007년 5월 24일에는 [[안소희|소희]], [[브라이언]]과 함께 《[[쇼! 음악중심]]》 MC로 발탁되었다.<ref>{{뉴스 인용|제목=‘원더걸스’소희·현아 ‘쇼!음악중심’ 새MC|url=http://sports.khan.co.kr/news/sk_index.html?cat=view&art_id=200705242109433&sec_id=540101&pt=nv|출판사=스포츠경향|저자=조상인|날짜=2007-05-24|확인날짜=2014-06-29}}</ref> 하지만 MC에서 하차하고 나서 7월 [[원더걸스]]의 광고에도 참여하지 않는 등 탈퇴설이 돌았다. 이에 대해 소속사측은 "멤버 교체에 대해 논의한 것은 사실이다. 건강상의 이유로 문제가 있다"며 요양이라고 말했다.<ref name="세계일보">{{뉴스 인용|제목=원더걸스 멤버교체 위기 -­ 현아 이탈하나|url=http://www.segye.com/content/html/2007/07/31/20070731002528.html|출판사=세계일보|저자=이혜린|날짜=2007-07-31|확인날짜=2014-06-29}}</ref> 이후 건강상의 이유로 원더걸스에서 탈퇴한다고 공식 발표했다.<ref>{{뉴스 인용|제목=원더걸스 현아, 건강상 이유로 팀 탈퇴|url=http://star.mt.co.kr/view/stview.php?no=2007073016565270766&type=1&outlink=1l|출판사=머니투데이|저자=김원겸|날짜=2007-07-30|확인날짜=2014-06-29}}</ref> 실제로 [[현아]]는 [[만성장염]]을 앓고 있었고 세 번이나 탈진으로 쓰러지는 등 부모님의 반발을 샀다.<ref name="세계일보"/>
         2011년 4월 5일 [[포미닛]]은 [[한국]]에서의 첫 번째 정규 앨범 《[[4Minutes Left]]》를 발매해 타이틀 곡 〈거울아 거울아〉로 활동했다.<ref name="아시아경제"/> 또한 비슷한 시기 [[임정희]]의 〈[[Golden Lady]]〉에 피처링으로 참여했다.<ref>{{뉴스 인용|제목=임정희 ‘골든 레이디’ [[포미닛]] [[김현아]] 랩 피처링 지원사격 |확인날짜=2011-07-24|url=http://www.newsen.com/news_view.php?uid=201105030905191002|출판사=뉴스엔|저자=박영주|날짜=2011-05-03}}</ref> 2011년 6월부터는 [[MBC]] 《[[댄싱 위드 더 스타]]》에 출연했지만,<ref>{{뉴스 인용|제목=김현아, 6월 솔로컴백 동시 '댄싱위드더스타' 출연|확인날짜=2011-06-04|url=http://star.mt.co.kr/view/stview.php?no=2011052209433305110&type=1&outlink=1|출판사=머니투데이|저자=박영웅|날짜=2011-05-22}}</ref> 심사위원들에게 혹평을 받으며 다섯 번째 탈락자로 결정되었다.<ref>{{뉴스 인용|제목=김현아, ‘댄싱 위드 더 스타’ 탈락..심사위원 “심사할 수 없는 지경”|확인날짜=2011-07-24|url=http://n.breaknews.com/sub_read.html?uid=178679§ion=sc4|출판사=브레이크뉴스|저자=한누리|날짜=2011-07-16}}</ref> 현아는 2011년 7월 5일 첫 번째 EP 음반 《[[Bubble Pop!]]》을 발매했다. 이에 앞서 2011년 6월 30일 발라드풍의 수록곡 〈[[A Bitter Day]]〉를 공개했다.<ref name="Pop!">{{뉴스 인용|제목=김현아, 30일 발라드 ‘A Bitter day’ 선공개…‘솔로 출격’ 신호탄|확인날짜=2011-06-29|url=http://www.eto.co.kr/news/outview.asp?Code=20110629111326420&ts=130703|출판사=경제투데이|저자=곽민구|날짜=2011-06-29}}</ref> 이번 앨범의 동명 타이틀곡인 〈Bubble Pop!〉은 [[가온 디지털 차트]] 2위까지 올랐다.<ref name="가온">{{웹 인용|url =http://www.gaonchart.co.kr/main/section/search/list.gaon?Search_str=Bubble+Pop%21&x=43&y=19|제목 =가온 차트 > Bubble Pop! |출판사 =[[가온 차트]]|확인날짜 =2011-07-19}}</ref> 그러나, 2011년 8월 [[방송통신위원회]]에서 "Bubble Pop!"의 안무 중 일부가 청소년들에게 선정적으로 보인다며 안무를 수정할 것을 요정했지만, 소속사측은 안무를 수정하면 무대에 오르는 것이 의미가 없다며 활동을 중단한다고 밝혔다.<ref>{{뉴스 인용|제목=김현아 버블팝 활동중단 '또 선정성 논란, [[김현아]]가 추면 다 야해' |확인날짜=2011-08-05|url=http://artsnews.mk.co.kr/news/163166|출판사=아츠뉴스|저자=김하얀|날짜=2011-08-05}}</ref> "Bubble Pop!"은 평론가들로부터 혼합된 평가를 받았는데, 《이즘》에서 "캔디 팝의 요소가 잘 녹아들었음에도 제대로 방점을 찍지 못해 솜사탕같은 트랙이 되었다"고 평가했다.<ref>황선업.[http://www.izm.co.kr/contentRead.asp?idx=23086&bigcateidx=8&subcateidx=10&cTp=4 이즘 - Bubble pop!] 《이즘》. 2011-07 작성. 2011-12-16 확인.</ref> 영국의 《팝저스티스》는 "오늘의 노래"에 선정했고,<ref>{{뉴스 인용|제목=김현아 '버블팝', 英 팝사이트 '오늘의 노래' 선정… "가장 섹시" 찬사 |확인날짜=2011-07-22|url=http://sports.hankooki.com/lpage/music/201107/sp2011072010252095510.htm|출판사=스포츠한국|저자=김성한|날짜=2011-07-20}}</ref> 미국의 《스핀 매거진》은 "2011년 올해의 베스트 노래 20" 순위 중 〈Bubble Pop!〉을 9위에 선정했다.<ref>{{뉴스 인용|제목=김현아 '버블팝', 美스핀 선정 '2011 베스트송20'|확인날짜=2011-12-16|url=http://star.mt.co.kr/view/stview.php?no=2011121209445192085&type=1&outlink=1|출판사=스타뉴스|저자=박영웅|날짜=2011-12-12}}</ref> 이후 2011년 8월부터 [[도끼 (가수)|도끼]]가 피처링한 노래 "[[Just Follow]]"로 후속곡 활동을 잠깐 했다.<ref>{{뉴스 인용|제목=뮤직뱅크 김현아 just follow 무대 공개, 선정성 '제로' 카리스마 '폭발' |확인날짜=2011-08-13|url=http://artsnews.mk.co.kr/news/164401|출판사=아츠뉴스|저자=김풀잎|날짜=2011-08-13}}</ref>
         2014년 7월 28일에는 세 번째 미니 앨범 《[[A Talk]]》를 발매했고 타이틀곡 〈빨개요〉로 활동했다.
         ** 8월 11일 [[Mnet]] 《[[엠카운트다운]]》 1위
  • USS 피닉스 (CL-46) . . . . 5회 일치
         1941년 12월 7월 아침, 진주만에 기항해 있던 중 [[진주만 공습|일본군 전투기들의 공습을 받는다.]] 피닉스는 그 아비규환에서 비무장 상태로 탈출, 오후에는 해당 공습을 벌인 일본군 항공모함들을 수색하는 작전에 참가하였다.
         1943년 7월, [[국무장관]]이었던 [[코델 헐]]을 [[카사블랑카]]까지 수송하는 임무를 수행한 피닉스는 다시 태평양 전역으로 돌아온다. 같은 해 12월에는 글로스터 곶에 상륙하는 연합군을 지원하였으며, 1944년 1월에는 [[뉴기니]] 섬의 해안시설을 포격하는 임무를 맡았다. 2월에는 [[로스니그로스]] 섬에 상륙하는 연합군을 지원하였고, 3월에는 다른 연합군 순양함과 함께 일본군의 해안 포대를 깨부쉈다. 4월 22일에는 홀란디아[* 現 [[자야푸라]].]에 상륙하는 연합군을 지원하였고, 그로부터 1주일 후에는 근처 지역의 일본군 비행장을 포격, 연합군을 위협할 수 없게 하였다. 5월에는 또다른 상륙작전들을 지원하여 일본군의 초소를 초토화시켰다. 6월에는 해당 지역에 증원군을 수송하던 일본군 구축함들을 발견, 쫓아내었다. 7월에는 Numfoor[* Neumfoor라고 읽기도 하는 듯. 갓-구글님께서 한국어 표기를 말씀하시지 않으신다.]의 해안을 포격했다. 9월에는 말루쿠 제도의 [[모로타이]] 섬 상륙작전을 지원하였다.
         1945년 7월 에는 [[발릭파판]] 해안의 기뢰 제거 임무를 지원하였다.
         일본이 항복한 후에는 본토로 돌아와 대서양 함대에서 복무하였다. 1946년 2월 28일 예비역이 되었으며, 1946년 7월 퇴역. 아르헨티나에 넘겨지기 전까지 필라델피아에 정박해 있었다.
  • 권재진 . . . . 5회 일치
         |임기 = [[2011년]] [[8월 12일]] ~ [[2013년]] [[3월 11일]]
         '''권재진'''(權在珍, [[1953년]] [[7월 27일]] ~ )은 [[대구]]에서 출생한 [[대한민국]]의 [[법조인]] 및 검사이다. 대검차장, 서울고검장, 청와대 민정수석을 역임했으며, [[2011년]] [[8월 12일]] 이명박 정부의 마지막 [[대한민국 법무부|법무부]] 장관을 맡아서, [[2013년]] [[3월 11일]] 법무부 장관 퇴임을 했다.<ref>[http://media.daum.net/economic/stock/others/newsview?newsid=20130311184903997 권재진 법무부 장관 퇴임], 뉴스토마토, 2013년 3월 12일</ref>
         * [[2011년]] [[8월 12일]] ~ [[2013년]] [[3월 11일]] 제62대 [[대한민국의 법무부 장관|법무부 장관]]
         |임기 = [[2011년]] [[8월 12일]] ~ [[2013년]] [[3월 11일]]
  • 김대륙 . . . . 5회 일치
         6월 11일 [[kt wiz|kt]]를 상대로 6회초에 대수비로 들어온 후 6회말에 프로 첫 타석, 초구를 받아 쳐 좌전안타를 만들어냈다.
         7월 14일 청주구장에서 있었던 한화와의 경기에서 1아웃에서 나온 [[짐 아두치]]의 평범한 좌익수 플라이에 2아웃처럼 전력 질주하는 예술적인 뇌주루를 보여주면서 한화의 역전승에 큰 도움이 되었다.~~ 대륙의 기상. 대륙횡단.~~ 후에 집중해야 한다고 허구연이 한소리 하기도 했는데, 이번엔 수비하다가 이용규를 내야안타로 내보냈고 이게 결국은 끝내기가 되었다. 한화의 끝내기 승리가 결정된 이후 카메라가 김대륙을 클로즈업 했을 정도. 한마디로 나쁜 의미로 경기를 지배했다고 할 수 있다.
         5월 19일 경기에도 9번 유격수로 선발출장하여, 첫 타석 3루타를 기록했으나, 나머지 두 타석은 삼진으로 물러났다.-- 3루타를 이틀 연속 치다니 또 다른 거포유격수인건가… 는 무슨.-- 이후 엔트리 말소해서 2군에 지내고 있다가 7월 10일 연이은 난조로 말소된 [[조쉬 린드블럼]]와 교대되어 1군에 다시 올라왔다
         원래 퓨처스 올스타전 참전 자격을 얻었으나, 7월 10일 1군으로 올라오면서 자격을 잃고 대신 박정현이 나가게 되었다.
         7월 27일 두산에서 김성배와 1:1 트레이드로 온 [[김동한]]을 올리기 위해서 대신 1군에서 말소되었다.
  • 김대환 (법조인) . . . . 5회 일치
         1942년에 [[경상북도]] 에서 태어나 [[서울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하고 제8회 [[사법시험]]에 합격하여 육군 대위를 전역한 이후 판사에 임용되어 서울형사지방법원 [[서울고등법원]] 등에서 판사와 [[서울고등법원]] 등에서 부장판사를 하다가 [[서울고등법원]]에서 수석 부장판사로 재직하고 있을 때인 1999년 10월 11일에 [[수원지방법원]]장에 임명되었다. [[수원지방법원]]장에 임명된 직후인 11월 20일에 수원지역 주민들의 등기민원 불편을 해소할 목적으로 2000년까지 수원시내 택지개발지구에 2개 등기소 를 설립하였으며<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1&aid=0004559307]</ref> 2000년 6월에 [[최종영]] 대법원장이 제청하는 신임 대법관 후보로 거론되었으나<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5&aid=0000008261]</ref> 2000년 7월21일에 [[대전고등법원]]장으로 승진하였으며 2001년 2월 12일에 [[서울고등법원]]장으로 전보되면서 대법원장에 의해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위원에 지명되었다. 서울고등법원장을 끝으로 법관에서 물러났으며 이후 법무법인 율촌에서 송무 Group<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1&oid=016&aid=0000189786]</ref> 변호사를 하다가 2004년 3월 2일에 박영철 고려대 교수와 함께 대법원장 추천으로 공적자금관리위원회 민간위원에 임명되었다. 2013년 4월에는 [[서울중앙지방법원]]과 [[서울고등법원]]을 관할하는 서울법원조정센터 상임조정위원과 센터장을 맡았다.<ref>[http://news1.kr/articles/?1087614]</ref>
         서울형사지방법원 항소3부 재판장으로 재직하던 1988년 3월 5일에 "보행자가 녹색 신호를 보고 횡단보도에 들어선 이상 횡단 도중에 적색 신호로 바뀌더라도 다 건널 때 까지는 도로교통법 제48조 제3항에 의한 운전자가 보호해야 할 보행자에 해당되어 이런 의무를 위반해 사고를 낸 이상 피해자가 처벌을 원하지 않더라도 형사처벌 대상이 된다"며 공소기각 판결을 했던 원심을 파기하고 벌금 30만원을 선고했다.<ref>동아일보 1988년 3월 5일자</ref> 7월 30일에 [[전대협]] 의장으로서 교내외에서 각종 시위를 주도하여 1심에서 징역1년6월 자격정지2년을 선고받은 [[이인영]]에 대해 징역6월 자격정지2년 집행유예3년을 선고했다.<ref>경향신문 1988년 7월 1일</ref> 1989년 6월 8일에 변호사법위반으로 구속
         대한 항소심에서 "공판 전 증인신문은 무효"라며 원심 파기하고 무죄를 선고했다. 공판 전 증인신문제도에 대해 헌법재판소가 위헌 결정받은 이후 첫 판결이다.<ref>동아일보 1998년 4월 20일자</ref> 4월 28일에 [[대한민국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선거운동기간 전에 선거기획단을 운영하여 법정선거운동 비용을 초과한 혐의 등으로 기소된 [[이명박]]에 대해 [[공직선거법]]과 범인도피죄를 적용해 각각 벌금400만원, 벌금 300만원을 선고했다.<ref>경향신문 1998년 4월 29일자</ref> 6월 30일에 사전 선거운동으로 1심에서 징역8월 집행유예2년을 선고받은 [[박계동]]에 대해 벌금 600만원을 선고했다.<ref>동아일보 1998년 7월 1일자</ref> 11월 4일에 "[[이회창]] 후보 아들 이정연이 고의로 체중을 감량해 병역을 면제받았다"고 기자회견을 했던 전 서울병무청장 직원 이재왕에 대해 명예훼손과 공직선거법 위반으로 징역1년6월을 선고했다.<ref>동아일보 1998년 11월 5일자</ref> 11월 30일에 1심에서
  • 김성주(축구선수) . . . . 5회 일치
         4월 11일 [[선문대학교]]와의 [[대한축구협회 FA컵/2015년|FA컵]] 3라운드 홈 경기에서 선발 출전해서 전반 30분 오창현의 드로인을 머리로 받은후 오른발로 접어 상대 수비와 골키퍼를 속인 뒤 왼발슛으로 첫골을 기록했다. 팀은 2:0으로 승리하여 32강전에 진출했다.
         7월 1일 [[대구 FC]]와의 리그 원정경기에서 후반 종료직전 조나탄에게 실점하며 0:1 패배를 당했다. 이번 패배로 원정 연승기록은 7연승에서 끝나게 되었다. 9승 4무 4패, 리그 3위로 한계단 하락.
         7월 4일 [[강원 FC]]와의 리그 원정경기에서 전반 15분만에 헤난에게 2실점한 후 [[조원희]]가 1골을 따라붙었으나 경기 종료직전 벨루소에게 쐐기골을 실점하며 1:3으로 패하여 창단이후 첫 2연패를 당하고 말았다. 9승 4무 5패, 리그 3위 유지.
         7월 8일 [[고양 Hi FC]]와의 리그 홈경기에서 후반 타라바이의 PK골과 [[주민규(축구선수)|주민규]]의 추가골로 2:0으로 승리, 연패를 끊었다. 1득점을 기록한 [[주민규(축구선수)|주민규]]가 MOM 및 리그 21라운드 MVP 선정. 10승 4무 5패, 리그 3위 유지.
         7월 12일 [[경남 FC]]와의 리그 홈경기에서 전반 초반 선취골을 넣었으나 곧바로 동점골을 실점한 이후 양팀 키퍼들의 동반 선방쇼로 서로 수많은 찬스들을 놓치면서 1:1 무승부를 기록했다. [[김영광(축구선수)|김영광]]이 MOM 선정. 10승 5무 5패, 리그 3위 유지.
  • 서상기 (1946년) . . . . 5회 일치
         * [[2008년 6월]] ~ [[2010년 7월]] : 한나라당 대구시당 위원장
         * [[2012년 7월]] : 사랑의 장기기증운동본부 홍보대사
         [[2012년]] [[4월 11일]] [[대한민국 제19대 국회의원 선거|19대 총선]]에서도 대구 북구을에 출마하여 당선, 3선의원이 되었다.
         [[2012년]] [[7월 9일]] 열린 국회 본회의에서 19대 전반기 정보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ref>[http://www.mt.co.kr/view/mtview.php?type=1&no=2012070918443765916&outlink=1 서상기 국회정보위원장 프로필], 머니투데이, 2012년 7월 9일 변휘 기자</ref>
  • 아이린(레드벨벳) . . . . 5회 일치
         [[겁]]이 많은 편이다. 예리가 레드벨벳에 합류하기 전에 혼자 방을 쓸 때 불을 켜놓고 잤을 정도.[* 그러다 방을 바꿔서 조이와 예리가 한 방을, 언니 셋이 한 방을 쓰기도 한다. 레드벨벳은 활동 시기마다 일부러 방을 새로 배정한다고 한다. 7월 7일 활동 시기에는 웬디, 예리와 함께 썼다.] 그래서 그런지 자주 놀라는 모습이 포착된다. 또한 약간의 [[고소공포증]]이 있어서 계단 같은 걸 내려갈 때 멤버들이 손을 잡아주며--이게 약간..?--[* 최근 리얼리티에서는 손잡이를 잡으면서 혼자 내려오긴 했다.] SM 유리 엘리베이터를 올라갈 때도 밑을 내려다보지 못하고 구석에 있는다고 한다. 그런데 재밌는 사실은 [[롤러코스터]]는 잘 탄다는 것. 순간 무서운 것만 넘기면 스릴을 느껴서 좋다고 한다.
         미니 2집 The Velvet의 타이틀곡인 7월 7일에서 독무를 맡았다. 라디오 인터뷰나 비하인드를 보면 얼마나 독무가 웬디 파트라는 것에 대한 부담감을 갖고 열심히 했는지 알 수 있다. 웬디와 호흡을 맞추려 노력했다고.
          * 그러나, 7월 7일 안무와 독무 파트에서 논란이 있었다. 우선 안무가 서정적인 발라드곡에 어울리지 않는 격한 춤이었고, 아이린이 독무 파트를 맡은 이후 아이린의 춤이 어색하다는 평이 있어 이후 안무를 더 부드럽게 수정했다.
         || 2017년 2월 11일 ||<|2> SBS ||<|2> [[백종원의 3대 천왕]] || ||
          * [[SM엔터테인먼트|같은 소속사]] 선배인 [[소녀시대]]의 [[서현(소녀시대)|서현]]과 성을 제외한 본명도 같고 나이도 같다. 서현이 아이린보다 7년차 선배여서 소녀시대 팔방미인 4화에서 태연의 주도 하에 서로 "야"라고 부르기로 해 서현은 "야"라고 불렀으나, 아이린은 침묵했다. --서현 : 네. 저 나빠요.-- 그래도 "친구야"라고 부르는 건 성공했다. --하지만 다시 어색해졌다.-- [[http://www.vlive.tv/video/1406|#]][* 8분쯤부터 보면 됨] 2015년 [[MBC 가요대제전]]에서 서현과 악수하고 끝나고 나서 함께 가는 모습이 포착되었으며 친해진 것으로 보인다. 같은 소속사의 남자 선배인 [[샤이니]]의 [[민호]], [[Key(샤이니)|Key]]와도 1991년생 동갑이다. 특히 Key와는 [[대구광역시|동향]]이다. Key는 [[수성구]] 출신이고[* 다만, Key는 출신 학교를 보면 알겠지만 [[동구(대구)|동구]]에서 자랐다.(초등학교가 [[APRIL]] [[예나(APRIL)|예나]]와 같은 곳이다)] 아이린은 [[북구(대구)|북구]] 출신이다.[* 그래서인지 [[백종원의 3대 천왕]] '대구 맛골목 5'편(2017년 2월 11일 방송)에 키와 함께 게스트로 출연하기도 했다.] --공통점은 둘 다 1학군[* 중구, 북구, 동구, 수성구, 달성군 가창면]이라는 것--
  • 안기효 . . . . 5회 일치
         2012년 7월 6일 제대했다. 미니홈피 글로 미루어보면 새 진로를 모색하는 듯 보이나 아직 정확한 거취는 불명. 나중에 코치 직을 알아봤지만 새로운 길을 걷기로 마음을 정했다는 것이 게임조선 기사를 통해 밝혀졌다. 참고로 소속팀이었던 위메이드 폭스는 이미 2011년 8월에 해체되었다.
         2018년 7월 트위치에서 리액션으로 인기가 대박나면서 트위치 방송 비율이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트위치 유저들이 갑작스럽게 늘어나자 7월 17일 방송에서 트위치 유저들과 소통하던 중 영상 도네를 시도해보았고, 2017년도에 유행했던 자신의 클립을 보며 재밌다, 신세계를 발견했다며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으며, 영상 도네에 적극적으로 리액션해주며 첫 날부터 수 많은 클립을 만들어냈다. 영상 도네 두 번째 날인 7월 18일에는 짧은 시간이었음에도 트게더 핫클립 순위를 싹쓸이하는 등 반응이 뜨겁다. 7월 20일에는 트위치 단독 송출을 하였고, 앞으로 플랫폼에 대해 고민이 많은거 같다.
  • 안지만 . . . . 5회 일치
         |마지막 경기 = [[KBO (야구)|KBO]] / [[2016년]] [[7월 14일]] <br /> [[포항야구장|포항]] 대 [[롯데 자이언츠|롯데]]전 구원
         [[2002년 한국프로야구 신인 드래프트|2002년]] [[삼성 라이온즈]]의 2차 5순위(전체 40순위) 지명을 받아 입단하였다. [[2005년]]에 [[오승환]]과 함께 불펜에서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2010년]]에 뛰어난 모습을 보여 주며 [[2010년 아시안 게임|광저우 아시안 게임]]에 참가하여 금메달을 획득했다. [[권혁]], [[정현욱]]과 함께 불펜의 '안정권' 트리오라는 별칭이 있다.<ref>[http://osen.mt.co.kr/news/view.html?gid=G1008200005 오치아이 코치가 바라보는 안정권 트리오] - OSEN</ref> [[2011년 한국시리즈]]에서 4홀드로 맹활약하며 [[한국시리즈]] 우승에 기여했다. [[2013년]] [[8월 17일]] [[넥센 히어로즈|넥센]]전에서 우완 [[투수]]로써 최초의 100홀드를 기록했다.<ref>[http://sports.news.naver.com/sports/index.nhn?category=kbo&ctg=news&mod=read&office_id=076&article_id=0002377859 삼성 안지만, 우완 투수 최초 100홀드 대기록] - 스포츠조선</ref> 그리고 [[2014년]] 프로 데뷔 12년 만에 FA 자격을 획득하여 계약금 35억, 연봉 7억 5000만원으로 총액 4년 65억에 [[삼성 라이온즈|삼성]]과 재계약하였다. 그 뒤 [[2015년]] [[6월 5일]] [[롯데 자이언츠|롯데]]전에서는 [[KBO 리그]] 최초 개인 통산 150홀드라는 대기록을 달성했다. 하지만 [[윤성환]], [[임창용]]과 함께 해외원정 불법도박 혐의로 [[2015년 KBO 한국시리즈|2015년 한국시리즈]]에 승선하지 못했고 [[2015년 WBSC 프리미어 12|2015년 프리미어 12]]에도 탈락하였다. [[2016년]] [[7월 20일]]에 검찰로부터 불법 스포츠 도박사이트 자금 투자와 관련한 혐의를 받고 있다는 보도까지 나오면서 [[삼성 라이온즈]]는 다음날 계약 해지를 발표함에 따라서 유니폼을 완전히 벗게 되었고, 구단에서 퇴출되었다. 퇴출 이후에는 사회인 야구 선수들을 가르치며 지도자 생활을 하고 있다.
         [[삼성 라이온즈]]가 한국시리즈 경기를 앞두고 있었던 [[10월 15일]]에 팀의 [[스타]]급 플레이어로 평가받는 간판투수 3명이 마카오에서 바카라 도박을 즐겼다는 혐의로 검찰의 조사를 받았다. 며칠 뒤 [[삼성 라이온즈]]는 [[윤성환]], [[임창용]]과 함께 한국시리즈 엔트리에서 제외시켰다. 결국 팀은 [[두산 베어스]]에게 1승 4패로 패배하여 통합 5연패가 좌절되었다. 검찰 조사가 늦어지면서 같이 거론된 [[윤성환]]과 함께 [[삼성 라이온즈]] 전지훈련에 참가하였다. [[2016년]] [[4월 3일]] 1군에 재합류했다. 경찰은 "도박 혐의로 수사 중인 프로야구 선수들에 대한 수사를 마무리하려면 중요 참고인을 소환해야 하는데, (그들이) 외국에서 아직 안 들어오고 있으니 현재 상황이 계속될 경우 수사는 '참고인 중지' 결정으로 끝날 수 있다"라고 말하며 이들의 소재가 불분명하다고 수사 가능성을 낮게 봤다. 그러나 6월 초에 이들은 경찰 조사를 받은 것이 확인되었다.<ref>[http://sports.news.naver.com/general/news/read.nhn?oid=108&aid=0002510793 '원정도박 혐의' 안지만-윤성환, 수사보류 가능성↑.. 복귀?] - 스타뉴스</ref> 이후 7월 중순에도 불법 도박사이트 개설에 연루되어 검찰 조사를 받았다. [[2016년]] [[7월 21일]] 서울지방경찰청 광역수사대는 그를 불구속 입건해 기소 의견으로 검찰에 송치했으며, 이에 [[삼성 라이온즈]]는 [[KBO (야구)|KBO]]에 계약 해지 승인을 요청하기로 결정했다. 그는 사실상 퇴출됨으로써 유니폼을 벗게 되었다.<ref>[http://www.enews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650401 삼성라이온즈 안지만, 보류선수 명단 ‘제외’… ‘사실상 은퇴 수순’] -이뉴스투데이</ref>
         그러나 7월 21일 항소가 기각되면서 원심이 유지되었다.<ref>http://m.sports.naver.com/kbaseball/news/read.nhn?oid=001&aid=0009423503</ref>
  • 울릉군 . . . . 5회 일치
         2016년, 국내 기초자치단체 최초로 인구 네자리로 떨어지는 불명예를 얻기도 했다.[* [[http://biz.chosun.com/site/data/html_dir/2010/09/07/2010090701865.html?rsMobile=false|2005년엔 9,538명을 기록하기도 했는데, 1만 명 넘어섰다고 마냥 좋아하기도 그런 게 지역주민들에게 배값을 정부에서 지원해주는 걸 노리고, 유령주민이 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주민등록을 옮겨놓으면 10분의 1가격에 배를 타니 꽤나 혹하는 듯 하다.] 그러나 2017년 7월 기준으로 다시 1만 명을 넘어갔다...는 2017년 11월 기준 9,996명으로 떨어지며 네 자릿수가 되었다..가 2018년 6월 기준 10,010으로 다시 1만 명 선을 회복했다.~~다이나믹 인구~~
         2018년부터 울릉도에 1개 중대 규모의 해병대 전투병력이 순환배치될 예정이라 한다. 2017년 7월 6일, 울릉도에 거주하는 주민에 의하면 폐교된 모 초등학교에 해병대원 20여 명이 6월에 며칠 동안 깨끗이 청소하고 갔다며 주둔지로 쓸 것 같다고 한다. [[http://www.ksmnews.co.kr/default/index_view_page.php?idx=179567&part_idx=288|#]]
         공항이 없기에 고정익기 취항은 불가능하지만, [[헬기]] 노선은 몇 차례 시도된 바 있다. 울릉도행 첫 항공노선은 1989년 7월 25일에 개설된, 포항-울릉도 간 (주)우주항공의 16인승 헬기 노선이었다. 우주항공은 울릉도행 선박 노선을 운항하는 (주)대아고속해운의 계열사였다. 당시 편도요금은 46,200원이었고, 이걸 2010년대 물가로 환산하면 10만원쯤 된다고 보면 된다. 그러나 고작 취항 3일만인 [[7월 27일]], 노후된 기체가 기관 고장을 일으켜 추락, 13명이 숨지고 물론 헬기 운항은 중단되었다. 그 이후로도 몇차례 헬기가 취항한 적이 있으나 이런저런 이유로 모두 철수하여 현재 울릉도에 가는 교통수단은 배밖에 없다.
         2017년 7월 28일, [[롯데리아]]가 문을 열었다. 그리고 pc방도 몇 군데 위치해있고 게임도 나름 잘 돌아간다. --초딩 때 한 번쯤 들어봤을 "울릉도 PC방 한 시간에 5천원"-- 실제로는 5천원까진 당연히 아니다. 물론 좀 비싼 곳도 있기야 하지만 그래봐야 1000원 중후반대다.
  • 윤태진(아나운서) . . . . 5회 일치
         프리랜서로 퇴사한 [[최희]]를 대신해 [[2014년]] 프로야구 시즌부터 [[아이 러브 베이스볼]]의 평일 진행을 맡게 되었다. 기존에 맡았던 주말은 동기 언니 [[정인영(방송인)|정인영]]이 진행했다. 2015년 7월에는 드라마 [[복면검사]] 마지막회에 뉴스 앵커 역으로 카메오 출연했다.
          * 2016년 7월부터 2017년 1월까지 아시아경제TV 프로그램 <윤태진의 아이라인UP>의 MC를 맡았다.
          * 화요일 고정으로 출연중인 SBS [[배성재의 TEN]] 대타 DJ로 확정되었다. (2018년 6월 25일 ~ 7월 1일) [[배성재]] 아나운서는 2018 러시아월드컵 생중계로 출장..
          * 개인 사정으로 2018년 7월 31일을 마지막으로 [[배성재의 텐]] 화요일 코너 <아재판독기> 고정 게스트 자리에서 하차한다....인줄 알았으나 2018년 8월 7일부터 파일럿 코너로 함께한다. 즉 <아재판독기>는 코너 마지막이다. 하지만 제작진들의 장난에 속아서 2018년 7월 24일 방송에서 눈물을 흘렸다는..
  • 이관섭 (1961년) . . . . 5회 일치
         |임기 = [[2014년]] [[7월]] ~ [[2016년]] [[8월]]
         '''이관섭'''(李官燮, [[1961년]] [[7월 12일]] ~, [[대구광역시|대구]])은 대한민국의 공기업인이다.
         * 2013년 4월 ~ 2014년 7월 : [[산업통상자원부]] 산업정책실장
         * 2014년 7월 ~ 2016년 8월 : [[산업통상자원부]] 제1차관
         |임기 = [[2014년]] 7월 ~ [[2016년]] 8월
  • 이신학 . . . . 5회 일치
         | 임기 = [[2002년]] [[7월 1일]] ~ [[2006년]] [[6월 30일]]
         * 남구의회 미군기지 이전 대책위원회 간사(1995년 7월)
         * 대구광역시 남구의회 의원(1995년 7월)
         * 대구광역시의회 의원(1998년 7월)
         |임기 = [[2002년]] [[7월 1일]] ~ [[2006년]] [[6월 30일]]
  • 이열희 (1924년) . . . . 5회 일치
         만년에는 [[서울특별시]] 서초구 잠원동에 살다가 [[2012년]] [[8월 9일]] 새벽 4시 [[경기도]] [[고양시]] [[일산구]] [[대화동]]의 장성 건영아파트 304동 304호 자택에서 사망했다. 빈소는 [[경기도]] [[고양시]] 일산구 국민건강보험공단 일산병원 장례식장 5호에 마련됐으며 발인은 지난 11일 진행됐다. 장지는 [[대구광역시]] [[달성군]] [[화원읍]] 본리리 산9번지에 안장되었다.<ref name="pisots">[http://www.kda.or.kr/kda/modules/kdaNews/news/NewsView2.aspx?NewsID=75541 이열희 경북치대 명예교수 별세] 치의신보 제2058호(2012년 08월호)</ref>
         *** 당숙모: [[권기옥]](權基玉, [[1901년]] [[1월 11일]] ~ [[1988년]] [[4월 19일]], '''이상정'''(李相定)의 부인. 여성 비행사, [[대한독립군]] [[대령]])
         *** 고종사촌누나 : [[윤덕주 (농구인)|윤덕주]](尹德珠, [[1921년]] [[6월 23일]] - [[2005년]] [[7월 8일]]<ref>[http://www.hani.co.kr/arti/society/obituary/48641.html 윤덕주 농구협회 명예회장 별세] 한겨레신문 2005.07.08</ref>), 농구선수, [[대한체육회]] 부회장·명예회장 역임
         * 부인 : [[박부남 (1932년)|박부남]] (朴富南, [[1931년]] 8월 12일 ~ [[2018년]] [[1월 11일]]), 소아과 의사
         * 장모 : 남원양씨 순이(南原梁氏, [[1907년]] [[8월 11일]] - ?), 양재형(梁在亨)의 딸
  • 이현보 . . . . 5회 일치
         '''이현보'''(李賢輔, [[1467년]] [[8월 28일]]([[음력 7월 29일]])~ [[1555년]] [[7월 1일]]([[음력 6월 13일]]))는 조선 연산군, 중종 때의 문신이며 학자이다. 자는 비중, 호는 농암(聾巖)·설빈옹(雪賓翁), 본관은 [[영천 이씨|영천]](永川)이다. 시호는 효절(孝節)이다.
         1542년(중종 37) 76세 때 지중추부사에 제수되었으나 7월, 병을 핑계로 벼슬을 그만두고 낙향하였다.
  • 이희근 (1929년) . . . . 5회 일치
          | 설명= 1981년 11월 11일 당시의 이희근 공군참모총장
         * 1955년 공군 소령 진급 1개월만에 공군본부 감찰감실 작전장교 보임(1955년 7월).
         * 1962년 공군 제1초급훈련비행전대장 보임 3개월만에 [[대한민국 공군|공군]] [[1성 장군|준장]] 진급(1962년 7월).
         * 1970년 공군본부 감찰감 보임 2개월 후 공군본부 군수참모부 부장 보임과 동시에 [[대한민국 공군|공군]] [[2성 장군|소장]] 진급(1970년 7월).
         * 1982년 국방부 촉탁위원(1982년 7월 24일).
  • 장세용 . . . . 5회 일치
         ||<bgcolor=#1870B9> '''{{{#FFFFFF 출생일}}}''' ||<(> [[1953년]] [[7월 25일]] ([age(1953-07-25)]세) ||
         ||<bgcolor=#1870B9> '''{{{#FFFFFF 임기}}}''' ||<(> [[2018년]] [[7월 1일]] ~ ||
         7월 2일, 시정 첫 날부터 친박단체가 구미시청 앞에서 새마을운동 사업 재검토에 반대하는 집회를 벌였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469&aid=0000311116|#]]
         7월 6일, 이철우 경상북도지사와의 면담에서 새마을운동 사업 축소에는 한발 물러섰고, 대구취수원 구미 이전에는 구미시민 동의하에 이전하는 것으로 의견을 밝혔다.
         9월 11일, 자유한국당 지도부가 구미를 방문하였다. 하지만, 장 시장은 10일부터 4박 5일로 자매 결연 20주년 행사를 위해 중국 창사시에 출장갔기에 만나는 일은 없었다.
  • 정찬성 . . . . 5회 일치
         2013년 7월 개최예정인 'UFC 162' 에서 [[리카르도 라마스]]와 격돌하는 것이 사실상 확정되었다. 이 매치는 페더급 타이틀 도전자 결정전일 확률이 높은 상태...였는데 [[앤소니 페티스]]가 무릎부상으로 결장하게 되면서 '''[[조제 알도]]와 타이틀전이 확정되었다!!'''
         2017년 5월 13일, 정찬성이 SNS에 본인과 [[최두호]]가 2017년 7월 29일(한국 기준 30일)에 열리는 UFC 214에 출전한다고 밝혔다! 최두호의 상대는 15위 바로 아래 수준의 안드레 필리. 그리고, 정찬성의 상대는 '''페더급 랭킹 3위의 [[리카르도 라마스]]'''이다. 정찬성과 라마스의 경기는 4월부터 각종 해외 종합 격투기 소식에서 추진되고 있다는 말이 나와서 어느정도 예상되었었다. [[UFC]]에서 공식으로 정찬성의 상대가 라마스라고 하지는 않았는데 각종 해외 격투기 소식에서 정찬성 vs 라마스가 성사되었다는 뉴스가 나왔고, 정찬성 본인도 라마스와 잘 싸우고 오겠다고 한 것으로 보아 둘의 경기도 확정인 듯 하다. 드디어 5월 말, UFC에서 공식적으로 '''정찬성과 라마스의 경기'''를 발표하였다. 그리고 정찬성이 이번 경기에서 이길 경우 한 경기를 더 치루고 다시 다시 타이들전에 도전할 것으로 기대되었지만...
         2018년 7월 중반, 정찬성이 원하던 대로 '''프랭키 에드가'''와 경기가 추진 중이라는 뉴스가 각종 해외 격투기 소식에서 나왔다. 게다가 이 소식이 나올 때쯤 정찬성이 인스타그램에 올린 글에 ___#기회, #도전, #coming soon___ 해시태그가 붙어 있었는데 아마도 에드가와의 경기에 대한 암시였을 것으로 보인다. 공식적으로 성사될 가능성이 높을 것으로 보이며, 각종 해외 소식에 의하면 2018년 10월 7일에 열릴 UFC 229에서 이 경기가 있을 것을 것이라고 한다.
         [[2018년]] 7월 20일에 드디어 [[프랭키 에드가]] vs 정찬성이 공식적으로 확정되었다. 다만, UFC 229가 아닌 [[11월 11일]]에 열릴 UFC Fight Night 139에서 경기가 있을 것이며, 정찬성의 경기는 그 대회의 '''메인 이벤트'''로 결정됐다. 5라운드 경기로 에드가가 5라운드 판정 경기에 능숙하다는 점 때문에 불안감을 주고 있다. 게다가 이 경기의 장소는 [[미국]] [[콜로라도 주]]의 [[덴버]]인데, 이 지역은 해발 1,500m 정도의 상당히 높은 곳에 있기 때문에 정찬성이 이로 인해 체력이 저하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도 있다. [[http://naver.me/GJeUjkcH|#]] 만약 정찬성이 에드가를 이긴다면 타이틀전에 많이 가까워지게 된다. 정찬성의 말에 의하면 승리할 경우 타이틀전 보장을 약속받았다고 한다.
  • 차명진 . . . . 5회 일치
         * [[2006년]] 7월 ~ [[2008년]] 5월 : 제17대 [[한나라당]] 국회의원(부천시 소사구)
         * [[2010년]] [[7월 23일]] 에서 24일까지 참여연대가 실시한 최저생계비로 한달나기 캠페인에 참여한 이후 후기가 논란이 됐다. 이 후기에서 차명진 의원은 "나는 왜 단돈 6300원<ref>[http://media.daum.net/politics/others/newsview?newsid=20100727034204810 “6300원짜리 황제의 삶” 차명진 의원 최저생계비 체험 수기 논란]</ref> 으로 황제와 같은 생활을 할 수 있었을까? 물가에 대한 좋은 정보와 마음껏 돌아다닐 수 있는 건강이 있었기 때문이다"라고 글을 써 논란을 빚었다. 이에 대응하여 민주노총은 개드립(개+애드립(ad lib))과 오버질에 불과하다며 비난했다. 차명진 의원은 결국 물의를 빚어서 죄송하다는 말로써 사과했다.
         * [[2011년]] [[9월 18일]] 국민일보의 "[정치자금 겉과 속-(4) 정치 후원금은 쌈짓돈] 이발비 12만원·안경 구입비 45만원 쓰고 “의정활동용”"이라는 기사 <ref>{{뉴스 인용|제목=`[정치자금 겉과 속-(4) 정치 후원금은 쌈짓돈] 이발비 12만원·안경 구입비 45만원 쓰고 “의정활동용`|url=http://news.kukinews.com/article/view.asp?page=1&gCode=kmi&arcid=0005364841&code=11121100|출판사=국민일보|날짜=2011-09-18}}</ref> 에 의하면 차명진은 2010년 5월 27일 업무용 안경 10만원, 6월 23일 다시 업무용 안경 45만원, 7월 1일에도 업무용 안경 45만원, 9월 8일 진료비 21만 9100원, 11월 28일 목도리 4만5천원, 12월 8일 셔츠 3만9천원을 각각 '의정활동용'으로 신고했다.
         * 2011년 [[10월 11일]] 국회 본회의 대정부 질문에서 서울시장 박원순 후보를 "양아치", "삥" 등의 적절한을 총동원해 원색적이 비난해서 논란이 됐다. "박씨는 한 손으로 채찍을 들어 재벌들의 썩은 상처를 내리치면서 다른 한 손으로는 삥을 뜯는 식으로 사업을 운영해왔다. 이는 악어와 악어새의 동거"라며 "시민운동이 아니라 저잣거리 양아치의 사업방식"이라고 박원순 후보를 양아치로 규다했에 대해 투명하게 재정상태를 공개해온 시민운동단체의 활동을 양아치로 묘사한 것에 많은 공가이 어다
         |임기 = [[2006년]] [[7월 27일]] ~ [[2008년]] [[5월 29일]]
  • 천호선 . . . . 5회 일치
         노무현 대통령 청와대 국정상황실장, 대변인, 홍보수석비서관 등 요직을 두루 역임한 바 있으며, [[2015년 7월]] 까지 [[정의당 (대한민국)|정의당]] 대표직을 맡았다.
         * 2010년 7월 28일: 국회의원 재 · 보궐 선거(서울특별시 은평구 을)
         * 2013년 7월 ~ 2015년 7월 : [[정의당 (대한민국)|정의당]] 대표
         학생운동시절 활동을 함께했던 [[권태홍]]의 설득으로 [[국민참여당]] 창당기획에 참여하게 되었다. 창당 후 당 최고위원으로 선출되었다. 그리고 [[2010년]] [[7월 28일]] [[2010년 대한민국 재보궐선거|재보선]]에 [[서울특별시]] [[은평구]] 을 지역에 공천되어 출마하였으나 [[민주당]]과의 야권 단일화를 위한 여론조사에서 [[장상]]후보에 패해 사퇴하였다.
  • 최덕희 . . . . 5회 일치
         '''최덕희'''(崔德喜, [[1966년]] [[7월 27일]]([[음력 6월 10일]]) ~ )는 [[대한민국]]의 [[성우]]이다.
         캐나다 [[밴쿠버]]로의 이주 후 [[2007년]] 7월 25일까지 현지 한인 [[라디오 방송국]]인 [[라디오서울 (캐나다)|라디오서울]]에서 《'''최덕희의 굿모닝 밴쿠버'''》라는 [[라디오]] 프로그램의 진행을 맡았다. 2014년 4월부터 6월까지 웹라디오 방송으로 《최덕희의 헬로우 밴쿠버》을 진행하였다. 2014년 7월부터 8월까지 라디오 방송 앱 '라디오벤쿠버입니다'로 《최덕희의 해피타임》을 진행하였다.
         * [[포켓몬스터|포켓몬스터]] ([[SBS]]) - [[지우 (포켓몬스터)]] '''한지우''' (1대)<ref>1999년 7월 ~ 2002년 11월</ref>
  • 한선교 . . . . 5회 일치
         * 2004년 7월: 국회 건설교통위원회 위원
         * 2008년 7월 ~ 2009년 9월: [[한나라당]] 홍보기획본부 본부장
         * 2012년 7월 ~ 2013년 3월: 제19대 국회 문화체육관광방송통신위원회 위원장
         * 2018년 7월 ~ : 제20대 국회 후반기 정보위원회 위원
         * 2018년 7월 ~ : 제20대 국회 후반기 문화체육관광위원회 위원
  • 홍국영 . . . . 5회 일치
         '''홍국영'''(洪國榮, [[1748년]] ~ [[1781년]] [[4월 28일]]([[음력 4월 5일]])<ref>정조실록 11권, 정조 5년 4월 5일 세 번째 기사</ref>)은 [[조선]] 영조,정조대의 [[세도]] 정치가. [[본관]]은 [[풍산 홍씨|풍산]](豊山)이며, [[자 (이름)|자]]는 덕로(德老)이다. 세손궁의 궁료(宮僚) 시절 때부터 [[조선 정조|정조]](正祖)의 총애를 얻고, 정조 즉위 후 부홍파(扶洪派)를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했다. 세간에는 흔히 권력을 잡은 후 세도를 부리다가 축출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 축출 이유에 대해서는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다.
         [[1776년]] 3월 정조는 즉위 3일 만에 그를 전격적으로 [[승정원]] [[동부승지]]에 발탁했다. 이어 7월에는 승정원 최고직인 [[도승지]]로 승진시킨다. 이후 그는 정계에서 물러날 때까지 거의 줄곧 도승지직을 맡았으며(원빈 사후 약 2개월 동안 물러났던 적이 있었음) 이 당시 도승지의 별칭인 "지신사"는 곧 홍국영을 가리키는 대명사처럼 사용되었다고 한다. 이 밖에 문관으로는 경연 참찬관, 춘추관 수찬관, 예문관 직제학, 홍문관 제학, 규장각 직제학, 이조참판, [[대사헌]] 등의 역임했다.
         군문의 장임으로는 정조 즉위년 11월 수어사에 임명되었던 것을 시작으로 잠시 총융사를 거쳐 [[1777년]] 5월에는 금위대장에 임명되었으며, 이후 대개 금위대장과 훈련대장을 돌아가며 맡았다.(그러나 훈척만이 맡을 수 있는 호위대장에 임명된 적은 없다.) [[1777년]](정조1년) 7월, 전술한 [[홍상간]], [[홍계능]]의 궁궐자객침투 사건이 일어났을 때 이 사건 연루자에 호위청의 무사가 포함되어 있었던 이유로 호위청을 축소하였는데 <ref> 이 때문에 호위청은 3청에서 1청으로, 인원은 1000명에서 350명 가량으로 축소되었다. </ref>, 대신 숙위소(宿衛所)를 창설하고 홍국영을 그 대장에 임명 하였다. 정조는 숙위대장에게 특별히 대장패와 전령패를 차게 하며, 안으로 위장, 부장, 금군과 도감의 군병, 각문의 수문장ㆍ국별장과 밖으로 궁궐 담장 바깥에 삼군영의 입직하는 순라까지 매일 숙위대장에게 보고하도록 조치했다. 이런 보직들은 대개 겸직이었으며 그의 대표적인 보직은 도승지와 훈련대장/숙위대장, 약원부제조였다.<ref>홍국영은 (원빈 사후 2개월 가량을 제외한) 집권 기간 대부분 동안 약원부제조직을 맡았다. 이는 임금의 최측근인 그가 임금의 생명과 건강을 책임지고 보살핀다는 의미도 있지만 동시에 하루동안 임금과의 공식적인 면대를 2회 이상 가질 수 있게 하기 위한 조치였던 것으로도 해석된다.</ref> 그외 각종 제거 역시 다수 겸직하였으며 잡류 제거직으로 인한 격무의 어려움을 호소하는 기록도 종종 보인다.
         [[1779년]] [[음력 9월 26일]] 홍국영은 자신이 맡고 있던 모든 조정의 실직(實職)에서 물러난다는 뜻을 담은 은퇴 상소를 올렸으며, [[정조]]는 당일 이를 수락한다. 이때 정조는 불과 32세의 홍국영에게 [[봉조하]] 직함을 내려주는데, 일찍이 백발의 봉조하는 있어도 흑발의 봉조하는 없었는데, 이제 있게 되었다고 하여 그는 “흑두봉조하”라고 불리게 된다. 《한중록》과 《정종대왕행장》 등 사후적인 기록에서는 공통적으로 홍국영이 자진 사퇴의 형식으로 물러난 것 자체가 정조의 뜻이었다고 전하고 있어 정설로 통하나, 이와 같이 사퇴시킨 정확한 이유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확인된 바 없다.
         임기= [[1776년]] [[3월]] ~ [[1779년]] [[음력 9월 26일]]
  • 화완옹주 . . . . 5회 일치
         '''화완옹주'''(和緩翁主, [[1738년]] [[3월 9일]] ([[음력 1월 19일]]) ~ [[1808년]] [[5월]])는 조선의 제 21대 왕 [[영조]]와 [[영빈 이씨]]의 딸이다. 이름은 용완(蓉婉) [[조선 장조|사도세자]]의 친동생이자 조선의 제 22대 왕 [[정조]]의 고모이기도 하다. [[정후겸]]은 그녀의 양자이다.
         [[1749년]](영조 25) [[7월 6일]] [[소론]]의 거두 [[정휘량]]의 조카이자 이조 판서와 [[의정부]][[우의정]]을 지낸 [[정우량]](鄭羽良)의 아들 [[정치달]]과 혼인하였다. 정우량은 [[우의정]]까지 지냈고, 사후에는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정치달과의 사이에서 딸을 낳았으나 일찍 죽었다. 남편을 일찍 여의자 시댁 일가의 아들인 [[정후겸]]을 데려다가 양자로 삼았다.
         ** '''생어머니''' : [[영빈 이씨|소유영빈 이씨]](暎嬪 李氏, 1696년 7월 18일~1764년 7월 26일)
         **** 조카며느리 : [[의빈 성씨]](宜嬪 成氏, 1753년 7월 8일~1786년 9월 14일)
  • 권은희 (1959년) . . . . 4회 일치
         * 2009년 7월 ~ 2010년 9월: (주)KT네트웍스 BIZ부문장(전무이사)
         * 2014년 8월 ~ 2015년 7월: 새누리당 대변인
         * 2017년 7월 ~ 2018년 7월 : 한국여성의정 대구여성아카데미 원장
  • 김숙자 (1389년) . . . . 4회 일치
         [[1422년]](세종 4) [[5월]] 종사랑으로 승진, 성균관학록이 되었다. 아들 김종직에 의하면 [[1423년]] 김주가 한성으로 간 뒤, 장인 한변(韓變)을 불러서 [[사헌부]]에 소송을 제기하였다고 한다. [[사헌부]]에 소환된 그는 대질심문을 받았으며 낙직(落職)당하고 고향으로 내려왔다 한다.<ref name="ginyon"/> 고령현감을 거쳐, [[1423년]](세종 5) [[7월]] 성균 직학(成均直學)이 되었을때, [[사헌부]]가 [[세종대왕]]에게 그가 자식이 있는 조강지처를 망령되이 서얼(庶孽)이라 일컬어 아무 까닭도 없이 버려 이별하였으니, 형률에 의거하면 곤장 80대를 치라는 계를 올렸다.<ref>세종실록 21권, 1423년(세종 5년, 명 영락 21년) 7월 4일 임오 3번째기사, "성균 직학 김숙자를 처벌하다"</ref> [[1431년]] [[7월]] 모친 유씨가 죽어 밀양에서 분상했는데, 8월 아버지도 사망하였다. 그는 할머니 김씨부인 묘소 하에 빈소를 마련하였다. 이후 3년간 복상하였다. [[1433년]] 가을 상복을 벗고 [[밀양]]으로 돌아왔다.<ref name="ginyon"/>
         [[1440년]](세종 22) [[선교랑]], 1441년(세종 23) [[1월]] 김해교수관 노호(盧浩)와 보직상환 변경되어 [[김해]]로 내려갔다. 이듬해 2월 남부령(南部令)이 되었다가 특별히 동반직을 받아 승의교위(承義校尉)에 제수되고,중군섭부사직 겸 성균관주부(中軍攝副司直兼成均注簿),남학교수관(南學校授官)이 되었다가 그해 11월 승훈랑(承訓郞)이 되어 고령현감(高靈縣監)으로 나갔다. [[1445년]] [[2월]] 승의랑이 되었다가, 지방의 수령들의 직급을 1계급씩 강하한다는 명에 따라 강임되었다. [[1447년]](세종 29) 10월 다시 승의랑으로 환급되고, 11월에 [[성균관]]주부 겸 남학교수관, [[1448년]] [[7월]] [[교서관]]교리가 되었다가 한달만에 전제경차관(田制敬差官)에 임명되어 [[전라도]] [[남원]], [[옥과]], [[장흥]], [[순천]], [[장흥]] 등을 순시하고 그해 [[10월]]에 봉훈랑으로 승진한 뒤, 12월에 도성으로 되돌아왔다.<ref name="ginyon"/> [[1450년]](문종 즉위) [[8월 13일]] 지풍기군사(知豊基郡事)로 발령, 부임하였다.
  • 김시진 . . . . 4회 일치
         '''김시진'''(金始眞, [[1958년]] [[5월 8일]] ([[1958년]] [[음력 3월 20일]]) - )은 전 [[KBO 리그]] [[롯데 자이언츠]]의 [[투수]]이자, 현 [[KBO (단체)|KBO]]기술위원장이다.
         }}</ref> [[7월 9일]] 삼미전(대구)에서 8회 강우콜드 완봉승을 기록하여<ref>{{뉴스 인용
         {{s-ttl | title = 제2대 [[현대 유니콘스]] 감독 | years = [[2006년]] [[11월 6일]] ~ [[2008년]] [[3월 11일]]}}
         {{s-ttl | title = 제15대 [[롯데 자이언츠]] 감독 | years = [[2012년]] [[11월 11일]] ~ [[2014년]] [[10월 17일]]}}
  • 김정혁 . . . . 4회 일치
         그리고 두 번째 출장 경기인 4월 28일 LG전에서는 [[임지섭]]을 상대로 안타를 기록했다. 만 서른살에 나온 프로 첫 안타. 이후로는 [[구자욱]]이 다시 주전 1루수로 복귀하면서 대타나 대수비로 나오다가 [[채태인]]과 [[김태완(1981)|김태완]]의 복귀가 다가온 5월 11일에 1군 엔트리에서 제외됐다.
         개막전 엔트리에 들지 못하면서 2군에서 시즌을 시작했고, 4월 11일 1군에서 빠진 [[정인욱]]을 대신해 12일 1군에 등록됐다. 4월 22일 [[정인욱]]이 1군에 올라오자 1군에서 제외됐다. 5월 28일 [[김현우(야구선수)|김현우]], [[최선호(야구선수)|최선호]]와 함께 1군에 올라왔다.
         그러나 조동찬이 ~~유리몸답게~~ 2일 만에 부상으로 빠지며 다시 주전 자리를 차지했지만 [[아롬 발디리스]]와 [[구자욱]]이 차례대로 복귀하면서 백업으로 밀려났다. 7월 22일 선발로 내정된 [[아놀드 레온]]이 복귀하면서 대신 1군 엔트리에서 제외됐다. 8월 19일 전날 얼굴에 공을 맞아 시즌 아웃된 [[최재원(야구선수)|최재원]]을 대신해 1군에 올라왔다. 9월 10일 1군 엔트리에서 제외됐고, 대신 [[이성규]]가 등록됐다. 10월 3일 부상으로 시즌 아웃된 [[조동찬]]을 대신해 1군에 올라왔다.
         그러나 이전에도 그랬듯이 고질적인 약점인 선구안과 수비 능력을 극복하지 못하면서 부진, 대수비로 밀려났다. 6월 21일 이후 안타를 1개도 못 치다가 7월 18일 롯데전에서 모처럼 선발 출장 기회를 받았으나, 3타수 무안타 2삼진을 당하면서 다음 날인 19일 1군에서 제외됐다.
  • 박동진 (1922년) . . . . 4회 일치
         '''박동진'''(朴東鎭, [[1922년]] [[10월 11일]] ~ [[2013년]] [[11월 11일]])은 [[대한민국]]의 외교관, 국회의원이다. [[민주정의당]] 소속으로 11대와 12대 전국구 국회의원을 역임했다.
         |임기 = [[1961년]] [[7월 7일]] ~ [[1961년]] [[10월 11일]]
  • 성시경 . . . . 4회 일치
         성시경은 데뷔 이후, 오랜 기간동안 감성적인 [[발라드 (대중 음악)|발라드]]로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2008년]] [[6월 28일]]에 [[연세대학교]] 노천극장에서 열린 마지막 콘서트 이후, [[7월 1일]] 현역으로 [[강원도 (남)|강원도]] [[춘천시]]에 있는 102 보충대에 입대하였고, [[제1야전군 (대한민국)|제1야전군사령부]] 군악대 군악병으로 복무한 뒤 [[2010년]] [[5월 17일]]에 제대하였다. 제대 후, 매년 축가콘서트와 연말콘서트를 진행했으나 2015년을 마지막으로 연말콘서트는 진행되지 않고 있다. [[MBC FM4U]] 《FM 음악도시 성시경입니다》의 [[디스크 자키|DJ]]를 거쳐서, 현재 [[KBS2]] 《[[배틀 트립]]》, [[tvN]] 《[[모두의 연애]]》, [[OLIVE]], [[tvN]] 《달팽이호텔》 등의 진행자로 활동하고 있다.
         |[[2014년]] [[7월 7일]] ~ [[2017년]] [[12월 4일]]
         |[[2018년]] [[5월 26일]] ~ [[2018년]] [[7월 14일]]
         |[[2018년]] [[7월 19일]] ~ [[2018년]] [[10월 13일]]
  • 송진현 . . . . 4회 일치
         |임기 = 2015년 7월 31일 ~ 현재
         * 서울형사지방법원 형사항소6부 재판장으로 재직하던 1997년 10월 24일에 [[인천역]]에서 다른 승객이 놓고 간 35000원 상당의 공구함을 들고가다 붙잡힌 피고인에 대해 "지하철이 종착역에 도착한 순간부터 점유권이 지하철공사에 있으므로 피고인의 행위는 절도죄에 해당한다"며 징역10월을 선고했다.<ref>경향신문 1997년 10월 25일자</ref> 1998년 1월 10일에 일반음식점 영업 허가없이 통조림, 캔류 등 안주류를 파는 24시간 편의방을 운영해 1심에서 무죄가 선고된 피고인에 대해 식품위생법 위반으로 벌금 100만원을 선고했다.<ref>경향신문 1998년 1월 11일자</ref> 1999년 1월 10일에 폭행 혐의로 조사를 받다가 경찰관의 신분증 제시 요구에 다른 사람의 운전면허증을 보여줘 공문서 부정행사죄로 기소되어 1심에서 징역8월 집행유예2년을 선고받은 정모씨에 대한 항소심에서 "관련 법령에 따라 운전면허증을신분증으로 규정한 조항이 없다"며 일부 무죄를 선고했다.<ref>경향신문 1999년 1월 11일</ref> 4월 24일에 서울대 캠퍼스에서 집단 농성을 주도한 한국통신 서울본부 위원장에 대해 "서울대 총장이 한국통신 노조의 총파업에 대해 학내 출입을 금지했음에도 무단 진입했다"며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 위반과 업무방해죄를 적용해 벌금 700만원을 선고했다.<ref>동아일보 1999년 4월 26일자</ref> 5월 17일에 [[한총련]] 범민족통일대축전에 참가했다가 [[집시법]]위반과 건조물 침입죄로 1심에서 징역8월 집행유예1년이 선고된 노래패 '희망새에 대해 단장 조모씨(31세)에 대해 "당국의 허가를 받지 않은 집회라고 하더라도 공연의 목적으로 참석했고 구호를 외치거나 연설을 하는 등 집회,시위를 한 것이 아니다"는 이유로 원심을 깨고 [[집시법]]위반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ref>한겨레 1999년 5월 18일자</ref> 10월 7일에 폭력배를 동원해 채무 해결사 노릇을 했던 [[홍수환]]에 대해 "평소 알고 지내던 사람 부탁으로 후배를 연결해준 점은 인정되지만 채권을 회수하기로 후배와 공모한 일은 그 뒤에 이뤄져 피고인이 개입됐다고 볼 수 없다"며 원심을 깨고 무죄를 선고했다.<ref>한겨레 1999년10월 8일자</ref>
         * 서울형사지방법원 형사6부 재판장으로 재직하던 1997년 1월 10일에 성적이 떨어진 학생을 막대기로 뗘 상해죄로 1심에서 벌금 100만원을 선고받은 체육교사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ref>한겨레 1997년 11월 11일자</ref>
  • 에스쿱스 . . . . 4회 일치
         [[2017년]] [[7월 10일]]에 방송된 [[세븐틴(아이돌)/힙합팀|힙합팀]] 눕방에서는 [[버논(세븐틴)|버논]]의 옆 자리에 누워 카메라에 함께 투샷으로 잡히면서도 진짜 [[혼혈]] 멤버인 [[버논(세븐틴)|버논]]에게 결코 뒤지지 않는 이국적인 이목구비를 자랑했다.
         이후 [[2016년]] 아시아 투어 기간 중 잠시 탈색했던 것을 제외하면 쭉 갈발이나 흑발에 가까운 머리색을 유지해오다가 월드 투어<DIAMOND EDGE>가 시작되기 직전 [[2017년]] 7월 즈음 새하얀 은발에 도전했는데, 이 과감한 색깔을 찰떡 같이 소화하며 가히 폭발적인 비주얼을 과시하기 시작했다.
         스스로 "정신 연령이 좀 낮긴 한 것 같다."라고 말했을 정도로 어린 아이같은 면이 많아 장난을 치는 모습이 자주 보인다. [[2017년]] [[7월 23일]] [[정한]]이 [[세븐틴(아이돌)/방송#s-6|따뜻한 우유 한잔]]의 게스트로 [[에스쿱스]]와 [[원우]]를 초대했다가 [[에스쿱스]]가 거의 ~~미친~~ 만취한 사람 처럼 장난을 치며 급기야 방송을 난장판으로 만들어 버렸고, [[에스쿱스]]는 결국 [[정한]]의 블랙리스트 명단에 올라가게 되었다. ~~[[에스쿱스]] : 여러분들 쏘리질러얽!!! / [[정한]] : 안돼, 지르지마!!!!~~ 후일 이 방송은 팬들에게 [[http://www.vlive.tv/video/36544|"시원한 소주 한잔 방송"]]이라고 불리우게 된다.
          * [[2018년]] [[7월 19일]] [[Mnet]] <[[엠 카운트다운]]> 스페셜 MC with [[호시(세븐틴)|호시]], [[원우]]
  • 우의형 . . . . 4회 일치
         1948년 태어난 우의형은 [[경기고등학교]]와 [[서울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하고 1971년 제13회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1977년 [[서울가정법원]] 판사에 임용된 이후 [[서울고등법원]], 서울형사지방법원 등에서 판사를 하다가 법원행정처에서 조사심의관으로 지냈으며 2003년에 서울지방법원 의정부지원장, [[청주지방법원]], [[인천지방법원]], [[서울행정법원]]에서 법원장을 역임하고 퇴직한 2005년에 변호사 우의형 법률사무소를 개업했다. 2009년 7월 22일에 제17대 영남대 재단 이사장,<ref>[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367375.html]</ref> 2011년 11월 10일에 주식회사 화진 사외이사에 선임되었다.<ref>[http://news.mt.co.kr/mtview.php?no=2011111017081381674&outlink=1&ref=https%3A%2F%2Fsearch.naver.com]</ref>
         * 서울형사지방법원 합의24부 재판장으로 재직하던 1994년 5월 17일에 [[상문고등학교]] 교장으로부터 1500만원의 뇌물을 받아 구속된 국립교육평가원장 박병용에게 "유죄는 인정되나 큰 과오없이 30년간 공직생활에 충실했다"며 [[특가법]] 뇌물죄를 적용해 징역2년6월 집행유예3년 추징금1500만원을 선고했다.<ref>경향신문 1994년 5월 18일자</ref> 1994년 6월 10일에 상무대 사업과 관련하여 공사대금 189억여원을 유용한 혐의로 구속된 청우종합건설 전 회장 조기현에게 [[특가법]] 횡령, 사기죄 등을 적용해 징역5년을 선고했다.<ref>매일경제 1994년 6월 11일자</ref> 6월 14일에 접착테이프로 암달러상의 입을 막고 금품을 빼앗으려다 전치2주 상처를 입혀 구속된 피고인에게 무죄를 선고했다.<ref>동아일보 1994년 6월 15일자</ref> 7월 15일에 [[범청학련]] 결성식에서 인공기를 게양하여 구속된 [[중앙대학교]] 총학생회장 김영하에게 [[국가보안법]]을 적용해 징역2년 자격정지2년을 선고했다.<ref>한겨레 1994년 7월 16일자</ref>
  • 이경희 (1880년) . . . . 4회 일치
         '''이경희'''(李慶熙, [[1880년]] [[6월 11일]] ~ [[1949년]] [[12월 4일]])는 [[대한제국]]의 교육자이자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정치인으로, 구한 말 [[신민회]]의 회원이자, [[일제 강점기]] 당시 [[의열단]]과 [[신간회]]의 주요 멤버의 한 사람이다. 해방 후 초대 [[경상북도]] 부지사와 초대 [[대구광역시장|대구부윤]]을 역임했다.
         지오 이경희는 [[1880년]](고종 17년) [[6월 11일]] [[경상북도]] [[달성군]] [[공산면]] 무태리(현, [[대구광역시]] [[북구 (대구광역시)|북구]] 서변동)에서 아버지 이병두(李柄斗) 어머니 경주 최씨의 아들로 태어났다. 동생 [[이강희 (독립운동가)|이강희]] 역시 독립운동가였다. 본관은 [[인천 이씨|인천]]으로, [[조선의 개국공신]]이며 [[증직|증]][[영의정]](贈領議政)에 [[추증]]된 공도공(恭度公) [[이문화|오천 이문화]](烏川 李文和)의 19대손이며, [[조선]]중기의 [[성리학]]자이자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인 [[이주 (임란 의병장)|태암 이주]](苔巖 李李輈)의 11대손이다.
         그는 만해 [[한용운]] 등과 가깝게 지냈고 [[1939년]] [[7월 12일]] [[한용운]]의 회갑연에 참여했다. 한용운 회갑연 참석자 방명록에는 [[오세창]], [[홍명희]], 이경희 등 16명의 이름이 적혀 있다. 그는 한용운의 환갑을 축하하는 친필 휘호 불택세류(不擇細流)라는 자를 지어 주었다.
         [[1946년]] [[1월]] 다시 [[대구광역시장|대구부윤]]에 유임되었다. 그러나 [[미 군정]]의 고압적이고 권위적인 정책에 환멸을 느껴 [[1946년]] [[9월 4일]] 부지사, 대구부윤, 군정청 민정관 사직서를 제출하고, 야인으로 돌아갔다. 46년 [[9월 5일]] [[독립촉성중앙회]] 경북지부의 후신인 [[대한독립촉성국민회]] [[경상북도]]지부 위원장에 피선되고, [[대종교]] 남사도본사 선범에 선임되고, [[대한민국]] 건국 직후에는 [[1949년]] [[7월 1일]] [[남선경제신문사]] 제4대 대표이사 사장을 역임하였다.
  • 이명주 (축구선수) . . . . 4회 일치
         이후로도 [[6월 27일]] [[울산 현대 축구단|울산]]전과 [[7월 1일]] [[수원 삼성 블루윙즈|수원]]전에서 1도움씩을 기록했고 팀의 [[FA컵 2012]] 우승에도 일조했지만 7월 1일 이후로 공격 포인트가 없어 "출장 수로만 신인왕 후보"이라는 비아냥을 받다가 10월 28일 [[경남 FC]]와의 원정 경기에서 후반 38분 중거리슛으로 골을 기록했고 신인 선수로는 처음으로 K리그 주간 베스트 11 MVP에 올랐다. 이 경기 이후 11월 17일 [[전북 현대 모터스|전북]]전 1골, 11월 25일 [[경남 FC|경남]]전 1골 1도움, 11월 29일 [[FC 서울|서울]]전 2도움, 12월 2일 [[수원 삼성 블루윙즈|수원]]전 1골을 터뜨리며 신인왕 후보로 거론된 선수들 중 가장 많은 5골 6도움 11개의 공격 포인트를 쌓았다. 이명주는 [[12월 3일]] K리그 대상 시상식에서 [[광주 FC]]의 [[이한샘]], [[전남 드래곤즈]]의 [[박선용]]을 압도적인 표 차이로 제치고 [[K리그 영플레이어상|신인 선수상]]을 받았다.<ref>{{뉴스 인용 |제목=(K리그 대상) ‘신인왕’ 이명주 “포항의 축구스타일, 나랑 잘 맞았다” |url=http://sports.news.naver.com/sports/index.nhn?category=k_league&ctg=news&mod=read&office_id=109&article_id=0002452360 |출판사=OSEN |date={{날짜한글화|2012-12-03}} }}</ref>
         [[2014년]] [[6월 9일]], 포항은 기자회견을 통해 이명주의 [[알아인 FC|알아인]] 이적을 발표하였다. 이적료는 공개되지 않았지만 언론은 그의 이적료와 연봉을 합쳐 총 95억 원 정도 규모로 추정하고 있다. 등번호는 포항에서의 번호인 29번을 선택했다.<ref>{{뉴스 인용 |제목='총액 95억원' 이명주 알아인 이적, K리그 이적사 다시 썼다 |url=http://sports.chosun.com/news/ntype.htm?id=201406100100083460005726&servicedate=20140609 |출판사=스포츠조선 |date={{날짜한글화|2014-06-9}} }}</ref> 7월 '알아인 인터내셔널 친선대회'에서 두 경기 연속 어시스트를 기록하며 팀의 우승에 기여하였다. 또한 9월 30일 열린 [[AFC 챔피언스리그 2014|AFC 챔피언스리그]] 4강 2차전에 [[알힐랄 (리야드)|알힐랄]]과의 경기에서 전반 10분 선제골을 기록하며 팀의 승리를 이끌었으나, 1, 2차전 합계 2:4로 결승 진출에는 실패하였다.<ref>{{뉴스 인용 |제목=(ACL) ‘이명주 선제골’ 불구 알아인 결승 좌절 |url=http://sports.news.naver.com/sports/index.nhn?category=k_league&ctg=news&mod=read&office_id=413&article_id=0000011083 |출판사=인터풋볼 |date={{날짜한글화|2014-10-1}} }}</ref> 한편 정규리그에서는 12월에 열린 10, 11라운드에서 두 경기 연속 어시스트를 기록하였으며, 13라운드 [[샤르자 스포츠 클럽|샤르자]]와의 경기에서는 정규리그 첫 골을 성공시켰다. [[2015년 AFC 아시안컵|아시안컵]] 이후 복귀한 14라운드 [[알샤바브 (두바이)|알샤바브]]와의 경기에서도 골을 기록하였다. 이후 주전으로 활약하며 [[알아인 FC|알아인]]의 [[UAE 아라비안 걸프 리그]] 2014-15시즌 우승에 크게 기여하였다.
         [[2013년]] [[6월 11일]]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우즈베키스탄 축구 국가대표팀|우즈베키스탄]]과의 [[2014년 FIFA 월드컵 아시아 지역 최종 예선]] 경기에서 선발 출장하며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국가대표팀]] 데뷔전을 가졌다. 데뷔전에서 MOM(Man Of the Match)에 선정되었다.<ref>{{뉴스 인용 |제목='겁없는 데뷔전' 이명주, 대담한 활약 눈부셨다|url=http://sports.news.naver.com/sports/index.nhn?category=a_match&ctg=news&mod=read&office_id=111&article_id=0000336377 |출판사=조이뉴스24 |date={{날짜한글화|2013-06-11}} }}</ref>
  • 이수민(야구선수) . . . . 4회 일치
         ||<:> '''생년월일''' || [[1995년]] [[9월 11일]] ||
         이 영향 때문이었을까, 2013년에 창단한 KT 위즈의 신인 우선 지명 대상자로도 잠시 거론되었으나, [[kt wiz]]가 [[개성고등학교 야구부|개성고]] [[심재민]]과 [[천안 북일고등학교 야구부|북일고]] 류희운을 지명함으로서 [[삼성 라이온즈]] 및 삼성 팬들은 한숨을 놓을 수가 있었으며--그리고 [[한화 이글스]]와 한화 팬들은 울었다--, 경북고 박세웅과 함께 누가 삼성의 1차지명 대상자가 될 것인가에 대한 선택만이 남게 되었다. 그리고 2013년 7월 1일 [[삼성 라이온즈]]의 1차 지명 대상자로 최종 선택되었다.[[http://sports.news.naver.com/sports/index.nhn?category=kbo&ctg=news&mod=read&office_id=109&article_id=0002566963|#]]. 지명 이후 [[대한민국 U-18 야구 국가대표팀/2013|2013 IBAF U-18 대회]] 대표팀에 발탁되어 활약하기도 했다.
         이후 7월 7일에 휴식일이 겹쳐 2군으로 내려갔던 [[J.D. 마틴]]의 복귀를 앞두고 1군 엔트리에서 말소되었다. 2군에서 투구 밸런스를 조정하는 과정에서 [[볼질]]이 심해지는 바람에 그대로 2군에서 시즌을 마쳤다. 2군 성적은 17경기 2승 4패 평균자책점 5.07.
         4월 16일 삼성전에서 원래 선발로 등판이 예정된 [[노성호]]가 등판 전 갑자기 통증을 호소하는 바람에 이미 4월 14일 계투로 2이닝을 던진 이수민이 하루만 휴식하고 선발로 나온데다 16일 등판 후로 1달을 쉬면서 전년도와 마찬가지로 혹사 논란이 나왔다. 6월 중순 이후 1달을 쉬었고, 7월 중순 복귀 후 등판이 없다가 9월 1일 등판하는 등 사실상 안식년을 보냈다. 9월 1일 롯데 2군과의 경기에서 사실상 전역 전 마지막으로 선발 등판해 6이닝 96구 2실점 1자책 5피안타 3볼넷으로 승리투수가 되었다.
  • 이주호 (1961년) . . . . 4회 일치
         |임기 = [[2010년]] [[8월 31일]] ~ [[2013년]] [[3월 11일]]
         * 2001년 7월 ~ 2002년 8월 [[KDI]] 국제정책대학원 교학처장
         * 2003년 7월 ~ 2004년 5월 [[KDI]] 국제정책대학원 교육개혁연구소 소장
         |임기 = [[2010년]] [[8월 31일]] ~ [[2013년]] [[3월 11일]]
  • 임현주 . . . . 4회 일치
         |2012||JTBC||[[JTBC 뉴스 사사건건]]||[[2012년]] [[2월 6일]] ~ [[2012년]] [[7월 9일]]||
         |2013 ~ 2015<br/>2017 ~ 2018||rowspan="2"|MBC||rowspan="2"|[[MBC 뉴스투데이]]||[[2013년]] [[11월 18일]] ~ [[2015년]] [[11월 6일]]<br/>[[2017년]] [[12월 26일]] ~ [[2018년]] [[7월 13일]]||평일 앵커
         |2018 ||MBC||[[아침발전소]]||[[2018년]] [[5월 11일]] ~ [[9월 7일]]||
         |2018 ~ ||MBC||[[생방송 오늘 아침]]||[[2018년]] [[7월 16일]] ~ 현재||
  • 장순왕후 . . . . 4회 일치
         '''장순왕후 한씨'''(章順王后 韓氏, [[1445년]] [[2월 22일]]([[음력 1월 16일]]) ~ [[1462년]] [[1월 5일]]([[1461년]] [[음력 12월 5일]]))는 [[조선]] [[조선 예종|예종]](睿宗)의 정비이다. [[시호]]는 '''휘인소덕장순왕후'''(徽仁昭德章順王后)이며, 상당부원군 충성공 [[한명회]](上黨府院君 忠成公 韓明澮)와 황려부부인 민씨(黃驪府夫人 閔氏)의 셋째 딸로, 본관은 [[청주 한씨|청주]](淸州)이다. 세자빈 시절 [[인성대군]]을 낳은 뒤 산후병으로 요절하였다.
         1460년 세자빈(世子嬪)으로 간택되어 당시 세자였던 [[조선 예종|예종]]과 가례를 올리고 부부가 되었으니 이때 나이가 16살이었다. 정숙한 성품에 아름다운 용모로 시아버지 [[조선 세조|세조]]의 총애를 받았다고 한다. 책봉 이듬해인 [[1461년]] [[음력 11월 30일]], 왕실의 적통인 원손(예종의 장남인 인성대군)을 낳았으나 같은 해 [[음력 12월 5일]] 녹사(錄事) 안기(安耆)의 집에서 산후병으로 향년 17세로 요절했다.
  • 장익 (1933년) . . . . 4회 일치
         | 임기 = [[1994년]] [[11월 11일]] ~ [[2010년]] [[1월 28일]]
         | 취임 = [[1994년]] [[11월 11일]]
         ** 형 : 장영 (張英, [[1920년]] [[7월 2일]] ~ [[1922년]] [[음력]] [[4월 6일]])
  • 전성군 (1488년) . . . . 4회 일치
         '''전성군'''(全城君) 이대(李對, [[1488년]] [[7월 21일]] ∼ [[1543년]] [[10월 29일]])는 [[조선]]시대 중기의 왕족으로 본관은 [[전주 이씨|전주]], 자(字)는 성중(盛仲)이다. [[효령대군]] 이보의 고손으로 아버지는 여양군(呂陽君), 조부는 율원군(栗元君), 증조부는 보성군(寶城君). [[인순왕후|인순왕후 심씨]], [[심의겸]], [[심충겸]] 등의 외할아버지가 된다. 다른 이름은 이대(李薱)이다.
         [[1488년]](성종 19) [[7월 21일]] 사후 [[여양군]]에 추증된 여양정 이자겸(呂陽正 李子謙)과 훈도(訓導) 김기(金耆)의 딸 광산김씨<ref>정사룡, 호음잡고 제7권, "李龍岡墓碣銘 幷序"</ref> 의 아들로 태어났다. [[효령대군]] 보의 차남 [[보성군]] 이합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율원군]] 이종(栗元君 李終)이다. 그의 생일은 오랫동안 실전되었다가 [[정사룡]](鄭士龍)이 쓴 그의 묘비문에 그의 생일이 [[7월 21일]]이라고 언급되면서 알려졌다.<ref name="heomyong">정사룡, 호음잡고 제7권, "李龍岡墓碣銘 幷序"</ref> 조부 [[율원군]]은 적개공신이었다.
         [[1527년]](중종 22) [[7월]] [[함열읍|함열]][[현감]](咸悅縣監)에 임명되었다가 얼마 뒤 면직되었다. 이후 좌익찬(左翊贊), [[사복시]]주부, 겸[[한성부]][[참군]](兼漢城府參軍), [[장예원|장예]][[사평]](掌隷司評), [[종부시]]주부를 거쳐 다시 사헌부감찰이 되었다가 용강 [[현령]](龍岡縣令), [[평양]][[진관]] 병마첨절제 도위, [[돈녕부]] 주부(敦寧府主簿) 등을 역임하였다. [[1541년]](중종 36) 부정(副正) 이공장(李公檣)의 천거를 받았다가 [[사헌부]]로부터 성품이 본래 침착하지 못하고 소행도 탐욕스럽고 간특하다는 평을 듣기도 했다.<ref>중종실록 94권, 1541년(중종 36년, 명 가정 20년) 2월 17일 갑술 1번째기사, "헌부가 천거하는 자들이 사적으로 천거를 함으로 폐단이 심하다고 아뢰다"</ref> [[내자시]]정(內資寺正)을 지낸 정종보(鄭宗輔)의 딸 동래정씨와의 사이에서 8남 1녀를 두었는데, 일곱째 아들이 권신 [[이량 (조선)|이량]]이고, 고명딸은 [[청송 심씨]] [[의정부]][[영의정]][[심연원]]의 아들이자 [[좌의정]] [[심통원]]의 조카 [[심강]]에게 출가했다.
  • 전재국 . . . . 4회 일치
         * [[1991년]] [[1991년 7월|7월]]: [[시공사]] 사장
         * [[1993년]] [[1993년 7월|7월]]: [[도서출판 음악세계]] 사장
  • 전태일 . . . . 4회 일치
         아버지가 사기를 당하여 정규 교육을 받지 못하고 [[서울]]로 올라와 [[청계천]] 피복 공장에 취직하였다. [[1965년]]에는 청계천내 삼일회사 재봉사로 일하다가 강제 해고된 여공을 돕다가 함께 해고되었다. 이후 [[한미사]]의 재단보조로 있다가 재단사가 사장과의 갈등으로 해고되자, 그가 재단사가 되었다. [[1968년]] [[근로기준법]]의 존재를 알게 되어 [[1969년]] [[7월]]부터 [[노동청]]을 방문, 노동자들의 열악한 환경 개선과 위생 환경 개선을 요구하였으나 번번히 거절당했다.
         [[1969년]] [[7월]] 열악한 노동조건과 근로기준법 위반에 관한 설문조사를 하여 [[노동청]]에 진정을 하였으나 거절당하였다. 이후 [[노동청]]을 찾아가 근로 환경 개선, 위생 환경 개선을 요구했지만 번번히 거절당했다. [[1969년]] [[9월]]부터 [[1970년]] [[4월]]까지 일용직 건축 노동자로 일하였다. 이때 그는 [[감리교|감리교회]]의 주일학교 교사로 활동했다. [[1970년]] [[4월]]부터는 평일에는 자신이 다니던 감리교회의 신축 공사장에서 일하며 밤에는 노동자 동지들에게 [[근로기준법]]을 가르치는 야학당 교사가 되었다. 주말 낮에는 주일학교 교사로 활동하였다.
         [[1972년]] 기독청년 전태일 1주기 추도식으로 시작된 이래 1980년대에 와서 노동운동가 전태일 추도식으로 제목이 바뀌었다. 그의 어머니 [[이소선]]은 아들의 유언에 따라 사망직전까지 청계천 노조 지원과 노동 운동 지원에 헌신하여 노동자들의 어머니 라는 별칭을 얻기도 했다. [[1984년]] [[서울]]에서 노동운동가들 중심으로 전태일기념사업회가 조직되었고, [[1985년]] 전태일기념관이 개관하였다. 이후 전태일재단이 조직되어 '전태일문학상'과 '전태일노동상'을 제정하여 수여하기 시작하였다. [[1987년]] [[6.10 항쟁]] 이후 노동단체들이 모여 그해 [[7월]]부터 [[8월]]까지 노동자 대회를 열었으며 7월 15일에는 그의 어록, 초안 등을 참고하여 '87 노동자계급 해방선언'이 개최되었다. [[1988년]] [[11월]] 전태일의 분신 자살을 기념하기 위한 '전태일 정신 계승 전국 노동자 대회'가 [[서울]]에서 개최되어 매년 [[11월]] 전국 노동자대회가 열리고 있다. [[2002년]]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에서 전태일을 민주화 운동 관련자로 승인하였다. [[1996년]] 9월 19일에는 서울 중구 을지로6가에서 '전태일 거리'를 선포하였고, 이를 기념하여 민예총 회원들이 전태일 열사가 분신하고 있는 모습을담은 걸개그림 앞에서 추모공연을 하였다.<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6092000289120003&edtNo=6&printCount=1&publishDate=1996-09-20&officeId=00028&pageNo=20&printNo=2680&publishType=00010 한겨레 1996,09.20]</ref> 이 '전태일 거리'에서는 전태일을 추모하기 위한 '전태일 거리문화제'가 진행되고 있다. 1999년부터는 민주열사를 비롯해 의롭게 숨진 시민의 기념표석을 세우는 서울시'유적지 사업'에 포함되어 평화시장 분신장소에 기념표석이 세워졌다. 하지만 2003년 청계천 복원공사로 철거되기도 하였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32&aid=0000043117 전태일 동판 철거 ‘물의’ 경향신문, 2003.12.01]</ref>
  • 정경식 . . . . 4회 일치
         1937년에 경상북도 고령에서 태어난 정경식은 [[고려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하고 이건개 전 대전고검장, 송종의 전 대검 차장 등과 함께 제1회 [[사법시험]]에 합격해 [[박정희 정부]]와 [[5공화국]]에서 <신국가보안법>이라는 책을 저술할 정도로 공안검사로서 최고의 평가를 받다가 서울지검 공안부에서 재직하던 1979년 10월 27일에 [[10.26 사건]]으로 서울지검 특수부와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에 파견되어<ref>경향신문 1979년 10월 27일자</ref> [[12.12 사태]]로 연행된 [[정승화]] 육군 참모총장을 조사하는 등 [[5공화국]] 출범 때인 서울지검 특수2부장으로 있던 1980년 5월말 [[국보위]] 사회정화위원회에서 공무원을 정화하는 사회정화위원을 했다. 1983년 8월 12일에 서울지검 3차장 검사를 거쳐 부산지검장에 재직하던 1992년에는 지역감정 조장과 국가기관의 선거 개입 논란을 부른 [[초원복집 사건]]에 연루될 뿐만 아니라 대통령 선거 직후에 "송종의, 최명부 검사와 함께 [[민청학련 사건]]에서 가혹행위를 했다"며 "검찰 요직에 임명해서는 안된다"는 야당인 [[민주당 (대한민국, 1991년)]]의 주장<ref>매일경제 1993년 9월 18일자</ref>에 의해 대검찰청 공판송무부장, 법무연수원 기획부장으로 전보되는 등 인사상 불이익을 받았으나 서울지검 특수부장, 대검찰청 공안부장, 청주지검장, 대구고검장 등을 역임하다 검찰 출신으로서 [[김영삼]] 대통령에 의해 [[헌법재판관]]에 임명되었다.<ref>[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807569.html]</ref> 하지만 [[대한변호사협회]]로부터 1994년 9월 16일에 "유신체제 아래에서 공안검사로 있으면서 [[김영삼]] 신민당 총재의 1979년 7월 23일 국회 본회의 발언을 [[신민당]] 기관지 <민주전선>에 게재한 민주전선 주간인 [[문부식]]<ref>동아일보 1979년 7월 31일자경향신문 1979년 7월 31일자 8월 18일자</ref>과 <어떤 조사>를 쓴 [[한승헌]] 변호사<ref>동아일보 1975년 8월 28일자</ref>, 우도 간첩 사건<ref>동아일보 1973년 7월 3일자</ref>, 교포학생 김승효, 삼천포 간첩단 사건, 예비역 장교 등에 의한 내란음모사건<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75013100209201011&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75-01-31&officeId=00020&pageNo=1&printNo=16410&publishType=00020 동아일보 1975년 1월 31일자</ref>, [[통일혁명당 사건]], [[남민전 사건]] 등을 수사하면서 [[민주화운동]]과 인권회복을 위해 노력한 많은 시민과 학생을 [[긴급조치]] 위반 등으로 구속하고 [[신군부]]의 국보위 산하 사회정화위원회에서 공무원을 정화하는 등의 민권억압을 한 전력이 있다"<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8102000329201009&editNo=3&printCount=1&publishDate=1988-10-20&officeId=00032&pageNo=1&printNo=13253&publishType=00020 경향신문 1988년 10월 20일자]</ref>며 "자진 사퇴하라"는 비판을 받았다.<ref>한겨레 1994년 9월 17일자 경향신문 1995년 11월 28일자</ref> [[박정희 정부]]에서 시국사건으로 재판을 받는 구속자 가족들이 정경식 검사를 향해 야유를 보내면 검사석에서 벌떡 일어나 매서운 눈초리로 방청석을 노려보곤 했다.<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3061400289105001&editNo=5&printCount=1&publishDate=1993-06-14&officeId=00028&pageNo=5&printNo=1589&publishType=00010 한겨레 1993년 6월 14일자]</ref> 1999년 2월 공직자 재산 공개에서 전년 대비 "8천902만원이 늘었다"고 신고했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1&aid=0004418788]</ref> 1980년 [[5·16민족상]] 안전보장 부문 후보자로 선정됐다.<ref>동아일보 1980년 5월 9일자</ref>
  • 정인숙 (1945년) . . . . 4회 일치
         [[1962년]] 신명여고 졸업 후 [[1964년]] [[이화여자대학교]] 영문과에 지원했으나 낙방했다. 이후 [[명지대학교]] 사범대학에 입학했으나 학업에 흥미를 잃고 학교에는 가는둥 마는둥 하다가 중퇴하였다. 뛰어난 미모로 [[미스코리아]] 대회에 나가려고 했으나 가족들의 반대로 무산되었다.<ref name="han01">[http://news.hankooki.com/lpage/people/200807/h2008070802511484800.htm <nowiki>[</nowiki>정홍택의 지금은 말할 수 있다<nowiki>]</nowiki> <16>정인숙 사건과 나] 한국일보 2008년 07월 08일자</ref> 아버지의 실직과 대학 낙방은 그의 방황을 부추겼다. 영화배우가 되고 싶은 꿈에 영화감독을 만났으나 1년만에 헤어지고, 임신한 아이는 낙태하였다. 이후 요정에 들어가 요정업에 종사하게 된다.
         당시 그를 목격한 연예기자 정홍택의 회고에 의하면 '그 날도 나는 남산 중턱에 있는 타워호텔 18층 나이트클럽에 갔다. 밤 8시 반쯤 되었을까? 나는 만나기로 한 일행보다 먼저 도착했고 클럽 안에서는 밴드가 연주를 하고 있었는데 젊은 여자 한 분이 카운터에 앉아 술을 마시고 있었다. 나도 술집에서 카운터 앉는 것을 좋아하는 편이라서 그 여인과 몇 자리 떨어진 곳에 앉았다. 가까이 보니 아주 미인이었다. 그리고 얼굴이 하얀 것이 더욱 아름답게 보였다.<ref name="han01">[http://news.hankooki.com/lpage/people/200807/h2008070802511484800.htm <nowiki>[</nowiki>정홍택의 지금은 말할 수 있다<nowiki>]</nowiki> <16>정인숙 사건과 나] 한국일보 2008년 07월 08일자</ref>
         * [http://heymannews.mediahey.com/news5_1/10411 다시 떠오른 ‘정인숙의 추억’의문의 피살 미스터리 전모] 헤이맨뉴스 2008년 08월 11일
         * [http://news.hankooki.com/lpage/people/200807/h2008070802511484800.htm <nowiki>[</nowiki>정홍택의 지금은 말할 수 있다<nowiki>]</nowiki> <16>정인숙 사건과 나] 한국일보 2008년 07월 08일자
  • 정재학 (1856년) . . . . 4회 일치
         묘민 [[임호연]](1920~ 2009)은 일본대 전문부 경제학과를 나온 엘리트였지만 귀국 후 항일 지하 조직 활동을 하다가 2년간 옥고를 치른 항일 투사 경력의 경제부문 대기자다.<ref>동아일보 온라인판 2009년 7월 28 일 애국지사 임호연 선생 별세 http://m.donga.com/List/3/70060000000002/20090728/8760617/1</ref> 그는 1982년 [[매일경제신문]]에 [[대구은행]] 관련 연재기사 19편을 집필했다.<ref>매일경제 1981 년 4 월 21 일 1면 재계산맥 연재 사고</ref>
         그러나 오구라는 행장에 오르지 못한 반면 정재학의 손자인 [[정운용]]은 1940년 4월 27일 열린 이사회에서 대표 이사 (대표취체역) 겸 행장에 선임됐다. 이듬해인 1941년 7월 총독부는 전시금융체제를 강화한다는 이유로 금융기관 정리통합 방침을 밝혔다. 예상과 달리 [[경상합동은행]]은 [[대구상공은행]]과의 합병대신 1941년 8월10일 서울 소재 [[한성은행]]에 흡수 합병됐다. 정운용은 한성은행 주식 1220주를 보유하면서 [[상무]] [[취체역]](상무이사)로 발탁됐다. 해방 후 한국인 최초의 은행장이 되는 계기였다. 오구라는 이에 상심한 듯 은행업에서 완전히 손을 떼고 본업인 전력산업에 집중한다.
         반면 민씨 가문은 1957년 가문의 주력 기업이었던 조선맥주의 경영정상화를 위해 조흥은행 주식을 대거 팔아치우면서 주요주주 자리를 내놓게 된다.<ref>매일경제 1968년 7월 2일 7면</ref><ref>동아일보 1957년 7월 20일 3면</ref><ref>경향신문 956년 4월 22일 1면</ref> 조흥은행은 1995년 2월 확대이사회 결의를 통해 은행장의 순서를 조정하는 결정을 내린다.
  • 채동욱 . . . . 4회 일치
         * 6월 11일 : 국정원 선거개입사건 원세훈·김용판 불구속기소
         * 7월 16일 : 전두환 전 대통령 자택 등 압수수색
         * 7월 18일 : 이재현 CJ회장 횡령·배임·조세포탈 혐의로 구속기소
         * 9월 11일 : 원전비리중간수사결과 발표, 97명 기소
  • 최남선 . . . . 4회 일치
         1906년에 다시 일본 유학을 떠나 4월 [[와세다 대학]](早稻田大學) 고등사범학부 지리역사과에 입학하지만, 역시 3개월간 다니다 동맹 휴학으로 제적당하다가 복학하였다. 이어 [[이광수]] 등 유학생과 사귀면서 러시아 문학 작품을 탐독하였다. 1906년 7월 유학생 회보인 《[[대한 흥학회보]] (大韓興學會報)》편찬회를 맡아 편집인으로 활동했다. 《[[대한 흥학회보]] (大韓興學會報)》의 편집 활동을 하면서 그는 회보에다 새로운 형식의 시([[신체시]])와 [[시조]]를 발표하였다.
         1920년대에 문화 운동 활동한 동시에 같은 해 1928년 10월 [[조선총독부]] 내에 [[식민사관]] 유포를 위해서 만든 어용단체인 ‘[[조선사 편수위원회]]’를 창립했을 때 편수 위원직을 맡았다. 1930년 8월 [[경성제국대학교]] 법문학부 교수와 조선총독부·조선사편수회 간부들이 중심이 되어 [[조선]]과 [[만주]]를 중심으로 한 '극동문화연구'를 표방하며 조직한 [[청구학회]]의 평의원으로 활동했으며 1937년 중추원 참의를 맡아 1938년 3월까지 재임하면서 매년 1200원의 수당을 받았다. 1937년 2월 9일부터 11일까지 3회에 걸쳐 [[매일신보]]에 '조선문화의 당면과제'를 연재해 조선문화의 일본화야말로 당면한 문제 가운데 제일 중요한 것이라며 [[내선일체]]를 강조하는 사설을 기고했다. 이어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총독부 어용기관지 [[매일신보]]와 [[경성일보]]에 각종 친일논설을 게재했다.
         또한 최남선의 [[단군론]]은 1926년 3월 3일부터 1926년 7월 25일까지 [[일제강점기]]에 『[[동아일보]]』에 연재된 글인데 특유의 논법에 의거 ‘[[단군론]]’을 내세워 일본인 중심의 [[식민사관]]에 맞서기도 하였다.<ref>「씨성으로 본 한일민족의 기원」, 단군론의 문헌검색, 김성호 저, 푸른숲(2000년, 43~51p)</ref>
  • 한받 . . . . 4회 일치
         * 재발매일: [[2003년]] [[7월]]
         * [[2003년]] [[7월 4일]] 《아내의 미래》 (EP)
         * [[2003년]] [[7월 4일]] 《오로라》 (99 Track Single)
         * [[2003년]] [[7월 4일]] 《마네킨》 (Single)
  • 현재윤 . . . . 4회 일치
         '''현재윤'''(玄在潤<ref>한국야구위원회, 2012 가이드북</ref>, [[1979년]] [[7월 8일]] ~ )은 전 [[KBO 리그]] [[LG 트윈스]]의 [[포수]]이자, 현재 [[중국야구리그]] [[장쑤 페가수스]]의 배터리코치이다.
         트레이드 후 1군에 복귀했으며, [[2013년]] 데뷔 첫 올스타에 선정되었으나 [[7월 9일]] 잠실 NC전에서 [[찰스 쉬렉|찰리]]의 투구를 맞고 왼 손목 골절상을 당해 올스타전 출전권을 [[김태군 (야구 선수)|김태군]]에게 넘겼고, 주전포수는 [[KIA 타이거즈]] 포수 [[차일목]]이 나왔다.<ref>[http://sports.news.naver.com/sports/index.nhn?category=baseball&ctg=news&mod=read&office_id=014&article_id=0002930096 NC 김태군, 현재윤 부상으로 올스타전 합류] - 파이낸셜뉴스</ref> 이후 고질적인 왼손 엄지손가락 통증으로 [[2014년]] [[12월 29일]] 현역 은퇴를 선언했다.<ref>[http://sports.news.naver.com/sports/index.nhn?category=baseball&ctg=news&mod=read&office_id=382&article_id=0000300457 LG 포수 현재윤 ‘현역 은퇴’] - 스포츠동아</ref>
         * 2008년 6월 11일 대구구장 한화 전 : 2008 시즌 첫 안타
         |'''7월'''||11||28||6||9(2루타2개)||3||321||393||424
  • 홍인한 . . . . 4회 일치
         |사망일= [[1776년]] [[7월 5일]]
         '''홍인한'''(洪麟漢, [[1722년]] ~ [[1776년]] [[7월 5일]])은 [[조선]] 후기의 [[문인]]이자 [[정치가]]이다. 자는 정여(定汝), 본관은 풍산(豊山). [[예조]][[판서]] [[홍현보]]의 아들이고 [[영의정]] [[홍봉한]]의 이복동생이다. 혜경궁 홍씨의 이복 삼촌이 된다. [[홍국영]]의 일족이기도 하다. 당색으로는 [[노론]]이며 노론내 외척당의 지도자였다.
         그러나 [[1776년]] [[음력]] [[3월]] [[영조]]가 승하하고 [[정조]]가 즉위하자, 숙청에 들어갔으며, 홍인한은 서명선 등의 탄핵을 받은 뒤 [[정후겸]], [[문성국]], [[김귀주]] 등과 함께 여러번 탄핵을 당한 뒤 [[충청도]] [[여산]](礪山)에 유배되었다가 배소가 옮겨져 [[고금도]]에 유배되었으며, 다시 거듭 탄핵을 받고 [[위리안치]](圍籬安置)형을 받았다가 그해 [[7월 5일]] 사사령을 받고 처형됐다.
  • 강동우 . . . . 3회 일치
         7월 2일 [[KIA 타이거즈]]와의 3연전 두 번째 경기 3-6으로 뒤지고 있는 6회초 1사 만루 상황에서 [[손영민]]의 공을 잡아당겨 우측 담장을 넘어가는 [[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역전만루홈런]]을 쳤다! 시즌 9호. 캐스터가 타이거즈 팬인 건 알지만 좀 심하게 친기아 성향으로 중계하는 와중에 패배로 기울던 분위기를 다시 되찾아온 모처럼 시원한 한 방이었다. ~~도루하기 귀찮아서 그냥 넘겨버리는 1번 타자의 위엄~~
         7월 30일 [[SK 와이번스]]의 큰 [[이승호(1976)|이승호]]를 상대로 쓰리런을 때리며 기어코 개인 시즌 최다 홈런 기록인 11호 홈런을 쏘아 올렸다!! ~~테이블세터고 뭐고 그냥 넘겨서 점수내면 되는 거잖아? 그리고 요즘 더워서 누상에 서 있으면 힘들다고...~~
         이후 꾸준히 제몫을 해냈으나 허리 미세통증으로 인해 6월 26일자로 1군 엔트리에서 제외되었다. 회복기간을 거쳐 7월 10일 1군에 복귀. 한화는 강동우가 2군에 내려가 있는 동안 [[고동진(야구선수)|고동진]], [[양성우(야구선수)|양성우]] 등을 1번 타자 자리에 기용하였으나 좋은 모습을 보이지 못했고, 실제로 강동우가 2군으로 내려가 있는 동안 한화는 2승 7패로 부진을 면치 못했다. 마지막에는 '''[[장성호]]가 1번 타자'''로 기용될 정도였으니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한지? 1군으로 올라왔으나 별 활약을 하지 못하고 8월 2일 이후로 다시 2군행. 다행히 1번 구멍은 [[오선진]]이 각성하면서 메울 수 있게 되었다.
  • 권희동 . . . . 3회 일치
         7월 28일 [[KIA 타이거즈]]전에서 2번이나 홈런을 쳐내 4타점을 쌓았고 몸을 날리는 [[http://sports.news.naver.com/videoCenter/index.nhn?category=kbo&id=52913&gameId=20130728HTNC0&listType=game&date=20130728|호수비]]를 보여주는 등 공수 양면에서 활약했다. 그러나 팀은 4:8로 패배.
         7월 30일 [[SK 와이번스]]전에서 시즌 8호 홈런을 쳐냈다. 앞서 홈런을 친 [[이호준]]에 이은 백투백 홈런. 이어서 8월 1일에도 [[김광현]]을 상대로 홈런을 쳐내면서 팀의 스윕에 기여했다. SK와의 시리즈에서 12타수 2안타를 기록했는데 그 2개가 다 홈런.
         7월 15일 [[고척 스카이돔]]에서 열린 [[KBO 퓨처스 올스타전|퓨처스 올스타전]]에서 솔로 홈런과 2루타를 쳐내며 다시금 자신의 존재감을 뽐냈다. 또한 7회 수비에서는 멋진 다이빙 캐치도 선보였다. 올스타전 MVP까지 노려볼 만 했으나 [[신성현]]의 무려 5타점을 쓸어담는 활약으로 수상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이 날 기준 복귀까지 68일 남은 시점에서 팬들의 기대감을 높이기에는 충분한 활약을 보여주었다.
  • 김상중(배우) . . . . 3회 일치
         || '''출생''' ||<(> [[1965년]] [[8월 6일]] [*음력] ([age(1965-08-06)]세), (정부 직할) [[전라북도]] [[완주군]] [* 현 전라북도 완주군. 전북 태생이지만 어린 시절부터 전라북도 무주군(현 전라북도 무주군)에서 자랐다.] ||
          * 2014년 [[7월 20일]] [[SBS]] [[TV동물농장]]에 깜짝 [[내레이션]] [[http://media.daum.net/entertain/enews/newsview?newsid=20140720100311249|출연]]하였는데, [[https://www.youtube.com/watch?v=LboCsRfyekI|여기]]에서 그 장면을 조금 볼 수 있다. [[2015년]] [[2월 1일]] 방송에서도 내레이션을 다시 맡았다.
          * 혼사와 관련된 [[흑역사]]가 있다.[* 이전에 한번 [[결혼]]을 해서 아들을 두었었는데 [[2000년]]에 [[http://www.donga.com/docs/magazine/woman_donga/200002/wd2000020120.html|이혼을 했었다]]. 이쪽도 이혼이라는 흑역사가 있다.] 2003년에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21&aid=0000049827|결혼 발표]]를 했었으나 [[신부]]가 [[파라다이스 그룹]] 재벌 2세 행세를 한 사기결혼으로 드러나 [[결혼식]]을 보름 앞두고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6&oid=003&aid=0000004595|파혼했다]]. 진행을 맡고 있는 그것이 알고싶다에서도 종종 사기 결혼에 대해 다루곤 하는데[* [[2013년]] [[8월 10일]] 방영된 「내 아내는 누구인가」편과 [[2014년]] [[7월 5일]]에 방영된 「사라진 '신데렐라' 예비신부 실종 미스터리」도 이 내용을 다루고 있다.] 과연 어떤 심정일지.
  • 김상훈 (1963년) . . . . 3회 일치
         * [[2016년]] [[7월]] ~ [[2016년 10월]] : 제20대 국회 가습기살균제 국정조사 특별위원회 간사
         * [[2017년]] [[7월]] ~ [[2018년 8월]] : [[자유한국당]] 대구시당 위원장
         * [[2018년 7월]] ~ : 제20대 국회 후반기 국토교통위원회 위원
  • 김수미(1949) . . . . 3회 일치
         2015년 7월, '[[나를 돌아봐]]'가 정규편성이 되는 데에 큰 공헌을 한 김수미의 매니저 역할 [[장동민]]이 뜬금없이 하차통보를 받았다. 빈 자리는 [[개그맨]] [[박명수]]로 대체. 알려진 바에 따르면 나돌 제작진은 프로그램이 토요일에 편성될 수 있으니 장동민에게 같은 토요일에 방영하는 [[더 지니어스:그랜드 파이널]] 하차를 요구했다고 한다. [* 이건 실제로 하차해도 그거대로 문제다. [[더 지니어스]] 자체가 매주 탈락자가 정해져있지 않고 그렇기 때문에 "누가 떨어질까" 궁금해서 팬들이 모이는 건데, 이걸 하차하라는 건 장동민보고 자진하차하거나 방송을 조작하라는 말 밖에 안된다. 그런데 자진하차는 프로그램 구성상 택도 없고 조작을 시전했다간 그 후폭풍은...] 그러나 전 시즌 우승자 장동민이 빠진다는 건 말조차 안 되는 일, 장동민은 당연히 그 제안을 거절하고 나돌에서 하차했다. --그런데 정작 나돌은 금요일로 편성되었다-- 파트너 김수미 역시 장동민의 하차소식을 기사로 접했다. 그런데 무개념 악플러들은 박명수와 같은 전라도 군산 출신인 김수미가 입김을 넣어서 장동민을 하차시켰을 것이라는 근거없는 추측을 하고 "망할 전라도 놈들", "같은 전라도라서 니가 꽂아줬냐"라는 식으로 애꿎은 김수미를 원망하며 비난했다. 이에 김수미는 큰 충격을 받았으며 제작 발표회에서 자신이 [[지역감정]]에 대한 악플을 보고 상처받아 자신의 머리카락을 자르며 울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 제작 발표회에서 [[조영남]]을 자극하는 발언으로 조영남과 말다툼을 하며 현장 분위기를 어색하게 만들었다. 이후 김수미는 '나를 돌아봐'를 포함한 모든 연예 활동을 일시적으로 중단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그러나 7월 20일, 김수미는 계속되는 제작진과 이경규의 설득 끝에 출연 중단 의사를 번복하고 '나를 돌아봐' 출연을 결정지었다. --조영남과 판박이--, --[[이경규]]는 뭔 죄?--
         결국 이러한 여론에 7월 17일 해당 프로그램에서 하차 의사를 밝혔다. 갑자기 저런 행동을 한 것에 대해선 '[[지역감정]]이 드러난 악플을 보고 내가 잠시 돌았나보다, 그 영상을 보니 내가 생각해도 제정신이 아닌 듯 해서 하차하고 정신과 치료를 받으려고 한다'는게 본인의 이야기다. 참고로 [[기자회견]] 영상을 직접 보고 울면서 스스로 머리카락을 잘라 삭발했다고 한다. 감정적으로 매우 불안정한 상황인 것은 사실인 듯.[* 이후 나를 돌아봐 촬영 복귀 후 방송 분에도 "의사 선생님이 나보고 한두달 더 오래"라는 말을 한 걸로 봐서는 진짜 정신과 치료를 받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나마 당행인 것은, 조영남이 그림 대작 사건 등으로 원래 안 좋던 평판에 쏘기를 박아 버려서 더이상 연예 활동이 완전히 끊어질 만큼 망해 버렸기 때문에, 당시 김수미가 과하게 반응하였던 것도 "그런 인간에겐 그럴만했다."는식으로 넘어가게 되었다는 것.
  • 김윤아(1974) . . . . 3회 일치
         ||<#CF89D7> {{{#ffffff '''출생'''}}} ||<#FFFFFF><(> [[1974년]] [[3월 11일]]([age(1974-03-11)]세), [[전라북도]] [[순창군]] ||
         다른 가수에게 곡을 써주는 일이 매우 드물다. [[박정현]] 앨범 중에 작사를 2곡 해주었고 [[김경호]]와 동갑내기 친구 임현정의 앨범에서 작사를 1곡씩 해주었다. --유일하게-- 작곡까지 하고 편곡까지 한 경우는 [[장나라]]의 3집 앨범 수록곡인 '키키'이다. 2015년 7월에는 슈퍼주니어의 10주년 앨범에 Rock'n Shine을 작사/작곡/편곡 해주었다.[* 원래 제목은 슈퍼 매직 파워라고 전해진다][[http://www.stardaily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64310|곡을 주게 된 계기]]
         2011년 7월 25일부터 [[자우림]]으로서 나가수에 합류한다고 하여 화제가 되고 있다. 락밴드인 [[YB]]와의 대결 구도 등 여려가지 흥미로운 모습을 기대하는 목소리 또한 높았다. 자우림이 출연하는 5차 경연은 31일 방영되었으며 비록 (처음 경연에 참가하는 관계로) 7번째 경연이라는 혜택이 있었지만 특유의 압도적인 카리스마와 중저음을 내뿜으며 1위에 등극했다. 이후 비밀번호 776이라는 최악의 코드 달성까지 하지만 '재즈카페' 라는 곡으로 다시금 1위를 달성하며 이후 원곡의 코드를 자우림화 시켜 시청자들의 대찬사 를 받은 '가시나무', 김덕수 사물놀이패와 함께 꾸민 조용필 특집의 '꿈' 퇴폐적인 술집 마담과 항구의 뱃사장의 끈적한 사랑을 연상시켜 곱디곱게 노래한 심수봉도 깜짝 놀랄 법한 무대를 꾸몄던 '사랑밖에 난 몰라' 실향민들의 감성을 자극하는 모던록 편곡의 '라구요' 그만 '자브라교'를 창시해 버린 '아브라카다브라' 깊은 감정몰입을 해 모두에게 진한 감동을 주었던 록발라드 표 '1994년 어느 늦은 밤'. 이 사람의 비주얼의 끝은 어디인가 하며 감탄을 자아내게 했던 '얘기할 수 없어요." 내마주교를 창시하며 산울림 특집 2위를 차지했던 '내 마음에 주단을 깔고'는 김윤아가 사랑하는 인디 친구들 후배들이 함께한 멋진 무대였고, 그 후 인디밴드 후배들과 함께 만든 신나고 유쾌한 무대인 '정신차려' 그리고 스페니쉬 리듬을 가미하여 초상집 복장으로 처연하게 부른 '하루 까지. 총 14곡의 팔색조 변신으로 모든 이들의 감탄을 자아냈다.
  • 김재규 . . . . 3회 일치
         인터뷰에 응한 [[성공회대]] [[한홍구]] 교수의 과거 발언내용인 2004년 8월 11일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14&oid=036&aid=0000005863|한겨레21 기사]]와 최근 발언 내용을 비교하면 그의 김재규에 대한 평가가 변한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몇 년 전까지는 김재규에 매우 비판적이었으나, 2013년 5월 17일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587948.html|한겨레 기사]]를 통해 재평가 여지가 있음을 밝혔고 2016년 12월 17일 경향신문 기사에서도 마찬가지 입장임을 알 수 있다. 경향신문 기사를 참고하면 한 교수는 지금이 '''[[박정희]]와 유신의 망령을 떨쳐내는 시기'''라고 규정하고 그렇기 때문에 김재규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지는 측면이 있다고 여기는 듯하다. 과거 한 교수는 '대한민국이 박정희와 유신의 망령을 떨치고 자유민주주의를 만끽하게 될 때 김재규에 대한 평가는 분명 달라질 것이다.'라고 발언한 적이 있다. 아래 기사 참고.
         >'''2004년 8월 11일'''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14&oid=036&aid=0000005863|한겨레21 기사]]
         >저 젊은 생명 여하히 하겠는가. 나에게 끝까지 충성하고 있지 않는가.(음력 12월 29일)
  • 김종훈 (1952년) . . . . 3회 일치
         * 2013년 7월 : 새누리당 재해대책위원회 부위원장
         * 2012년 7월 ~ 2014.11월 : 제19대 국회 정무위원회 위원
         * 2012년 7월 : 새누리당 인재영입위원회 위원
  • 김필곤 . . . . 3회 일치
         * 대구지방법원 형사12부 재판장으로 재직하던 2003년 7월 29일에 [[대구 지하철 화재]] 현장을 훼손한 혐의로 불구속 기소된 전 대구지하철공사 사장 윤진태에게 징역 3년 벌금 500만원을 선고하며 법정구속했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20&aid=0000198906]</ref>11월 28일에 [[한총련]] 중앙위원으로 활동한 [[계명대]] 총학생회장에 대해 "11기 [[한총련]]은 10기 한총련의 기본노선을 충실히 따르고 있고, 이적단체인 [[범청학련]] 남측본부의 집행부를 장악해 [[범청학련]]의 기본 대오로 활동하고 있다”며 처음으로 11기 한총련을 이적단체로 규정하면서 "11기 한총련이 범청학련을 통해 북한의 대남 공작부서인 통일전선부의 사실상 지휘·조정을 받아 북한의 적화통일 노선을 수용하고 있고, 북한 쪽과 빈번하게 불법 접촉 및 서신교환을 하면서 하달받은 투쟁지침에 따라 11기 한총련 조국통일위원회의 사업계획을 수립·시행했다"며 [[국가보안법]] 이적단체 가입죄 등을 적용해 징역2년6월 자격정지1년 집행유예4년을 선고했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28&aid=0000036082]</ref> 2004년 2월 6일에 보궐선거를 앞두고 부하 직원 2명으로부터 "당선되면 잘 봐달라"는 청탁과 함께 2000만원, 아들 축의금으로 1000만원을 받은 [[박진규]] 영천시장에 대해 "시장에 당선된 후에 받은 1천만원은 대가성이 인정된다"면서도 2000만원에 대해서는 "범죄 입증이 어렵다"고 하면서 수뢰액이 1천만원이상 5천만원 미만 일 때는 5년이상 징역에 처함에도 불구하고 징역2년6월 집행유예4년 추징금1000만원을 선고했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3&aid=0000026584]</ref>
         * [[서울중앙지방법원]] 형사항소4부 재판장으로 재직하던 2009년 3월 31일에 모텔에 투숙한 손님들의 자동차 번호판을 나무 판자로 가려줘 자동차관리법 위반으로 즉결심판에 회부되어 벌금 5만원을 선고받았지만 이에 불복해 청구한 정식재판에서 무죄를 선고받은 모텔 종업원에게 항소심에서 "해당 조항에서 처벌에 특별한 제한을 두고 있지 않으므로 처벌 근거 조항에 대해서는 행정형벌의 일반적인 특징에 비추어 판단해야 한다"며 "자동차 관리와 안전을 해칠 수 있는 일반적 위험성이 있는 행위를 모두 처벌 대상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하면서 원심을 깨고 벌금 5만원을 선고했다.<ref>[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347248.html]</ref> 7월 8일에 "지하철에서 장갑을 팔았다 범칙금 스티커를 발부받아야 한다"며 강제연행하려는 서울메트로 질서기동팀 소속 공익근무요원을 폭행한 홍모씨에게 "임의동행을 거부한 피고인을 강제 연행하려 하거나 경찰관이 도착할 때까지 체포한 행위는 공익근무요원의 정당한 직무상 행위로 볼 수 없기 때문에 피고인이 이에 대항해 폭행을 가했다 해도 공무집행방해죄로 처벌할 수 없다"며 벌금 200만원을 선고한 원심을 깨고 무죄를 선고했다.<ref>[http://www.fnnews.com/news/200907080856516671?t=y]</ref> 12월 9일에 비자발급 심사를 부실하게 한 혐의로 기소되어 "일부러 직무를 포기했다고 인정할 증거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1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은 중국 주재 한국대사관 전 영사 황모씨에 대해 "중국 현지 한인회의 부탁으로 서류가 보완되지 않은 중국인에게 비자를 발급한 것도 직무유기에 해당한다"고 하면서도 "자의적인 비자 발급으로 불법 체류자가 생긴 만큼 죄질이 나쁘지만 그동안 국가에 헌신해 왔고 나태한 마음으로 범행을 하게 된 점을 참작했다"며 징역 8개월 집행유예 1년을 선고했다.<ref>[http://news.mt.co.kr/mtview.php?no=2009120911405515959&outlink=1&ref=https%3A%2F%2Fsearch.naver.com]</ref> 2010년 2월 11일에 면허정지 기간에 운전을 하다 적발돼 벌금 100만원에 약식 기소되자 청구한 정식재판에서 "무면허 운전을 한 사실이 인정된다"며 벌금 50만원을 선고받은 피고인에게 "무면허 운전은 면허가 없는 것을 알면서도 고의로 차를 몰아야 성립하는데 최씨가 정지처분 통지를 받지 못한 사실이 인정된다"며 "비록 경찰 당국이 통지를 대신하는 공고를 거쳤더라도 그것만으로는 그가 면허 정지 사실을 알았다고 보기에 부족하다”원심을 깨고 무죄를 선고했다.<ref>[http://www.fnnews.com/news/201002110848419738?t=y]</ref>
  • 무라하치부 . . . . 3회 일치
         이 당시 이 마을에 거주하던 중학생 소녀 이시카와 사츠키(石川皐月, 1935년 5월11일 생)는 1952년 부정선거의 풍조에 의문을 느껴 학내 신문인 우에노 중학교 신문에 이 사실을 고발하는 글을 개제하였다. 하지만 학교 측에서 모든 학생에게 배포된 신문을 회수하여 소각 처리했다. 1952년 5월 6일 열린 참의원 보궐 선거에서도 비슷한 수법으로 부정이 실행된 것을 알게 된 이시카와(당시 고교생으로 진학)는 아사히 신문에 이를 투고하여 고발하였다. 아사히 신문사의 기자는 5월 8일 이시카와를 방문하였고, 몇일 뒤에는 사건이 기사화 되었으며 사건 관계자 수십명이 경찰에 출두하게 되었다.
         6월 24일 자 아사히 신문을 시작으로 전국의 신문과 잡지가 따돌림 문제를 보도하여 우에노 마을은 전국에서 주목을 받게 되었다. 이시카와는 "불의를 보고도 가만히 있는 것이 마을을 사랑하는 길입니까?"라고 신문 지상에서 주장하였고, 이시카와가 다니던 후지노미야 고등학교(富士宮高等学校)의 학생회는 만장일치로 이시카와의 행동에 지지를 선언, 교직원들도 이시카와를 지지하여 7월 상순에는 교직원 조합의 후지노미야 고등학교 분회, 시즈오카 현 교직원 조합에서도 지지 성명을 발표했다.
         2013년 7월 21일에 야마구치 현 슈우난 시 미타케(山口県周南市金峰)에서 발생한 사건. 63세 남성이 가옥 1채를 방화하고 5명의 노인을 살해한 사건이다.
  • 박석민 . . . . 3회 일치
         여담으로 7월 4일 대구 홈경기에서 [[이범석(야구선수)|이범석]]이 9회 2사까지 안타를 한 개도 허용하지 않은 가운데 인생주루를 선보이며 3루쪽 내야안타를 때려서 노히트노런을 저지한 경험이 있다. 당시 3루수는 [[김주형]].[* [[2017년 한국시리즈|그리고 9년 후]], 김주형은 생애 첫 출전한 한국시리즈에서 또다시 답이 없는 뇌수비로 KIA 팬들의 뒷목을 움켜잡았다. 다행히 [[양현종]]의 투혼으로 후속 타자들을 범타로 돌려세워 [[903 대첩|한국시리즈 역사에 길이 남을 대참사]]는 면했다.]
         유난히 1루 악송구를 많이 범해 [[채태인]]의 가랑이를 찢어지게 했으며,(…) [[양준혁]]의 은퇴 선언 및 손가락 부상의 악화로 인해 7월 말부터는 [[지명타자]]로서만 출장하여 시즌 끝까지 수비보다는 타석에만 전념하는 모습을 보였다. 다행히도 그가 지명타자로 출장하면서 생긴 [[3루수]]의 공백은 [[2010 광저우 아시안 게임/야구|면제로이드]]로 인해 각성한 [[조동찬]]이 잘 메워 주었다.
         2017년 7월에는 '[[양산 아파트 밧줄 절단 살인 사건|밧줄 추락사]]'로 40대 가장을 잃은 유가족들에게 1억원을 기부했다. 그외에도 가정형편이 어려운 야구 후배들을 위해 2억여원을 [[http://sports.news.naver.com/kbaseball/news/read.nhn?oid=018&aid=0003881512|기부하기도 했다.]]
  • 박승호 (야구인) . . . . 3회 일치
         [[2010년 대한민국 프로 야구 올스타전|한국 프로 야구 2010 시즌 7월, 올스타전]]이 [[대구시민운동장 야구장|대구구장]]에서 치뤄지면서 "[[삼성 라이온즈]] 레전드 올스타" 행사도 열렸는데, 박승호가 레전드 [[지명타자]]로 선정되어 오랜만에 [[삼성 라이온즈]]의 고전 유니폼을 입고 모습을 드러내기도 하였다.<ref>[[스포츠 서울]] - 2010년 7월 기사 [http://news.sportsseoul.com/read/baseball/857634.htm "올스타전, 팬들에게 추억을 선사한 레전드 행사"]{{깨진 링크|url=http://news.sportsseoul.com/read/baseball/857634.htm }}</ref><ref>엑스포츠 뉴스 - 2010년 7월 기사 [http://xportsnews.hankyung.com/?ac=article_view&entry_id=123489 "이만수, 김성래… 삼성 레전드 등장에 대구 야구 팬 열광"]</ref>
  • 박승효 . . . . 3회 일치
         * [[1974년]] [[7월 2일 [[선경합섬]] 상무<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74070300209202012&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74-07-03&officeId=00020&pageNo=2&printNo=16232&publishType=00020 ]</ref><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74070200099204010&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74-07-02&officeId=00009&pageNo=4&printNo=2563&publishType=00020 ]</ref>
         * [[1981년]] [[7월 21일]] [[한국전자진흥회]] 이사<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1072300099208009&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81-07-23&officeId=00009&pageNo=8&printNo=4732&publishType=00020 ]</ref>
         * [[1990년]] [[7월 27일]] [[엔씨에스시스템]] 공동대표<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0072700099208007&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90-07-27&officeId=00009&pageNo=8&printNo=7520&publishType=00020 ]</ref>
  • 박주영 . . . . 3회 일치
         ||<:> '''생년월일''' ||<:> [[1985년]] [[7월 10일]] ([age(1985-07-10)]세) ||
         ||<:> 2011년 10월 11일||<:> [[수원시]]||[[파일:아랍 에미리트 국기.png|width=30]] [[UAE]]||<:> 2–1||<:> 2014 FIFA 월드컵 브라질 예선||
         ||<:> 2011년 11월 11일||<:> [[두바이]]||[[파일:아랍 에미리트 국기.png|width=30]] [[UAE]]||<:> 2–0||<:> 2014 FIFA 월드컵 브라질 예선||
  • 배영호 . . . . 3회 일치
         * 1958년 3월 11일 ~ 1959년 1월 26일 : 제5대 [[대구고등검찰청]] 검사장
         * 1959년 1월 27일 ~ 1961년 7월 5일 : [[법원행정처장]]
         |임기 = 1959년 1월 27일 ~ 1961년 7월 5일
  • 송지효 . . . . 3회 일치
         * [[2007년]] [[11월 11일]] ~ [[2008년]] [[5월 4일]] [[SBS]] 《[[인기가요]]》 MC ([[김희철 (가수)|김희철]]과 함께)
         * [[2009년]] [[7월 11일]] [[tvN]] 《[[월드스페셜 LOVE]]》 [[필리핀]] 편
  • 수애 . . . . 3회 일치
         '''수애'''([[1979년]] [[9월 16일]] ([[음력 7월 25일]]) ~ )는 [[대한민국]]의 [[배우]]이다.
         2005년 《[[나의 결혼 원정기]]》에서 [[북한이탈주민|탈북자]] 출신의 통역관을 연기하였고, 2016년 영화 《[[국가대표 2]]》에서도 [[북한이탈주민|탈북자]] 출신의 [[아이스하키]] 선수를 연기하였다.<ref>[http://entertain.naver.com/movie/now/read?oid=111&aid=0000462127 '국가대표2' 수애 "동생 役 박소담, 저와 닮은 것 같아요"] 조이뉴스24. 2016년 07월 27일</ref>
  • 양시영 (1944년) . . . . 3회 일치
         | 임기 = [[1995년]] [[7월 1일]] ~ [[1998년]] [[6월 30일]]
         * 제30대 달성군수(1995년 7월 ~ 1998년 6월,[[무소속]] → [[자유민주연합]]
         |임기 = [[1995년]] [[7월 1일]] ~ [[1998년]] [[6월 30일]]
  • 오봉 . . . . 3회 일치
         불교의 우란분재(盂蘭盆齋) 의 기원 설화는 이러하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제자 목련존자는 신통력으로 자신의 어머니가 아귀도에 떨어져 굶주림에 고통 받는 것을 보고, 석가모니에게 어떻게 해면 좋은지 물엇다. 석가모니는 여러가지 음식, 과일, 초를 준비하여 스님들의 안거가 끝나는 7월 15일에 공양을 하면 아귀도에 떨어진 자들 역시 음식을 먹게 될 것이라 하였다. 그대로 행하자 목련존자의 어머니 역시 아귀도에서 구제되었다.
         백중은 중원(中元)이라고도 하는데, 음력 7월 15일이다. 도교에서 이 날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중국의 민속신앙에서는 이 날은 저승의 문이 열리고 조상의 영혼이 돌아오므로 제사를 지낸다고 한다. 일본에도 비슷한 민속 신앙이 있다. 대개 비슷한 시기에 행사가 모여 있으므로 불교, 도교, 민속 신앙 등이 습합되어 열린다. 서양에서는 할로윈에 대응하는 것으로 본다.
  • 오사충 . . . . 3회 일치
         [[1392년]] [[음력 7월 17일|7월 17일]]에 이성계 추대에 참여하여 조선 개국공신 3등으로 [[호조]][[전서]]가 되고 영성군(寧城君)에 봉해졌다. 1394년 중추원부사에 오르고, 교주강릉도관찰사(交州江陵道觀察使)로 있으면서 [[정도전]](鄭道傳)·[[남은]](南誾) 등과 가까운 수령·군인들이 직책을 소홀히 하거나 차례를 뛰어넘어 승진한 것 등을 엄하게 조사, 처리하였다. 1395년에 상의중추원사(商議中樞院事)가 되고, 이듬해 정당문학(政堂文學)·경기좌도관찰사가 되었으며, 1404년(태종 4) 판사평부사(判司平府事)로 재직하다가 영성군(寧城君)에 봉군되었다. 1406년 졸하였고 시호는 공희(恭僖)이다. 아들은 [[서자]]인 오계종(吳繼宗) 하나가 있다.
  • 유승민(정치인) . . . . 3회 일치
         [[박근혜]] 대통령 취임 이후로도 [[박근혜정부]]의 정책을 공개적으로 비판하고 [[청와대]]와 여러 차례 충돌을 벌이다가, 2015년 7월 원내대표 당시 [[국회법]] 개정안을 두고 갈등의 정점을 찍었다. 특히 가장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던 것은 15년 4월에 있었던 '''증세 없는 복지는 허구'''로 대표되는 교섭단체 대표연설 이후였다. 그 연설 이후, [[박근혜]]로부터 이른바 '찍박'으로 낙인찍혀 결국 원내대표직 사퇴까지 이르게 된다.
         [[THAAD]] 배치가 결정되자 "[[칠곡군]]에 배치하면 수도권 방어가 어렵다"고 주장하며 사드 2~3포대 추가배치를 주장하였고, 후에 [[성주군]] 배치로 결정된 7월 12일 CBS 라디오에 출연해 "TK에 배치돼도 감당해야 한다"고 입장을 밝혔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1&aid=0008536495|유승민 "사드, TK에 배치돼도 감당해야"(연합뉴스)]] 또한 사드 문제로 인해 방중했던 [[더불어민주당]] 소속 의원들에게는 매우 부적절한 처사이며 굴욕외교를 하고 있다고 이례적으로 매우 강도 높게 비판하였다.
         >— 2015년 7월 8일 [[새누리당]] 원내대표 사퇴 연설 中
  • 이동흡 . . . . 3회 일치
         * [[대전고등법원]] 형사부 재판장으로 재직하던 1999년 7월 30일에 1994년 2월부터 1998년 2월까지 퇴출된 [[충청은행]] 은행장으로 재직하면서 경영이 부실한 서우주택건영에 368억원, 경원건설에 40억원을 부당하게 대출하고 대지 200평과 현금 2000만원 등 1억 6천여만원을 사례금으로 받아 구속된 전 충청은행 은행장 윤은중에 대해 징역 3년 추징금 6천만원이 선고된 원심을 깨고 징역2년 6월 추징금 6000만원을 선고했다.<ref>동아일보 1999년 7월 31일자</ref>
         * [[대전고등법원]] 특별부 재판장으로 재직하던 1999년 12월 13일에 시영아파트를 분양받고 3년이 넘도록 소유권 이전 등기를 하지 않아 과징금을 부과받은 이모씨 사건에서 1995년 7월 1일부터 시행된 부동산 실명제법 제10조 제1항에 대해 "법률은 탈세 행위를 막아 부동산 거래를 정상화한다는 취지로 제정되었음에도 탈법의 의도가 전혀 없는 사람들에게 까지 과중한 금전적 부담을 주고 있다"며 [[헌법재판소]]에 [[위헌법률심판]]을 제청했다.<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9121400329126006&editNo=40&printCount=1&publishDate=1999-12-14&officeId=00032&pageNo=26&printNo=16930&publishType=00010 경향신문 1999년 12월 14일자</ref> 이에 대해 [[헌법재판소]]는 2001년 5월 31일에 합헌 결정했다.(99헌가18)
  • 이성민 (야구선수) . . . . 3회 일치
         [[2013년 한국 프로 야구 신인선수 지명 회의|2013년]] 특별우선지명을 받아 [[NC 다이노스]]에 입단하며 즉시 전력감 [[투수]]로 주목받았으나, 기대와 달리 시즌 초에는 별로 좋지 않았다. [[2013년]] [[4월 2일]] [[롯데 자이언츠]]와의 개막전에서 선발 [[애덤 윌크|아담]]을 대신하여 7회에 구원 등판하였으나 [[박종윤 (1982년)|박종윤]]에게 2점 홈런을 허용해 구단 첫 패전 [[투수]]가 됐다.<ref>[http://sports.donga.com/3/all/20130402/54154104/1 ‘제 9구단’ NC, 1군 데뷔전에서 롯데에 영봉패] - 스포츠동아</ref> 이후 필승계투로 활동하였으나 기대에는 못 미치는 부진한 투구와 팔꿈치 통증까지 겹쳐 잠시 C팀(2군)에 내려가기도 했으며, 자신감을 되찾은 후 [[7월 14일]] 올스타 휴식기를 맞아 [[이재학 (야구 선수)|이재학]]을 대신해 1군에 등록된다.
         [[7월 27일]] [[KIA 타이거즈|KIA]]전에서 구원 등판해 1 2/3이닝 무실점 호투로 프로 데뷔 첫 승을 기록하였다. [[애덤 윌크|아담]]이 선발진에서 부진하고 부상과 팀 내 융화 문제까지 겹쳐 C팀 강등 후 [[트위터]]에 불만을 표시하자, [[김경문]] 감독은 [[애덤 윌크|아담]]을 대신해 그를 선발진에 넣었고 [[애덤 윌크|아담]]을 퇴출했다. [[2013년]] [[8월 31일]] [[KIA 타이거즈|KIA]]전에서 첫 선발승을 거두었다.<ref>[http://sports.news.naver.com/sports/index.nhn?category=baseball&ctg=news&mod=read&office_id=117&article_id=0002370496 ‘1피안타’ NC 이성민, 선발 데뷔전에서 깜짝 승리] - 마이데일리</ref>
         [[2015년]] [[5월 2일]] [[kt 위즈]]와 [[롯데 자이언츠]]의 5:4 트레이드를 통해 [[롯데 자이언츠]]로 이적하였다.<ref>[http://sports.news.naver.com/sports/index.nhn?category=kbo&ctg=news&mod=read&office_id=001&article_id=0007569615 롯데-KT, 5대 4 대형 트레이드 단행] - 연합뉴스</ref> 이적하자마자 9경기 연속 평균자책점 0.00대 행진을 하며 [[롯데 시네마]]라는 조롱성 별명을 얻은 [[롯데 자이언츠]] 불펜진에 큰 힘이 되었다. 5월 한달간 14경기에서 2승 1패, 2홀드, 평균자책점 1.80의 뛰어난 활약을 펼쳤으며, 6월에도 역시 7경기에서 1승 1패, 1홀드, 1세이브, 평균자책점 2.08의 뛰어난 활약을 펼치며 불안한 불펜진의 핵심 투수로 떠올랐다. 그러나 7월과 8월 컨디션 난조를 보였고 15경기에서 2승 3패, 1홀드, 2세이브, 평균자책점 9.45를 기록하며 부진에 늪에 빠졌다. 하지만 9월에 다시 컨디션을 되찾으며 12경기에서 3홀드, 1세이브, 평균자책점 2.03을 기록하며 부활했다. 2015 시즌 61경기에 나서 5승 7패, 7홀드, 4세이브, 4점대 평균자책점을 기록하였다.
  • 이시영 (1882년) . . . . 3회 일치
         '''이시영'''(李始榮, [[1882년]] [[1월 10일]] ~ [[1919년]] [[7월 9일]])은 [[일제 강점기]]의 독립운동가이다. [[대구광역시|대구]] 출생. 본관은 [[경주시|경주]](慶州). 본명은 이중현(李仲賢), 호는 우재(又齋). 친족 관계에 있는 동명이인인 [[이시영 (1868년)|이시영]](李始榮, 성재 이시영)과의 구별을 위해 '우재 이시영'으로도 부른다. [[성리학]]자 이관준의 차남으로 [[대한민국]]의 제1대 [[대한민국의 법무부 장관|법무부 장관]] [[이인]](李仁)의 숙부이다.
         그러나 [[1919년]] [[7월 9일]] 피로와 식중독으로 병을 얻어 사망하고 말았다. 그가 타계했다는 소식을 들은 [[안창호]]는'문무 겸전한 우재가 갔으니 또하나 큰 별을 잃었구나'땅을 치며 통곡했고 성재 [[이시영 (1868년)|이시영]](省薺 李始榮)도 "나라의 큰 별이었는데…"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한다.<ref name=autogenerated1 /> [[1963년]]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 조카 : [[이인]](李仁, [[1896년]] [[10월 26일]](음력 [[9월 20일]]) ~ [[1979년]] [[4월 5일]], 독립운동가 겸 정치인, 법조인)
  • 이유리(배우) . . . . 3회 일치
         || 2004년 7월 31일 || MBC || [[행복주식회사]] - [[만원의 행복]] ||<|5> 게스트 || ||
         || 2016년 7월 25일 || SBS || 셀프디스 코믹클럽 DISCO || 패널 || 파일럿 방송 ||
         || 2017년 6월 21일~2017년 7월 5일 ||<|2> SBS ||<|2> [[싱글 와이프]] ||<|2> 진행자 || ||
  • 이재학 . . . . 3회 일치
         7월 30일 [[삼성 라이온즈]]전에 구원으로 등판하여 [[야마이코 나바로]]와 [[박석민]]에게 각각 홈런을 맞았다.
         [[2016년 프로야구 승부조작 사건|승부조작]]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의혹을 받았다. 본인은 그러한 의혹에 대해 결백하다는 입장을 밝혔으나, [[NC 다이노스]] 구단은 관련 사안의 중대성을 고려하여 7월 30일 [[http://sports.news.naver.com/kbaseball/news/read.nhn?oid=001&aid=0008575719|1군 엔트리 제외]]를 결정했다.
          * [[2013년]] [[4월 11일]] [[고창성]]과 함께 [[켠김에 왕까지]] 164회 [[닌자 베이스볼 배트맨]]편에 게스트로 출연하여 적절한 예능감을 보여주었다. 징크스 같은게 있냐고 묻자 자신은 그런건 안만들려고 노력한다고 대답을 하였다. 시구하는 것을 보고 싶은 연예인으로 f(x)의 설리를 지목하였다. 그런데 제작진들이 투수2명을 섭외해놓고 과자는 홈런볼을 준비하는 괴악한 센스를 보여주었다. --모조리 먹어서 홈런 맞지말란 뜻..?--
  • 이정재(영화배우) . . . . 3회 일치
         이후 영화 빅매치에 이어 2015년 7월 22일 개봉한 영화 《[[암살(2015)|암살]]》에서 두 얼굴의 독립군인 염석진 역할을 하며 [[천만영화]] 두편을 지닌 배우가 되었다.[* 이 캐릭터의 불안정하고 이중적인 심리를 드러내기 위해 두 달 간 체중을 15킬로그램 감량한 것은 물론, 촬영 전 48시간 동안 깨어있는 상태로 준비했다고 한다. 똑같이 불안정한 캐릭터인 이자성을 연기할 땐 저절로 살이 빠졌다고.]
         2016년 7월 27일 개봉한 '인천상륙작전' 에서 맥아더의 명을 받고 X-Ray 작전을 수행하는 장학수 대위 역할을 하였다.
         2번 적발됐다. 첫 번째 음주운전은 1999년 9월 13일, 자신의 [[자동차]]인 [[BMW]]를 혈중 알코올 농도 0.222% 만취 상태로 운전을 하다가 당시 23살 여성(회사원) 송모씨가 타고 있는 [[마티즈]] 옆 부분을 들이 박은 것이다. 당시 동료배우 정모씨와 있었던 걸로 알려져 있었고, 이씨는 사고 직후 술을 마신 것은 사실이지만 '''자신이 운전을 하지는 않았다고 주장'''하며 출동한 경찰과 실랑이를 벌이기도 했다. 이정재는 경찰에서 "내가 운전하지 않고 매니저가 대신했다"라고 혐의 사실을 부인을 했었다. ~~[[강정호|17년 뒤 똑같은 수법을 쓴 메이저리거가 등장하는데...]]~~ 경찰서에서는 시인하였다고 한다. 이 음주운전으로 인해 불구속 입건 및 면허 취소가 되었다.[[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9091400209122009&editNo=45&printCount=1&publishDate=1999-09-14&officeId=00020&pageNo=22&printNo=24301&publishType=00010#|기사]] 그리고 첫 번째 음주 운전 사고가 난 3년 뒤 또 한 번 2002년 7월 22일 [[강남구]] 청담동 청담초등학교앞에서 음주단속 중인 경찰에게 적발되었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20&aid=0000147301|기사]]
  • 이준(배우) . . . . 3회 일치
         그리고 런닝맨 연출진들의 마음에 들었는지 같은해 7월 22일자 [[런닝맨]]에서는 그룹 멤버들을 빼고 단독 출연했다! 여기서도 이동 중에 혹시 스파이가 아니냐는 아이돌팀 멤버들의 의심에 '''"내가 그럴 급이 아냐!"'''라고 강하게 부정하고 어머니 나이를 왜 공개하냐는 정용화의 핀잔에 '''"우리엄마 나이 내가 공개하는데 왜?"'''하면서 웃음 포인트를 만들었다. 중간 미션인 뜀틀 배구대에서는 쓸데없이 높게 뛰는 퍼포먼스를 남발하다가 자신에게 날아온 배구공을 제대로 토스하지 못해 팀을 패배하게 만들었다(마침 그게 런닝맨팀의 매치포인트 경기였다). 최후의 추격전에서는 [[개리(리쌍)/런닝맨|개리]]를 피해 달아나다 [[김종국/런닝맨|호랑이]]를 맞닥뜨려서 또 다시 '''"오와아아아아악!"'''이라는 비명을 남기고 횡사.[* 뒤에서 추격해오던 하하까지 기겁했다.] [[단말마]]가 무엇인지 시범을 보이면서 본의 아니게 예능감을 보여주기도.
         2013년 7월 2일 [[화신]]에서 우결에 대한 이야기를 했는데, [[http://news.nate.com/view/20130703n00274|대인배]] 같은 모습을 보여줘 시청자들에게 호감을 샀다.
         2015년 7월, 영화 [[손님]]에서도 섬뜩한 연기를 보여주어 호평을 받았다.
  • 이준승 . . . . 3회 일치
         대검찰청 공판부장, 1980년 서울지검 북부지청장과 1981년 법무부 법무실장을 거쳐 검사장으로 승진하여 1982년 대전지검, 1983년 마산지검에서 검사장을 지내고 광주지검 검사장 재직 중인 1986년 4월에 전두환 대통령에 의해 1986년 4월 17일에 2년 임기의 대법원 판사에 임명되었고 1988년 [[이일규]] 대법원장 취임이후 대법관 재임명 과정에서 탈락하여 대법원 판사 퇴임이후에 변호사 활동을 하였다. 1991년에 국회 추천 몫으로 여당인 [[민자당]]이 추천하여 중앙선거관리위원에 추천되어 1997년까지 임기를 마쳤다.<ref>[http://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120117027020]</ref> 서울지검 공안부 검사 시절에는 [[동백림 사건]]을 맡아 처리했으며 <국제분쟁에 있어서의 국가배상 문제> 등의 저서가 있고 테니스와 등산을 즐겼다.<ref>경향신문 1986년 4월 3일자</ref> 대구지검 차장검사로 재직하던 1980년 7월 3일 소속 검사와 직원들에게 "공사간 언행을 조심하고 사건처리과정에서 피의자들에게 이해와 설득으로 승복하여 신뢰받는 검찰상을 구현해달라"고 하면서 "공보관은 엄연히 검사장이므로 검사나 일반직원들이 함부로 수사기밀을 누설하지 말고 검찰청 출입자의 신분을 가릴 것 없이 수위실에서 출입증을 받아 패용하도록 하라"고 지시하였고<ref>경향신문
          1980년 7월 4일자</ref> 대검찰청 공판부장에 재직할 때 "검사들이 피고인에게 무죄만 선고되면 무조건 상소하는 것은 고질적인 폐단이다"고 하면서 개선책을 마련했다.<ref>동아일보 1983년 7월 23일자</ref>
  • 이지아(배우) . . . . 3회 일치
         [[ http://m.entertain.naver.com/read?oid=112&aid=0002712938|2부작 드라마 <설련화>에 출연하였다.]] SBS에서 2015년 11월 11일에 방영하였다.
         Cosmopolitan 2008년 3월호 / 2009년 5월호 / 2015년 7월호 / 2016년 3월호
         The Celebrity 2014년 7월
  • 이효상 . . . . 3회 일치
         |임기 = [[1960년]] [[7월 29일]] ~ [[1961년]] [[5월 16일]]
         |임기 = [[1967년]] [[7월 1일]] ~ [[1971년]] [[6월 30일]]
         |임기 = [[1973년]] [[3월 12일]] ~ [[1979년]] [[3월 11일]]
  • 장원준 (야구선수) . . . . 3회 일치
         '''장원준'''(張元準, [[1985년]] [[7월 31일]] ~ )은 [[KBO 리그]] [[두산 베어스]]의 [[투수]]이다. [[서울특별시|서울]]에서 태어났으나 7세 때 [[부산광역시|부산]]으로 이주하여 성장했다.<ref>[http://sports.news.naver.com/sports/index.nhn?category=kbo&ctg=news&mod=read&office_id=382&article_id=0000007335 장원준, 미인들만 만나는 비결? “모성애 자극 ㅋㅋ”] - 스포츠동아</ref>
         * 프로 2년차이던 [[2005년]] [[7월 26일]] [[KIA 타이거즈|KIA]]전 9회말에 [[이종범]]의 깊은 타구를 당시 [[1루수]]였던 [[라이언 잭슨|라이온]]이 잡았지만, 그의 1루 베이스 커버가 늦으면서 내야 안타를 허용해 안타깝게 [[노히트노런]]을 기록하지 못하였다.
         * [[2014년]] [[7월 12일]] [[KIA 타이거즈|KIA]]전에서 12회초에 타석에서 삼진을 당하였다.<ref>
  • 장항준 . . . . 3회 일치
         *[[2004년]] [[7월 7일]] - [[앨프리드 히치콕]] 후편
         *[[2004년]] [[7월 28일]] - [[마이클 무어]] 편
         *[[2004년]] [[8월 11일]] - [[피비 케이츠]]와 [[브룩 실즈]] 편
  • 전태규 . . . . 3회 일치
         *[[2002년]] [[7월]] ITV 팀배틀 최강전 우승
         *[[2003년]] [[7월]] Stout MSL 3위
         *[[2009년]] [[7월]] 신한은행 프로리그 08~09 6강
  • 정동기 . . . . 3회 일치
         * 1995년 ~ 1996년 7월 : [[법무부]] 국제법무심의관
         * 1996년 7월 ~ 1997년 8월 : [[부산지방검찰청]] 형사제1부 부장검사
         * 2008년 6월 ~ 2009년 7월 : 대통령실 [[청와대 민정수석|민정수석비서관]]
  • 정성왕후 . . . . 3회 일치
         '''정성왕후 서씨'''(貞聖王后 徐氏, [[1693년]] [[1월 12일]] ([[1692년]] [[음력 12월 7일]]) ~ [[1757년]] [[4월 3일]] ([[음력 2월 15일]])는 조선의 제21대 왕 [[조선 영조|영조]]의 정비(正妃)이며 조선의 역대 왕비 중 왕비재임기간이 가장 긴 왕비이다.
         1692년 음력 12월 7일 술시에 가회방 사제에서 태어났다. [[1704년]](숙종 30년), 연잉군(延仍君, 훗날의 영조)과 길례를 행하고 달성군부인(達城郡夫人)으로 봉해졌다.
  • 정창영 (공무원) . . . . 3회 일치
         |임기 = [[2009년]] [[1월 2일]] ~ [[2009년]] [[7월 22일]]
         |임기 = [[2009년]] [[7월 22일]] ~ [[2009년]] [[12월 16일]]
         |임기 = [[2009년]] [[12월 16일]] ~ [[2011년]] [[7월 21일]]
  • 정호용 . . . . 3회 일치
         |임기 = 1987년 7월 14일~1988년 2월 25일
         1987년 1월, [[대한민국 행정안전부|내무부]] 장관에 임명되었다가 4개월 만인 그 해 5월 장관직에서 물러났다. 그러나 [[민주정의당]] 당내에 영향력을 행사하였으며, 같은 해 7월 [[대한민국 국방부|국방부]] 장관으로 내각에 복귀했으나 전두환 정권이 불과 7개월밖에 남지 않은지라 오래 재직하지 못했다. 이후 노태우가 대통령으로 당선된 후 정치인으로 변신했고 1988년 5월 민주정의당 대구경북지구당 위원장에 임명, 같은 해 [[대한민국 13대 총선|13대 총선]]에서는 대구 지역에서 출마해 국회의원으로 당선됐다. 그러나 여소야대 국회에서 제5공화국 비리에 대한 청문회, 5·18 청문회로 사회 여론이 공직사퇴요구를 제기하자 결국 1990년 1월 5일에 국회의원직을 사퇴했다.<ref>1990년 1월 5일에 사직했다.</ref> 이후 명예회복을 위해 자신의 지역구 보궐선거에 다시 출마했지만 정치적 부담을 느낀 노태우 정부의 압력에 의해 후보직에서 다시 사퇴했다.
         |임기 = [[1987년]] [[7월 14일]] ~ [[1988년]] [[2월 25일]]
  • 지증왕 . . . . 3회 일치
         [[502년]] [[순장]]을 금하고, 신궁에서 직접 제사를 지냈다. 음력 3월에 주주(州主)와 군주(郡主)에게 각각 명하여 농사를 권장케 하였고, 처음으로 [[소]]를 부려 논밭갈이를 하였다.<ref>{{서적 인용 |제목= [[삼국사기]] | 저자= [[김부식]] |연도= 1145 |장= [[:s:삼국사기/권04/지증 마립간|본기 권4 지증 마립간]] |인용문= 三年 春二月 下令禁殉葬 前國王薨 則殉以男女各五人 至是禁焉 親祀神宮 三月 分命州郡主勸農 始用牛耕(3년(502) 봄 2월에 영(令)을 내려 순장(殉葬)을 금하였다. 전에는 국왕이 죽으면 남녀 각 다섯 명씩을 순장했는데, 이때 이르러 금한 것이다. 왕이 몸소 신궁(神宮)에 제사지냈다. 3월에 주주(州主)와 군주(郡主)에게 각각 명하여 농사를 권장케 하였고, 처음으로 소를 부려 논밭갈이를 하였다. )}}</ref> [[503년]]에 국호를 신로(新盧)·사라(斯羅)·서나(徐那)·서야(徐耶)·서라(徐羅)·서벌(徐伐) 등에서 “신라”(新羅)로 통일하였다.<ref>{{서적 인용 |제목= [[삼국사기]] | 저자= [[김부식]] |연도= 1145 |장= [[:s:삼국사기/권04/지증 마립간|본기 권4 지증 마립간]] |인용문= 四年 冬十月 羣臣上言 “始祖創業已來 國名未定 或稱斯羅 或稱斯盧 或言新羅 臣等以爲 新者德業日新 羅者網羅四方之義 則其爲國號宜矣 又觀自古有國家者 皆稱帝稱王 自我始祖立國 至今二十二世 但稱方言 未正尊號 今羣臣一意 謹上號新羅國王” 王從之(년(503) 겨울 10월에 여러 신하들이 아뢰었다. 시조께서 나라를 세우신 이래 나라 이름을 정하지 않아 사라(斯羅)라고도 하고 혹은 사로(斯盧) 또는 신라(新羅)라고도 칭하였습니다. 신 등의 생각으로는, 신(新)은 ‘덕업이 날로 새로워진다.’는 뜻이고 나(羅)는 ‘사방을 망라한다.’는 뜻이므로 이를 나라 이름으로 삼는 것이 마땅하다고 여겨진다. 또 살펴 보건대 예부터 국가를 가진 이는 모두 제(帝)나 왕(王)을 칭하였는데, 우리 시조께서 나라를 세운 지 지금 22대에 이르기까지 단지 방언만을 칭하고 높이는 호칭을 정하지 못하였으니, 이제 뭇 신하가 한 마음으로 삼가 신라국왕(新羅國王)이라는 칭호를 올립니다. 왕이 이에 따랐다. )}}</ref>
         즉위 초부터 그는 제도와 체제 개편을 추진하였다. [[504년]] 음력 4월 상복법을 제정하고, 음력 9월에 파리, 미실, 진덕, 골화 등 12성을 쌓는 등 고대 국가로서의 기반을 다졌다.<ref>{{서적 인용 |제목= [[삼국사기]] | 저자= [[김부식]] |연도= 1145 |장= [[:s:삼국사기/권04/지증 마립간|본기 권4 지증 마립간]] |인용문= 五年 夏四月 制喪服法頒行 秋九月 徵役夫築波里 彌實 珍德 骨火等十二城(5년(504) 여름 4월에 상복(喪服)에 관한 법을 제정하여 반포하고 시행하였다. 가을 9월에 인부를 징발하여 파리성(波里城), 미실성(彌實城), 진덕성(珍德城), 골화성(骨火城) 등 12성을 쌓았다.)}}</ref>
  • 창원시 . . . . 3회 일치
         [[이명박 정부]] 들어 많은 인센티브를 거론하며 기초자치단체 간 통합을 유도하였으며, 당연히 그전부터 경제/사회/문화적 교류가 많은 소위 마창진([[마산]], [[창원시/통합 이전|창원]], [[진해]])에 대한 이목이 집중되었다. 이에 자극받은 3개 시는 지난한 정치적 협상 및 행정적 조율을 거쳐 드디어 2010년 7월 통합 창원시가 출범하게 되었으며,[* "경상남도의 창원시, 마산시 및 진해시를 각각 폐지한다."(경상남도 창원시 설치 및 지원특례에 관한 법률 제2조 제1항) "경상남도에 창원시를 다음과 같이 설치한다."(같은 조 제2항. 제1항에 따라 폐지되는 창원시 일원, 마산시 일원 및 진해시 일원을 관할구역으로 하는 창원시 설치)] 이는 이명박 정부의 정책 수립 이후 첫 번째 사례가 되겠다. 이 과정에서 [[함안군]]도 포함될 뻔했으나 제외되었다.[* 마산과 함안이 밀었던 모델은 함안+마산+창원 이였고 창원이 밀었던 모델이 마산 + 창원+ 진해 였다. 마산은 이 3도시가 통합되면 마산은 발전동력이 다해 쇠퇴하던 도시가 다시 도시중심부가 되어 새로운 발전동력을 얻을수 있었고 함안은 새로이 공장이 들어서는 발전가능성이 높은 도시였으나 재정자립도가 낮은 탓에 과감한 투자를 할수 없으므로 많은 재정을 유치할수 있었던 까닭이다. 그러나 창원시는 아직도 북면의 개발등 개발지역이 남아있고 함안과의 연동으로는 별 메리트를 찾을수 없었던 터라 함안과 마산을 제외하고 신항이 들어서던 진해와 합쳐서 항만도시로의 발전을 추구하는게 낫다고 판단하고 도시통합을 추진했다.]
         우리나라 기후 특성상 '''강수량은 연도마다 들쭉날쭉하다'''.[* 이는 연강수량 대부분을 장마와 태풍에 의존하는 우리나라의 기후 특성 때문이다. 유달리 장마가 길고 태풍도 여러개씩 통과하는 해는 연 강수량이 2000mm 가까이 내리는 경우도 있는 반면에 장마가 짧게 끝나고 태풍이 통과하지 않는 해는 1000mm도 채 안내리는 경우도 있다. 당장 2016년만 하더라도 서울의 누적 강수량은 776mm(9월 20일 기준)로 평년의 66% 수주밖에 되지 않는다.] 1987년에는 최악의 겨울가뭄으로 저수지가 다 말라붙었고, 1999년에는 6월 중순부터 8월 말까지 거의 100일에 걸쳐 게릴라성 집중호우가 내리기도 했다. 그리고 2013년 여름 8월에는 제대로 된 비는 다섯 손가락에 꼽을 수 있을 정도로 땡볕이 쏟아졌다. 일기예보에서 전국(남부지방 포함) 비 예보를 할 때조차 땡볕이었다! 뉴스를 볼 때마다(일기예보에서만 윗 지방의 홍수를 얘기하는 것이 아니므로) 밥 먹다 숟가락 던지는 사람도 많다고. 경남 지역 뉴스의 일기예보조차 맞지 않아 각 개인이 날씨에 대비할 수밖에 없다. 단, 더위 관련은 예보를 뛰어넘는 찜통을 보여준다. 2016년 7월 31일을 기준으로 2016년 전국 최고기온을 달성한 적도 있으며, 대개 숫자상 최고기온은 내륙의 대구, 경산, 밀양이 갖고가지만 창원도 정말 만만찮게 덥다. 게다가 창원기상대는 마산합포구 해안가의 옛 마산측후소 자리에 그대로 있는데 구 창원 권역은 분지 지형이라 열섬현상에 분지 특성까지 얹어서 더 덥다.
          * 창원시립교향악단 연주회: 2010년 7월 통합으로 마산시립교향악단이 창원시립마산교향악단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가 2012년 4월 두 악단이 통합되었다.
  • 채상병 . . . . 3회 일치
         |마지막 경기 = [[KBO (야구)|KBO]] / [[2012년]] [[7월 7일]] <br /> [[사직야구장|사직]] 대 [[롯데 자이언츠|롯데]]전
         [[2009년]] 시즌에 접어들어서는 [[최승환]], [[용덕한]] 등의 팀 내 다른 [[포수]]들의 경쟁에 밀려 1군 경기보다는 2군 경기에서의 출전이 잦아지게 되었고 1군에는 몇 경기에만 나와서 손가락 부상을 당하는 등 거의 출전하지 못했다.<ref>[http://www.mydaily.co.kr/news/read.html?newsid=200905231651142222&ext=na 두산 채상병-SK 채병용, 부상으로 1군 엔트리 말소] - 마이데일리</ref> 때마침 [[삼성 라이온즈]]의 주전 [[포수]]였던 [[진갑용]], [[현재윤]] 등이 잇따라 부상을 입으면서 남아 있는 포수는 1군 경험이 거의 없는 신고선수 출신 [[이지영 (야구 선수)|이지영]]뿐이라 [[포수]] 자원이 부족해진 상황에 놓이자, [[2009년]] [[7월 16일]] [[삼성 라이온즈]]의 좌완 투수인 [[지승민]]을 상대로 한 1:1 트레이드를 통해 [[삼성 라이온즈]]로 이적하였다.<ref>[http://osen.freechal.com/news/view.asp?code=G0907160125 두산, 삼성 좌완 지승민 영입] 《Osen》, 2009년 7월 16일 작성</ref> 하지만 [[2010년]]에는 [[진갑용]]과 [[현재윤]]의 회복, 그리고 [[이정식 (야구 선수)|이정식]]이 군에서 제대하여 다시 2군으로 밀렸다. [[2011년]]에 포수들이 대거 부상을 입어 주전 자리에 다시 앉게 되어 감각을 찾았고, [[2011년 한국시리즈]]에 출전하여 처음으로 우승을 맛보았다.그러나 2012년 이후 부터 경쟁에서 밀리며 경기에 출전하지 못하였고, 2014 시즌 후 구단과의 합의 끝에 은퇴를 결정하였고, 배터리 코치로서 새 출발을 하게 되었다.
  • 챈슬러 (음악가) . . . . 3회 일치
         | [[6월 11일]]
         | [[7월 10일]]
         | [[7월 4일]]
  • 최다빈 . . . . 3회 일치
         | 2019년 1월 11일-13일
         | 2018년 11월 9일-11일
         | 2013년 8월 8일-11일
  • 최동수 (야구인) . . . . 3회 일치
         '''최동수'''(崔東秀, [[1971년]] [[9월 11일]] ~ )는 전 [[KBO 리그]] [[LG 트윈스]]의 [[내야수]], [[지명타자]]이자, 현 [[KBO 리그]] [[LG 트윈스]]의 육성군 타격코치이다.
         [[2010년]] 시즌 좀처럼 주전 기회를 잡지 못하던 그는 그 해 [[7월 28일]] 4:3 대형 트레이드로 [[SK 와이번스]]로 이적하였다. 주전 [[내야수]] [[박정권]], [[나주환]]이 부상으로 이탈하여 [[내야수]]가 필요하였던 [[SK 와이번스]]와 [[투수]]가 필요하였던 [[LG 트윈스]]의 이해 관계가 맞아 떨어져 그는 [[권용관]], [[안치용]], [[이재영 (야구 선수)|이재영]]과 함께 [[SK 와이번스]]로 이적하였고, [[LG 트윈스]]는 [[SK 와이번스]]로부터 [[투수]] [[박현준 (야구 선수)|박현준]], [[김선규 (야구 선수)|김선규]], [[포수]] [[윤요섭]]을 받았다. 그 때 [[SK 와이번스|SK]]와 [[LG 트윈스|LG]]는 [[서울종합운동장 야구장|잠실]] 3연전 중이어서, 트레이드 된 선수들은 [[서울종합운동장 야구장|잠실]]에서 유니폼을 바꿔 입었다. 트레이드가 성사된 [[7월 28일]] 당일, 트레이드 당사자인 [[LG 트윈스]]와 [[SK 와이번스]]가 맞대결하게 되었는데 그는 같이 이적한 [[안치용]]과 함께 선발 출장하였고 [[권용관]]은 도중에 대주자로 교체되어 출전하였다. 그리고 이적한 선수 중 [[윤요섭]]이 대타로 나서는 진풍경이 펼쳐졌다. [[SK 와이번스]] 이적 첫 경기에서 그는 3점 홈런을 쳐 내는 등 4타점을 쓸어담아 맹활약하였다. 그 날 [[SK 와이번스]]는 연장전에서 [[권용관]]이 [[정성훈 (1980년)|정성훈]]의 타구를 놓치는 실책을 범해 끝내기 안타를 허용하여 패했다. 특히 그에겐 프로에서 눈을 뜨게 해 준 [[김성근 (야구인)|김성근]]과의 재회여서 더 의미가 컸으며, 2차 드래프트가 있기 전 [[김성근 (야구인)|김성근]]이 감독직에서 경질된 것에 대해 아쉬움을 드러냈다. 하지만 [[2010년 한국시리즈]] 엔트리에는 들어가지 못했다. 그 해 시즌 후 32번을 쓰고 있었던 [[외야수]] [[박윤]]이 보류 선수에서 빠져 [[신고선수]]로 전환되자, 자신의 번호였던 '32'번을 되찾았다. [[2011년]]에는 [[박경완]]의 재활이 장기화되어서 10년 만에 그의 본업인 [[포수]]로 출전하기도 하였으며, [[2002년]] 이후 9년 만에 포스트 시즌에 복귀하여 [[2011년 한국시리즈|한국시리즈]]에도 출전했다.
  • 최성국 (축구선수) . . . . 3회 일치
         [[2011년 5월]] [[K리그 승부조작 사건|승부조작 사건]]이 터진 후 최성국은 승부조작 근절을 위한 [[K리그]] 전 구단 전 선수가 참여하는 워크숍에서 "부끄러움이 있다면 이 자리에 있지 않는다. 솔직히 웃어 넘길 수 있었으나 계속 들으니 지치기도 했다"라며 또 "모르는 전화는 받지도 않는다. 부끄러움 없이 정직하게 살았다"라고 하면서 승부 조작을 극구 부인하였다.<ref>{{뉴스 인용 |제목=최성국∙유병수, “통장, 통화 내역 공개할 수 있다” |url=http://www.sportalkorea.com/news/view.phgisa_uniq=2011053117182513§ion_code=10&key=&field= |출판사=스포탈코리아 |저자=김성진 |날짜=2011년 5월 31일 }}</ref> 그러나 [[2011년]] [[6월 28일]] [[상주 상무 피닉스|광주 상무]] 소속 시절 승부조작에 참여했다고 자진 신고하였다.<ref>{{뉴스 인용 |제목=결백 주장하던 최성국, 승부조작 자진신고 |url=http://www.sportalkorea.com/news/view.php?gisa_uniq=2011062910214013§ion_code=10&key=&field= |출판사=스포탈코리아 |저자=김성진 |날짜=2011년 6월 29일 }}</ref> 게다가 브로커 역할까지 한 것으로 밝혀졌다.<ref>{{뉴스 인용 |제목='혐의 없다던' 최성국, 400만원 수수에 선수 섭외까지 |url=http://news.naver.com/sports/index.nhn?category=soccer&ctg=news&mod=read&office_id=109&article_id=0002228785 |출판사=OSEN |저자=허종호 |날짜=2011년 7월 7일 }}</ref> 더 이상 축구계에 발을 딛을 수 없게 영구 제명되었으나,<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7&oid=241&aid=0002054535 승부조작 가담 선수 모두 “선수자격 영구박탈”] 일간 스포츠 김민규 기자 2011-08-25</ref> [[마케도니아]]의 [[FK 라보트니치키]]에 입단하여 축구 선수로서의 생명을 이어가고자 하였다. 그러나 [[2012년]] [[3월 16일]](한국시간), [[국제 축구 연맹|FIFA]]가 최성국의 모든 선수 활동을 세계적으로 정지시키는 영구제명을 결정함으로써<ref>{{뉴스 인용 |제목=FIFA, 최성국에 '선수 활동 정지' 징계 |출판사=OSEN |날짜=2012년 3월 16일 |url=http://sports.media.daum.net/soccer/news/a_match/breaking/view.html?cateid=1172&newsid=20120316073304526&p=poctan }}</ref> 축구 선수로서의 삶은 끝나게 된다.
         2014년 현재 최성국은 어느 한 사회인 야구단에서 활동하고 있다. 2016년 7월 축구선수 최성국·김동현 협박했던 30대 남성이 6년만에 기소 되었다.<ref>{{웹 인용|url=http://news.mk.co.kr/newsRead.php?no=537548&year=2016|제목=축구선수 최성국·김동현 협박했던 30대 남성 6년만에 기소|확인날짜=2016-08-08}}</ref> 그와 동시에 2016년 7월 징계가 끝나는것과 관련하여 복귀 의사를 밝혔지만 프로축구연맹과 대한축구연맹은 아직 영구제명에 대해 경감의사가 없는것으로 입장을 표명했다 <ref>{{웹 인용|url=http://www.newstomato.com/ReadNews.aspx?no=675935|제목=복귀 타진 최성국…축구계 "현실성 없는 일"|확인날짜=2016-08-08}}</ref>
  • 최준석 . . . . 3회 일치
         || '''응원가''' || '''두산 베어스 시절''' [br] 정광태 - 힘내라 힘[* 날려라 준! 날려라 석! 날려라 최준석~ 홈런! ×4][* 여담으로 이 응원가는 [[이승엽]]의 [[치바 롯데 마린즈]] 시절 응원가기도 했고, [[중신 브라더스]]의 팀 응원가로도 쓰인다.] [br] '''롯데 자이언츠 시절'''[br]콜럼버스 1492 OST - Conquest of Paradise[* 스포츠 CF에 나오던 그 [[마성의 BGM#s-9|웅장한 마성의 BGM]] 맞다. 응원 가사는 롯데~의 최 준석 화이팅 오오오오오오오~ 롯데~의 최 준석 화이팅 오오오오오오오] [br] 자우림 - 하하하송[* (빰빰빰빰빠밤빰) 홈! 런! 최준석! (빠빠빠빠빠빠빠빠빠밤빰) 홈! 런! 최준석!. 2015년 7월 2일 사직SK전에서 쓰이는게 확인되었다. 원래 홈런타자 돌림빵 응원가였다가 [[이대호|친구]] 응원가로 굳어졌던 노래다.][* [[한화 이글스]]의 [[하주석]]도 같은 멜로디의 응원가를 쓰고 있다. ] [br] Pitbull - Celebrate[* 자~이언츠 최준석~ 자~이언츠 최준석~ 빰빠바바바빰빰 *2][* 이 응원곡의 응원동작에는 최준석의 홈런 세레머니 동작이 들어간다.] [br]'''NC 다이노스 시절''' [br]구단 자체제작[* 오~ NC의 최준석 NC의 최준석 다이노스(최준석!)(x3)][* 시즌 전에 공개한 응원가는 [[장성호]]와 [[Johnny, I hardly knew ya|원곡도 같고]] 가사마저 [[표절|복붙 수준으로 같았으나]] 이에 대해서 항의가 들어갔는지 시즌이 시작되기 전에[[https://youtu.be/1ouaZDexyA8|비공개 처리 되었다]]. 그런데 오히려 급하게 만든 응원가가 더 호평을 받고 있다(...).] ||
         [[롯데 자이언츠]]와의 2012년 팔도 프로야구 준플레이오프 1, 2차전에서는 출장하지 못했으나 10월 11일 [[사직 야구장]]에서 열린 3차전 스코어 1:0으로 팀이 앞선 1회초 2사 1루 첫 타석에서 [[롯데 자이언츠|롯데]]의 [[선발 투수]] [[라이언 사도스키|사도스키]]를 상대로 투런 홈런을 쳐내며 팀의 스코어 7:2 승리에 공헌했다.
         결국 2018년 2월 11일, 이전에 했던 말을 번복하고 조건없는 사인 앤 트레이드로 NC행이 결정되었다. 연봉은 본인이 말했던 5천만에 근접한 5,500만 원. [[http://sports.news.naver.com/kbaseball/news/read.nhn?oid=311&aid=0000821910&redirect=false|김경문 감독의 요청이 있었다고 한다]]. 이렇게 2014년 두산의 FA [[최준석|3]][[이종욱(야구선수)|인]][[손시헌|방]]이 모두 NC에서 김경문 감독과 재회하게 되었다. 허나 NC 팬덤은, [[리빌딩]]을 천명하면서 이종욱, 손시헌과 저렴한 금액에 재계약하고 [[조영훈]], [[김종호(야구선수)|김종호]]를 내쳐놓고는 최준석 영입이 말이 되느냐는 반응.
  • 카치구미 . . . . 3회 일치
         이런 상황에서 일본이 패전하기 직전인 1945년 7월, 브라질 일본인들이 조직한 신도연맹(臣道連盟)이라는 단체가 [[상파울로]]에서 결성되었다. 신도연맹은 이들의 조국인 '''일본을 응원하고, 승리를 믿는 조직'''으로서, 7월에 발족하고 빠른 속도로 성장하여 12월에는 회원은 3만 가구에 달하게 되었다.
         시간이 지나자 일본인과 브라질 시민들 사이에서도 대립이 발생하여, 7월 30일에서 8월 2일 까지는 파울리스타 선 오스왈드 드 크루즈 시에서 일본인과 브라질 시민 사이에서 대규모 난투극이 벌어져 살해까지 일어났다.
  • 코만단테 카펠리니 . . . . 3회 일치
         1940년 7월 1일, 이탈리아가 [[제2차 세계대전]]에 뛰어든 이후 [[대서양]]에서 통상 파괴 작전을 수행한다.
         1943년 5월 11일 [[보르도]], 아퀼라 III는 일본에 보급할 물자를 싣고 [[싱가포르]]로 출항한다. 7월 13일, 두달간의 항해 끝에 아퀼라는 싱가포르에 도착했다. 한편 유럽에서는 연합군이 [[시칠리아]]에 상륙한 상황이었다. 결국 9월 8일, 이탈리아는 연합군에 항복했다. 그때도 아퀼라 III는 싱가포르에 정박해 있었다.
  • 피수영 . . . . 3회 일치
         * 1978년 7월 ~ 1980년 6월 : [[유타 대학교]] 부속병원 신생아학 전임
         * 1980년 7월 ~ 1995년 8월 : [[미네소타 대학교]] 의과대학 임상부 교수, 둘루스클리닉 신생아과 과장
         피수영은 1995년 [[미국]]을 떠나 한국으로 오면서 국내의 수많은 미숙아들을 살리기 위해 서울아산병원으로 향했다. 2000년엔 국내 의료진과 함께 468g 체중으로 태어난 아이를 성공적으로 살려냈다. 서울아산병원의 의료진은 미국 의사들이 "너희들은 이런 아이들까지 살리느냐"고 할 만치 위험한 상태의 미숙아를 살려내기도 했다. 경제적 부담 때문에 미숙아로 태어난 아이의 치료를 거부하는 부모가 있었다고 한다. 심지어 "나도 백내장에 걸려 치료도 못 받는데 아기를 살려서 뭐하냐"는 아기 할아버지의 항의도 있었다고 한다. 그 땐 피 교수가 "미숙아도 생명이다"라며 자기 돈을 들여 아이를 살려냈다고 한다. 피수영 교수는 '더 이상 경제적 이유로 미숙아가 죽어서는 안된다'는 바람으로 유명 탤런트 등 몇몇 지인들과 몇백 만원씩 모아서 1억5000만원을 아산사회복지재단에 기부했다.<ref>[http://www.mt.co.kr/view/mtview.php?type=1&no=2008071222083196938 피수영 교수가 말하는 '나의 아버지, 피천득'], 《머니투데이》, 2008년 7월 25일</ref>
  • 하정우(영화감독) . . . . 3회 일치
         ||<#878787> '''{{{#EEE156 출생}}}''' ||<(> [[1978년]] [[3월 11일]] ([age(1978-03-11)]세), [[전라북도]] [[임실군]] ||
         [[2013년]] [[류승완]] 감독의 《[[베를린(영화)|베를린]]》에서 주인공 [[표종성]] 역을 맡아 열연했다. 영화가 관객 수 700만 명을 넘기면서 당대 최고의 흥행 배우로 입지를 굳혔다는 평. 또한 같은 해 7월에 개봉한 《[[더 테러 라이브]]》는 하정우의 단독 주연작에 같이 개봉하는 《[[설국열차]]》가 있어서 흥행하기 힘들 것이라는 평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550만을 넘기며 흥행에 성공했다.
         [[2014년]] 다시 한 번 [[윤종빈]] 감독과 함께한 영화 《[[군도: 민란의 시대]]》에서는 백정 돌무치로 변신해 머리까지 밀고 열연하였지만 손익분기점을 넘지 못했다. [[2015년]] 1월 하정우의 두 번째 연출작인 《[[허삼관]]》이 개봉했지만 여러가지 평가 속에서 흥행하지 못하였고, 7월 영화 《[[암살(2015)|암살]]》에서는 청부살인업자 하와이 피스톨 역을 맡아 큰 인기를 얻으며 데뷔 후 첫 천만 영화를 보유하게 되었다.
  • 한영이 . . . . 3회 일치
         |시복일 = [[1925년]] [[7월 5일]]
         한영이는 한 배교자의 고발로 [[1839년]] [[7월 17일]]에 그녀의 딸 권진이와 딸의 친구 이경이와 함께 [[체포]]되었다. 그런데, 한영이만 따로 수감 되었고, 딸 권진이를 포함한 세 명의 여성은 포졸들의 감시 하에 이웃 집에 수감되었다. 배신자 [[김여상]]이 [[권진이]]를 첩으로 들이려 유혹했지만,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녀의 젊음과 미모를 동정한 포졸들에 의해서 풀려났다. [[조정 (정치)|조정]]에서 그 사건을 알고 김여상에게 협조한 관리 및 포졸들을 처벌했다. 권진이를 포함한 그 세 명의 여성은 나중에 다시 체포되었다.
         한영이 막달레나는 [[1925년]] [[7월 5일]]에 [[로마]] [[성 베드로 광장]]에서 [[교황]] [[비오 11세]]가 집전한 79위<ref name=103saints_britannica>{{백과사전 인용
  • 한호문 . . . . 3회 일치
         그의 동생 한의문의 부인이 도적에게 살해당한 일이 인조실록에 등장한다.<ref>인조실록 47권, 1646년(인조 24년, 청 순치 3년) 7월 3일 정미 2번째기사, 대신 및 비국 당상과 양사 장관을 인견하다</ref>
         ** 제수 : ?(? ~ [[1646년]] [[7월 3일]]<ref>인조실록 47권, 1646년(인조 24년, 청 순치 3년) 7월 3일 정미 2번째기사, 대신 및 비국 당상과 양사 장관을 인견하다</ref>)
  • 허건엽 . . . . 3회 일치
         || '''생년월일''' || [[1993년]] [[7월 24일]] ([age(1993-07-24)]세) ||
         드디어, 2014년 7월 10일에 부진했던 [[엄정욱]]을 대신해 시즌 처음으로 1군에 등록되었다. 1군에 올라와서는 단 5이닝만 던지고 실점은 하지 않은 채 엔트리에서 말소됐다.
         6월 11일, 의 뒤를 이어 2회에 올라와서 아웃 하나 잡고 2회를 끝낸 후 3회에 안타 안타 안타 플라이 볼넷 안타라는 최악의 투구를 보여주면서 0.2이닝 5실점으로 먼지나게 두들겨맞고 강판당했다.
  • 현경련 . . . . 3회 일치
         |시복일 = [[1925년]] [[7월 5일]]
         [[1893년]] [[기해박해|기해년의 박해]] 초기에, [[교리]] [[선생]]이 된 현경련은 박해를 피해 숨었지만, [[6월|6]] [[7월]] 경에 [[체포]]되었다. 관리들은 현경련이 [[선교사]]들을 위해 중요한 역할을 하던 [[현석문]]의 누나인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그가 숨은 위치를 알아내기 위해 더 가혹하게 그녀를 고문했다. 그녀는 여덟 차례 [[심문]]과 두 차례의 [[주뢰형]] 그리고 300 여대의 [[장형 (형벌)|장형]]을 받았다. 형리들은 선교사들을 체포해서 포상을 받고 싶어했기 때문에, 선교사들에 대한 정보를 캐내기 위해 더 혹독하게 그녀를 고문했다. 그러나 현경련의 강한 의지로 인해서, 그들의 탐욕적인 노력은 허사로 돌아갔다. 그녀는 [[형조]]로 압송된 후에, 다리를 거의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격심하게 매질을 당했다. 그녀의 온몸에 상처가 깊어서 피와 [[고름]]이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또한 그녀는 [[감옥]]에서 [[콜레라]]에 걸려 앓았다.
         현경련 베네딕타는 [[1925년]] [[7월 5일]]에 [[성 베드로 광장]]에서 [[교황]] [[비오 11세]]가 집전한 79위<ref name=103saints_britannica>{{백과사전 인용
  • 현정건 . . . . 3회 일치
         조선 [[대한제국 고종|고종(高宗)]] 24년([[1887년]])에 [[대구광역시|대구(大邱)]]에서 현경운(玄炅運)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일찍 독립운동에 투신하여 [[1910년]]에 중국으로 유학, [[상하이 시|상하이]]에서 수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대한민국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의 [[임시의정원|임시의정원(臨時議政院)]]에서 이규홍(李奎洪) 등과 함께 1919년 9월 17일 경상도 의원으로 보선되었다. [[1920년]]에 상하이 주재 [[고려공산당|고려공산당(高麗共産黨)]]에 입당하였고 [[1922년]] 10월 20일에 열린 베르프네우딘스크(Verkhneudinsk) 회의<ref group="설명">이동휘의 상하이 고려공산당과 김철훈ㆍ안병찬의 이르쿠츠크 고려공산당의 경쟁을 완화하고 두 세력을 합치기 위해 코민테른에서 그들에게 베르프네우딘스크에서 연합대회를 갖도록 하였다. 여기에는 한인 공산주의 운동 계열의 주요 지도자들이 모두 참석하였는데, 국내에서는 정재달, [[조봉암]] 등도 여기에 참석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 대회는 대표의 자격 문제가 제기되면서 파탄나고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은 철수, 코민테른 당국이 각파 지도자를 모스크바로 불러 조정하려 했으나 이마저 실패하자 결국 코민테른은 양파 모두 해산하고 단일당을 조선 안에 세울 것을 지시함으로써 상하이파도 이르쿠츠크파도 없어지게 된다. 김학준 저 「혁명가들의 항일 회상」 2005, 민음사.</ref>에 윤자영(尹滋英) 등과 함께 고려공산당 상하이파의 일원으로서 참가하였다. [[1923년]] 1월에 상하이에서 소집된 [[국민대표회의|국민대표회의(國民代表會議)]]에서는 윤해(尹海)ㆍ신숙(申肅) 등과 더불어 창조파(創造派)에 속하여 왕삼덕(王三德) 등과 참여하였고 2월 5일에 [[여운형|여운형(呂運亨)]]과 더불어 외교분과위원으로 지명되었으나, 창조파가 임시정부를 부정하며 조선공화국(朝鮮共和國) 건국을 결정하고 임시헌법과 국호 등을 제정하자 뜻을 바꾸어 "임시정부는 3ㆍ1운동의 결정인데 출석원(員)의 2/3나 되는 개조안을 무시하고 사신 5인이 퇴석 통고를 하고 불착한 대로 국호를 조선공화국로 정하여 새 국가를 만든 것을 성토한다"는 성명을 발표하였다.<ref>「創造派의 회의 종료」 『동아일보(東亞日報)』 1923년 6월 25일자.</ref> 7월에는 여운형이 조직한 한국독립촉진회에도 가담하는 등,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가로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계파간의 이견 조정에 힘쓰는 등 민족 우선의 독립운동을 위해 활동하였다. 8월에 조선의 관서([[평안도]]) 지방에서 일어난 대홍수로 이재민이 발생했을 때는 상하이에 거주하던 조선인들의 상하이교민단(上海僑民團)이 내지동포수재구제회(內地同胞水災求濟會)를 조직해 9월 26일에 수재의연금 110원을 동아일보사에 전달하기도 했는데 <ref>「同胞의 ㅁ愛! 해외각디동포의열렬한동정 가련한수재당한형뎨들에게」 『동아일보』1923년 10월 4일자 기사.</ref> 여기에 현정건의 이름이 실려 있다.
         [[1925년]] 5월 9일에는 상하이에 있던 [[조소앙|조소앙(趙素昻)]]ㆍ여운형ㆍ윤자영ㆍ김상덕(金尙德)ㆍ최창식(崔昌植)ㆍ김규면(金圭冕)ㆍ손두환(孫斗煥) 등 약 30명의 조선인 동지와 함께 서문 밖 체육장에서 배일(排日) 중국인 단체의 집합에 참가하였고 이곳에서 "중국과 한국이 합동하여 일본에 맞서야 한다"는 취지의 『상하이주간(上海週刊)』5월 9일자 특별호에 실린 사설을 인쇄하여 배포하였다.<ref>이는 [[조선총독부]] 경무국장에 의해 7월 1일에 일본 외무성의 외무차관에 보고되었다. 국회도서관(國會圖書館) 편찬 『한국민족운동사료(韓國民族運動史料)』(중국편), 1976년, 567~568쪽.</ref> 9월 8일에는 상하이교민단의 의사원(議事員)으로 선출되어 활동하였다.
         [[1926년]] 10월 10일에 중국사정연구회(中國事情硏究會)를 조직하여 집행위원이 되었으며, 11월에 상하이에서 의열단 창립 9주년을 맞아 재중 조선인들에게 격문을 발표하며 성대한 기념식을 가졌다. [[1927년]] 4월 10일 홍진(洪鎭)ㆍ홍남규(洪南杓) 두 사람의 명의로 발표된 전민족적독립당결성선언문(全民族的獨立黨結成宣言文)에 따라 11일에 삼일당에서 약 40명이 모여 한국독립당관내촉성회연합회(韓國獨立黨關內促成會聯合會) 창립총회를 열고,
  • 현주엽 . . . . 3회 일치
         '''현주엽'''(玄周燁, [[1975년]] [[7월 27일]] ~ )은 [[대한민국]]의 前 [[대한민국 프로 농구|프로 농구 선수]], 농구 해설가이자 현재는 [[창원 LG 세이커스]]의 감독이다.
         [[1975년]] [[7월 27일]] [[서울특별시|서울]]에서 의류제조업을 하는 아버지 현진구(玄晉具)와 前 국가대표 농구 선수인 어머니 홍성화(洪性華) 사이에서 슬하 3남 중 막내로 출생하였다. 그의 위로는 세 살 위의 두 쌍둥이 형이 있다. 그의 본관은 [[연주 현씨|연주]](延州)이고 [[종교]]는 [[불교]]이며 신장은 195cm이고, 체중은 120kg이다.
         * [[2013년]] [[7월 10일]], [[음주운전]] 혐의로 불구속 입건, 면허정지 100일 처분을 받았다.<ref>[http://www.dispatch.co.kr/r.dp?idx=18848 현주엽, 음주운전 입건…"0.053%, 면허정지 100일"]</ref>
  • 홍대광 . . . . 3회 일치
         * 《2016 월드디저트 페스티벌》 (난지한강공원 중앙잔디마당, 2016년 6월 11일)
         * 《2016 디어콘서트》 (공감센터, 2016년 7월 02일)
         * 《2016 홍대광 콘서트 - 홍대에서 하는 홍대광 콘서트》 (무브홀, 2016년 12월 10-11일)
  • 황은진 . . . . 3회 일치
         * [[1993년]] [[7월 20일]], [[인풍비전]] 부사장.
         * [[1994년]] [[1994년 7월|7월]], [[연극]][[평론|평론가]] 등단.
  • 흥인군 . . . . 3회 일치
         * 양조부: [[은신군]] 이진(恩信君 李禛, [[1755년]] [[음력 1월 11일]] ~ [[1771년]] [[음력 3월 29일]]) - 아버지 [[남연군]]의 양부
  • F-15 . . . . 2회 일치
          1972년 7월 첫 비행.
          F-15A의 복좌형 모델. 1973년 7월 첫 비행.
  • 강구열 . . . . 2회 일치
         * [[손찬웅]] (현 [[화승 OZ]]) : 2011년 7월 은퇴. 손찬웅의 행보는 강라인이 되는 데 정말 완벽했다. 2007 스타챌린지 S2에서 손찬웅은 [[변길섭]]과의 최종전에서 변길섭을 꺾고 박카스 [[스타리그]]에 올라가 김동건, 박명수, 박영민에게 패하며 탈락했고, 그 다음 시즌 [[에버 스타리그 2008]] R1에서 [[이제동]]과 [[한동욱]]을 떨어트리는 충격적인 대진으로 2R에 진출했다. 그 후 R2에서 [[김택용]], [[박성균]], [[박영민 (1984년)|박영민]]과 같은 조가 되어 김택용과 박영민을 이기고 박영민과 8강에 진출하며 김택용과 박성균의 진출을 기대하였던 관계자에게 충격을 주었다. 또 8강에서는 강력했던 로얄로더 후보 [[허영무]]를 2:1로 역전시키며 4강에 진출하여 시드를 얻었다. 하지만 4강에서 [[프로토스]]전을 제일 잘 하기로 유명한 [[박성준 (1986년)|박성준]]에게 3:1로 패하는 무력한 모습을 보여주며 탈락하였으며, 끝내 [[인크루트 스타리그 2008]] 16강에서도 [[송병구]], [[염보성]], [[정명훈 (프로게이머)|정명훈]]에게 전패를 당하고 광속 탈락, 강라인의 일원이 되고 말았다. 인크루트 스타리그 3패 탈락의 영향으로 [[클럽데이 온라인 MSL 2008]]에서도 김택용, 박영민에게 2패를 당하고 광속 탈락, 이 후에도 서바이버 시즌 3에서도 [[박태민]]과 STX의 저그 신예 [[조일장]]에게 연패하며 탈락, 강라인의 일원임을 입증했다. 이후 [[박카스 스타리그 2009]]에서는 [[박태민]]과 [[서기수]]를 이기고 16강에 진출은 하나 [[문성진]], [[송병구]], [[정명훈 (프로게이머)|정명훈]]에게 무난한 3패로 광탈하며 강라인임을 다시 한번 입증한다. 차기 시즌에서는 36강에서 탈락하며 본선 진출 실패. 그 뒤로는 스타리그에도 MSL에도 복귀하질 못하였고, 계속 탈락만 하다가 2011년 7월 은퇴.
  • 강영식 . . . . 2회 일치
         1군에 올라온 이후로는 몸 상태가 정상은 아닌지라 1이닝을 소화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고 대부분 [[원 포인트 릴리프]]로 뛰었는데, 7월 29일부터 무려 30경기 가까이 등판했음에도 '''자책점은 0'''이었다. --물론 [[분식회계(야구)|분식회계]]는 했었다--
         8월 11일 SK 와이번스 경기에서 최연소 700경기 출장을 달성했다. 비가 오지만 8회초 시점이므로 노게임이 선언될 수 없는 상황. 기록은 모두 인정된다.
  • 강우영 . . . . 2회 일치
         제1회 고등고시 사법과에 합격한 1950년 부산지방검찰청 검사를 시작으로 대구지검, 서울지검 검사를 거쳐 1961년 법무부 검찰과 과장을 하다가 1961년 서울고검 검사, 1962년 부산지검 부장검사, 1966년 전주지검 차장검사 1968년 서울지검 부장검사 1970년 부산지검 차장검사를 하였으며 1971년에 서울지검 영등포지청장이 되었다. 지청장 임기를 마친 이듬해 서울고검 차장검사를 하다가 대검찰청 특별수사부 부장, 대검찰청 공안부장, 전주지검 검사장, 법무부 기획관리실장, 대구지검 검사장, 법무부 법무실장을 하는 등 박정희 정부에서 법무부와 검찰 주요 요직을 거쳤다. [[전두환]] 등 신군부 집단에 의해 권력이 장악된 1980년 7월부터 이듬해 4월까지 22대 서울지검장을 하고 1981년에 중앙선거관리위원으로 재직중인 1981년 4월 전두환 대통령에 의해 임기 5년의 대법원 판사에 임명되었다. 대법관에 재직중이던 1984년 7월 제6대 중앙선거관리위원장을 겸직하였으며 대법관 퇴임이후인 1987년에는 대한공증협회 부회장에 선출되었다.
  • 강원래 . . . . 2회 일치
         '''강원래'''(姜元來, [[1970년]] [[1월 28일]] ([[1969년]] [[음력 12월 21일]]) ~ )는 [[대한민국]]의 [[가수]]이다.
         [[황우석]] 교수의 [[줄기세포]] 논란과 관련하여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강원래는 [[황우석]] 교수의 장애인 대상 강연에서 [[줄기세포]]를 이용하여 척수 손상 장애인을 치료할 수 있다는 내용을 듣고, [[황우석]] 교수의 연구에 관심을 가져 왔다고 한다. [[황우석]] 박사는 강원래에 대해 2005년 7월 26일 [[KBS]] 《[[열린음악회]]》 녹화장에서 다시 춤을 출 수 있도록 일으켜 세우겠다는 발언을 하기도 하였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6&oid=001&aid=0001060126 황우석 교수 "강원래 일으키고 싶다"] - 연합뉴스</ref>
  • 강유미(코미디언) . . . . 2회 일치
         2016년 SNL코리아 시즌7을 마치고 정식 크루에서 하차했다. 그리고 2017년 7월에 다시 [[봉숭아 학당]]을 통해 개콘 합류. 원래 아프리카 방송 BJ 패러디 캐릭터로 나왔지만 [[나는 자연인이다]] 캐릭터로 교체되었다.
         그후 2018년7월 MBC 다큐스페셜 "강유미의 재벌3세 탐구기"를 촬영했다.
  • 경순왕 . . . . 2회 일치
         그는 [[신라]] 왕족으로 [[경명왕]]과 [[경애왕]]의 친척 동생이다. 제54대 [[경명왕]] 때부터 고려 세력에 의지해 후백제를 견제하려는 정책을 펼쳐왔는데, [[924년]] 제55대 왕에 등극한 [[경애왕]]도 형 [[경명왕]]의 친 고려 정책을 이어받아 [[927년]] 음력 정월에 고려가 후백제를 공격하자 군사를 보내 도왔다.
         그러자 [[927년]] 음력 11월 후백제 견훤이 신라의 수도 금성을 기습하여 [[경애왕]]과 왕비를 죽이고, 그의 친척 동생인 경순왕을 왕으로 세워 왕위에 올라 [[927년]]부터 [[935년]]까지 재위하였다.
  • 고경표(배우) . . . . 2회 일치
         || '''출생''' ||<(> [[1990년]] [[6월 11일]] ([age(1990-06-11)]세), [[전라북도]] [[순창군]] ||
         || 2013년 6월 11일 ||<|2> SBS 파워FM || 김창렬의 올드스쿨 ||<|2> 게스트 (with [[김지원(배우)|김지원]]) ||
  • 구본홍 . . . . 2회 일치
         * 2005년 8월 ~ 2008년 7월 : 고려대학교 언론대학원 석좌교수
         * 2008년 7월 ~ 2009년 8월 3일 : YTN 대표이사 사장
  • 구자춘 . . . . 2회 일치
         1932년 5월 11일 ~ 1996년 2월 10일
         1932년 5월 11일 [[경상북도]] [[달성군]] 다사면 세천리(현 [[대구광역시]] [[달성군]] [[다사읍]] 세천리)에서 태어났다.
  • 금조(나인뮤지스) . . . . 2회 일치
         2017년 4월 11일 ~ 6월 27일, 참가자로 출연했다. 데뷔 후 첫 개인 고정 출연. 정확한 대사구사력과 감정변화의 표현력이 풍부한 안정적인 연기력으로 초반부터 꾸준히 상승세를 이어가고 상위권을 유지하였으며, 5월 16일자 방영분에서는 1위를 차지하는 영광을 누렸다. 마지막 회에서도 평소와 같이 안정적인 연기를 보여주었으나, 아쉽게도 2위를 기록하여 1위를 놓치는 바람에 1등 혜택이었던 웹드라마 출연도 놓치게 되었다.
         2016년 9월 27일부터 2016년 11월 11일까지 뮤지컬 '노서아 가비'의 여주인공 '따냐' 역을 같은 팀 [[혜미(나인뮤지스)|혜미]], [[멜로디데이]]의 [[여은]], 뮤지컬배우 이지유와 함께 맡게 되었다. SNS에서는 '햄따냐', '금따냐', '은따냐', '쥬따냐' 등 으로 분류하고 있다.[* 공연 장소는 서초 흰물결아트센터.]
  • 김대호(축구선수) . . . . 2회 일치
         사실 이는 어느 정도 예견되었던 게, 수비적인 능력이 그리 깔끔하지 못하다. 센터백으로 실패한 게 이 때문. --공격도 그리 매끄럽진 않잖아-- 풀백으로 뛰면서 공격적인 재능이 꽃핀 덕분에 좋은 모습을 보였지만 수비 쪽에서 단점은 여전. 피지컬로 비벼서 뺏어내는 스타일이라 카드수집이 엄청나다. 사실 2013년도 이런 단점 때문에 박희철과 번갈아가며 나오다가 그가 부상으로 빠지는 바람에 --얼떨결에-- 주전이 된 경우. 이전에는 [[황지수]]가 이 부분을 잘 메꾸어줬지만 2014년 초 황지수가 부상으로 빠진 사이 수비에만 치중하지 않는 [[김태수(축구선수)|김태수]], [[김재성(축구선수)|김재성]], [[손준호]] 등이 주전으로 뛰는 바람에 그의 단점이 극대화, 수비가 좋은 [[박희철]]과 5월부터 급성장한 [[박선주(축구선수)|박선주]]에게 밀렸고 2015년에도 초반에 주전으로 출전하다가 7월 이후에는 여름 이적 시장에 이적한 [[최재수]]가 대신하면서 사실상 주전에서 밀려버렸다.
         2018년 7월 13일 [[수원 FC]]로 이적한다는 [[https://m.sports.naver.com/kfootball/news/read.nhn?oid=542&aid=0000000088&|기사]]가 나왔다. 여담으로 입단 후 [[등번호]]가 바뀌었는데, 입단 당시에는 출생년도인 1988년에서 따온 88번이었으나, 이후 [[임하람]]의 [[강릉시청 축구단]] 임대로 공석이 된 4번으로 변경되었다.
  • 김대휘 . . . . 2회 일치
         |임기 = 2010년 2월 11일 ~ 2011년 2월 16일
         서울지방법원 형사합의23부 재판장으로 재직하던 2000년 2월 11일에는 민혁당을 결성한 혐의로 구속기소돼 무기징역이 구형된 하피고인에 대해 국보법상 반국가단체 구성죄 등을 유죄로 인정, 징역 10년에 자격정지 10년을 선고했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15&aid=0000226118]</ref> 6월 15일에 1994년말 트로츠키의 영구혁명론을 추종하는 국제사회주자들이라는 조직에 가입한 뒤 이 조직에서 발행하는 기관지 노동자연대 등을 소지한 혐의 등으로 4월달에 구속되어 징역 3년이구형된 피고인에 대한 선고 공판에서 "피고인의 이적단체 가입혐의에 대해 논란이 있는데다 도주 및 증거인멸의 우려도 없는 것으로 보여 보석을 허가한다"고 했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15&aid=0000244671]</ref>
  • 김문오 . . . . 2회 일치
         | 임기 = [[2010년]] [[7월 1일]] ~ [[2022년]] [[6월 30일]]
         |임기 = [[2010년]] [[7월 1일]] ~ [[2022년]] [[6월 30일]]
  • 김문집 . . . . 2회 일치
         | 출생일 = [[1907년]] [[7월 7일]]
         '''김문집'''(金文輯, <small>일본식 이름:</small> 大江龍之介(오에 류노스케), [[1907년]] [[7월 7일]] ~ ?)은 [[한국]]의 문학평론가이다. 아호는 화돈(花豚)이다.
  • 김민희(1982) . . . . 2회 일치
         하지만 [[2016년]] [[7월 20일]]에 방영된 [[리얼스토리 눈]]에서, 홍상수 감독의 부인은 '''자신은 인터뷰를 한 적이 없으며 일부 기사는 기자들의 악의적인 보도로 심하게 과장되었다고 밝혔다.''' 한 마디로 6월 21일 단독보도라면서 나온 김민희의 [[막장 드라마]]스러운 발언 외에 기타 여러가지 자극적인 관련 보도는 정작 당사자와는 한 마디도 나누지 않은 한마디로 [[카더라]] 통신에 불과 한 것. 자세한 것은 [[홍상수]] 항목 참조.
         [[2016년]] [[7월 17일]], 6월에 출국한 지 약 1개월 만에 [[프랑크푸르트]]에서 아시아나 항공기로 [[인천국제공항]]에 입국했고, 마중 나온 것으로 보이는 젊은 남자와 함께 공항을 떠났다는 보도가 나왔다. 하지만 이 보도 역시 사실인지 아닌지 불확실하다.
  • 김성곤 (1913년) . . . . 2회 일치
         '''김성곤'''(金成坤, [[1913년]] [[7월 14일]] - [[1975년]] [[2월 25일]])은 [[대한민국]]의 [[기업인]], [[정치인]]으로 호는 성곡(省谷)이다.
         김해김씨 김성곤은 [[1913년]] [[7월 14일]]에 현재의 [[대구광역시|대구]] [[달성군]]에서 태어났다.
  • 김승관 . . . . 2회 일치
         [[삼성 라이온즈]]에 오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본인에게 따라다니던 딱지는 [[2군 본즈|2군 홈런왕]]이었다. 그럼에도 본인이 좋아해 온 팀이자 고향 팀에 몸담고 있다는 자부심으로 버텨 왔지만, 2004년 7월 12일 투수 [[노장진]]과 함께 외야수 [[김대익]], 투수 [[박석진]]을 상대로 [[롯데 자이언츠]]에 [[트레이드]]되고 말았다. 2006년 7월 16일에는 친정 팀 삼성을 상대로 [[투수]] [[임동규(야구)|임동규]]에게 선제 결승 쓰리런 홈런을 작렬시키며 롯데의 스코어 14:0의 대승을 이끌기도 했다.
  • 김영인(탤런트) . . . . 2회 일치
         [[1952년]] [[9월 5일]][* [[음력]] 1952년 [[7월 16일]].]생. 한국의 [[배우]] 겸 [[기업인]]. 그리고 '''[[야인시대]]의 실질 최대 피해자이자 수혜자'''.[* 한 인터뷰에서 그때 받은 충격을 토로하였다.] [[KBS]] 소속이지만 [[SBS]] 드라마인 야인시대에 출연한 것으로 보아 전속은 아닌 듯하다. 데뷔년도가 꽤 늦은 편으로 본업인 건설에 종사하다가 평소 꿈이었던 배우의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한 끝에 단역이나마 특채로 뽑힌 게 지금에 이르렀다고 한다. 즉 원래는 건설업자가 본업이고 배우는 부업이었으나, 드라마 '야인시대'에서 그의 혼이 실린 처절한 연기로 [[내가 고자라니]] 장면이 빅 히트를 친 덕분에 지금은 단역 전문 배우로도 잘 알려져 있다.
  • 김용국 (야구인) . . . . 2회 일치
         [[한양대학교]] 재학 시절 뛰어난 활약으로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국가대표팀]]에 발탁되어 [[1984년 하계 올림픽|1984년 LA 올림픽]]에 참가하였다.<ref name="imaeil">[[매일신문]] - 2007년 7월 기사 [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29528&yy=2007 "최종문의 펀펀 야구 - 영어가 뭐기에"]</ref>
         [[2010년 대한민국 프로 야구 올스타전]]에서 "[[삼성 라이온즈]] 레전드 올스타" 행사도 열렸는데, 그가 레전드 [[3루수]]로 선정되어 오랜만에 [[삼성 라이온즈]]의 옛 유니폼을 입고 모습을 드러내기도 하였다.<ref>[[스포츠 서울]] - 2010년 7월 기사 [http://news.sportsseoul.com/read/baseball/857634.htm "올스타전, 팬들에게 추억을 선사한 레전드 행사"]{{깨진 링크|url=http://news.sportsseoul.com/read/baseball/857634.htm }}</ref>
  • 김윤환 . . . . 2회 일치
         1986년 8월 개각 때 [[허문도]]의 뒤를 이어 [[대통령비서실]] 정무제1수석비서관에 임명되었다. 1987년 7월 [[김정렬(1917)|김정렬]] 내각이 출범하자 [[박영수(정치인)|박영수]]의 뒤를 이어 전두환 정권의 마지막 [[대통령비서실|대통령비서실장]]에 임명되었다.
         16대 총선 낙선 후 김윤환은 민국당의 대표를 맡아 당을 추스리는 역할을 하게 되었지만.. 이때부터 그의 몸에는 2년 뒤 그를 죽음으로 몰아가는 암이 자라고 있었다고 한다. 게다가 이회창에게 토사구팽을 당한 분노는 사그라들지 않아 그의 건강을 심각하게 해쳤다. 당시 김윤환을 만났던 [[최병렬]]의 말에 따르면 함께 [[스테이크]]를 시켜놓고는 썰어놓지도 않은 채로 한 시간이 넘도록 이회창에 대한 분노를 쏟아냈다고 한다. 암이 자라지 않을래야 않을 수가;; 이후 여당인 [[새천년민주당]]의 약세와 [[자유민주연합]]의 패망으로 나름대로의 입지를 살려 3당 연합(혹은 DJP 재연합)에 낄 수 있었지만, 2001년 10월 [[임동원]] 통일부 장관 해임건의안 통과로 DJP 연합이 완전히 붕괴되자 유일한 지역구 의원 [[한승수]]도 탈당해버렸다.[* 한승수는 무소속 의원 신분으로 외교통상부 장관직을 유지하다가, 지방선거에서 한나라당이 압승하자 7월 장관을 사퇴하고 한나라당에 입당하여 이회창 후보의 외교담당 특별자문이 되었다.] '''이 시기 "호남이 밀어 주는 영남 대통령론"으로 [[이회창]]을 패망시키는 정치공학적 구도를 구상했고 [[듣보잡|이 때까지만 해도 인지도가 낮아 가능성이 없다]]이라고 여겨졌던 [[노무현]]이 [[제16대 대통령 선거]]에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하지만 노무현과 김윤환이 협력하는 일은 없었고[* YS에게 팽당한 5공, 유신 세력을 포용한 김대중과는 달리, 노무현은 3당 합당 당시부터 보여주었던 자신의 원칙대로 옛 군부 정권 시절 인사들과의 타협을 거부하고, 대신 자신과 뜻을 함께했던 주변 사람들을 세웠다. 5공 시절부터 킹메이커로 이름을 날린, 그것도 TK의 좌장이나 다름없던 김윤환이 노무현과 연합할 가능성은 애초부터 없던 셈.] 김윤환 본인은 대선 직후 [[신장암]] 말기 판정을 받았다. [[http://www.viewsnnews.com/article/view.jsp?seq=2114|#]]
  • 김인철 . . . . 2회 일치
         || '''생년월일''' || [[1971년]] [[7월 14일]] ||
          * 2017년 7월 청주고 감독으로 부임한 이후[* 장정순은 상습 폭행건으로, 경질되고, 심정진이 새로 부임했는데, 과거 폭력전과가 있어서 해임되었다.]나온 기사에 따르면 은퇴 후 한화의 전력분석원, 스카우트를 맡을 때도 틈틈이 공부를 하는 '공부하는 야구인'이었으며, 현재 대학원 입학을 위해 공부 중이라고 한다. 나중에 꿈은 대학 강단에 올라서 제대로 된 야구인을 육성하는 것이라고. 또한 심판, 기록원, 스카우트 등 야구계 전반에서 활동할 이들에게 체계적인 야구 교육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 김재홍 (1958년) . . . . 2회 일치
         * 2013년 3월 ~ 2014년 7월 : 산업통상자원부 제1차관
         |임기 = [[2013년]] [[3월 13일]] ~ [[2014년]] [[7월]]
  • 김진향 . . . . 2회 일치
         '''김진향'''([[대구광역시]] [[달성군]], [[1969년]] [[3월 25일]] ~ )은 [[대한민국]]의 정치학자이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 전문가이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277&aid=0003684523 개성공단 4년 실무담당 김진향 교수 "우리 기업들만 죽이는 행위"]. 아시아경제. 2016년 2월 11일.</ref>
         * 2008년 2월 ~ [[2011년]] 7월:[[개성공업지구]]관리위원회 기업지원부 부장
  • 김태우(god) . . . . 2회 일치
         || '''2017년 1월 31일''' || → || '''2017년 7월 25일''' || → || '''2021년 3월 20일''' ||
         참고로 2차 도전을 했을 때 '''[[이하늬|여친이 있는]] 윤계상이 god 멤버 중 가장 먼저 결혼할 것'''으로 그가 예측했는데 정작 예상이 완전히 빗나가서 아닐 거라고 예상했던 '''[[박준형(god)|박준형]]이 2015년에 먼저 결혼했다.''' 참고로 박준형 역시 2017년 7월에 인터뷰에서 god 멤버 중 다음 결혼을 할 멤버는 장기간 이하늬와 연애중인 윤계상을 예상했다.
  • 나고야 대학 여학생 살인사건 . . . . 2회 일치
         >7월7일!![[사카키바라 세이토]] 군 32세 생일 축하해요♪(///∇///)
         범행을 한 것과 같은 해인 2014년 7월 7일에는 이 같은 트윗을 올리는 등. [[살인마]]를 동경하는 이상 심리를 보이고 있었다. 사카키바라 세이토 이외에 [[가토 토모히로]], [[아사하라 쇼코]]에 대해서도 동경하는 트윗을 올리고 있었다.
  • 로베르 기스카르 . . . . 2회 일치
         생몰년도 1015~1085 7월 17일
         그러나 기스카르는 아직도 자신만만했다. 초여름이 되자 그는 다시 병력을 이동시키기로 결정했고, 차남인 로제르에게 선발대를 맡겨 케팔로니아를 점령하도록 한뒤, 몇주뒤에는 그도 거기서 아들과 합류하러 출발했다. 그러나 남쪽으로 항해중 그는 그역시 해당 역병에 걸린걸 느꼈다. 함대가 섬의 북단에 있는 아테르 곶에 닿았을 무렵 그의 병세는 더더욱 심해졌고, 그의 배는 황급히 피스카르도만에 정박했다. 그리고 1085년 7월 17일에 거기서 그의 파란만장한 인생을 끝마친다.
  • 문문 . . . . 2회 일치
         ||<:><#ace5ee> '''데뷔''' ||<rowbgcolor=#ffffff><(> 2016년 7월 18일 싱글 앨범 [Moon, Moon] ||
         음악 활동 이전엔 본래 [[직업군인]]이었으며 부사관으로 5년간 복무하다가, 20대 중반에 음악에 대한 꿈 때문에 전역을 하고 [[여주대학교]] 실용음악과에 입학했다. 대학생 시절에 '저수지의 딸들'이라는 밴드를 결성해 음악계에 진입했으나 밴드 활동이 잘 되지 않자 잠정 해체되고, 그 후 2016년 7월에 싱글 앨범 [Moon, Moon]으로 데뷔했다. 대표곡으로는 '''물감'''과, [[비행운(노래)|비행운]] 등이 있다.
  • 박경호 (1949년) . . . . 2회 일치
         | 임기 = 1998년 7월 1일 ~ 2006년 6월 30일
         |임기 = 1998년 7월 1일 ~ 2006년 6월 30일
  • 박부남 (1931년) . . . . 2회 일치
         '''박부남'''(朴富南, [[1931년]] ?월 ?일 ~ [[2018년]] [[1월 11일]])은 [[대한민국]]의 [[소아과|소아]][[내과]] [[의사]], 대학 교수로 [[경북대학교]] 의과대학 교수와 [[계명대학교]] 의과대학 외래교수를 역임했다. 구한 말의 관료 [[박중양]]의 손녀이며, [[청도군|청도]], [[상주군|상주]], [[청송군|청송]][[군수]]를 지낸 [[박문웅 (1890년)|박문웅]]의 딸이다. [[대구광역시]] [[북구 (대구광역시)|북구]] [[침산동]] 출신.
         * 어머니 : 남원양씨(南原梁氏, [[1907년]] [[8월 11일]] - ?), 양재형(梁在亨)의 딸
  • 박세직 . . . . 2회 일치
         [[1933년]] [[9월 18일]] ~ [[2009년]] [[7월 27일]]
         1988년 12월 배명인의 뒤를 이어 국가안전기획부 부장으로 임명되어 1989년 7월까지 재임하였다. 1990년 [[서울특별시장]]으로 임명되었으나 1991년 2월에 사직하여, 2개월의 단명시장에 그쳤다. 이것도 1991년 일어난 [[한보그룹]]의 [[수서지구 택지 특혜 분양 사건|수서비리 사건]]과 관련하여 여러 모로 루머가 많았는데, 특별히 문제가 불거지지는 않았다.
  • 박홍 (신부) . . . . 2회 일치
         }}</ref> 그 때 [[예수회]] 박홍 신부(당시 서강대 총장)가 7월 18일 "[[우루과이라운드]] 반대 시위 배후에 [[주사파]]가 있고 주사파 배후는 김정일이다"는 발언으로 세상을 놀라게 했다.<ref>{{뉴스 인용
         |확인날짜 = 1994년 7월18일
  • 박화요비 . . . . 2회 일치
         || '''출생''' ||<(> [[1982년]] [[2월 11일]] [[전라북도]] [[군산시]][* 아버지가 [[대한민국 군무원]]이라서 3살 때 [[경상북도]] [[포항시]]로 이사 가고 어린 시절은 포항에서 보냈다. 고등학교도 포항에서 다니다가 전학하여 졸업했다.][* 데뷔 초에는 창법이나 음색만 보고 [[윤미래]]처럼 [[미국]] 본토 교포 출신이라는 오해(?)를 받았으며 평상시 말하는 스타일도 우물쭈물 어리바리 컨셉으로 웅얼거리는 게 많아서 아직까지도 교포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
         본명은 박미영[* [[마망|마골피]]와 본명이 같다.]이었다가 박레아로 개명했다. 예명 역시 (박효신 1집 등에 피처링하던 시절에는) 박노미였다가 데뷔하면서 박화요비로 바꿨다. 화요비라는 이름은 '이름을 지은 날(화요일)과 R&B의 B'에서 따 왔다는 이야기와 '화요일에 내리는 비'의 줄임말이라는 두 가지 설이 있다.[* 화요일에 태어나서 화요비란 말이 있지만 전혀 사실무근. 1982년 2월 11일은 화요일이 아닌 '''목요일'''이었다. ~~목요비~~] 2000년 8월 19일 이소라의 프로포즈에서 본인 얘기로는 화요일에 이름을 지은 것에서 '화요'를 따왔고, R&B를 부르기 때문에 '비'를 따왔다고 한다. ~~힙합이었으면 화요합~~ (출처: [[https://youtu.be/vvcat903c44]], 박효신과 함께 나온다.) 그녀는 이후 인터뷰에서 각자 기억하고 싶은 대로 기억하면 좋겠다고 넌지시 말했다. 2017년 11월 중순 다시 박화요비로 활동명을 바꾸어 활동한다는 기사가 나왔고 네이버 인물검색에서도 다시 박화요비로 활동명이 바뀌어있다.
  • 배성룡 . . . . 2회 일치
         1945년 9월 이극로가 주도하는 전국정치운동자후원회에 가입해 교섭위원으로 활동했다. 또한 권오익(權五翼) 등과 각당통일기성회(各黨統一期成會)를 조직해 좌우익 정당통합에 주력했다. 1946년 1월 이극로·권오익 등과 함께 통일정권촉성회를 결성해 우익의 비상국민회의와 좌익의 민주주의민족전선을 통합하고자 노력했다. 7월 도진호(都鎭浩)와 함께 좌우합작촉진회를 결성했다. 1947년 2월 〈세계일보〉 주필 겸 편집국장을 지내면서 이극로·조봉암·백남규(白南奎) 등과 함께 민족주의독립전선을 결성하고 상임위원 및 기초위원에 선임되었다. 10월에 김규식의 민족자주연맹이 결성되자 권태석(權泰錫) 등과 함께 5인 정강·정책기초위원에 선임되었다. 1948년 4월 남북협상을 지지하는 ' 문화인 108인 성명'에 서명하고, 권태석과 함께 김규식의 제2차 특사로 평양에 가서 남북협상에 참여했다. 7월 김규식과 김구가 연합한 통일독립촉진회에 참여했다. 1950년 이후 〈동아일보〉와 〈사상계〉 등에 경제평론을 발표하여, 대외의존체제의 극복과 내포적(內包的) 공업화를 통한 경제자립을 주장했고 서울대학교 상과대학에서 동양경제를 강의하기도 했다.
  • 백남억 . . . . 2회 일치
         [[1914년]] [[11월 11일]] - [[2001년]] [[1월 15일]]
         1914년 11월 11일 [[경상북도]] [[김천시|김천군]]에서 태어났다. 대구고등보통학교(현 [[경북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보성전문학교]](현 [[고려대학교]]) [[고려대학교/학부/법과대학|법과]]를 1936년에 졸업하였다. 그리고 일본으로 유학을 가서 1939년 [[큐슈대학]] 법문학부를 졸업하였다.
  • 백승주(정치인) . . . . 2회 일치
         2016년 7월 26일 [[THAAD|사드]]관련 성주 지역주민과의 간담회에서 성주 사드 배치는 노블리스 오블리주라고 발언하였고, 이에 대해 한 [[성주군]]민이" (백 의원 지역구인) [[구미시]]에 사드를 배치해도 그렇게 말하겠느냐?"의 질문에 그렇다고 답변하였다. --이분이 연구원으로 일하신 분야가 국방이다.--
         2016년 국감에서 [[김제동]]이 7월경 방송에서 "사모님을 아주머니 불러 13일 영창을 갔다왔다"라는 말을 했다며 "군 이미지를 실추하고 있다"해 증인 요청을 했다. 하지만 [[국정감사]]라는 좀 더 시급한 문제를 다뤄야 하는 곳에서 이런 말을 한 것 자체가 논란이 되고 있다.
  • 보나 . . . . 2회 일치
          * 2016년 7월 22일, 공개된 [[네이버 웹소설]]의 특집 프로젝트인 '썸남에서 겟남까지'의 [[http://tvcast.naver.com/v/998129|광고모델로]] [[http://tvcast.naver.com/v/998161|출연했다.]]
          * 2017년 2월 11일, [[KBS 2TV]] [[연예가중계]]의 코너 '김생민의 베테랑'에 보조 MC로 출연했다.
  • 봉준호 . . . . 2회 일치
         1993년 6mm 단편 영화 《백색인》을 연출하여 영화계에 데뷔했으며, 2번째 단편《지리멸렬》은 큰 화제가 되었다. [[배두나]]가 출연하였던 첫 장편 《[[플란다스의 개 (영화)|플란다스의 개]]》가 흥행에 실패했으나 이후 [[송강호]]와 김상경이 출연한 《[[살인의 추억]]》을 개봉하였는데 크게 흥행하였고, 작품성과 상업성을 동시에 잡았다는 평을 받고 있다. 2006년 7월에 3번째 장편 영화 《[[괴물 (2006년 영화)|괴물]]》을 개봉했다. 2008년 그는 [[미셸 공드리]], [[레오 카락스]] 감독과 함께 [[도쿄도|도쿄]]를 주제로 한 옴니버스 프로젝트 영화 《[[도쿄!]]》에 참여하였다. 3편의 영화 중 "흔들리는 도쿄"에서 [[카가와 테루유키]], [[아오이 유우]]와 호흡을 맞췄다. 이 영화를 통해 멜로적 감수성 또한 인정 받았다.
         [[프랑스]] 만화를 각색한 《[[설국열차]]》를 준비한후,<ref>[http://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6050627 네이버 책 '설국열차'], 뱅자맹 르그랑, 장 마르크 로셰트, 자크 로브 저, 김예숙 역, 현실문화, 2009년 8월 5일</ref> 2012년 초 크랭크인하여 2013년 7월 31일에 개봉하였다.<ref name="설국열차">[http://news.naver.com/main/hotissue/read.nhn?mid=hot&sid1=106&cid=307165&iid=364668&oid=020&aid=0002268463&ptype=011 프랑스 만화 각색한 ‘설국열차’ 400억대작 이끄는 봉준호 감독], 동아일보, 2011년 8월 16일</ref>
  • 서상일 . . . . 2회 일치
         '''서상일'''(徐相日, [[1886년]] [[7월 9일]] - [[1962년]] [[4월 18일]], [[대구]] 출생)은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정치가이다. [[대한민국 제1공화국|제1공화국]] 기간 중에는 [[야당]] 정치인으로 활동했다. 호 동암(東菴). 본관은 [[달성 서씨|대구]].
         |임기 = [[1960년]] [[7월 29일]] - [[1961년]] [[5월 16일]]
  • 서정돈 . . . . 2회 일치
         '''서정돈'''(徐正燉, [[1943년]] [[12월 11일]] ~ , [[대구광역시|대구]])은 [[대한민국]]의 교수이자 의학자이다.
         * 1977년 7월 ~ 1979년 6월 : 캐나다 앨버타대학병원 심장과 연구원
  • 서정제 . . . . 2회 일치
         대구고등법원장으로 재직하던 1993년 7월 13일에 대법원이 법관인사위원회를 강화하기로 하면서 [[이원배]] 서울민사지방법원장, [[박영식 (법조인)|박영식]] 광주지방법원장과 함께 위원으로 추가 임명되었다.<ref>동아일보 1993년 7월 14일자</ref>
  • 서정환 . . . . 2회 일치
         '''서정환'''(徐定煥, [[1955년]] [[7월 5일]] ~ )은 전 [[KBO 리그]] [[삼성 라이온즈]]와 [[해태 타이거즈]]의 [[유격수]]였다. 현재는 [[KBO (야구)|KBO]]의 대구 감독관이다.
         |임기 = [[2005년]] [[10월 3일]] - [[2007년]] [[10월 18일]] (감독 대행 : [[2005년]] [[7월 25일]] - )
  • 신화용 . . . . 2회 일치
         4월 11일 K리그1 6라운드 강원 전에서는 명단제외. 노동건과 김선우에게 엔트리를 내주었다.
          * 2017년 7월 9일, 제주전에서 K리그 통산 100번째 무실점 경기를 기록하였다.[* 포항 시절 통산 94번 + 수원 입단 후 6번]
  • 양예나 . . . . 2회 일치
          * 2016년 7월 21일 MBC <능력자들>에 채원, 나은과 함께 출연했다.
          * 2017년 7월 29일 서울 [[고척 스카이돔]]에서 열린 2017 타이어뱅크 [[KBO 리그]] [[넥센 히어로즈]]와 [[삼성 라이온즈]]의 경기에 앞서 시구를 선보였다. [[http://m.entertain.naver.com/read?oid=109&aid=0003587286|기사]] --고향 팀 앞에서.....--
  • 연분홍 . . . . 2회 일치
         '''연분홍'''({{본명|곽지은}}, [[1992년]] [[8월 11일]] ~ )은 [[대한민국]]의 [[가수]]이다. 2015년 5월에 녹화되어 7월5일에 방송된 전국노래자랑 용인시편에서 장윤정의 애가 타를 불러 최우수상을 수상하였고 당일 심사위원이자 초대가수였던 정의송의 눈에 띄어 3개월만인 8월4일 가수로 데뷔하게 되었다.
  • 예천군 . . . . 2회 일치
         시외버스는 [[예천시외버스터미널]]을 통해 이용 가능하다. 기타 [[농어촌버스]]는 [[예천여객]]에서 운영하고 있다. [[2012년]] [[7월 1일]] [[경상북도]] 북부 지역의 군 단위 최초로 [[티머니]] [[교통카드]]를 도입하였으며, [[중앙고속도로]] - [[중부내륙고속도로]] 라인에 있는 모든 [[경상북도]] 북부 지역의 시군과 공용한다. [[2013년]] [[3월 1일]]부터는 군계 내 [[구간요금]], [[2014년]] [[7월 1일]]부터는 군계외 구간요금을 폐지하고, 무료환승제도가 도입으며, [[2016년]] [[3월 1일]]부터는 [[안동시 시내버스]]와도 무료환승이 가능하다.
  • 우효광 . . . . 2회 일치
         국가대표 운동선수로 활동하던 우효광은 [[2002년]] [[7월]], 우연하게 사촌누나의 권유로 TV 오디션 프로그램 '청춘지성[*2 청춘지성 참가로 연예계로 데뷔하게 된다. 우승상품으로 심천의 아파트가 수여되었다. 배우가 되기 위한 자금 마련 및 활동비를 위해 처분했다.]'에 참가하여 우승했다. 같은해 그는 연기 오디션 우승에 이어 음악 콘테스트에도 참가하여 2002년 10월, 아시아 신인 음악 콘테스트에서 최우수 가수상을 수상했다. 싱가폴에서 음악을 공부했고 유명 가수들에게 곡을 주고 O.S.T에도 참여하며 가수와 작곡가로도 활동한다. 2003년, 명문예대인 중앙 희극학원에 들어가 2004년, 드라마 주연으로 배우 활동을 시작했다. 배우로 드라마를 해오며, 연출에 관심을 가지게 되어 드라마 감독으로 활동하고 있다. 공공복지분야에 관심이 많은 그는 공익과 개혁을 주제로 하는 극에 자주 출연하고 있으며 아동복지에도 관심을 가지고 많은 기부 및 자원봉사 활동을 해오고 있다.
          * [[2017년]] [[7월 10일]]부터 동상이몽 시즌 2격인 [[동상이몽, 너는 내 운명]]에 아내 [[추자현]]과 함께 출연하고 있다. 추자현과 함께 귀여운 부부의 모습을 보여주며 인기를 끌며, 우블리라는 별명을 얻었다. [[동상이몽, 너는 내 운명]]이 정식으로 편성받는 데에 많은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이 부부의 스페셜 방송이 편성될 정도로 활약이 대단하다. 동시간대 1위를 첫방송부터 계속 수성하고 있다.
  • 유병수 . . . . 2회 일치
         [[2011년]] [[7월 23일]], [[알힐랄 (리야드)|알힐랄]]이 유병수의 영입을 공식 발표하였다.<ref>{{뉴스 인용|제목=알 힐랄, 유병수와 3년 계약 공식 확인 |url=http://sports.chosun.com/news/ntype.htm?id=201107250100208830017535&servicedate=20110724 |출판사=스포츠조선 |저자=박상경 |날짜=2011년 7월 24일}}</ref> 입단 초반 부상으로 고전하였으나 부상에서 회복한 이후 2011-12 시즌 크라운 프린스 컵에서 4골을 기록하며 대회 득점왕에 올라 팀의 우승에 공헌하였고, [[AFC 챔피언스리그 2012|2012 ACL]] 16강 경기에서는 무려 4골을 몰아치며 팀을 8강으로 이끌었다.
  • 이경영(1960) . . . . 2회 일치
          * 2002년 7월 30일: 보석금 700만 원을 내고 석방되어 불구속상태에서 재판 받게 됨
         7월 : [[군도: 민란의 시대]](땡추 역)
  • 이동훈 (1996년) . . . . 2회 일치
         |첫 출장 = [[KBO (야구)|KBO]] / [[2016년]] [[7월 10일]]<br />[[한밭종합운동장 야구장|대전]] 대 [[삼성 라이온즈|삼성]]전 대주자
         '''이동훈'''([[1996년]] [[7월 24일]] ~ )은 [[KBO 리그]] [[한화 이글스]]의 [[외야수]], [[지명타자]]이다.
  • 이상백 (1904년) . . . . 2회 일치
         **** 5촌 조카딸 : [[윤덕주 (농구인)|윤덕주]](尹德珠, [[1921년]] [[6월 23일]] - [[2005년]] [[7월 8일]]<ref>[http://www.hani.co.kr/arti/society/obituary/48641.html 윤덕주 농구협회 명예회장 별세] 한겨레신문 2005.07.08</ref>), 농구선수, [[대한체육회]] 부회장·명예회장 역임
         ** 형수: [[권기옥]](權基玉, [[1901년]] [[1월 11일]] ~ [[1988년]] [[4월 19일]], '''이상정'''(李相定)의 부인, 여성 비행사, [[예비역]] [[대한독립군]] [[대령]] )
  • 이상훈 (1971년생 우완 투수) . . . . 2회 일치
         |마지막 경기 = [[KBO (야구)|KBO]] / [[2004년]] [[7월 8일]]<br />[[마산야구장|마산]] 대 두산 전<br />1이닝 3타자 1피안타 0피홈런 0볼넷 0탈삼진 0실점 0자책점
         1990년 고졸우선지명으로 삼성 라이온즈에 지명되어 주로 중간 계투로 뛰었다. 1999년 7월 31일, 트레이드 마감 기한에 포수 [[진갑용]]을 상대로 현금 4억원과 함께 [[두산 베어스]]로 트레이드 되었다.<ref>{{뉴스 인용|url=https://sports.news.naver.com/general/news/read.nhn?oid=001&aid=0004408061|제목=프로야구,진갑용-이상훈+4억 트레이드|날짜=1999-07-31|출판사=연합뉴스}}</ref> 2002년에 70경기 동안 133.2이닝을 소화하며 4승 10패 2세이브 6홀드와 93탈삼진 평균자책점 3.91의 커리어하이를 기록하였지만 2003년 기량 하락으로 방출되었다. 이후 2004년 롯데 자이언츠에 입단하였지만 단 2경기 출장에 그치고 시즌 후 은퇴하였다.
  • 이석훈 . . . . 2회 일치
          * 2013년 국방FM 《충성! My Friend 이석훈입니다》 DJ (2013년 4월 1일 ~ 2013년 7월 4일)
         || [[2011년]] [[7월 23일]] || 남자 보컬리스트 특집 || 봄날은 간다 (원곡자: 백설희) || 1번 || 1승 ||
  • 이선아 . . . . 2회 일치
         '''이선아''' ([[1985년]] [[7월 22일]] ~ )은 대한민국의 배우이다
         '''이선아'''는 [[1985년]] [[7월 22일]] [[경상북도]] [[대구광역시|대구시]]에서 태어났고 [[1998년]]를 거쳐 [[2001년]]에를 거쳐
  • 이승현 (1985년 7월) . . . . 2회 일치
         '''이승현'''([[1985년]] [[7월 25일]] ~ )은 [[대한민국]]의 [[축구]] 선수로 포지션은 [[미드필더#윙어|윙어]]이다. 현재 [[수원 FC]] 소속으로 뛰고 있다.
         2011년 1월 11일, [[정성훈 (1979년)|정성훈]]과 함께 [[전북 현대 모터스]]로 이적하였다.<ref>{{뉴스 인용 |제목=전북-부산, 2대2 트레이드…정성훈, 이승현 전북행 |url=http://sports.media.daum.net/soccer/news/breaking/cluster_view.html?newsid=20110111101107782&clusterid=267505&clusternewsid=20110111115209319&p=sportalkr |출판사=스포탈코리아 |date={{날짜한글화|2011-1-11}} }}</ref>
  • 이윤열 . . . . 2회 일치
         이윤열은 [[2012년]] [[6월 20일]] 자신의 팀인 컴플렉시티 게이밍 홈페이지에 은퇴 사실을 알렸다. 사유는 현재 병역문제와 개인적인 문제가 결합되어 은퇴하는것으로 밝혀졌으며 [[2012년]] [[7월 3일]] tving 스타리그 2012 레전드매치를 마지막으로 은퇴하였다.
         2013년 7월 16일 상근 예비역으로 군입대했다.
  • 이은혜 (레이싱모델) . . . . 2회 일치
         * 2013년 7월 서울오토살롱 레이싱모델
         * 2014년 7월 서울오토살롱 레이싱모델
  • 이인영(정치인) . . . . 2회 일치
         1987년 고려대학교 총학생회장으로서 대통령선거 직선제 쟁취를 위한 학생운동을 이끌었고, 정보기관에 끌려가서 고문을 당하기도 했다. 그 후 [[노태우]]의 항복선언을 받아내자, 각 대학 총학생회장들 중심으로 [[전대협]]을 결성하여, 1987년 7월 대전 충남대에서 출범식을 거행하였다.
         2015년 7월에는 새민련 내에서 청년세대 정치인인 이동학과 공개논쟁을 벌였다. 이동학 혁신위원이 공개 편지를 통해 "선배님들을 응원할 든든한 후배 그룹 하나 키워내지 못했다." "시대는 빠르게 변해왔고, 또 변해 가는데, 우리 사회의 새로운 어젠다나 비전을 제시하지 못했다." "지금의 계파 전쟁이라고 하는 최악의 상황을 만들어 낸 것에서도 자유롭지 못하다"고 이인영을 비판하면서, 이인영에게 내년 4월 총선에서 '약세 지역'으로 뛰어들어가야 한다고 주문한 것이다.
  • 이장섭 . . . . 2회 일치
         '''이장섭'''([[1963년]] ~ )은 [[대한민국]]의 시민사회 운동가 출신 정치인, 공무원이다. [[1986년]] [[민주화운동협의회]] 충북지회 상임위원으로 활동한 뒤 시민단체에서 활동하였다. 이후 국회의원 [[노영민]]의 보좌관, 국회의장 비서실 비서관 등을 역임했고, 18대 대선 당시 [[문재인]] 후보자 캠프에서 활동하였다. [[2017년]] [[5월 11일]] [[문재인]]이 [[대한민국 대통령]]에 당선되자 [[청와대]] 경제수석실 산하 산업정책비서관실 선임행정관(2급 [[이사관]]급 상당)에 임명되었다.
         * [[2011년]] [[7월 4일]] ~ [[2012년]] [[5월]] [[대한민국 국회|국회]] 정책연구위원회 위원<ref name="ssss">[http://www.cbi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75898 충북 첫 국회 2급 비서관 탄생:이장섭 노영민 의원 보좌관 국회정책연구위원]</ref>
  • 이철우(1955) . . . . 2회 일치
         2017년 4월 1일 [[자유한국당]] [[사무총장]]에 임명됐고, 제19대 대통령선거 자유한국당 선거대책위원회 총괄선대본부장을 맡았다. 그러나 대선 이튿날인 5월 10일 사무총장 직을 스스로 사퇴했다. 대선 패배의 책임을 지고 자진 사퇴한 유일한 당직자였다. 이후 2017년 7월 3일 전당대회에 출마하여 최다득표로 자유한국당 최고위원에 당선됐다.
         2018년 7월 1일 영천호국원을 찾아 충혼탑을 참배하는 것으로 첫 임기를 시작했다. 그리고 동남권에 약속했던 제2청사 건립을 위해 포항 환동해안본부를 제2청사로 승격시키는 것을 시사했다. 하지만 공약 이행을 하려고하자 안동을 비롯한 북부권의 반대가 심해 난항을 겪고 있다.
  • 임대윤 . . . . 2회 일치
         '''임대윤'''(林大潤, [[1957년]] [[7월 3일]] ~ )은 [[대한민국]]의 정치인이다.
         |임기 = [[1998년]] [[7월 1일]] ~ [[2003년]] [[12월 17일]]
  • 임윤선(법조인) . . . . 2회 일치
         2015년 6월 24일 [[TV조선]]의 프로그램 <[[강적들]]> 85회 면세점 전쟁편부터 출연하고 있다. 9월 9일에는 [[KBS]] 드라마 <[[어셈블리(드라마)]]> 17회에 깜짝 출연, 주인공 [[진상필]]을 심문하는 검사로 열연, [[김서형]]에게도 밀리지 않는 카리스마를 보여줬다. 2016년 11월 [[TV조선]] <박종진 라이브 쇼>에서 반고정 패널로 출연 중이며, [[채널A]] <신문 이야기 돌직구쇼>에 매일 아침 9시 고정 패널로, 2017년 7월 KBS [[역사저널 그날]]에 고정으로 출연 중이며 2018년 1월 [[JTBC]] [[착하게 살자]]에 출연했다.
          * 2016년 7월 독거 노인 등 어려운 이웃에게 선풍기 20여 대를 기부했다. [[http://www.yswf.or.kr/open_content/bbs.do?act=detail&msg_no=7&bcd=photo&pageno=2|#]]
  • 임은정(법조인) . . . . 2회 일치
         || '''출생일''' || [[1974년]] [[7월 14일]]([age(1974-07-14)]세) ||
         [[1974년]] 7월 14일 생으로, [[경상북도]] 영일군(현 [[포항시]])에서 태어났다. 이후 [[부산]]에서 성장하여, [[부산]] [[남성여자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고려대]]에서 법학을 전공했다. [[1998년]] 제40회 [[사법시험]]에 합격하였고, [[2001년]] 제30기로 사법연수원을 수료한 뒤, 인천지방검찰청 검사로 검찰생활을 시작하였다.
  • 임효성 . . . . 2회 일치
         || 생년월일 || [[1981년]] [[7월 31일]] ||
         [[2010년]] [[4월 11일]]에 결혼식을 올렸으며, 결혼 당시 이미 유진는 [[임신]] [[속도위반#s-2|5개월이었다.]] 첫 아들을 봤는데, 이름이 임유. 유진의 에서 첫 자를 따온 것이라고 하며 서로에 대한 애칭은 베이비라고 한다. 어찌보면 [[인생의 승리자]]라고 볼 수 있다. ~~부럽다~~
  • 장기오 (공무원) . . . . 2회 일치
         |임기 = 1986년 12월 5일 ~ 1987년 7월 14일
         |임기 = 1987년 7월 14일 ~ 1988년 2월 24일
  • 장도 (1876년) . . . . 2회 일치
         '''장도'''(張燾, 음력 [[1876년]] [[음력 5월 7일|윤 5월 7일]]/양력 1876년 [[6월 28일]] ~ ?)는 [[대한제국]]과 [[일제 강점기]]의 법조인으로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를 지냈다. 본관은 [[덕수 장씨|덕수]]이다.
  • 장성집 . . . . 2회 일치
         |시복일 = [[1925년]] [[7월 5일]]
         장성집 요셉은 [[1925년]] [[7월 5일]]에 [[로마]] [[성 베드로 광장]]에서 [[교황]] [[비오 11세]]가 집전한 79위 [[시복|시복식]]을 통해 [[복자]] 품에 올랐고,<ref name=blessed>{{뉴스 인용
  • 장우석 . . . . 2회 일치
         [[1977년]] [[대구광역시]]에서 태어나(음력 [[1976년]] 11월 20일) [[영남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한 후 경북산업정보전문학교 웹멀티미디어과정 3기를 수료했다.
         [[2005년]] 7월 25일부터 8월 7일까지 정신대할머니와함께하는시민모임, 평화통일대구시민연대, 국적포기필요없는나라만들기모임, 태평양전쟁희생자광주유족회가 공동으로 구성한 '동북아평화를 위한 한일공동 일본열도 도보행진단'<ref>[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269522 "일본열도 걸으며 동북아 평화 외칠 것"], 《오마이뉴스》, 2005.7.21.</ref>과 함께 일본 오사카, 교토, 우토로, 후코야마, 히로시마 등 8개 도시를 걸으면서 동북아 평화와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을 규탄하는 일련의 과정을 영상으로 담았다.
  • 전경협 . . . . 2회 일치
         |시복일 = [[1925년]] [[7월 5일]]
         전경협 아가타는 [[1925년]] [[7월 5일]]에 [[성 베드로 광장]]에서 [[교황]] [[비오 11세]]가 집전한 79위<ref name=103saints_britannica>{{백과사전 인용
  • 전예용 . . . . 2회 일치
         }}</ref> ~ [[1994년]] [[7월 4일]]<ref>{{뉴스 인용
         |임기 = 1964년 5월 11일 ~ 1966년 12월 27일
  • 전종환 . . . . 2회 일치
         * 《[[뉴스콘서트 (MBC)|뉴스콘서트]]》(2018년 3월 12일 ~ 2018년 7월 6일)
         * 《[[MBC 뉴스투데이]]》(평일앵커 : 2018년 7월 16일 ~ '''현재''')
  • 전형필 . . . . 2회 일치
         '''전형필'''(全鎣弼, [[1906년]] [[7월 29일]] ~ [[1962년]] [[1월 26일]])은 [[대한민국]]의 [[문화재]] 수집, 보존, 연구가이며 [[교육]]가이다. 자는 천뢰(天賚), 호(號)는 간송(澗松), 지산(芝山), 취설재(翠雪齋)이다. [[서울특별시]]에서 태어났다. [[훈민정음]] 원본 등의 문화재를 수집하고, 일본으로 유출된 문화재들을 되찾아와 1938년 조선 최초의 근대사립미술관인 [[보화각]]을 세웠다. 해방 후 혼란기와 [[한국전쟁]]중에 한국의 문화재들을 지켜내었다. 간송 전형필 선생의 사후 보화각은 전형필 선생의 유족들과 지인들에 의해 한국민족미술연구소와 [[간송미술관]]으로 개편되었고, 간송미술관에서는 [[1971년]] 봄부터 '겸재전'(謙齋展)주제를 시작으로 2014년 가을까지 일년에 2차례씩 무료 일반공개를 하였다. 현재는 [[간송미술문화재단]]이 설립되어 더 많은 사람들에게 간송컬렉션을 선보이고자 동대문디자인프라자&파크에서 간송문화전을 진행하고 있다. 문화재청에서는 그의 업적을 기려 2012년 12월 14일 [[서울 방학동 전형필 가옥|전형필의 가옥]]을 등록문화재 제521호로 지정하여 지정 관리하고 있고, 2014년 10월 대한민국 금관문화훈장에 추서되었다.
         * 1906년 7월 29일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4가 112번지에서 중추원의관 전영기와 밀양 박씨 사이의 차남으로 출생, 본관은 정선
  • 정봉수(역사) . . . . 2회 일치
         정봉수는 2001년 7월 5일 말기 신부전으로 사망하여 7월 9일 김천시 봉산면 광천리 금릉공원묘원에 안장되었다.
  • 정성주 . . . . 2회 일치
         '''정성주'''([[1956년]] [[7월 25일]] ~ )는 [[대한민국]]의 드라마 작가이다.<ref>박현택. [http://media.daum.net/entertain/drama/newsview?newsid=20161027131630724 (직격인터뷰)'밀회' 정성주 작가 "정유라, 최태민..정말 우연입니다"]. 스포츠조선. 2016년 10월 27일.</ref>
         [[이화여자대학교]] 가정학과를 졸업하였다. 작곡가 [[이승희 (1954년)|이승희]]와 결혼을 하였고 이승희는 [[2000년]] 3월 사망하였다. <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15&aid=0000194850 이승희 작곡가 별세]. 한국경제. 2000년 3월 11일.</ref>
  • 정소림 . . . . 2회 일치
         |활동기간 = [[2000년]] [[7월]] ~
         1973년 8월 20일 [[서울]]에서 태어났다.<ref>{{웹 인용 |url= http://people.search.naver.com/search.naver?where=nexearch&query=%EC%A0%95%EC%86%8C%EB%A6%BC&sm=tab_etc&ie=utf8&key=PeopleService&os=100806|제목= 네이버 인물정보 - 정소림|저자= 네이버|날짜= 2011-05-19|웹사이트= 네이버|확인날짜= 2016-02-22|인용문= 출생 1971년 8월 20일}}</ref><ref>{{뉴스 인용 |저자= 조한대|제목= 정소림 게임 캐스터, "매일 30분? 차라리 하루만 몰아서 하게 해줘야"|url= http://news.joins.com/article/15332527|뉴스= 중앙일보|날짜= 2014-07-23|확인날짜= 2016-02-22}}</ref> [[2000년 7월]], 당시 [[경인방송]] 《게임스페셜》을 진행하던 [[정일훈]]이 방송 회수를 줄여가며 빈자리가 생겼을때, 정소림 캐스터가 《게임스페셜》의 오디션에 지원해 《게임스페셜》을 통해 데뷔하였다.
  • 정승빈 . . . . 2회 일치
         '''정승빈'''([[1991년]] [[7월 11일]] ~ )은 대한민국의 [[희극 배우]]이다. [[KBS]] 공채 29기 개그맨으로 데뷔했다.
  • 정운용 . . . . 2회 일치
         정재학의 3남 정종원이 조흥은행장으로 재직하던 1957년 3월말 실시 된 [[귀속주]]입찰에서 민씨 가문은 [[민덕기]]를 중심으로 계성(주), 휘문재단, 영보합명회사 및 민병도 당시 조흥은행 전무 등의 지분을 합쳐, 7만8000 주를 확보하며 4만6000 주에 그친 정종원, 정운용 가문을 압도했다. 그러나 민씨 가문의 주력 기업이었던 조선맥주의 경영악화로 인해 민씨가문은 조흥은행 주식을 팔아 긴급자금을 마련해야 했다. 민씨 가문은 1957년 하반기부터 1958년 상반기까지 조흥은행 주식을 대거 처분한다.<ref>동아일보 1957년 7월 20일 3면</ref> 조흥은행에서 소수주주로 전락해버렸다. 그럼에도 불구 조선맥주은 주세체납 등으로 은행관리로 넘어갔다.<ref>매일경제 1968년 7월 2일 7면 빚만 늘어가는 조선맥주</ref>
  • 정웅인 . . . . 2회 일치
         * 2013년 7월 31일 [[SBS]] 《[[화신: 마음을 지배하는 자]] - 23회》 ... 대세특집 2탄
         * 2008년 7월 8일 [[KBS2]] 《상상플러스 시즌2 - 풍선토크 터질거예요》
  • 정정용 . . . . 2회 일치
         '''정정용''' ([[1969년]] [[4월 1일]] ~ )은 [[대한민국]]의 전 [[축구 선수]] 및 축구 지도자이다. [[2017년]] 7월부터 9월까지 [[대한민국 U-23 축구 국가대표팀]]의 임시 감독을 지냈다.
         |임기 = [[2017년]] [[7월 6일]] - [[2017년]] [[9월 25일]]
  • 정채진 . . . . 2회 일치
         '''정채진'''(鄭埰鎭, [[1932년]] [[4월 27일]] ~ [[2008년]] [[7월 26일]] , [[대구광역시|대구]])은 공무원이자, 시민사회 운동가이다. 검정고시 출신 관료로 일반 공무원 공채에 합격, 공무원 재직 중 다시 보통고시에 합격하였다. [[박정희]] 정권에서 [[대구직할시장]], [[경상북도지사]], [[부산직할시장]]을 역임하였다.
         |임기 = [[1981년]] [[7월 1일]] ~ [[1982년]] [[5월 2일]]
  • 조응천 . . . . 2회 일치
          * [[2016년]] [[7월 1일]] 조응천 의원은 국회 상임위원회 감사에서 [[MBC]] 출신의 대법원 양형위원이 성추행으로 정직 처분을 받은 적이 있다는 사실을 폭로했고, '''[[김장겸|당사자의 실명]]'''까지 거론해 가며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기는 꼴'이라고 비판했다. 이후 보도 자료까지 배포해 일부 언론에서는 "양형위원이 성추행 전력이 있다"는 기사까지 나오게 되었다. 그런데 그 문제의 [[MBC]] 간부는 [[http://www.mediatoday.co.kr/?mod=news&act=articleView&idxno=130876|조 의원이 지목한 사람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었다]]. [[MBC]] 보도국 부장이라고 한다.
          7월 4일, 조응천 의원은 사실 관계를 똑바로 파악하지 못한 잘못을 인정하고 공개적으로 사죄하였다. 그는 '당사자가 해외에 있고 연락이 안 되고 있다. 기회가 주어지면 당사자를 만나 용서를 구할 것이며 자신의 잘못으로 인한 모든 비난을 달게 감수하겠다'고 말했다. [[김종인]] 대표도 조응천 의원에게 '발언에 신중을 기하라'고 강력히 경고하였고 조응천 의원은 이를 무겁게 받아들이겠다고 밝혔다.
  • 존 딜린저 . . . . 2회 일치
         7월 21일, 안나 세이지(Anna Sage)라고 자칭하는 여성이 경찰에게 연락해온다. 그녀의 정체는 인디애나 주 게리에서 포주일을 하던 아나 쿰파나슈(Ana Cumpănaș)였다. 이민 귀화국에서는 이 루마니아 출신 포주를 국외추방하려고 하고 있었는데, 이에 위기감을 느낀 쿰파나슈는 보상금을 주고 미국에 남게 해준다면 존 딜린저에 대한 정보를 주겠다고 연락한 것이었다. FBI는 보상금은 약속할 수 있지만 국외추방에 관한건 노동부의 협조가 있어야 한다고 말하였다. 쿰파나슈는 이를 받아들였다.
         7월 22일 오후. 딜린저, 해밀턴, 그리고 쿰파나슈는 영화를 보러 길을 나선다. 쿰파나스가 어떤 극장에 갈지 아직도 몰랐다는 문제가 있었지만 FBI와 경찰은 두 극장 모두 경찰을 배치하는 방식으로 대응했다. FBI 요원들은 세 명이 바이오그래프 극장으로 들어가는걸 목격하지만 사람들이 몰린 극장에서 딜린저가 저항할 위험을 피해 대기했다.
  • 주상욱 . . . . 2회 일치
         '''주상욱'''([[1978년]] [[7월 18일]] ~ )은 [[대한민국]]의 [[배우]]이다. 1998년 [[한국방송공사|KBS]] 《[[신세대 보고 - 어른들은 몰라요|신세대 보고 어른들은 몰라요]]》로 텔레비전 연기자 데뷔하였다.
         주상욱은 1남 2녀중 둘째로 대구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이북 출신으로서 주상욱이 7살때 돌아가셨고 어머님이 공직 생활을 하시며 삼남매를 키우셨다. 친구의 모델활동 현장에 우연히 놀러갔다가 에이전트로 부터 부탁을 받았던 주상욱<ref>[http://news.hankooki.com/lpage/entv/201310/h20131015100416133420.htm '힐링캠프' 주상욱, "배우 데뷔? 모델 여자친구가…"]{{깨진 링크|url=http://news.hankooki.com/lpage/entv/201310/h20131015100416133420.htm }}</ref> 은 1999년 [[KBS]] 청소년 드라마 《[[신세대 보고 - 어른들은 몰라요|신세대 보고 어른들은 몰라요]]》의 단역으로 데뷔한 뒤, 20대 중반까지 아역으로 활동했다. 제대 후 젠틀하고 반듯한 이미지의 역할을 도맡아 해 '실장님 전문 배우'라는 별명이 붙기도 했다.<ref>{{뉴스 인용|제목="실장님서 반장님… 다음은 허당 공무원이죠"|url=http://news.hankooki.com/lpage/culture/201201/h20120116210008111780.htm|저자=신정엽|출판사=한국일보|날짜=2012-01-16|확인날짜=2013-05-10|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131004230734/http://news.hankooki.com/lpage/culture/201201/h20120116210008111780.htm|보존날짜=2013-10-04|깨진링크=예}}</ref> [[2012년 7월]] [[김준호 (희극인)|김준호]]와 함께 《[[남자의 자격]]》에 합류해 프로그램이 종영될 때까지 고정 멤버로 출연했으며 이 프로그램으로 2012년 [[KBS 연예대상]] 쇼오락 남자 신인상을 수상했다.
  • 청년 튀르크 당 . . . . 2회 일치
         1908년 7월 3일, 제3군단의 아메드 니야지 소령이 1876년 헌법의 부활과 의회 소집을 요구하며 반란을 시작했다. 반란이 오스만 투르크 제국 전국 각지로 확산되면서, 술탄은 버틸 수가 없게 되었고 결국 1876년 7월 23일 헌법을 부활시키겠다고 발표, [[의회]]를 재수립했다.
  • 최광식 . . . . 2회 일치
         | 임기 = [[2011년]] [[9월 20일]] ~ [[2013년]] [[3월 11일]]
         |임기 = [[2011년]] [[9월 20일]] ~ [[2013년]] [[3월 11일]]
  • 최성관 (1925년) . . . . 2회 일치
         '''최성관'''(崔聖寬. [[1925년]] [[9월 5일]] ~ [[1999년]] [[7월 19일]])은 [[대한민국]]의 [[영화 배우]], [[영화 감독]], [[영화 편집자]]이다.
         [[1925년]] [[9월 5일]] [[서울]]에서 태어났으며, [[국학대학]] 국문학과를 졸업하였다. [[1957년]] 《선화 공주》를 감독하였다. 감독활동은 1959년 《남의 속도 모르고》, 1962년 <태양(太陽)을 등진 사람들>로 이어졌다. 김근자, 박귀희 주연의 <선화공주>는 흑백영화로 일관되다시피한 당시에 16미리이기는 했으나 모처럼 천연색 필름으로 촬영하여 큰 관심을 끌었다. 이는 홍성기 감독이 <여성의 일기>(1949)로 색채 화면을 선보인 이후 두 번째의 시도였다. 그는 배우로도 활동했다. [[1999년]] [[7월 19일]] 별세하였다.
  • 최성준 (법조인) . . . . 2회 일치
         '''최성준'''(1957년 7월 12일 ~ )은 대한민국의 법조인이다.
         최성준은 1957년 7월 12일 [[서울특별시]]에서 태어나 [[경기고등학교]]와 [[서울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하고 제23회 사법시험에 합격하여 13기 사법연수원을 수료하고 1986년 9월 서울민사지방법원 판사에 임용된 이후 1989년 3월 서울형사지방법원 1990년 9월 제주지방법원 1992년 8월 서울지방법원 북부지원 판사를 거쳐 1994년 법원행정처 송무국 심의관으로 발령받았다가 1995년 3월 서울고등법원 판사를 거쳐 1998년에 특허법원 부장판사로 승진하였다. 이후 2000년 2월 수원지방법원, 2002년 2월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부장판사를 계속하였으며 2005년 2월 특허법원 고등부장판사, 2006년 8월 특허법원 수석부장판사, 2007년 2월 서울고등법원 고등부장판사, 2010년 2월 서울중앙지방법원 민사수석부 부장판사를 하였으며 2009년 3월에는 2년 임기의 지적재산권법연구회 회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 최영이 (종교인) . . . . 2회 일치
         |시복일 = [[1925년]] [[7월 5일]]
         최영이 바르바라는 [[1925년]] [[7월 5일]]에 [[로마]] [[성 베드로 광장]]에서 [[교황]] [[비오 11세]]가 집전한 79위<ref name=103saints_britannica>{{백과사전 인용
  • 최원준 (1994년) . . . . 2회 일치
         |첫 출장 = [[KBO (야구)|KBO]] / [[2018년]] [[7월 25일]]<br>[[문학야구장|문학]] 대 [[SK 와이번스|SK]]전 구원
         [[2016년]] [[10월]] 갑상선 암 수술을 받느라 지난 해 5월부터 라이브 피칭을 실시했고 6월 말에 2군 경기에 등판했다. [[2018년]] [[7월 25일]] [[SK 와이번스]]와의 경기에서 구원 등판하며 데뷔 첫 경기를 치렀고, 경기에서 3이닝 3실점을 기록하였다.
  • 최윤 (소설가) . . . . 2회 일치
         | 출생일 = [[1953년]] [[7월 3일]]
         본명은 최현무(崔賢茂)이며, 1953년 7월 3일 서울에서 태어났다. 경기여고 졸업 후 서강대학교 국문학과 학부와 석사과정을 졸업했으며, 1978년 프랑스 [[엑상프로방스]]의 프로방스대학교에서 프랑스 작가 [[마르그리트 뒤라스]]에 관한 연구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 최창흡 . . . . 2회 일치
         |시복일 = [[1925년]] [[7월 5일]]
         최창흡 베드로는 [[1925년]] [[7월 5일]]에 [[로마]] [[성 베드로 광장]]에서 [[교황]] [[비오 11세]]가 집전한 79위<ref name=103saints_britannica>{{백과사전 인용
  • 추미애 . . . . 2회 일치
          * [[KBS]] 2TV '슈퍼맘 다이어리'라는 리얼 다큐 프로그램에 출연했다. 시청자의 반응은 "평소에 정치인으로서 굉장히 강한 모습을 보여주는 전형적인 여장부[* 이 때문에 정치인 스타일 중에서는 탱커형으로 종종 분류된다.]의 면모와 달리, 해당 프로그램 속의 주부 추미애는 대한민국의 여느 아줌마들과 같은 모습"이라는 평. [[http://www.ikoreadaily.co.kr/news/articleView.html?idxno=237261|#]] 그리고 2017년 7월에는 KBS 2TV의 오락 프로그램 [[냄비받침]]에 출연하여 진행자인 [[이경규]]와 대화를 나눴다.
          * 2000년 7월 5일, 동료 의원들 및 기자들과 함께 한 술자리에서 술에 취해 'X같은 [[조선일보]]', '[[이회창]]이 이놈' 등의 발언을 했고, [[동아일보]] 기자와 싸움이 번져 '사주같은 놈', '누구의 지시를 받아 기사를 썼느냐'는 등의 불호령을 내렸다. [[정동영]] 등 동료 의원들이 말리면서 데리고 나오자 '정의가 바로 서야 하는데 왜 이러느냐' 하고 마당에 주저 앉아 펑펑 울었다고 한다. 다음 날, 조선일보에는 추미애의 'X같은 조선일보' 발언이 대문짝만하게 실려서 곤욕을 치렀는데, 오프 더 레코드로 사석에서 나온 말을 기사화한 것은 업계 상도의에 어긋나는데다, 당시 [[김대중]] 정부의 언론사 세무조사와 관련한 보복성 보도였다는 평가가 주론이다.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047095|그날 추미애 의원에게 일어난 일들]]
  • 카라스노 고교 . . . . 2회 일치
         || 6 || 봄고 || 1차 예선 2회전[* 카라스노는 인터하이 시드배정교로 2차전에 자동진출했다.] || 오기미나미 고교[* 인터하이에서 1차전부터 시라토리자와를 만나 참패했던 팀.] || 승리 || 2 : 0 || 카지 고등학교 || 8월 11일 || 12권 ||
         || 7 || 봄고 || 1차 예선 3회전 || 카쿠가와 고교 || 승리 || 2 : 0 || 카지 고등학교 || 8월 11일 || 12권 ||
  • 타루 . . . . 2회 일치
         '''타루'''(墮淚, {{본명|김민영}}, [[1982년]] [[7월 10일]] ~ )는 [[대한민국]]의 여성 [[가수]]이다.
         * 발매일 : [[2013년]] [[7월 3일]]
  • 하현우 . . . . 2회 일치
          * 현재 방송 중에 나온 최고음은 '''3옥타브 라♯(A♯5)'''[* 2018 인생술집 [[She's Gone(스틸하트)|She's Gone]] [[http://tv.naver.com/v/3599929?openType=nmp|#]]] 콘서트 중에 '''3옥타브 라♯(A♯5)'''[* 2013년 안산 여르미오 공연 '꼬리'[[https://youtu.be/ehRZu6QXa7o|#]], 그리고 [[2015년]] [[5월 1일]]에 부른 '[[She's Gone(스틸하트)|She's Gone]]'. [[https://www.youtube.com/watch?v=x7S9Q3bUm6o|#]]]를 보여준 적 있다. 가성으로는 '''3옥타브 라♯(A♯5)''' [[https://www.youtube.com/watch?v=f2JhDE6__6E|#]], '''3옥타브 시(B5)''' [[https://www.youtube.com/watch?v=ffl9JCKSPDs|#]], '''4옥타브 라(A6)''' [[https://www.youtube.com/watch?v=tDby__0o4Sg|푸에고(2012 Live.ver)]] 를 보여준 적이 있다.[* 다만 샤우팅을 하다 삑사리처럼 찢어지는 비명으로 터져나온 것이라 가창으로서는 별 의미가 없긴 하다..] 또한 [[두성]]으로 '''3옥타브 라♯(A♯5)'''[* 2013년 안산 여르미오 공연 '꼬리'[[https://youtu.be/ehRZu6QXa7o|#]], 그리고 [[2015년]] [[5월 1일]], [[2018년]] [[7월 12일]] [[인생술집]] 방송때 부른 '[[She's Gone(스틸하트)|She's Gone]]'. [[https://www.youtube.com/watch?v=x7S9Q3bUm6o|#]][[http://tv.naver.com/v/3599929?openType=nmp|#]]]까지 발성할 정도로 음역대가 무지막지하다. [[http://www.10years.co.jp/guckkasten/|국카스텐 일본 사이트]]에서는 '''3옥타브 시(B5)'''까지 가능하다고 적혀 있다. 게다가 한 곡 안에서 최저음과 최고음이 3옥타브 이상 차이가 나면 저음이나 고음 둘 중 한 쪽은 흔들리는 것이 보통인데, 하현우는 초저음역대와 초고음역대를 짧은 순간 안으로도 자유자재로 오간다. 일반적인 고음, 저음으로 유명한 보컬들의 음역대가 비교적 하이톤의 고음 특화거나, 로우 톤의 비교적 저음 특화로 생성된다는 것을 감안했을 때, 양쪽이 모두 가능한 하현우의 음역대는 숙고할 만하다. 오죽하면 음역대로 광고를 찍었을까.
         2018년 7월 15일 첫 방송 된다고 하며 복면가왕, 런닝맨과 동시간대 편성이라고 한다. 윤도현의 말에 따르면 자신들은 웃긴 게 하나도 없는데 tvN 예능국장이 5분마다 한 번 씩 터진다며 주말 프라임 타임 편성을 제안했다고.
  • 한병주 . . . . 2회 일치
          | 사망일 = [[1950년]] [[7월 26일]] (72세)
         '''한병주'''(韓秉柱, [[1879년]] ~ [[1950년]] [[7월 26일]])는 [[대한민국]]의 [[한국의 독립 운동|독립운동가]]이다. [[본관]]은 [[청주 한씨|청주]](淸州). 호(號)는 산남(山南).
  • 한용덕 . . . . 2회 일치
         |첫 출장 = [[KBO (야구)|KBO]] / [[1988년]] [[7월 1일]]<br />[[숭의야구장|인천]] 대 [[태평양 돌핀스|태평양]]전
         [[2006년]] 시즌 중반 당시 플레잉 코치였던 [[지연규]]의 1군 합류와 함께 1군 [[투수]]코치로 자리를 옮겼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001&oid=109&aid=0000041623& 한화, 우완 조성민 1군 올리고 최동원 코치 2군행] 《Osen》, 2006년 7월 24일 작성</ref> [[2006년]] 시즌 종료 후 열린 전지 훈련에서 [[류현진]]에게 [[슬라이더]] 투구법을 전수하였다.<ref>[http://joynews.inews24.com/php/news_view.php?g_menu=702120&g_serial=249270 신인 삼총사, '신무기 장착으로 2년차 징크스 넘는다'] 《조이뉴스》, 2007년 2월 21일 작성</ref> [[2007년]] 시즌 중반 [[이상군]]이 1군 [[투수]] 코치로 승격됨에 따라 재활군 코치로 자리를 옮겼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001&oid=001&aid=0001733318& 한화, 1군 투수코치에 이상군]《연합뉴스》, 2007년 8월 22일 작성</ref>
  • 함병춘 . . . . 2회 일치
         [[10월 11일]] 시신은 KAL 특별기편으로 [[경기도]] [[김포]]에 도착한 뒤 [[서울대학교 병원]]에 안치되었다가 [[10월 13일]] [[국민장]]으로 거행되어 [[서울특별시]] [[동작구]] 동작동 국립 서울 현충원에 안치되었다.
         [[1983년]] [[10월 11일]] 청조[[근정훈장]]이 추서되었다.
  • 허준 (1981년) . . . . 2회 일치
         '''허준'''(許俊, [[1981년]] [[7월 20일]] ~ )은 전 [[KBO 리그]] [[NC 다이노스]]의 [[포수]]이다. 2014 시즌후 무릎관절 수술대에 오르며 은퇴하였다. 현재는 2018.[휘문고] 야구부 코치이다.
         [[2015년]] 7월에 백송고 코치로 옮겼다.
  • 허협 . . . . 2회 일치
         |시복일 = [[1925년]] [[7월 5일]]
         허협 바오로는 [[1925년]] [[7월 5일]]에 [[성 베드로 광장]]에서 [[교황]] [[비오 11세]]가 집전한 79위<ref name=103saints_britannica>{{백과사전 인용
  • 헤이즈 (가수) . . . . 2회 일치
         * 2016년 7월 18일 - 《And July》
         ** 7월 14일 [[KBS]] 《[[뮤직뱅크]]》K-Chart 1위
  • 홍금주 . . . . 2회 일치
         |시복일 = [[1925년]] [[7월 5일]]
         홍금주 페르페투아는 [[1925년]] [[7월 5일]]에 [[성 베드로 광장]]에서 [[교황]] [[비오 11세]]가 집전한 79위<ref name=103saints_britannica>{{백과사전 인용
  • 홍병주 . . . . 2회 일치
         |시복일 = [[1925년]] [[7월 5일]]
         홍병주 베드로와 [[홍영주 바오로]] 형제는 [[1925년]] [[7월 5일]]에 [[성 베드로 광장]]에서 [[교황]] [[비오 11세]]가 집전한 79위<ref name=103saints_britannica>{{백과사전 인용
  • 홍석형 . . . . 2회 일치
         |임기= [[2001년]] 7월 ~ [[2010년]] 7월
  • 홍승목 . . . . 2회 일치
         '''홍승목'''(洪承穆, [[1847년]] [[음력 10월 11일]] ~ [[1925년]] 양력 [[2월 15일]])은 [[조선]] 말기의 관료이며 [[일제 강점기]]에 [[조선총독부 중추원]] 찬의를 지냈다. 자는 경희(敬熙), 호는 연운(硯耘), 본관은 [[풍산 홍씨|풍산]]. 본적은 [[경기도]] [[경성부]] 계동이다.
  • 홍영주 . . . . 2회 일치
         |시복일 = [[1925년]] [[7월 5일]]
         [[홍병주 베드로]]와 홍영주 바오로 형제는 [[1925년]] [[7월 5일]]에 [[성 베드로 광장]]에서 [[교황]] [[비오 11세]]가 집전한 79위<ref name=103saints_britannica>{{백과사전 인용
  • 홍해성 . . . . 2회 일치
         | 출생 = [[1894년]] [[10월 13일]]/[[음력 9월 15일]]
         '''홍해성'''(洪海星, [[1894년]] [[10월 13일]]([[음력 9월 15일]]) ~ [[1957년]] [[12월 6일]])는 [[일제 강점기]]부터 활동한 [[대한민국]]의 연극인이다. 본명은 홍주식(洪柱植)이다.
  • 황경태 . . . . 2회 일치
         |첫 출장 = [[KBO (야구)|KBO]] / [[2017년]] [[7월 19일]]<br>[[문학야구장|문학]] 대 [[SK 와이번스|SK]]전
         [[2016년]]에 입단하였다. [[2017년]] [[7월 19일]] [[SK 와이번스|SK]]전에서 대수비로 출전하며 데뷔 첫 경기를 치렀으나 타석에는 들어서지 못하였다.
  • 황진하 (아나운서) . . . . 2회 일치
         '''황진하'''([[1986년]] [[11월 11일]] ~ )은 현재 [[대한민국]]의 tbs([[교통방송]]) [[아나운서부]]의 [[아나운서]]다.
         * 출생: [[1986년]] [[11월 11일]]
  • Crusader Kings 2/DLC . . . . 1회 일치
          * 2015년 7월 14일 발매
  • Darkest Hour: A Hearts of Iron Game . . . . 1회 일치
          1943년 7월 26일을 기준으로 한 시나리오.
  • NEC 코퍼레이션 . . . . 1회 일치
         1995년 10월에 [[NEC]]에서 소프트웨어 관련 부문이 분리되어 NEC인터채널 주식회사로 창립됐다. 2004년 3월에 NEC가 보유하던 주식의 대부분이 양도되어 2004년 7월 1일에 '주식회사 인터채널'로 사명을 변경했다. 하지만 이 회사 전성기는 NEC인터채널 시대로 그냥 '인터채널'로 하면 도무지 적을 정보가 없으니 이걸로 쓰자.
  • USS 뷰캐넌 . . . . 1회 일치
         취역한지 1년도 안 된 뷰캐넌은 대서양을 떠나 태평양에서 활동한다. 이후 뷰캐넌은 퇴역과 재취역을 반복했다. 1922년 7월 7일 퇴역했지만 1930년 4월 10일 USS 소머즈(USS Somers)가 퇴역하며 재취역했다. 이렇게 태평양에서 활동하던 뷰캐넌은 1937년 4월 9일 다시 퇴역한다. 1939년 9월 1일, [[유럽]]에서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함에 따라 미 해군은 해군력을 불리기 시작한다. 1939년 9월 9일, 뷰캐넌은 3번째 취역을 맞는다. 이후 뷰캐넌은 대서양에서 활동하다 1940년 9월 9일, 미국과 영국이 맺은 조약[* Destroyer for Bases Deal. 영국이 미국에게 기지를 대여해주는 대신 미국은 영국에게 구축함을 지원하는 조약.]에 의해 영국 해군에게 넘겨진다.
  • Victoria II . . . . 1회 일치
          1861년 7월 1일부터 시작하는 캠페인. 이탈리아는 통일을 완수하여 열강의 자리에 올라갔으며, 한때 열강이었던 스페인은 이탈리아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탈락해버렸다. 아편 전쟁으로 홍콩을 강탈당한 중화제국은 천왕이 이끄는 태평천국을 상대로 전쟁을 벌이고 있다. 미국은 멕시코에게서 텍사스와 캘리포니아를 강탈하고 현재의 국경선을 거의 완성했지만 독립을 선언한 아메리카 연합국과 전쟁을 벌이고 있다. 한편 오스만 제국은 튀니스와 트리폴리를 자국 영토로 합병하고 이집트에게서 중동 지방을 빼앗았다. 프랑스 역시 알제리를 완전히 먹어치웠고. 한편 일본은 미국의 영향권 내에서 근대화를 끝마쳐가는 중이다. 중앙아메리카 합중국은 분열되어 여러개의 나라가 되었으며, 페루는 에콰도르가 지배하고 있는 파스타사를 해방시키기 위해 전쟁을 벌이고 있다.
  • 강성호 (1966년) . . . . 1회 일치
         '''강성호'''(姜聲浩<ref name=nec>{{웹 인용 |url=http://info.nec.go.kr/electioninfo/electionInfo_report.xhtml?electionId=0020111026&requestURI=%2Felectioninfo%2F0020111026%2Fep%2Fepei01.jsp&topMenuId=EP&secondMenuId=EPEI01&menuId=EPEI01&statementId=EPEI01_%234&electionCode=4&cityCode=0&x=17&y=10 |제목=중앙선거관리위원회 역대선거정보시스템 |확인날짜=2011-10-26 |형식=html |출판사=중앙선거관리위원회}}</ref>, [[1966년]] [[10월 11일]] ~ , [[대구광역시|대구]] [[서구 (대구광역시)|서구]] [[상중이동]])은 [[대한민국]]의 전직 대구 서구청장이었다.
  • 강정길 . . . . 1회 일치
         '''강정길'''(姜正吉, [[1962년]] [[7월 25일]] ~ )은 전 [[KBO 리그]] [[한화 이글스]]의 선수이다.
  • 강중인 . . . . 1회 일치
         [[1946년]] [[민주주의민족전선]] 토지문제연구위원에 임명되었고, 미군정 과도정부의 사법부 총무국장도 지냈다. 같은 해 7월에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이 발생하여 남로당과 미군정이 정면 충돌을 일으켰을 때 위폐 사건 피고인들의 변호를 맡았다. 남로당은 곧 불법화되었고, 강중인은 [[1949년]]에 발생한 법조프락치 사건으로 구속되었다. 1심 재판에서 징역 3년형을 언도받고 항소 중에 [[한국 전쟁]]이 발발하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갔다.
  • 거푸집 . . . . 1회 일치
         정동찬 국립중앙과학관 과학기술사연구실장이 화학세계 1999년 7월호에 투고한 내용에 따르면, 활석 거푸집은 열전도율이 뛰어나며, 진흙이나 사암 거푸집과는 달리 가스 구멍을 따로 만들 필요가 없고, 단단하여 잘 망가지지 않으므로 오래 쓸 수있어서 좋다고 한다.[http://www.kcsnet.or.kr/main/k_chemstory/k_c_story_read.htm?qpage=k_c_story_main&uid=11&cat=2 참조]
  • 경기도 . . . . 1회 일치
         [[2017년]] [[7월 31일]]을 기준으로 경기도의 각 시와 인구와 면적은 다음과 같다. 인구는 12,783,741명이고 남여비율은 1.01로 전반적인 [[성비|남초]] 지역이다. 시군별로는 [[포천시]] (1.11)와 [[연천군]] (1.11)가 가장 높고, [[시흥시]] (1.10), [[화성시]] (1.07), [[광주시 (경기도)|광주시]] (1.06), [[오산시]] (1.06), [[안산시]] (1.05), [[안성시]] (1.05), [[가평군]] (1.05), [[이천시]] (1.04), [[안성시]] (1.04), [[양주시]] (1.03), [[파주시]] (1.03), [[양평군]] (1.02), [[여주시]] (1.02), [[수원시]] (1.01), [[하남시]] (1.01), [[김포시]] (1.01), [[남양주시]] (1.00), [[부천시]] (1.00), [[의왕시]] (1.00), [[구리시]] (0.99), [[군포시]] (0.99), [[동두천시]] (0.99), [[안양시]] (0.99), [[용인시]] (0.99), [[광명시]] (0.98), [[성남시]] (0.98), [[고양시]] (0.97), [[의정부시]] (0.97), [[과천시]] (0.95) 순으로 높다.
  • 경빈 박씨 (중종) . . . . 1회 일치
         1527년 동궁전 후원에 불에 태워 마치 돼지와 같은 형상을 하게 된 쥐와 방서를 매달아 세자를 저주한, 이른바 '작서(灼鼠)의 변(變)'에 범인으로 지목되었다. 이는 경빈이 세자를 밀어내고 복성군을 저위(儲位)에 앉히고자 하는 야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경빈 자신과 아들인 복성군은 서인(庶人)으로 강등당한 채 고향인 상주로 유배되었으며 경빈의 아버지 박수림 및 박인형(朴仁亨), 박인정(朴仁貞) 또한 파직되었다. 계속해서 복귀의 날만을 소망하였으나 결국 1533년 '목패의 변' 혹은 '가작인두의 변' 이라고 하는 사건의 배후로 지목되며 사약을 받고 사망했다.<ref>《조선왕조실록》 중종 74권, 28년 1533년 6월 15일 (음력 5월 23일) 2번째기사</ref> 아들 복성군 역시 사사되었으며, 두 옹주도 옹주 작호를 박탈당해 폐서인되었고 맏사위 당천위 김인경은 유배되었다.<ref>《조선왕조실록》 중종 74권, 28년(1533년) 5월 26일 5번째 기사</ref> 이후, 작서의 변괴와 목패의 변이 [[김안로]]와, 그 아들이며 중종의 장녀 [[효혜공주]]의 남편인 연성위(延城尉) [[김희 (조선)|김희]]가 한 짓이 밝혀지며 복권되었다.
  • 고수희 . . . . 1회 일치
         '''고수희'''(高秀喜 [[1976년]] [[7월 18일]] ~ )는 [[대한민국]]의 [[배우]]이다.
  • 고인범 . . . . 1회 일치
         2016년 7월 31일부터 매주 일요일마다 [[충청북도|충북]][[충주시|충주]]대표 저녁종합[[뉴스]] [[KNN 뉴스아이]]에서 '고인범의 억수로 맛있는 시장' 코너(꼭지)를 직접 진행하고 있다. 다음날인 월요일 [[KNN 모닝와이드]]에서도 재방송된다.
  • 곽상도 . . . . 1회 일치
          - 2018년 7월 ~ : 제20대 국회 후반기 교육위원회 위원
  • 곽성문 . . . . 1회 일치
         * 2006년 7월 제17대 국회 한미FTA특별위원회 위원
  • 구성윤 . . . . 1회 일치
         2015년 [[동아시안컵]] 예비 엔트리에 포함되었고, 7월 20일 [[슈틸리케호/2015년 EAFF 동아시안컵|슈틸리케호]]의 최종 엔트리에 처음 포함되었다. 그러나 실전에서 뛰지는 못했다.
  • 국부펀드 . . . . 1회 일치
          * 한국투자공사(KIC) : 2005년 7월 설립.
  • 권영진 (야구선수) . . . . 1회 일치
         |첫 출장 = [[KBO (야구)|KBO]] / [[2008년]] [[7월 5일]] <br /> [[한밭종합운동장 야구장|대전]] 대 [[한화 이글스|한화]]전
  • 권해효 . . . . 1회 일치
          * [[2017년]] [[7월 26일]] 뉴스타파에서 1시간 정도 분량의 인터뷰를 했다. ‘멋진 어른’ 권해효, 홍여진 기자를 울리다
  • 김강근 . . . . 1회 일치
         1995년 입단하였으며, 2007년 6단을 거쳐 2011년 7월에 7단으로 승단하였다. 2007년 제41회왕위전 본선과 제51회 국수전 본선, 2010년 제6회 한국물가정보배 본선에 올랐다.
  • 김광석 . . . . 1회 일치
         * 김광석 나의노래 (2012년 07월 17일, CJE&M, 박스셋, 북클릿(가사, 악보, 화보집))
  • 김굉필 . . . . 1회 일치
         그 뒤 [[사헌부]] 감찰을 거쳐 [[1497년]] [[형조]][[좌랑]]이 되었으나 7개월만에 사직상소를 내고 내려갔다. [[1498년]](연산군 4년) 동문 [[김일손]] 등이 실록에 [[조의제문]]을 실은 것과 [[남곤]] 등의 [[연산군]] 비판, [[폐비 윤씨]] 복위 반대에 염증을 느낀 [[연산군]]에 의해 [[무오사화]]가 발생했다. 오랜 고문 끝에 [[김일손]]이 그해 [[7월 17일]] 김종직의 문인이라고 진술한 명단에 그의 이름이 끼어 있어 그도 처벌을 받게 된다.
  • 김구현 (프로게이머) . . . . 1회 일치
         | 소속팀 = [[소울 (E스포츠)|STX SOUL]](2006 ~ 2011년 9월 11일)<br/>[[공군 ACE]](2011년 10월 24일 ~ 2013년 10월 23일)<br/> [[프라임 (E스포츠)|프라임]] (2013년 10월 31일 ~ 2014년 4월 10일)
  • 김기섭 (1939년) . . . . 1회 일치
         * [[1990년]] [[1월 11일]] [[삼성전관]] 상무
  • 김기창 (법학자) . . . . 1회 일치
         [[1981년]]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에 입학하여 [[1985년]]에 학사 학위하였고, 그 후 1985년 9월부터 1986년 6월까지 [[시카고 대학교]] 로스쿨에 재학하여 법학 석사 학위를 취득하였고, 1988년 3월에 제19기로 [[사법 연수원]]에 입소하였으며, 1990년 3월부터 9월까지 세방 종합 법률사무소에서 변호사로 재직하였다. 1990년 10월부터 1994년 7월까지 [[캠브리지 대학교]] 퀸즈 컬리지에 재학하여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1994년 10월부터 1997년 9까지 [[캠브리지 대학교]] 퀸즈 컬리지에서 전임 연구 교원으로, 1997년 10월부터 2002년 9월까지 캠브리지 대학교 셀윈 컬리지에서 전임 강사로, 2000년 10월부터 2002년 9월까지 캠브리지 대학교 법과대학에서 노튼로즈 기금 교수로 재직하였다. 2003년 3월부터 [[고려대학교]] 법과대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자유전공학부 학부장을 역임하였다.
  • 김덕현 (변호사) . . . . 1회 일치
         김덕현은 판사 출신으로 [[1986년]] 변호사로 개업한 뒤 여성변호사회 회장, 대한변호사협회 여성문제연구실무위원장, 한국에이즈퇴치연맹 이사, 국가인권위원회 위원 등을 거쳤다.<ref>김효섭.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81&aid=0000011071 전원위원회 구성 어떻게]. 서울신문. 2004년 8월 25일.</ref> <ref>강충식.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81&aid=0000033227 (‘로스쿨’로 뛰는 대학들) (1)한양대]. 서울신문. 2005년 2월 28일.</ref> <ref>심규석.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1&aid=0001323957 <헌법재판관 5인 교체 앞두고 하마평 무성>(종합)]. 연합뉴스. 2006년 6월 11일.</ref> <ref>이하나. [http://www.womennews.co.kr/news/54417 네 번째 여성 대법관 탄생하나]. 여성신문. 2012년 8월 17일.</ref>
  • 김동석 . . . . 1회 일치
         1920년에 진영학원을 설립하였다. 이후 화원청년회 회장을 역임하고 진우연맹을 조직하였다. 한편 [[무정부주의]] 노선에도 참여하였다. 1926년 7월 진우연맹 사건으로 체포되어 조선으로 압송되었다. 치안유지법 위반이란 죄명으로 1927년 6월 대구재판소에서 징역 3년형을 선고받아 복역하였다.
  • 김륵 . . . . 1회 일치
         [[1589년]](선조 22) 김륵은 내직으로 홍문관 교리에 임명되고 사헌부 집의(~[[1591년]] [[음력 6월 23일]]<ref>[[#선조실록 1616|선조실록 1616]] [http://sillok.history.go.kr/id/kna_12406023_003 25권, 선조 24년 6월 23일 병진 3번째기사]</ref>)를 거쳐 당상관으로 승진, [[승정원]] 우부승지·좌부승지가 되었다. 그 뒤 경상좌도 초유사, 경상우도 [[관찰사]], [[이조]] [[참판]], 성균관 대사성(成均館大司成), [[사헌부]] [[대사헌]] 등을 역임하였다.
  • 김명신 (야구선수) . . . . 1회 일치
         [[6월 29일]] 기사에 따르면 군문제 해결을 위해 [[7월 2일]] 사회복무요원으로 군입대를 하게된다.
  • 김무력 . . . . 1회 일치
         553년(진흥왕 14년), 진흥왕은 7월 [[백제]]의 동북 변경을 빼앗고 지금의 한강 유역에 신주를 설치하였다. 김무력은 신주(新州)의 군주로 임명되었다.
  • 김민수 (1992년) . . . . 1회 일치
         '''김민수'''([[1992년]] [[7월 24일]] ~ )는 [[KBO 리그]] [[kt 위즈]]의 [[투수]]이다.
  • 김보미(1958) . . . . 1회 일치
         김보미(1958년 7월 29일~) [[전라북도]] [[남원시]] 출생을 대한민국의 중년 여배우이다. 1977년 TBC 17기 공채 탤런트으로 데뷔하였다.
  • 김보민 . . . . 1회 일치
         '''김보민'''(金寶民, [[1978년]] [[7월 3일]] ~ )은 예술가의아내이다.
  • 김봉수(1953) . . . . 1회 일치
         [[1953년]] [[7월 15일]] ([age(1953-07-15)]세) ~
  • 김상엽 (야구인) . . . . 1회 일치
         '''김상엽'''(金相燁, [[1970년]] [[5월 11일]] ~ ) 은 전 [[KBO 리그]] [[LG 트윈스]]의 [[투수]]이자, 현재 [[KBO 리그]] [[NC 다이노스]]의 재활군 투수코치이다. 부상 이전 촉망받던 고졸 강속구 투수였다. 최고구속 150km대에 근접한 강속구를 뿌렸으며, 당시에는 희귀한 낙차 큰 파워 커브로 타자들을 상대했다. 1990년대에는 당시 보기 드물게 야구 선수로서 [[삼성물산]]의 패션 사업부인 [[삼성물산|에스에스패션]]의 신사복 빌트모아 TV CF에 출연하였을 정도로 큰 인기를 얻었다.
  • 김새해 . . . . 1회 일치
         '''김새해''' ([[1986년]] [[12월 11일]] ~ )는 [[대한민국]]의 여자 [[성우]]이다. [[2009년]] [[투니버스]] 7기 공채 성우로 데뷔하였다.
  • 김석형 (역사학자) . . . . 1회 일치
         * 1992년 7월 사회과학원 원장
  • 김성현 (1989년) . . . . 1회 일치
         2011년 7월 31일, LG의 투수 자원 보강을 위해 [[내야수]] [[박병호 (1986년)|박병호]]와 투수 [[심수창]]을 상대로 투수 [[송신영]]과 같이 트레이드되었다. 공교롭게도 이날 김성현은 [[KIA 타이거즈]] 전에서 선발로 나와 승을 챙겨서 MVP로 인터뷰까지 했다. 그리고 [[더그아웃]]으로 들어서자마자 트레이드 사실을 통보받았다.
  • 김소희 (쇼트트랙 선수) . . . . 1회 일치
         김소희는 [[2003년]] 말 국가대표팀 코치로 선임되어 그 해 [[중화인민공화국|중국]]에서 열린 1, 2차 월드컵에서 [[대한민국]] 대표팀이 종합 우승을 거두는 데 기여하였다. 그러나 [[2004년]] [[11월 3일]] [[최은경 (쇼트트랙 선수)|최은경]], [[여수연]], [[변천사]], [[허희빈]], [[강윤미 (쇼트트랙 선수)|강윤미]], [[진선유]] 등 여자대표팀 선수 6명이 사생활 간섭<ref>{{뉴스 인용|제목 = "죽도록 두들겨 맞고…" 여자 쇼트트랙 '폭력의 얼음판' | url =http://sports.news.naver.com/sports/index.nhn?category=sports_general&ctg=news&mod=read&office_id=020&article_id=0000269734 | 출판사 = 동아일보 | 저자 = 김성규 | 쪽 = | 날짜 = 2004-11-11 | 확인날짜 = 2014-02-16 }}</ref>, 상습적 구타<ref>{{뉴스 인용 | 제목 = 여자 쇼트트랙 구타 쇼크 "매일 무차별적으로 맞았다"- 국제대회장서도 되풀이 | url =http://legacy.www.hani.co.kr/section-006000000/2004/11/006000000200411101828268.html | 출판사 = 한겨레 | 저자 = 성연철 | 쪽 = | 날짜 = 2004-11-11 | 확인날짜 = 2014-02-16 }}</ref> 등 코치의 강압적인 지도 방식에 불만을 품고 [[태릉선수촌]]을 무단 이탈했다가 대한빙상연맹의 설득으로 하루 만에 복귀했다. 연맹 측은 [[11월 11일]] 상습구타 사건에 연루된 코치진이 제출한 사표를 수리했고, 7명의 부회장단도 총 사퇴했다.<ref>{{뉴스 인용 | 제목 = `선수 매질`파문..빙상聯 부회장단 사퇴 | url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21&aid=0000088254 | 출판사 = 문화일보 | 저자 = 이준호 | 쪽 = | 날짜 = 2004-11-11 | 확인날짜 = 2014-02-16 }}</ref> 이후 연맹은 여자대표팀을 선수촌에서 퇴촌시켰으며, 11월 말 열린 3, 4차 월드컵 대회 출전도 정지시켰다.<ref>{{뉴스 인용 | 제목 =여자 쇼트트랙 새 사령탑 선임 | url =http://sports.hankooki.com/lpage/moresports/200411/sp2004111522171658130.htm | 출판사 = 스포츠한국 | 저자 = 허재원 | 쪽 = | 날짜 = 2004-11-15 | 확인날짜 = 2014-02-17 }}</ref> 이 사건 이후 현장 지도에는 나서지 않고 연구원으로만 활동하고 있다.
  • 김수학 (법조인) . . . . 1회 일치
         |임기 = 2010년 2월 11일 ~ 2011년 2월 16일
  • 김양 (1953년) . . . . 1회 일치
         * 어머니 : 임윤연(林胤嬿, <small>아명(兒名): 林胤燕</small>, [[1929년]] ~ [[1971년]] [[12월 11일]], [[위암]]으로 사망)
  • 김연수(작가) . . . . 1회 일치
         [[2013년]] 7월 기준, 최근작은 장편소설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이다.[* 다만 해당 책이 출간된 출판사에서 자사의 여러 책들을 사재기하여 베스트셀러 순위를 조작하는 사태가 일어나면서, 이와 관련하여 김연수 작가는 해당 책의 관련 여부와 관계없이 발매된 지 9개월 만에 본 책을 절판시켜 버렸다. 그리고 [[2015년]], 자신의 단편집 <스무살> 재판과 함께 [[문학동네]] 출판사에서 다시 나온다.]
  • 김영환(1955) . . . . 1회 일치
         2016년 5월 11일 국민의당 사무총장에 임명되었다. 그런데 인재영입위원장 시절 영입한 [[김수민(정치인)|김수민]]의 리베이트 건이 터졌다.
  • 김운용 . . . . 1회 일치
         * 1992년 7월 : [[국제 올림픽 위원회]](IOC) 부위원장으로 선출됨.
  • 김윤동 (야구선수) . . . . 1회 일치
         |첫 출장 = [[KBO (야구)|KBO]] / [[2013년]] [[7월 23일]]<br />[[서울종합운동장 야구장|잠실]] 대 [[LG 트윈스|LG]]전 구원
  • 김을동 . . . . 1회 일치
         2012년 7월 23일, 이한수 익산시장(오른쪽), LG전자 경영지원부문장 이영하 사장(왼쪽)과 함께 서울 도곡동 야구회관에서 ‘LG배 한국여자야구대회’ 개최를 위한 MOU를 체결하는 한국여자야구연맹 김을동 회장(중앙)
  • 김이브 . . . . 1회 일치
         2015년 7월 20일, 유튜브 구독자 수가 60만명을 넘었다. 그리고 2017년 9월 17일을 기준으로 유튜브 구독자수가 무려 100만명에 달하는 크리에이터가 되었다.[* 100만 구독자수가 되었을때 받는 골드버튼은 아직 안 받았다고 한다.]
  • 김지훈 (영화감독) . . . . 1회 일치
         '''김지훈'''([[1971년]] [[7월 3일]] ~ )은 [[대한민국]]의 [[영화 감독]]이자 [[영화 각본|각본가]]이다.
  • 김충공 . . . . 1회 일치
         [[831년]] [[흥덕왕]]의 왕자 김능유(金能儒)가 흥덕왕의 명을 받들어 9명의 승려와 함께 [[당나라]]에 진봉사로 갔다가, 이 해 7월 돌아오던 도중 바다에 빠져 익사하였다. 흥덕왕은 후사가 없었고 그가 태자로 책봉되었다. [[835년]] 여름에 병으로 사망하였다. 출생년대는 알려져있지 않으며 사망 원인도 역시 미상이다.
  • 김충섭 . . . . 1회 일치
         ||<bgcolor=#808080> '''{{{#FFFFFF 임기}}}''' ||<(> [[2018년]] [[7월]] ~ ||
  • 김태희 . . . . 1회 일치
         2004년 김태희는 헤럴드경제 기업사랑 캠페인 홍보대사로 활동했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16&aid=0000148878 'I Love Companies'`기업사랑 캠페인` 본궤도 올랐다] ''헤럴드경제'' 입력일자 2004-09-21</ref> 2005년에는 남편 [[이완 (1984년)|이완]]과 함께 수호천사로 위촉돼 [[독도]] 사랑 캠페인을 벌였고, 같은 해 5월 [[스위스]]에서 친선문화대사로 선정 돼 "독도 우리땅"이라는 문구를 새긴 티셔츠와 리메이크 앨범 등을 나눠주는 활동을 했다.<ref name="광주일보"/><ref>[http://www.myswitzerland.co.kr/etc/entertainer/friends/main.html SWISS FRIENDS 2005] {{웨이백|url=http://www.myswitzerland.co.kr/etc/entertainer/friends/main.html |date=20110813103724 }} 스위스관광청 홈페이지</ref><ref>[http://media.daum.net/society/others/view.html?cateid=1067&newsid=20050217085145988&p=yonhap 김태희, 스위스친선문화대사 선정] 연합뉴스 입력일자 2005.02.17</ref> 이후 2007년 유방암의 위험성을 알리는 핑크리본 홍보대사로 활동을 했고, 7월 22일 부산 [[해운대]]에서 열린 핑크리본 사랑 마라톤 대회에 참여했다.<ref>[http://media.daum.net/entertain/broadcast/view.html?cateid=1032&newsid=20070419123412761&p=SpoChosun 김태희, 유방암 조심하세요 핑크리본 홍보대사] 스포츠조선 입력일자 2007.04.19</ref> 또한 12월에는 [[BC카드]]의 후원을 받아 서울에서 외국인 노동자들을 위한 밥차 배식 봉사활동을 했다.<ref>{{뉴스 인용 |제목=김태희, 밥차 배식 봉사활동 펼쳐|url=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6&oid=073&aid=0000027316|저자=탁진현|출판사=[[네이버]]|날짜=2007-12-05|확인날짜=2011-09-15}}</ref> 김태희는 2005년부터 메이크어위시 재단의 홍보대사로 활동하기 시작했으며, 2006년에도 난치병 어린이들과 함께 자선 활동을 계속 했다.<ref>{{뉴스 인용 |제목=김태희, 난치병 어린이들과 따뜻한 만남|url=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1&aid=0001846672|저자=김가희|출판사=[[네이버]]|날짜=2006-05-16|확인날짜=2011-09-15}}</ref> 뿐만 아니라 2011년에는 난치병 아동들로 이루어진 메이크어위시 합창단 앨범에 참여했는데, "Make-A-Wish"를 녹음했다.<ref>조성훈 [http://www.gaonchart.co.kr/main/section/hotnews/kpop/view.gaon?idx=527 배우 김태희, ‘메이크어위시 합창단’ 음원 참여] {{웨이백|url=http://www.gaonchart.co.kr/main/section/hotnews/kpop/view.gaon?idx=527 |date=20120316165433 }}, 《[[가온 차트]]》, 2011-09-15 작성. 2011-09-15 확인.</ref>
  • 김현정 (1979년) . . . . 1회 일치
         :일시 : 2014년 6월 23일~7월 18일
  • 김형렬 (1959년) . . . . 1회 일치
         |임기 = [[2006년]] [[7월 1일]] ~ [[2010년]] [[6월 30일]]
  • 김형태(정치인) . . . . 1회 일치
         2012년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새누리당]] 후보로 경상북도 포항시 남구-울릉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허나 선거 기간부터 과거 [[제수]]씨 [[성폭행]] 미수 의혹으로 곤욕을 치뤘다. 이후 조카에게 사과하는 녹취록이 유포되어서 큰 망신을 당했다. 동생의 아내와 외도를 한 [[라이언 긱스]]를 빗대 '포항긱스'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리하여 당선 직후 출당되어 [[무소속]]으로 지내다가 [[공직선거법]] [[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37169&yy=2013|위반]]으로 2013년 7월 의원직이 상실되었다.
  • 김홍미 . . . . 1회 일치
         [[1589년]] [[이조]][[좌랑]](吏曹佐郞)으로 임명되었다. 그가 [[이조]][[좌랑]]으로 있을 때 누군가 그가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에 연루되었다고 지목하여, [[사헌부]]의 탄핵을 받고 [[기축옥사]](己丑獄事) 때 파면되었다. 이후 [[상주]]에 내려가 몇년 간 집에서 칩거하였다. 그 뒤 [[동인]]이 [[남인]]과 [[북인]]으로 나뉠 때에는 그는 [[남인]](南人)이 되었다. [[1589년]] 그에 대한 복권 여론이 나타나자 [[사헌부]]가 이를 지적하며 그가 이진길(李震吉)의 집에서 유숙한 일을 들었고, 왕이 이를 받아들였다. 그 뒤 복관되어 [[1592년]](선조 25년) [[4월]] [[임진왜란]]이 시작되자 그해 [[7월]] [[경상좌도]][[도사]]에 임명되고, 이듬해 어머니 창녕조씨의 상을 당해 사직하였다. 그러나 상중으로 내려간 뒤에도 선조는 [[정경세]]를 시켜 그와 그의 형의 안부를 묻고, 그의 학식이 어느 정도인가를 묻기도 했다.
  • 김효기 . . . . 1회 일치
         || '''생년월일''' || [[1986년]] [[7월 3일]] ([age(1986-07-03)]세) ||
  • 김효진 (배우) . . . . 1회 일치
         2011년 12월에는 8살 연상의 배우 [[유지태]]와 5년여의 열애 끝에 웨딩마치를 올렸다. 2014년 7월 5일, 첫 아이인 아들 유수인을 출산했다.<ref>{{뉴스 인용 |제목 = 김효진 유지태 부부 5일 득남 "가슴 벅차다"|url =http://entertain.naver.com/read?oid=421&aid=0000906672|출판사 =뉴스1 |저자 =권수빈 |날짜 = 2014-07-05 |확인날짜 =2017-09-29 }}</ref>
  • 나용찬 . . . . 1회 일치
         1953년 11월 11일 ~
  • 남궁민(배우) . . . . 1회 일치
         또 7월 24일부터 방영한 SBS 월화드라마 '조작'에 주인공 한무영 역으로 출연했다. 정의에 불타는 기레기 역할.(잠만 이상한데?)
  • 남일해 . . . . 1회 일치
         |[[1963년]]||빨간구두 아가씨||<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09&aid=0003004171], 매일경제신문, 2013년 7월 26일, 빨간색을 양지로 끄집어낸 남일해의 ‘빨간 구두 아가씨’ [패션찬가 ③]</ref>
  • 네드 켈리 . . . . 1회 일치
         네드 켈리는 스트링이바크 크리크에서 로니건 순경을 살해한 혐의로 사형 선고를 받았다. 1880년 11월 11일 아침, 멜버른 교도소에서 [[교수형]]이 집행되었다. 그의 유언은 "사는게 다 그런거지,"[* Such is life.]로 알려져 있다.
  • 노영하 . . . . 1회 일치
         * [[1972년]] 제17기 [[국수전]] 준우승(대 윤기현) <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72070600209208021&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72-07-06&officeId=00020&pageNo=8&printNo=15617&publishType=00020 盧永夏四(노영하사)단 國手戰(국수전)서 河燦錫四(하찬석사)단 꺾어 河四(하사)단 重大(중대)한 失着(실착)] 동아일보 8면 1972년 7월 6일 확인</ref>
  • 노재우 . . . . 1회 일치
         ** 형수 : 김옥숙 (金玉淑, 1935년 8월 11일 ~ )
  • 도광록 . . . . 1회 일치
         '''도광록'''([[1988년]] [[1월 11일]] ~ )는 [[대한민국]]의 [[희극 배우]]이다.
  • 동일본대지진 . . . . 1회 일치
         2011년 3월 11일 14시 46분 경 발생한 지진. 매그니튜트 9.0의 대지진으로서, 일본의 [[도호쿠]] 지방 앞바다의 [[태평양]] 해저에서 발생했다. [[쓰나미]]가 일어나서 도호쿠 지방의 해안을 강타하여 엄청난 대재해를 일으켰다.
  • 라늬 . . . . 1회 일치
         *[[2018년]] 7월12일
  • 레스터 길리스 . . . . 1회 일치
         7월 22일, 딜린저 갱을 이끌던 [[존 딜린저]]가 FBI에게 사살된다. 레스터 길리스와 체이스, 그리고 가석방된 헬렌 길리스는 시카고를 떠나 캘리포니아로 향한다. 이들은 캘리포니아로 향하는 도중 속도 위반으로 체포되기도 했지만 벌금 5달러만 내고 풀려난다.
  • 레이디 제인 (가수) . . . . 1회 일치
         '''레이디 제인'''({{llang|en|Lady Jane}}, {{본명|전지혜}}, 全智慧, [[1984년]] [[7월 25일]] ~ )은 [[대한민국]]의 [[가수]], [[방송인]], MC, 라디오 DJ이다.
  • 롤러 슈즈 . . . . 1회 일치
         2016년대 7월경 대한민국 내에서 다시 유행하고 있다는 [[http://m.mt.co.kr/renew/view.html?no=2016071412591029620&type=outlink#imadnews|기사가 나왔다.]]
  • 류원정 . . . . 1회 일치
         '''류원정'''([[1994년]] [[7월 31일]] ~ )은 [[대한민국]]의 [[가수]]이다.
  • 류중일 . . . . 1회 일치
         '''류중일'''(柳仲逸, [[1963년]] [[음력 4월 28일|4월 28일]] - )은 전 [[KBO 리그]] [[삼성 라이온즈]]의 [[내야수]], [[감독]]이자, 현재 [[LG 트윈스]]의 감독이다.
  • 류한수 . . . . 1회 일치
         '''류한수'''(柳漢壽, [[1988년]] [[2월 11일]] ~ )는 [[대한민국]]의 [[레슬링]] 선수이다.
  • 매카시즘은 이제 매카시워즘이다 . . . . 1회 일치
         아이젠하워는 1955년 7월에 있었던 공화당 지도부 모임에서는 "매카시즘은 더 이상 없다."(“It’s no longer McCarthyism,”), "매카시워즘일 뿐이다."(“It’s McCarthywasm.”)라고 발언하기도 했다.
  • 메디나 . . . . 1회 일치
         2016년 7월 4일 저녁(한국 시간 5일 새벽) 한 남성이 메디나에 있는 [[예언자]] [[모스크]] 부근에서 자폭하여, 보안요원 4명이 사망하고 5명이 부상을 입었다. 사우디에서는 같은 날 동부 카디프, 서부 제다 항구도시의 미국 총영사관 부근에서도 자폭 테러가 발생했다. 이는 이슬람 테러 조직 [[이슬람국가]]가 [[라마단]] 기간 동안에 테러를 무슬림들에게 호소한 것에 호응한 것으로 보인다. 사우디 당국의 발표에 따르면, 예언자 사원을 향하던 남성을 수상하게 여긴 치안 당국자가 제지를 했는데 몸에 두르고 있던 폭발물을 터트려서 테러를 일으켰다고 한다.[[http://www.47news.jp/korean/international_diplomacy/2016/07/141460.html (참조)]]
  • 문성주 . . . . 1회 일치
         7월 4일 2군으로 내려갔다. 대신 올라온 선수는 [[안익훈]].
  • 문연주 . . . . 1회 일치
         |[[2004년]] [[11월 11일]]||왜 나만||정규
  • 문지애 . . . . 1회 일치
         * [[tvN]] 《[[막돼먹은 영애씨|막돼먹은 긴급토론]]》 (2014년 7월 24일)
  • 문창진 . . . . 1회 일치
         || 생년월일 || [[1993년]] [[7월 12일]] ([age(1993-07-12)]세) ||
  • 미래소년 코난 . . . . 1회 일치
         서기 2008년 7월, [[핵무기]] 이상의 힘을 지닌 초자력무기가 이용된 대규모 전쟁이 발발해 문명은 멸망하고, 대부분의 대륙이 가라앉았다. 세월이 흐른 이후, 코난은 남겨진 섬에서 할아버지와 함께 살고 있었다. 코난은 라나라는 소녀와 만나게 된다. 라나는 뛰어난 과학자인 라오 박사의 손녀였으며, 박사를 이용하려는 사람들에게 쫓기고 있었다. 라나를 쫓는 자들의 습격이 계기가 되어 코난의 할아버지는 목숨을 잃고, 라나는 끌려가버린다. 코난은 라나를 구하기 위해 모험을 떠나는데….
  • 민룡 . . . . 1회 일치
         '''민룡'''([[1982년]] [[7월 14일]] ~ )은 [[대한민국]]의 전 남자 [[쇼트트랙]] 선수이다.
  • 박경석(1937) . . . . 1회 일치
         1937년 02월 11일 ~
  • 박기혁 . . . . 1회 일치
         [[2000년 한국 프로 야구 신인선수 지명 회의|2000년 신인 드래프트]]에서 [[롯데 자이언츠]]의 2차 2라운드 지명을 받고 입단하였다. [[2004년]]부터 본격적으로 1군에서 활동했다. [[2008년]] 시즌 113경기에 출장해 2할대 타율, 1홈런, 36타점, 47득점, 16도루로 데뷔 이후 최고의 활약을 펼쳤고, [[박계원]] 이후 14년 만에 [[롯데 자이언츠]]에 [[유격수]] 부문 [[한국 프로 야구 골든 글러브 상|골든 글러브 상]]을 안겼다.<ref>[http://osen.freechal.com/news/view.asp?code=G0812110172 박기혁, 데뷔 첫 황금장갑 수상] 《Osen》, 2008년 12월 11일</ref> [[2006년 아시안 게임|도하 아시안 게임]]에서는 동메달에 그쳤고, [[2008년 하계 올림픽 야구|베이징 올림픽]]에도 출전하지 못했다. 2009년에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WBC]]에 참가하여 [[박진만]]을 대신해 주전 [[유격수]]로 활약하였으나 병역 특례를 받지 못했다. [[2010년]] 시범 경기에서 좋은 모습을 보였으나 본격적인 시즌 개막 이후 무릎 부상과 경기력 저하로 [[강정호]]와 [[손시헌]]에게 밀려 야심차게 노렸던 목표인 [[2010년 아시안 게임|광저우 아시안 게임]] 엔트리 진입에 실패하였다. 시즌 종료 후 입대를 1주 앞두고 음주운전으로 물의를 일으켜 결국 [[2010년]]을 쓸쓸히 마무리하고 그 해 [[11월 15일]] [[공익근무요원]]으로 입대하여 [[2012년]] 소집 해제하였다. [[2013년]]에 복귀한 뒤 [[문규현 (야구 선수)|문규현]]을 밀어내고 주전으로 자리잡으려 했으나 부상으로 인해 결국 프로 2년차인 [[신본기]]에 밀리고 말았다.
  • 박명재 . . . . 1회 일치
         ||<bgcolor=#C9151E> '''{{{#FFFFFF 출생일}}}''' ||<(> [[1947년]] [[7월 5일]]([age(1947-07-05)]세) ||
  • 박보생 . . . . 1회 일치
         ||<bgcolor=#808080> '''{{{#FFFFFF 임기}}}''' ||<(> [[2006년]] [[7월 1일]] ~ [[2018년]] [[6월 30일]] ||
  • 박상원(배우) . . . . 1회 일치
          * [[둥지탈출]] ([[tvN]]) ([[2017년]] [[7월 15일]] ~ 2017년 [[9월 2일]])
  • 박술희 . . . . 1회 일치
         '''박술희'''(朴述熙 또는 朴述希, ? ~[[945년]] [[10월 24일]]([[음력 9월 16일]]<ref>『[[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권2, [[고려 혜종|혜종]](惠宗) 2년(945) 9월 16일(기유)</ref>))는 [[신라]](新羅) 말기와 [[후삼국시대]](後三國時代, 사람이며, [[고려]](高麗) 초기의 [[무신]](武神)이다. [[고려 태조|태조]](太祖)의 측근 중의 한 사람이다. [[면천 박씨]](沔川朴氏)의 시조로 [[고려]]高麗) 전기의 무신(武神)이자, 개국공신으로 [[호 (이름)|시호]]는 엄의(嚴毅)이다. 대승(大丞) 득의(得宜)의 아들이다. [[눌지 마립간]](訥祗 麻立干)시대의 문신 [[박제상]](朴堤上)과 [[백결 선생]](百結 先生)의 후손이다.
  • 박옥수 . . . . 1회 일치
         [[대한민국]]의 [[종교인]]. [[개신교]] 계통 [[신흥종교]]인 [[기쁜소식선교회]]를 운영하고 있으며, 산하 단체로 국제청소년연합(IYF)을 설립하여 활동하고 있다. [[음력]] [[1944년]] [[6월 2일]] 출생이며, 출생지는 [[경상북도]] [[구미시]].
  • 박윤경(가수) . . . . 1회 일치
         끊임없이 꾸준히 활동해오다가 지난 [[2006년]] [[7월 21일]]에 [[위암]] 수술을 받았다. 당시 박윤경은 암이 많이 전이돼 4시간에 걸쳐 위의 80%를 절제하는 대수술을 받았다. 이후 약 3개월 간 휴식을 갖게 되었다. [[2008년]] [[3월 3일]]에 8집 앨범을 발표하고 다시 가수로 복직하였다. 8집 타이틀곡〈1,2,3,4〉는 [[추가열]]이 작곡, 작사한 곡으로 한 여성이 일생에 단 한번 만난 사랑에서 느낀 행복을 노래한 내용이다. 최근에는 5년 3개월 만에 9집 앨범《도도한 여자》로 컴백하였다.
  • 박정근 (법조인) . . . . 1회 일치
          1984년 7월 21일자]</ref>
  • 박정민(배우) . . . . 1회 일치
         ||<#4682b4> {{{#white '''출생'''}}} ||<(> [[1987년]] [[3월 24일]][* [[2월 25일]]은 음력생일이다.] ([age(1987-03-24)]세), [[충청북도]] [[충주시]] ||
  • 박정수(정치인) . . . . 1회 일치
         1998년 3월 [[김대중]] 정부의 초대 외교통상부(현 [[외교부]]) 장관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그 해 5월의 기자회견에서 "김대중 대통령은 일본 문화 개방 및 '''천황'''의 방한을 원하신다"라는 발언으로 물의를 빚었다. 그리고 그 해 7월에는 모스크바 주재 한국대사관원의 강제추방 사건에 맞대응해 서울 주재 러시아대사관원인 올레그 아브람킨 참사관을 강제추방한 것이 화근이 되어 5개월 만에 장관직에서 경질된다. 이후 1998년 9월 [[새정치국민회의]] 부총재에 복귀했다.
  • 박제균 (1887년) . . . . 1회 일치
         '''박제균'''(朴濟均, [[1887년]] 음력 4월 ~ ?)은 [[일제 강점기]]의 관료이다.
  • 박철우(배구) . . . . 1회 일치
         || 생년월일 || [[1985년]] [[7월 25일]] ([age(1985-07-25)]세) ||
  • 박홍우 . . . . 1회 일치
         '''박홍우'''(朴洪佑, [[1952년]] [[7월 2일]] ~ )는 [[대한민국]]의 [[법조인]]이다. 2014년부터 2016년 2월까지 [[대전고등법원]] 법원장을 지냈다.
  • 배기철(정치인) . . . . 1회 일치
         ||<bgcolor=#C9151E> '''{{{#FFFFFF 임기}}}''' ||<(> [[2018년]] [[7월 1일]] ~ ||
  • 배대윤 . . . . 1회 일치
         |임기 = [[2002년]] [[7월 1일]] ~ [[2006년]] [[6월 30일]]
  • 배지환 (야구선수) . . . . 1회 일치
         '''배지환'''([[1999년]] [[7월 26일]] ~ )은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이자,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메이저 리그]] [[피츠버그 파이리츠]]의 [[내야수]]이다. 여자친구가 폭행혐의로 고소하여 비판을 얻는 등 논란이 되고 있다.
  • 배천석 . . . . 1회 일치
         2011년 7월, 숭실대를 중퇴하고 일본 [[J리그]] [[비셀 고베]]에 입단하였으나, 리그 3경기, 컵대회 1경기 출장에 그친 뒤, 양 정강이 피로골절로 수술을 받고 9개월간 재활의 시간을 보내야 했다.<ref>{{뉴스 인용 |제목=포항 배천석, “일본에서 시련, 강한 정신력 가져” |url=http://sports.news.naver.com/sports/index.nhn?category=k_league&ctg=news&mod=read&office_id=413&article_id=0000002805|출판사=인터풋볼 |date={{날짜한글화|2013-04-02}} }}</ref><ref>{{뉴스 인용 |제목=포항 배천석 "대학 후배 앞에서 체면 차렸죠" |url=http://sports.news.naver.com/sports/index.nhn?category=k_league&ctg=news&mod=read&office_id=001&article_id=0006251282|출판사=연합뉴스 |date={{날짜한글화|2013-05-09}} }}</ref>
  • 백대현 . . . . 1회 일치
         1994년 입단하였으며, 2010년 7월에 8단으로 승단하였다. 현재 [[한국바둑리그]] [[영남일보]] 소속의 선수이다.
  • 백승민 (야구선수) . . . . 1회 일치
         '''백승민'''(白承珉, [[1990년]] [[7월 9일]] ~ )은 [[KBO 리그]] [[삼성 라이온즈]]의 [[내야수]]이다.
  • 백춘희 . . . . 1회 일치
         * [[2014년]] [[7월 14일]] ~ [[2016년]] [[6월 30일]]<ref>[http://news1.kr/articles/?2706804 백춘희 "대전 공직자들과 함께한 2년 값지다"]</ref> [[대전광역시]] 정무부시장
  • 벌교 백여우 . . . . 1회 일치
         경향신문 1963년 7월 5일 기사에서 볼 수 있다. "어린이 벌남" 제6호에 수록된 것을 인용한 것이다.
  • 변현제 . . . . 1회 일치
         * [[2013년 7월]] SK플래닛 스타크래프트 II 프로리그 12-13 플레이오프 MVP
  • 보쿠걸 . . . . 1회 일치
         '''107화로 완결'''. 단행본은 7월 19일 완결 예정.
  • 북한의 역사왜곡 . . . . 1회 일치
         6.25 전쟁을 '''"북한의 승리"라고 주장'''하면서, 7월 27일을 전승절로 기념하고 있다. 이들은 미군과 한국군이 선제 북침을 하였으나, "김일성의 전략으로 미군이 무릎을 꿇고 정전협정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http://www.rfa.org/korean/weekly_program/kim_chon_ae/seoulpyongyang-08042017101743.html (참조)]]
  • . . . . 1회 일치
         2014년 7월 24일부터 2014년 9월 14일까지 [[엠넷]]에서 방영된 아메리칸 허슬 라이프란 리얼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에서 다른 멤버들과 함께 강제 [[힙합]] 유학을 [[LA]]로 간 적이 있는데, 당시 씨스터 액트2 실제 주인공이기도 한 아이리스 스티븐슨 보컬 선생님으로 만났는데 뷔의 허스키 중저음은 사람들에게 힐링과 안정을 주는 음색이라며 언젠간 사람들 가슴에 큰 울림을 줄 음색이라며 꾸준히 잘 가꾸고 간직하라며 극찬을 하기도 했다.
  • 빈병 . . . . 1회 일치
         [[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6/06/30/0200000000AKR20160630016900004.HTML|연합뉴스 - "빈병 보증금 쉽게 받는다"…7월부터 빈병 재사용 표시제 도입]]
  • 빌리 블랭크스 . . . . 1회 일치
         2009년 6월에 오사카 시내에서 결혼식과 피로연을 열었으며, 7월에 오사카 신사이바시에 트레이닝 스튜디오 빌리 브랭크스 인터내셔널 스튜디오를 개설했다. 2009년 4월에 일본에 [[영주권]]을 신청했음을 밝혔다.
  • 서든어택 2/무기 . . . . 1회 일치
         [[대한민국]]의 [[FPS]] 게임 [[서든어택 2]]의 무기를 소개하는 페이지. 2016년 7월 10일 이후 별다른 갱신이 없을걸로 보인다.
  • 서병조 . . . . 1회 일치
         '''서병조'''(徐丙朝, <small>일본식 이름:</small> 大峯丙朝, [[1882년]] [[7월 28일]] ~ [[1952년]] [[2월 29일]])는 [[일제 강점기]]의 [[대구광역시|대구]] 지역 유지이자 기업인으로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를 지냈다. 본관은 대구이며 본적은 [[경상북도]] [[대구부]] 계산동이다.
  • 서영무 . . . . 1회 일치
         그러나 [[두산 베어스|OB]]의 이사로 임명된 지 한 달도 안 돼 [[1984년]] [[5월 11일]] OB와 삼성의 대구 경기를 앞두고 원정 숙소였던 [[수성관광호텔]]에서 선수들의 방을 정하던 도중 갑자기 [[뇌졸중]]으로 쓰러져 [[경북대학교병원]]에 입원했다. 이후 식물인간이 되었고, 긴 투병 끝에 [[1987년]] [[5월 26일]] 오전 7시 5분, [[서울특별시]] [[성동구]] [[사근동]] 자택에서 사망하였다.
  • 서현진 (방송인) . . . . 1회 일치
         * 《[[MBC 뉴스데스크]]》 (주말): [[2006년]] [[3월 4일]] ~ [[2007년]] [[3월 11일]] 보도 진행
  • 서호진 . . . . 1회 일치
         '''서호진'''(徐昊辰, [[1983년]] [[6월 11일]] ~ )은 [[대한민국]]의 전 [[쇼트 트랙 스피드 스케이팅]] 선수이다. [[경희대학교]] 체육학부에서 스포츠지도학을 전공했다. [[서울시청]]에서 활약한 바 있다.
  • 선풍기 . . . . 1회 일치
         2015년 7월 16일, [[서울시]]에서 [[http://www.newsis.com/ar_detail/view.html?ar_id=NISX20150717_0013797499&cID=10201&pID=10200|선풍기 전동기 과열(추정)으로 화재가 발생했다.]] 이로 900만원 상당의 재산 피해가 발생했다.
  • 성현아 . . . . 1회 일치
         '''성현아'''(成賢娥, 1975년 7월 23일 ~ )는 [[대한민국]]의 [[배우]]이다.
  • 소냐(가수) . . . . 1회 일치
         1999년 7월 뮤지컬 "페임"에 캐스팅되어 뮤지컬 배우 겸업을 시작했고, 뮤지컬에서 평가가 더 좋았는지 현재는 뮤지컬에 주력하고 있다.
  • 소명(가수) . . . . 1회 일치
         '''소명'''(본명 : 소명호, {{한자|蘇明浩}}, [[1958년]] [[12월 11일]] ~ )은 [[대한민국]]의 [[가수]]이다.
  • 손광업 . . . . 1회 일치
         '''손광업'''([[1970년]] [[7월 3일]] ~ )은 [[대한민국]]의 [[배우]]이다. <ref>[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33XXXXX23173 손광업-다음인물정보]</ref>
  • 손병조 . . . . 1회 일치
         |임기 = [[2008년]] [[4월 11일]] ~ [[2010년]] [[6월 18일]]
  • 손형준 (야구선수) . . . . 1회 일치
         '''손형준'''(孫亨埈<ref>한국야구위원회, 2012 가이드북</ref>, [[1989년]] [[7월 1일]] ~ )은 [[KBO 리그]] 전 [[삼성 라이온즈]]의 [[외야수]]이다.
  • 송남헌 . . . . 1회 일치
         '''송남헌'''(宋南憲, [[1914년]] [[4월 11일]]~[[2001년]] [[2월 20일]])은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교육인, 통일운동가, 근현대사 연구가이다.
  • 송상진 . . . . 1회 일치
         * [[1964년]] 7월 소위 1차 [[인민혁명당]] 사건으로 연행, 무혐의 석방.
  • 송정현 . . . . 1회 일치
         [[2008년]] [[10월 11일]] [[우즈베키스탄 축구 국가대표팀|우즈베키스탄]]과의 친선경기에서 [[A매치]]에 데뷔하여, 역대 최고령 [[A매치]] 데뷔 순위 4위에 올랐다.<ref>[http://www.sportsseoul.com/news2/soccer/general/2008/1012/20081012101020300000000_6108091842.html 허정무호 12경기 연속 무패…송정현 역대 최고령 데뷔 4위 ]</ref>
  • 송주훈 . . . . 1회 일치
         미토 홀리호크로 임대된 송주훈은 재활을 거쳐 2016년부터 주전 센터백으로 뛰게 되었으며, 시즌이 개막한 후 올림픽 직전까지 모든 경기 (19경기) 풀 타임을 소화하며 1골을 넣는 등 핵심 자원으로 거듭났고, 2016년 [[J2리그]] 선수들 중 공중볼 점유율 1위 선수로 뽑혀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출국을 앞두고 FC 기후와 가졌던 7월 16일 경기에서 상대 선수와의 경합 도중 새끼발가락 골절상[* 발가락이 완전히 부러져서 수술이 급한 상황이었다고 한다. 송주훈 본인도 올림픽 직전에 당한 부상이라 충격이 상당했다고.]을 입어 다시 재활에 들어가게 되었고 결국 그대로 시즌을 마감했다.
  • 송창현 . . . . 1회 일치
         2018년 9월 11일 전역했다.
  • 송하윤 . . . . 1회 일치
         || [[2018년]] [[6월 25일]] ~ [[2018]] [[7월 30일]] ||<|2> [[tvN]] ||<|2> 풀 뜯어먹는 소리 ||<|2> 고정출연 ||<|2> ||
  • 스틸오션/영국 . . . . 1회 일치
         >알미란테 코치라네(Almirante Cochrane)는 칠레 해군이 영국에게서 구매한 선박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후, 이 함선은 영국왕립해군이 사용하게 되었다. 여러번의 재설계 끝에 항공모함 "이글"(Eagle)로 개장되었다. 1930년대에는 홍콩에 배치되어 해당 지역의 많은 해적을 소탕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후, 지중해로 옮겨가 아드미랄 그라프 슈페(Admiral Graf Spee)를 쫓는 임무를 맡았다. 1940년 7월, 토브룩에서 세척의 이탈리아 구축함과 한척의 잠수함에 의해 함재기가 파괴되었다. 고장으로 타란토 전투에는 참가하지 못했다. 1942년 8월, 몰타로 가는 네번째 수송선단을 호위하던 중 독일 잠수함 U-73에 의해 스페인 마요르카 근처에서 격침되었다.
  • 신동호 (아나운서) . . . . 1회 일치
         * 《[[시선집중|신동호의 시선집중]]》(2013년 7월 8일 ~ 2017년 9월 4일)
  • 신민아 . . . . 1회 일치
          * 2015년 7월 22일 모델 [[김우빈]]과 2개월째 열애중임을 밝혔다. [[http://m.entertain.naver.com/read?oid=108&aid=0002439439&gid=999339&cid=1005053|공식전문]]
  • 신영식(만화가) . . . . 1회 일치
         [[1949년]] [[2월 11일]]에 [[충청남도]] 연기군(현 [[세종특별자치시]])에서 태어나 서라벌예술고등학교[* 현 [[서라벌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라벌예술대학[* 현 [[중앙대학교]] 예술대학.] 서양화과를 다니다 중퇴한 뒤 1971년 소년한국일보에 <승리의 그날>을 시작으로 만화계에 데뷔한 뒤 주로 반공, 전쟁 등을 소재로 한 극화만화를 그려오다 1980년에 소년동아일보(현 어린이동아)를 통해 4쪽짜리 만화 <돌배군>을 장기간 연재하여 큰 [[인기]]를 끌었다.
  • 심학봉 . . . . 1회 일치
         1961년 4월 11일 ~
  • 안종범 . . . . 1회 일치
         '''안종범'''(安鐘範, [[1959년]] [[7월 15일]] ~)은 [[대한민국]]의 정치인이다.
  • 양키 . . . . 1회 일치
         북부 미국인을 뜻하는 양키(Yankee)와의 관계는 애매하지만, 당시 미국인=화려하다 는 이미지 때문에 이러한 표현이 나타난 것으로 추측된다. 1983년 7월 21일 발매된 카몬 타츠오(嘉門達夫)의 양키 오빠의 노래(ヤンキーの兄ちゃんのうた)는 ‘나쁜 남자’를 뜻하고 있었다. 이 노래를 전후하여 전국에 양키라는 단어가 일반적으로 퍼지게 된 것으로 추측된다.
  • 연경흠 . . . . 1회 일치
         7월 16일 [[롯데 자이언츠]]와의 원정경기에서 '''프로야구 통산 2만 호 홈런의 주인공'''이 되었기에, 연경흠 본인에게 있어 본의 아니게(?) 가장 눈부신 해가 되었다.
  • 영양군 . . . . 1회 일치
          * [[박은수(배우)|박은수]] - 탤런트 (7월 32일), (각설탕), (소년, 천국에 가다), (쑥부쟁이), (대장금), (납량특집극 거미),
  • 영창대군 . . . . 1회 일치
         결국 광해군 5년(1613 계축 / 명 만력(萬曆) 41년) 5월 4일(신유)에 영창대군의 외조부인 연흥부원군 김제남이 파직, 6월 1일(무자)에 사사되었다. 영창대군 역시 5월 21일(무인)에 봉작이 박탈되었고, 7월 27일에 영창대군은 강화도에 위리안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 오중기 . . . . 1회 일치
         || '''출생일''' || [[1967년]] [[7월 23일]] ([age(1967-07-23)]세) ||
  • 우건도 . . . . 1회 일치
         3월 7일, 기자회견을 열어 “게시글에 ‘2005년 6월 우 후보가 총무과장으로 근무할 때의 일’이라고 했으나 실제 총무과장 근무기간은 2005년 7월 25일부터 그 해 9월 4일까지였다"며 “폭로 글은 악의적으로 날조된 허위가 분명하다”고 주장했다. 이어 ”게시자가 성추행을 당한 날 모 식당에서 마셨다는 주류도 판매한 적이 없다고 주류 납품 업체가 확인해줬다”고 부연 설명했다. 현재 우 예비후보 관련 미투 폭로 글은 작성자에 의해 민주당 도당 홈페이지에서 모두 삭제된 상태다.[[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hm&sid1=102&oid=469&aid=0000283022|*]]
  • 우동균 . . . . 1회 일치
         |마지막 경기 = [[KBO (야구)|KBO]] / [[2017년]] [[6월 11일]] <br /> [[한밭종합운동장 야구장|대전]] 대 [[한화 이글스|한화]]전
  • 우용득 . . . . 1회 일치
         |임기 = 2001년 7월 ~ 2002년 6월
  • 우찬양 . . . . 1회 일치
          * 2016년 7월 3일, 광주전에서 프로 데뷔이자 K리그 데뷔전을 치뤘다.
  • 우현(배우) . . . . 1회 일치
         하지만 그 후 [[유자식 상팔자|고정 출연 프로]]가 종영되면서 예능 출연 빈도 수가 점점 줄어들더니, 2016년 7월말 이후로는 예능에 출연하지 않는다.
  • 유승민(배우) . . . . 1회 일치
         '''유승민'''([[1974년]] [[7월 7일]] ~ )은 [[대한민국]]의 [[배우]]이다.
  • 유승옥 . . . . 1회 일치
         7월 15일 모 온라인 매체의 '''기승전유승옥'''이라 불리는 기사 시리즈가 화제가 됐다. 인터넷상의 화제에 대해 서술한 후 유승옥의 반응을 덧붙이는 식으로 기사를 무한 생산한 것이다. [[http://me2.do/xzIctqPl|이런 기사가 뜬 이유]] ~~만물의 전문가 유승옥~~ 소속사는 "기자가 물어오면 코멘트를 전달하는 식으로 응대한 적은 있다"며 홍보 목적은 아니라고 해명했다. [[http://m.mt.co.kr/renew/view.html?no=2015071516054343015&ca=society|해명기사]]
  • 유인촌 . . . . 1회 일치
         위에서 말한 욕설 외에 [[막말]] 및 [[반말]], [[망언]] 등으로도 구설수에 올랐다. [[한예종]] 협동과정 서사창작과의 폐지에 반대하는 피켓을 든 학부모에게 [[세뇌]]라는 [[https://youtu.be/3LjZwalkUxY|막말]]을 했으며, [[국립오페라단]] 폐지에 반대하는 단원들의 시위 현장에서 단원들에게 [[https://youtu.be/kU9q6mi24Ps|반말]]했다. 그 외에도 2009년 11월 17일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265521|'대동아전쟁' 발언]], 2011년 7월 22일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005184859|을미사변 '경복궁 담장' 발언]]으로 물의를 빚었다.
  • 유지태 . . . . 1회 일치
         2003년 [[단편 영화]]《자전거 소년》를 통해 [[영화 감독]]으로서 첫발을 내딛었고 그해 부산아시아 단편영화제에서 관객상을 받음으로써 영화 감독으로 재능을 발휘했다. 2005년《장님은 무슨 꿈을 꿀까요?》, 2008년《나도 모르게》, 2009년《초대》의 단편 영화를 발표했고, 네 번째 단편 영화《초대》는 2009년 7월, 제5회 인디판다 국제 단편 영화제와 제8회 제주 영화제에 초청을 받았다.<ref>{{뉴스 인용|url=http://sportsworldi.segye.com/Articles/EntCulture/Article.asp?aid=20090819001036&subctg1=15&subctg2=00|제목=유지태, 네 번째 작품 제주영화제 출품|성=|이름=스포츠월드 황인성 기자|날짜=2009-08-19|출판사=세계일보|확인날짜=2010-04-17}}</ref><ref>{{뉴스 인용|url=http://osen.mt.co.kr/news/view.html?gid=G0907300038http://sportsworldi.segye.com/Articles/EntCulture/Article.asp?aid=20090819001036&subctg1=15&subctg2=00|제목=감독 유지태, 인디판다 국제단편영화제 4연속 초대|성=|이름=OSEN 조경이 기자|날짜=2009-07-30|출판사=스포츠 엔터테인먼트 전문 미디어 OSEN|확인날짜=2010-04-17}}</ref>
  • 육홍균 . . . . 1회 일치
         1900년 10월 1일 ~ 1983년 7월 5일
  • 윤석용 . . . . 1회 일치
         [[2008년]] [[7월 29일]] 국회 민생안정대책특위에서, 민주노동당 당사에 인공기(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국기)가 게양된 모습의 조작사진을 사실 확인 없이 들고 나와 물의를 일으켰다.<ref>{{웹 인용|제목=국회에서 '인공기' 꺼내 든 윤석용..논란에 휘말려|url=http://www.vop.co.kr/A00000217256.html|저자=[[Voiceofpeople]]|확인날짜=2008-08-07}}</ref><ref>{{웹 인용|제목=윤석용 의원 “민노당사에 인공기” 합성사진으로 밝혀 망신|url=http://www.hani.co.kr/arti/politics/assembly/301644.html|저자=[[한겨레]]|확인날짜=2008-08-07}}</ref>
  • 윤진이 . . . . 1회 일치
         '''윤진이'''({{본명|김윤진}}, [[1990년]] [[7월 27일]] ~ )는 [[대한민국]]의 [[배우]]이다.
  • 윤천주 . . . . 1회 일치
         1921년 7월 8일 ~ 2001년 9월 8일
  • 윤철종 . . . . 1회 일치
         2017년 7월 4일 소속사 측의 공식적인 입장에 따르면 전속 계약이 만료되는 시점이었던 6월 말, 멤버 윤철종이 개인적인 건강상의 이유로 탈퇴 의사를 밝혔고 당사자의 의견을 존중하여 이후부턴 권정열의 1인 체제로 10cm가 유지된다고 한다. 이후 윤철종은 19일 소속사와의 연락에서 본인이 대마초를 흡연했던 문제로 인해 권정열과 소속사에 해가 갈 것을 염려하여 급하게 탈퇴를 하게 되었다고 밝혔다.[[http://m.huffpost.com/kr/entry/17520376#cb|링크]] 이후 소속사는 10cm를 권정열 1인 팀으로 변경하여 9월 1일 4집 앨범으로 컴백했다.
  • 윤태동 . . . . 1회 일치
         [[1900년]] 5월 13일 [[충청북도]] [[충주시|충주]]에서 출생하였다. [[경기고등학교|경성제일고보]]를 거쳐 [[1925년]] [[일본]] [[도쿄대학|동경제국대학]] 문학부 철학과를 졸업한 후, [[서울대학교/학부/농업생명과학대학|수원고등농림학교]], [[보성전문학교]], [[중동고등학교|중동학교]] 등에서 강사로, [[경성제국대학]]에서 조수로 근무하였다. [[1934년]] 7월에는 [[경성제대]] 예과 [[교수]]로 임명되어 그해 11월까지 근무하였다. 조선인이 [[경성제국대학]] 교수로 임명된 것은 윤태동이 3번째이며, 전 기간을 통틀어 4명에 불과하다.
  • 이갑성 . . . . 1회 일치
         |임기 = [[1952년]] [[10월 14일]] ~ [[1953년]] [[7월 27일]]
  • 이강덕 . . . . 1회 일치
         ||<bgcolor=#C9151E> '''{{{#FFFFFF 임기}}}''' ||<(> [[2014년]] [[7월]] ~ ||
  • 이기광 (법조인) . . . . 1회 일치
         |임기 =2016년 2월 11일 ~ 2018년 2월 12일
  • 이기백(군인) . . . . 1회 일치
         이후 [[1986년]] [[1월]]부터 [[1987년]] [[7월]]까지 [[국방장관]]을 지냈다. 이때 [[북한]]이 [[금강산댐]]을 건설하여 [[서울특별시]]가 물에 잠길 것이라고 과장하여서 [[평화의 댐]] 사건의 주역 중 한 명이 되었다.
  • 이기택 . . . . 1회 일치
         ||<#6e7edd> '''출생일''' ||<#c5cae8>[[1937년]] [[7월 25일]] ||
  • 이덕건 . . . . 1회 일치
         *결국 1997년 7월 12일부터 10월 5일까지 9시에 방영된 KBS 2TV [[전설의 고향]] 16화 '걸귀'(8월 31일)와 26화 '초야'(10월 5일, 마지막회)로 복귀하였는데 SBS <[[이웃집 여자]]><ref>{{뉴스 인용|url=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hm&sid1=103&oid=001&aid=0004242490|제목=SBS 주말극 야외 오픈세트 공개|저자=서한기|날짜=1997-06-17|출판사=연합뉴스|쪽=|확인날짜=2016-02-03}}</ref>와 경쟁한 바 있다.
  • 이동춘 . . . . 1회 일치
         [[대구광역시]]에서 태어났다. [[1980년]] [[11월 18일]] [[대한민국]]에서 프로 무대에 데뷔했으며, [[1981년]] [[11월 18일]] [[OPBF]] 밴텀급 경기에서 [[오장균]]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다. [[1983년]] [[7월 26일]] 대한민국 밴텀급 챔피언에 올랐으며, [[1992년]] [[6월 6일]] [[일본]] 밴텀급 챔피언에 올랐다.
  • 이명규(국회의원) . . . . 1회 일치
         1956년 1월 10일(음력 1955년 11월 28일)
  • 이병규 (1983년) . . . . 1회 일치
         |첫 출장 = [[KBO (야구)|KBO]] / [[2006년]] [[7월 7일]] <br /> [[서울종합운동장 야구장|잠실]] 대 [[롯데 자이언츠|롯데]]전
  • 이상목 (야구선수) . . . . 1회 일치
         |첫 출장 = [[KBO (야구)|KBO]] / [[1990년]] [[6월 11일]] <br /> [[서울종합운동장 야구장|잠실]] 대 [[LG 트윈스|LG]]전 구원
  • 이상정 (1897년) . . . . 1회 일치
         그는 시인 [[이상화 (시인)|이상화]](李相和), 사학자 [[이상백 (사학자)|이상백]](李相佰), 수렵가 [[이상오]](李相旿)의 형이다. 호적상에 등재된 부인은 2년 연상의 한문이(韓文伊, 1895년 5월 7일 ~ 1941년) 여사인데, 우리나라 여성 [[비행사]] 1세대 가운데 한 사람으로 일컬어지는 [[한국의 독립 운동|독립운동가]] 겸 항공비행사였던 4년 연하의 [[권기옥]](權基玉, 1901년 1월 11일 ~ 1988년 4월 19일) 여사와 [[1928년]], [[내몽골 자치구|중화민국 네이멍구 자치구]] [[후허하오터 시|후허하오터]]에서 다시 결혼하였다.
  • 이상화 (시인) . . . . 1회 일치
         [[권기옥]](權基玉, [[1901년]] [[1월 11일]] ~ [[1988년]] [[4월 19일]], '''이상정'''(李相定)의 부인, 여성 비행사, [[대한독립군]] [[대령]])
  • 이상훈 (1987년) . . . . 1회 일치
         |첫 출장 = [[KBO (야구)|KBO]] / [[2010년]] [[7월 13일]]<br>[[문학야구장|문학]] 대 [[SK 와이번스|SK]]전 대타
  • 이수진(치어리더) . . . . 1회 일치
         2014년 야구 매니지먼트 게임인, [[프로야구매니저]]에서 2주 가량 진행한 '가장 예쁜 한국프로야구 치어리더' 설문조사에서 박기량, 김연정, [[강윤이]]에 이어 '''4위'''에 이름을 올렸다.[* 총 7,682명이 설문에 응했으며, '''1위'''인 박기량은 2,518명(32.78%), '''2위'''인 김연정은 1,925명(25.06%), '''3위'''인 강윤이는 1,075명(13.9%).] 해가 바뀌닌 2015년 [[프로야구매니저]]에서 7월 1일부터 10일까지 진행한 '2015 프로야구 대표 여신 치어리더는?'라는 설문조사에서 박기량[* 2013년, 2014년에 이어 3연패 달성], 김연정에 이어 '''3위'''에 뽑혔다.[* '''1위'''인 박기량은 33.70%, '''2위'''인 김연정은 27.10% 득표][* 참고로, '''4위'''는 [[KIA 타이거즈]]의 엄지, '''5위'''는 [[한화 이글스]]의 임수연, '''6위'''는 [[LG 트윈스]]의 이애수.]
  • 이순재(1935년 10월) . . . . 1회 일치
         그리고 [[대한민국]] 괴수물 <[[용가리#s-1|대괴수 용가리]]>([[심형래]] 괴작이 아니라 판문점에서 솟아난 원조)에서 남자 주인공을 맡았다. 1967년에 만들어진 이 작품은 국내는 물론이고, 해외의 괴수물 매니아들에게도 컬트적인 인기를 끌면서 높게 평가받고 있는 작품이다.[* 해외에서 인기를 끌면서 여러 나라에 각 나라의 더빙판이 수출되기도 했다. 아이러니한것은 [[대한민국]]에는 손상된 판본뿐이고, 오히려 [[미국]] 더빙판이 더 온전하다는 것. 2013년 7월 21일 EBS에서 HD 리마스터링된 [[미국]] 더빙판을 방영했다.]
  • 이숭인 . . . . 1회 일치
         '''이숭인'''(李崇仁, [[1347년]]~[[1392년]] [[9월 10일]]([[음력 8월 23일]]))은 [[고려]] 말의 시인, 대학자이다. 호는 도은(陶隱), 자는 자안(子安), 본관은 성주이며, [[길재]] 대신 [[삼은]]으로 꼽히기도 한다.<ref name="역대"> [http://people.aks.ac.kr/front/srchservice/viewSearchPPL.jsp?pItemId=PPL&type=L&pType=P&pSearchSetId=8514&pTotalSearchCount=1&pPosition=0&pRecordId=00500050004C005F00350043004F0063005F00410031003300340037005F0031005F0030003000300039003900300032&pName=C774C22DC7780028674E5D074EC10029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 </ref> [[포은 정몽주]]의 문하생이었다. 권신 [[이인임]]의 5촌 조카였다.
  • 이승효(탤런트) . . . . 1회 일치
         2017년 10월 8일에 2009년부터 8년간 몸담은 소속사 매니지먼트 구와의 전속계약이 만료됐고, 2018년 1월 11일 [[블루드레곤]]과 전속 계약을 맺었다.
  • 이인민 . . . . 1회 일치
         [[1392년]] 7월 조선 건국 후 아들 이직(李稷)이 개국공신(開國功臣)ㆍ좌명공신이 되어 태조(太祖) 때에 성산부원군(星山府院君)에 추봉(追封)되었으며, 증 추충익대보조공신(推忠翊戴補助功臣)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 겸 경연판이조사 감춘추관사(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兼經筵判吏曹事監春秋館事)에 [[추증]]되었다.
  • 이재황(배우) . . . . 1회 일치
         ||<|2> [[2010년]] || 07월 29일 || [[SBS]] || 정선희의 러브FM || 게스트 || 478회 ||
  • 이정호 (1982년) . . . . 1회 일치
         이후 잠시 모교인 [[대구상원고등학교]] 야구부의 투수코치로 생활을 이어가다가, [[2011년]] 말 독립 야구단 [[고양 원더스]]의 프런트로 입사하였다. 프런트로 꾸준히 활동하던 중 [[2014년]] [[9월 11일]] 구단주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는 KBO에 의해 구단 해체를 선언한 후, 그 날 프런트직에서 물러났다.
  • 이정호 (독립운동가) . . . . 1회 일치
         '''이정호'''([[1913년]] [[3월 1일]] ~ [[1990년]] [[7월 10일]])는 [[조선민족혁명당]] 조직부장과 화남지부장으로 활동한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이다.<ref>[http://www.encyber.com/search_w/ctdetail.php?gs=ws&gd=&cd=&d=&k=&inqr=&indme=&p=1&q=%C0%CC%C1%A4%C8%A3&masterno=783623&contentno=783623 이정호] 엔사이버 두산백과사전</ref>
  • 이종혁 (배우) . . . . 1회 일치
         '''이종혁'''([[1974년]] [[7월 31일]] ~ )은 [[대한민국]]의 [[배우]]이다.
  • 이종화 (1949년) . . . . 1회 일치
         '''이종화'''(李宗和, [[1949년]] [[7월 16일]]~ , [[대구]] [[남구 (대구광역시)|남구]] 봉덕동)은 [[대한민국]]의 전직 공무원으로, [[대구광역시]] [[북구 (대구광역시)|북구]]청장을 역임했다.
  • 이주승(영화배우) . . . . 1회 일치
         ||<#20B2AA> {{{#ffffff '''출생'''}}} ||<(> [[1989년]] [[7월 20일]]([age(1989-07-20)]세), [[전라북도]] [[임실군]] ||
  • 이채영(fromis_9) . . . . 1회 일치
         이채영이 2013년에 [[학교폭력]] 가해자였다는 식으로 주장하는 글이[[http://pann.nate.com/talk/337716607|2017년 6월]]과 [[http://pann.nate.com/talk/339014341|2017년 10월]]에 [[네이트 판|한 커뮤니티]]에 올라간 적이 있다. '''[[아이돌학교]] PD는 2017년 7월에 [[http://hei.hankyung.com/news/app/newsview.php?aid=201707122947H|확인 결과 사실이 아니라고 밝혔지만]] ''' 많은 네티즌들이 커뮤니티에 올라간 글을 사실로 간주하고 [[악플]]을 작성하고 있다.
  • 이철희(1964) . . . . 1회 일치
         [[SBS]]에서 2015년 7월 26일 방송된 [[SBS 스페셜]] - 메르스의 고백편의 한 부분에서 토론 및 토의의 사회자로 출연하였다.
  • 이한응 (1849년) . . . . 1회 일치
         [[1873년]] [[8월 8일]] 훈련주부, 그해 [[10월 10일]] 훈련판관, [[1874년]] [[7월 12일]] 도총경력, [[1875년]] [[1월 21일]] 도총경력, 그해 [[12월 22일]] 무겸 등을 역임했다.
  • 이현우 (가수) . . . . 1회 일치
         ** 2월 11일 [[KBS]] 《[[가요톱텐]]》 1위 (5주 연속) (골든컵)
  • 이호성 (대한제국) . . . . 1회 일치
         [[1864년]](고종 1년) 증광과 진사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 [[음서 제도|음서제]]로 관직에 올라 [[군수]]에 이르렀다. [[1872년]] [[12월]] [[동몽교관]], [[1873년]] [[8월]] 사용, [[1875년]] [[7월]] [[예빈시]]주부와 [[호조]][[좌랑]] 등을 역임했다. 그해 [[12월]] [[세자익위사]]사어, [[1878년]] [[6월]] [[의빈부]]도사 등을 역임하였다. [[1879년]] [[1월]] [[토산]][[군수]](兎山郡守)로 부임하였고, [[1880년]] [[8월]] [[양근]][[군수]](楊根郡守)로 발령되었다. 그해 [[8월]] 상을 당하여 사퇴한 뒤 3년후 다시 [[양근]][[군수]]로 복직되었다.
  • 이호준 (프로게이머) . . . . 1회 일치
         '''이호준'''([[1991년]] [[7월 23일]] ~ )은 [[대한민국]]의 전직 [[스타크래프트]], [[스타크래프트 II]] [[프로게이머]]이다. '''Puma'''라는 아이디를 사용하며, 종족은 [[테란]]이다.
  • 이홍기(군인) . . . . 1회 일치
         [[1953년]] [[8월 25일]][* [[음력]]이다.], [[경상북도|경북]] [[김천시|김천]] 출신으로 [[김천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73년 [[육군사관학교]] 33기로 입교해 1977년에 임관했다. 2012년 [[제3야전군사령관]] 이·취임식에서 이임과 동시에 36년간의 군 생활을 마치고 예편했다.
  • 이홍우(1959) . . . . 1회 일치
         || '''출생일''' ||[[1959년]] [[10월 21일]] ([[음력]], 만 [age(1959-10-21)]세) ||
  • 이희성 (1988년) . . . . 1회 일치
         |첫 출장 = [[KBO (야구)|KBO]] / [[2012년]] [[7월 25일]] <br /> [[잠실야구장|잠실]] 대 [[두산 베어스|두산]]전 구원
  • 장다경 (영화배우) . . . . 1회 일치
         '''채다경'''(본명 : '''채은아''', [[1987년]] [[3월 26일]] ~ )는 2006년4월26일 일어난 [[창경궁]]의 [[문정전]]사건 과 2008년2월10일 2월11일 까지 일어난 숭례문방화사건의 범인이다
  • 장두진 . . . . 1회 일치
         1972년에 입단하였으며, 1997년 7단을 거쳐 2007년 7월에 8단으로 승단하였다. 1975년 제1기 국기전 준우승, 1987년 제12기 기왕전에서 각각 준우승을 차지했으며 1988년 제18기 명인전에서 준우승했다.
  • 장미화 (희극인) . . . . 1회 일치
         '''장미화'''([[1970년]] [[7월 15일]])는 대한민국의 희극인이다.
  • 장발 (화가) . . . . 1회 일치
         * 아버지 : [[장기빈]] ([[1878년]] [[9월 9일]] ~ [[1959년]] [[7월 24일]])
  • 장석조 (판사) . . . . 1회 일치
         |임기 = 2016년 2월 11일 ~ 2018년 2월 12일
  • 장선이 . . . . 1회 일치
         * [[SBS TV]] : 《[[SBS 8 뉴스]]》앵커 (주말, 2011년 3월 26일 ~ 7월 17일)
  • 장성환 . . . . 1회 일치
         |임기 = [[1971년]] [[7월 28일]] ~ [[1971년]] [[11월 24일]]
  • 장소팔 . . . . 1회 일치
         [[경성부]]에서 출생한 그는 [[1942년]]에 연극배우 첫 데뷔로 연예계에 입문했다.<ref>연합뉴스, 2002년 4월23일, 만담가 장소팔씨 별세, [http://entertain.naver.com/read?oid=001&aid=0000158511]</ref> [[1944년]] [[박춘재]]의 문하에서 '재담 수업'을 쌓은 뒤 [[한국 전쟁]] 이후 '한양합주단', '조선창극단'을 통해 만담가로 활동하기 시작했다.<ref>동아일보, 2002년 4월23일, [명복을 빕니다]'만담의 帝王' 장소팔씨,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20&aid=0000125613]</ref> 이후 고춘자와 함께 전국 명승 고적을 두루 돌아다니며 만담으로 묘사, 당시 TV가 없는 이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다. 특히 민요만담이 인기를 끌었다. [[1996년]] 만담보존회를 만들어 [[2001년]] 7월까지 회장을 지냈다.
  • 장시우 (배우) . . . . 1회 일치
         '''장시우'''(본명: 장성찬, [[1983년]] ~ )은 [[대한민국]]의 [[배우]]이다. [[서울특별시|서울]]에서 출생하였다. 현재 소속사는 버터플라이미디어 이다. [[2008년]] 드라마 ‘[[종합병원 2]]’로 데뷔했다. 현재는 [[tvN]]에서 방송중인 [[재밌는 TV 롤러코스터]]에서 활동하고 있다. <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6&oid=003&aid=0003344145 정경호·백종민·장시우, 우리는 롤러코스터 '루저'] NEWSIS 2010년 7월 16일</ref>
  • 장신애 (연극배우) . . . . 1회 일치
         |[[2015년]] [[9월 11일]] ~ [[2016년]] [[2월 27일]]||최고의 사랑||이모, 정복||
  • 장우혁 . . . . 1회 일치
         * [[2001년 12월]] ~ [[2004년 7월]] : 그룹 [[JTL]] 멤버
  • 장준영 (축구선수) . . . . 1회 일치
         |클럽팀 최신 업데이트 날짜=[[2018년]] [[1월 11일]]
  • 장포크 . . . . 1회 일치
         * [[2012년]] [[6월 11일]] Various Artist 《2집 딴지라디오 나꼼수 (나는꼼수다) 공식 OST》
  • 재신 (배우) . . . . 1회 일치
         '''재신''' ([[1989년]] [[2월 11일]] ~ )은 대한민국의 [[배우]]이다
  • 전덕기 . . . . 1회 일치
         |사망일 = 1914년 7월 23일(40세)
  • 전락원 . . . . 1회 일치
         *1970년 7월 월간 동서문학 발행인
  • 전상우 (1953년) . . . . 1회 일치
         '''전상우'''(全湘雨, [[1953년]] [[2월 11일]] ~ , [[서울특별시|서울]])는 [[대한민국]]의 공무원이다.
  • 전상욱 (프로게이머) . . . . 1회 일치
         * [[2010년 7월]] 빅파일 MSL 2010 16강
  • 전순옥 . . . . 1회 일치
         '''전순옥'''([[1953년]] [[6월 15일]]([[음력 5월 5일]]) ~ )은 [[더불어민주당]] 소속의 [[대한민국]]의 [[대한민국 제19대 국회|제19대]] [[대한민국의 국회의원|국회의원]]이다. 대한민국의 노동운동가 [[전태일]]의 여동생이다.
  • 전일수 . . . . 1회 일치
         '''전일수'''(全日洙, [[1968년]] [[7월 2일]] ~ )은 전 [[KBO 리그]] [[태평양 돌핀스]], [[LG 트윈스]]의 투수였다. 현재는 한국야구위원회(KBO)의 심판이다.
  • 정도복 (고려) . . . . 1회 일치
         그러나 다시 유배되는데 태종실록 태종 13년(1413) 7월 12일조에, “사헌부에서 2품 이상으로서 외방(外方)에 있는 자의 죄를 청하는 계청(啓請)에, “2품은 외방에 있을 수 없다는 것이 이미 이루어진 법이 있습니다. 검교(檢校) 한성 윤(漢城尹) 손가흥(孫可興)·박상경(朴尙絅)·박후식(朴厚植)·고도관(高都琯)·윤사혁(尹思奕)·최함(崔咸)·여극해(呂克諧)·정도복(鄭道復)·전이성, 병마사(泥城兵馬使) 정과(鄭過) 등은 항상 외방에 거주하니 심히 미편합니다. 청컨대, 고신(告身)을 거두고 다른 도(道)에 이치(移置)하소서.”라고 비난하였다.
  • 정몽근 . . . . 1회 일치
         '''정몽근'''(鄭夢根, [[1942년]] [[4월 11일]] ~ )은 [[현대백화점그룹]] 회장을 지낸 [[대한민국]]의 [[기업인]]이다.
  • 정무식(정치인) . . . . 1회 일치
         1924년 00월 00일 ~ 1988년 07월 15일
  • 정병오 . . . . 1회 일치
         | 출생일 = [[1950년 7월 29일]]
  • 정병희 . . . . 1회 일치
         [[2002년]] 신인 드래프트에서 [[한화 이글스]]의 2차 2순위 지명을 받아 입단했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001&oid=038&aid=0000085963 한화, 정병희와 입단 계약] 《한국일보》, 2001년 7월 13일</ref> [[2005년]] 시즌 후 [[내야수]] [[김민재 (1973년)|김민재]]의 보상 선수로 이적했다. 이후 입대하여 [[2010년]]에 제대하자마자 [[SK 와이번스]]에서 방출되었다.
  • 정성곤 . . . . 1회 일치
         '''정성곤'''([[1996년]] [[7월 10일]] ~ )은 [[KBO 리그]] [[kt 위즈]]의 [[투수]]이다.
  • 정인선(탤런트) . . . . 1회 일치
          * [[2013년]] [[7월 14일]], [[http://m.ilyo.co.kr/|일요신문]] 인터뷰 내용이다.
  • 정종철 . . . . 1회 일치
         2009년 10월 11일에 방송된 [[MBC]]의 새 개그 프로그램인 [[하땅사]]에 출연하였다. 《나 이런 사람이야》코너에서 '물을 아끼자'라는 주제로 정종철이 [[이순신#이순신과 관련된 것|이순신 동상]] 앞 분수대에서 머리를 감는 모습을 미리 촬영한 동영상이 방송되었다. 이에 시청자들은 "모두가 사용하는 공공장소에서 이러는 건 방송 횡포다" , "최소한의 예의를 지켜라"라며 시청 후 불쾌함을 호소했다.<ref>{{뉴스 인용 |제목 = '하땅사' 개그맨은 웃고, 시청자는 뿔났다? |url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9/10/11/2009101100645.html |출판사 = 조선일보 |저자 = 박현민 기자 |날짜 = 2009-10-11 |확인날짜 = 2009-10-12}}</ref>
  • 정진호(1956) . . . . 1회 일치
         은퇴 후에 태평양 수비코치를 시작으로, 1996년부터 2006년까지 [[현대 유니콘스]] 수석코치를 맡았다. [[김재박]] 현대 감독이 LG로 부임하면서 오랜 기간 현대의 수석코치를 맡았던 정진호도 현대 차기 감독 후보로 거론되었으나, 김재박을 따라 [[LG 트윈스]]로 갔다. LG에서도 수석코치로 있다가 2009년 말 김재박을 이어 [[박종훈(1959)|박종훈]]이 신임 감독이 되면서 정진호도 LG에서 나왔다. 2010년 7월, [[이광은]]을 이어 연세대 야구부 감독이 되었다.
  • 정홍준 . . . . 1회 일치
         |첫 출장 = [[KBO (야구)|KBO]] / [[2006년]] [[6월 11일]]<br />[[대구시민운동장 야구장|대구]] 대 [[현대 유니콘스|현대]]전
  • 정환덕 . . . . 1회 일치
         [[1904년]](광무 8) 음1월 11일 시종원 시종을 면직하고, 전화과 기사(電話課技師)에 제수되었다. 이해 음2월 2일 다시 시종원 시종에 제수되었다가 이해 음6월 25일 비서원승(秘書院丞)에 제수되었다가 이해 음6월 27일 면직하였다.
  • 조대연(1888) . . . . 1회 일치
         1960년 7월부터 같은 해 12월까지 관선 [[충청북도지사]]를 지냈다. 같은 해 12월 치러진 [[1960년 지방선거]]에서 [[민주당(1955년)|민주당]] 후보로 충청북도지사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그러나 1961년 [[5.16 군사정변]]으로 경질되었다.
  • 조성모(가수) . . . . 1회 일치
         || '''출생''' ||<(> [[1977년]] [[3월 11일]]([age(1977-03-11)]세)[* 호적상 생일은 2월 28일.][br][[전라북도]] [[임실군]][* 과거에는 [[전라북도]] [[임실군]].] ||
  • 조진호 (축구인) . . . . 1회 일치
         [[K리그 챌린지]]에서 시작한 2014 시즌 개막전에선 [[수원 FC]]에 대패하였으나 [[3월 30일]] [[고양 Hi FC]]전 4:1 대승을 시작으로 [[4월 27일]] [[부천 FC 1995]]전 까지 총 리그 5연승을 거두었으며, 5월 8일 [[감독 대행]]에서 정식 감독으로 부임하였다. [[6월 21일]] [[대구 FC]]전까지 총 14경기 연속 무패와 더불어 한시즌동안 11경기 연속 홈 무패를 기록하며 구단의 한시즌 홈 최다 연속무패 신기록을 세움<ref> 이 기록은 2016년 [[최문식]] 감독이 한시즌 홈 12경기 무패를 기록하며 깨졌다.</ref>과 동시에 리그의 절대강자로 치고 올라가는 등 상승세를 보이자 [[5월 8일]] 마침내 정식 감독으로 선임되었으며, [[5월 11일]] [[안산 경찰청 축구단]]과의 정식감독으로서의 데뷔전에서 2:0승을 이끌었으며, 5월 이달의 감독에 선정되었다.<ref> [http://osen.mt.co.kr/article/G1109868314/ 대전 돌풍 이끈 조진호, 연맹 선정 5월의 감독] </ref> 이후 시즌 종료까지 꾸준히 리그 1위 자리를 수성하며 대전의 1부 리그 승격을 이끌었으며, K리그 챌린지 최우수감독에 선정되었으며, 구단 역사상 최초로 한시즌에 20승 이상을 거둔 감독이 되었으며, 대전팬들 사이에서 '''갓진호'''라는 별명을 얻었다. <ref> [http://m.sports.naver.com/kfootball/news/read.nhn?oid=139&aid=0002028091/‘갓진호’, 축구특별시 부활 이끈 지휘자] </ref>
  • 조청희 . . . . 1회 일치
         '''조청희'''(趙靑熙, [[1961년]] [[12월 11일]] ~ )는 [[KBO 리그]] [[한화 이글스]]의 트레이닝 코치이다.
  • 조현근 . . . . 1회 일치
         중간계투로 주로 등판하며, [[2005년]]에 [[두산 베어스]]에 입단하여 프로 생활을 시작했고 2홀드를 기록했다. [[2006년]] [[7월 12일]] [[두산 베어스]]에서 [[김덕윤]]<ref>[[2008년]] 시즌 후 방출되었다.</ref> 을 상대로 1:1로 고향 팀 [[삼성 라이온즈]]에 트레이드되었고 [[2007년]]에 첫 승을 기록했다.
  • 주서은 . . . . 1회 일치
         '''주서은'''([[1987년]] [[11월 11일]] ~ )은 [[대한민국]]의 [[배우]]이다.
  • 주현미 . . . . 1회 일치
         주현미(周炫美 : 중국어 발음은 저우쉬안메이)는 [[1961년]] [[11월 5일]] 생 ([age(1961-11-05)]세) [* 음력 [[9월 27일]].]. 대한민국의 [[트로트]] [[가수]]다.
  • 차금봉 . . . . 1회 일치
         [[1927년]] 비타협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들이 연대하여 결성한 [[신간회]] 단체가 결성되자, [[1928년]]에는 신간회(新幹會) 경서(京西)지회 설립을 주도하여 간사를 맡았으며, 한편으로는 [[조선공산당]](朝鮮共産黨) 책임비서 등으로 활동했다. 그는 3·1운동 기념투쟁을 전개하기 위해 조선공산당 일본총국에 지시하여 선전전단 20만장을 도쿄의 동성사에서 인쇄했는데, 우송 도중 서울우편국에서 발각되고 말았다. 1928년 7월 제4차 조선공산당이 발각되는 상황에서 일본으로 건너가 피신했으나 도쿄에서 체포되었다. 국내로 압송당한 뒤 모진 고문에도 굴하지 않고 묵비권을 행사하다가 1929년 3월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던 중 옥사했다.
  • 차영철 . . . . 1회 일치
         '''차영철'''(車榮澈, [[1959년]] [[7월 28일]] ~ )은 [[대한민국]]의 [[하계 올림픽|올림픽]] [[국제식 사격|사격]] 은메달리스트이다.
  • 차재욱 . . . . 1회 일치
         2011년 7월, 부친상을 당한 이후 8월 말에 사업을 물려받는다며 코치직을 그만두고, 영등포구에서 오리고깃집을 운영하고 있다.
  • 천제훈 . . . . 1회 일치
         '''천제훈'''(千制訓, [[1985년]] [[7월 13일]] ~ )은 [[대한민국]]의 [[축구]] 선수로서 포지션은 [[미드필더]]이다. 현재 [[내셔널리그 (대한민국)|내셔널리그]]의 [[목포시청 축구단|목포시청]] 소속으로 뛰고 있다. 정규리그에서는 골을 기록하지 못했으나 2006년 [[FC 서울]] [[리그컵 2006|컵대회]] 우승을 확정짓는 동점골을 기록하였다.
  • 천해성 . . . . 1회 일치
         2016년 7월 행시 후배인 김형석 차관이 부임하자 퇴임한 뒤 통일부 산하 공공기관인 [[남북교류협력지원협회]] 회장에 선임됐다.
  • 최계훈 . . . . 1회 일치
         [[2005년]] [[10월 11일]] [[LG 트윈스]]의 투수코치로 영입됐다.<ref>{{뉴스 인용 |저자=|제목=LG, 최계훈 코치 영입|url=http://sports.news.naver.com/kbo/news/read.nhn?oid=001&aid=0001120091 |뉴스=연합뉴스|출판사= |위치= |날짜= 2005-10-11 |확인날짜= 2016-06-12}}</ref>
  • 최단비 . . . . 1회 일치
         '''최단비'''([[1978년]] [[7월 29일]] ~ )는 [[대한민국]]의 [[변호사]]이다.
  • 최동 . . . . 1회 일치
         '''최동'''(崔棟, <small>일본식 이름: </small>山佳棟, [[1896년]] [[2월 16일]] ~ [[1973년]] [[7월 30일]]<ref>{{뉴스 인용
  • 최동희 . . . . 1회 일치
         아들인 최동희를 최제우의 후계자로 선포하고 전국적으로 잔치를 열었다 [[서울]] [[종로 (서울)|종로]] 출생이며 [[3.1 운동]] 후 [[중국]] [[상하이]]로 망명해 독립 운동을 하다가 [[1922년]] 7월 [[천도교]] 중심인 [[고려혁명위원회]]를 조직해 부위원장 겸 외교부장으로 활동하다가 [[김광희]], [[강도희]]와 함께 [[러시아]] [[연해주]]로 건너갔다.
  • 최두호 . . . . 1회 일치
         | 2016년 7월 8일
  • 최민환 . . . . 1회 일치
         '''최민환'''([[1992년]] [[11월 11일]] ~ )은 [[대한민국]]의 드러머, 배우이다. 현재 밴드 [[FT아일랜드]]에서 드럼을 맡고 있다.
  • 최서일 . . . . 1회 일치
         '''최서일'''(崔瑞日, [[1906년]] [[9월 27일]] ~ [[1970년]] [[7월 24일]], [[서울특별시|서울]])은 대한민국의 공직자이자 국회의원이다. 본관은 [[통천 최씨|통천(通川)]]이다.
  • 최성민 (야구선수) . . . . 1회 일치
         '''최성민'''(崔成玟, [[1990년]] [[7월 31일]] ~ )은 전 [[KBO 리그]] [[LG 트윈스]]의 [[외야수]]이다.
  • 최성조 . . . . 1회 일치
         '''최성조'''([[1979년]] [[3월 23일]] ([[음력 2월 25일]]) ~ )는 스포츠 트레이너이. '''간코치''', '''간고등어 코치'''로도 불린다.
  • 최성훈 (야구선수) . . . . 1회 일치
         '''최성훈'''(崔成勳, [[1989년]] [[10월 11일]] ~ )은 [[KBO 리그]] [[LG 트윈스]]의 [[투수]]이다.
  • 최승민 (1996년) . . . . 1회 일치
         '''최승민'''(崔承民, [[1996년]] [[7월 1일]] ~ )은 [[KBO 리그]] [[NC 다이노스]]의 [[내야수]]이다.
  • 최여진(탤런트) . . . . 1회 일치
         ||<#FFB6C1> '''출생''' ||<(><#FBEFFB> [[1983년]] [[7월 27일]]([age(1983-07-27)]세), [[대구광역시]] [[서구(대구)|서구]] ||
  • 최운정 . . . . 1회 일치
         2015년 7월 19일 [[LPGA 투어]] 마라톤 클래식에서 156전 157기만에 우승을 차지했다.<ref>[http://sports.news.naver.com/sports/index.nhn?category=golf&ctg=news&mod=read&office_id=081&article_id=0002582231 최운정 LPGA 투어 마라톤 클래식 우승, 156전 157기]</ref>
  • 최원태 . . . . 1회 일치
         [[2016년]] [[5월 27일]] 선발 투수 [[양훈 (야구 선수)|양훈]]이 다실점을 한 뒤 두번째 투수로 구원 등판하며 데뷔 첫 경기를 치렀고, 경기에서 3.1이닝 무실점을 기록했다. [[2016년]] [[6월 14일]] [[롯데 자이언츠|롯데]]전에서 부진한 성적을 보였던 [[양훈 (야구 선수)|양훈]]의 공백을 메꾸는데 [[금민철]]이 실패하여 빈 자리를 메꿀 두 번째 선발 투수로서 첫 등판을 가졌다. 이 경기에서 {{분수|4|2|3}}이닝 동안 5실점을 기록하였다. [[2016년]] [[7월 1일]] [[KIA 타이거즈|KIA]]전에서 선발로 등판하여 타선의 지원에 힙입어 {{분수|5|2|3}}이닝 2실점으로 데뷔 이후 첫 승리 투수가 되었다.<ref>[http://sports.khan.co.kr/sports/sk_index.html?cat=view&art_id=201607012208003&sec_id=510201&pt=nv ‘첫승’ 넥센 최원태 “초심 잃지 않겠다] - 스포츠경향 </ref> 2017 시즌부터는 선발진에 합류하였는데, 지난 시즌에 비해 등판하는 경기에서 많은 이닝을 소화하며 불펜의 부담을 덜어주고 있다. [[2017년]] [[4월 9일]] [[두산 베어스|두산]]전에서 1군 경기 첫 퀄리티스타트 플러스를 기록하며 승리 투수가 되었다.<ref>[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7/04/09/0200000000AKR20170409045000007.HTML?input=1195m '7이닝 2실점' 넥센 최원태 "데뷔 후 가장 만족한 투구"] -연합뉴스</ref> [[2017년]] [[4월 27일]] [[두산 베어스|두산]]전에서 개인 최다 이닝인 8이닝을 소화하며 앞으로의 발전 가능성을 보여주면서 승리 투수가 되었다.<ref>[http://sports.mk.co.kr/view.php?&year=2017&no=287720 ‘시즌 3승’ 최원태, 값졌던 최다 이닝-투구수 경신] -MK스포츠</ref> [[2017년]] [[8월 13일]] [[한화 이글스|한화]]전에서 7이닝 1실점으로 승리 투수가 되며 데뷔 첫 두 자릿수 승리를 달성하였다.<ref>[http://osen.mt.co.kr/article/G1110709388 ‘7이닝 1실점’ 최원태, 생애 첫 10승 요건] -OSEN</ref>
  • 최윤동 . . . . 1회 일치
         '''최윤동'''(崔允東, [[1897년]] [[7월 3일]] [[대구광역시|대구]] - [[1968년]] [[5월]])은 대한민국의 국회의원이다.
  • 최인영 (야구선수) . . . . 1회 일치
         '''최인영'''(崔仁永<ref>한국야구위원회, 2012 가이드북</ref>, [[1989년]] [[7월 29일]] ~ )은 [[KBO 리그]] [[LG 트윈스]]의 선수이다.
  • 최재만 . . . . 1회 일치
         최재만(崔載晩, [[1988년]] [[5월 19일]] ~ )은 [[대한민국]]의 [[가수]]이다. [[2009년]] 7월 2일 [[대한민국]]의 [[음악 그룹]] [[어반 자카파]]의 EP 앨범 '커피를 마시고'로 데뷔하여 [[2010년]] 3월까지 [[어반 자카파]]의 멤버로 활동하였고, [[2014년]]과 [[2015년]]에 [[대한민국]]의 [[음악 그룹]] [[The Nucleus]]에서 활동하였다. [[2017년]] 4월 25일에 솔로로 데뷔하였다.
  • 최재연 . . . . 1회 일치
         '''최재연'''(崔在延, [[1974년]] [[7월 29일]] ~ ,[[서울특별시]])은 [[대한민국]]의 전직 경기도의원이다.
  • 최재환(배우) . . . . 1회 일치
         || '''출생''' ||[[1983년]] [[7월 15일]], [[전라북도]] [[고창군]] 상하면 (상하로)||
  • 최지우(영화배우) . . . . 1회 일치
         ||<bgcolor=#D76181> {{{#FFFFFF '''출생'''}}} ||<(> [[1975년]] [[6월 11일]] ([age(1975-06-11)]세), [[전라북도]] [[완주군]] ||
  • 최진순 . . . . 1회 일치
         최진순은 [[1990년]]대 중반 PC통신 천리안에서 정기간행물을 표방한 [[보테저널]]을 발행하며 김어준 딴지일보 총수 등과 1세대 PC통신 논객 대열에 올랐다. [[1999년]] 7월 인터넷 최초의 독립 일간지인 <온라인 뉴스> '뉴스24' 창간을 주도했다. 여기서 최초의 유급기자를 둔 웹진 편집장으로 활동했다.
  • 최창홍 . . . . 1회 일치
         [[1945년]] [[5월 11일]] [[충청북도]] 참여관 겸 광공부장으로 임명되었으며 1945년 8월 광복 때까지 고등관 3등과 정6위에 서위되었다. [[친일파 708인 명단]]의 경시 부문, 도 참여관 부문, 조선총독부 사무관 부문,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자 명단]]의 경찰 부문, 관료 부문, [[대한민국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 포함되었다.
  • 최채흥 . . . . 1회 일치
         이후 부상 때문에 2군에서도 7월 중순부터 8월 중순까지 1달 가량을 결장했고 이후로도 띄엄띄엄 등판하면서 사실상 그대로 시즌 아웃되는가 싶었는데, [[윤성환]]이 부상으로 이탈하면서 9월 25일 한화전 선발로 내정됐다. 그리고 '''7이닝''' 5피안타 1피홈런[* vs이성열] 2볼넷 5탈삼진 '''1실점'''으로 호투하면서 데뷔 첫 [[퀄리티 스타트]]와 함께 시즌 2승을 기록하였다.
  • 최태원 (야구인) . . . . 1회 일치
         [[1996년]] [[쌍방울 레이더스]]는 [[김성근 (야구인)|김성근]]을 감독으로 영입하면서 6년 만의 [[플레이오프]] 진출을 위한 대대적인 선수단 개편에 들어갔고, 그는 이 때부터 붙박이 [[2루수]]로 활약하였다. 이와 함께 그는 [[1995년]] [[4월 16일]] [[해태 타이거즈|해태]]와의 시즌 2차전에 대타로 출장한 이후, [[2002년]]까지 기록적인 1014경기 연속 출장 기록을 쌓아 갔고, 이것이 팀의 2년 연속 플레이오프 진출과 맞물리면서 [[1997년]] [[12월 11일]] [[2루수]] 부문 [[한국 프로 야구 골든 글러브 상|골든 글러브]]를 수상했다. 그는 연속 출장 기록을 쌓아 가면서 '철인'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 최희령 . . . . 1회 일치
         '''최희령'''([[1993년]] [[7월 13일]] ~ )은 대한민국의 개그우먼이다.
  • 칼리파 하프타르 . . . . 1회 일치
         2012년 7월, 국민투표(유권자 중 61.58%, 1,764,840명 투표)를 통하여 주로 [[터키]]와 [[카타르]]의 후원을 받고 이슬람주의자들이 주도하는 일반 국민회의(the General National Congress)가 성립하여 리비아를 통치하게 되었다.
  • 크림 전쟁 . . . . 1회 일치
         1853년 7월, 러시아는 오스만 영토였던 [[몰다비아]]와 [[루마니아|왈라키아]]로 군사를 보냈다. 이에 오스만은 러시아에 선전포고했다.
  • 타쿠마 마모루 . . . . 1회 일치
         1984년 11월, 부동산회사 업무 중 관리하던 오사카 시내의 아파트에, 수금을 빌미로 하여 여성의 집에 들어가서 폭행하고 [[강간]]을 저질렀다. 체포를 당하지 않으려고 [[정신병원]]에 입원하고, "환청이 들린다."고 호소하여 [[정신분열병]] 진단을 받는다. 하지만 오사카 지검에서는 성격 이상이 있으나 이성적인 판단 능력이 있다고 진단하여 기소하였다. 그리고 1986년 7월 31일, 오사카 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으로 실형 판결을 받고 나라 소년 교도소에 들어간다. 1989년 8월에 교도소를 나왔다.
  • 태의경 . . . . 1회 일치
         '''태의경'''(太義卿, [[1966년]] [[7월 20일]] ~ )은 [[한국방송공사]] 아나운서실에 속해 있는 [[아나운서]]이다. 2014년 [[서울대학교]] 대학원 협동과정 과학사 및 과학철학 전공을 수료하였다.
  • 테헤페로 . . . . 1회 일치
          * 2009년 7월, 히카사가 블로그에서 처음으로 사용.
  • 트로피코 4 . . . . 1회 일치
          * [[http://store.steampowered.com/app/205638/|Voodoo DLC]] - 2013년 7월 26일 발매
  • 티나 (1980년) . . . . 1회 일치
         티나는 해외 팬이 많다. 그녀는 21살때 미국으로 건너가 세계 각국의 다양한 음악과 춤 접하면서 성장했었다. 2004년 한국에서 "설레임"이라는 앨범을 발매하였으나, 이와 관련하여 일절 홍보활동을 하지 않고 한달 만에 뉴욕으로 돌아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음원 순위는24위에 올랐었다. 미국에서 생활하면서도 꾸준한 음악활동을 하였고, 그녀의 음악적으로 묘한 매력과 놀라운 춤 실력을 인정받아 미국에서도 러브 콜을 여러 번 제의 받았었다. 리키마틴, 켈리클락슨의 프로듀서인 Suren과 함께 2008 C U 2nite 타이틀"Catch me” 앨범을 미국에서 제작 하였고 ,한국과 미국에서 동시에 발표했었다. C U 2nite 앨범은 해외에 더 많이 알려져 있으며, 이 노래 역시 활동을 하지 않았었다. 그러는 도중 티나는 EDM 전설이며 보컬 겸 그래미수상 경험이 있는 유명 프로듀서 Kevin Irving에게서 오디션 제안을 받았고, 케빈은 미국의 유명한 팝 가수인 Dr Dre, Beyonce, 50cent. Pink, Janet Jackson과 같은 수많은 뮤지션과 작업을 해왔었다. 케빈 프 로듀서는 티나의 재능을 보고 영어 앨범을 제작 했고, 대표 곡” Come Mr. DJ”를 작업했다. 케빈은 티나에게 마돈나한테 느낄 수 있는 재능을 가지고 있는 가수라며 극찬하였다. 그녀는 그 동안의 경험을 통해 많은 깨달음을 얻고, 나의 조국인 대한민국에서 노래를 하고 싶다면 2014년 귀국했고 트로트 장르로 변경 2016년 7월20일 콩 앨범 발표하고 현재 활동 중이다.
  • 포스탈 리덕스 . . . . 1회 일치
          >2017년 17월 17일
  • 프라이머리 (음악가) . . . . 1회 일치
         2013년에는 [[MBC]]의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인 [[무한도전]]에 출연하여, 프로그램의 고정 출연자인 [[박명수]]와 호흡을 맞춘 바 있었으나 [[카로 에메랄드]]의 곡들을 짜깁기했다는 사실이 탄로 나고 말았고 표절 작곡가라는 불명예를 남겼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6&oid=396&aid=0000138610 "프라이머리 표절 논란에 원곡자 화났다…"신용을 지켜라" 트위터에 경고", 스포츠월드, 2013-11-07]</ref> 설상가상으로 [[박지윤 (가수)|박지윤]]의 〈미스터리〉도 표절로 확인되면서 프라이머리와 아메바컬쳐는 이미지 면에서 적잖은 타격을 입게 되었다. 2년 뒤인 [[2015년]]에는 록 밴드 [[혁오]]의 오혁과 공동 작업한 싱글 앨범인 ''LUCKY YOU''를 발표하였고,<ref>[http://entertain.naver.com/read?oid=109&aid=0003024748 “프라이머리, 오늘(24일) 컴백…싱글앨범 '럭키 유' 발매”, OSEN, 2015년 3월 24일.]</ref>이어 곧바로 또 다른 미니음반인 ''2-1''과 ''2-2'',''2-3''을 발표하였으며,<ref>[http://entertain.naver.com/read?oid=312&aid=0000086316 “프라이머리, 9일 새 싱글 ‘2-1’ 공개..BSK(a.k.a. 김범수), 개코 참여”, 텐아시아, 2015년 4월 9일.]</ref><ref>[http://entertain.naver.com/read?oid=312&aid=0000099663 “프라이머리, 5일 정오 새 싱글 '2-2' 공개..빈지노와 꿀조합”, 텐아시아, 2015년 6월 5일.]</ref><ref>[http://entertain.naver.com/read?oid=109&aid=0003120270 “프라이머리, 새 앨범 오늘(24일) 공개..초아·팔로알토·아이언 참여”, OSEN, 2015년 7월 24일.]</ref>8월에는 3년만에 정규 앨범 ''2''를 발표하였다.<ref>[http://entertain.naver.com/read?oid=108&aid=0002442842 “프라이머리, 3년만 정규 앨범 '2(이)' 12일 발매”, 스타뉴스, 2015년 8월 3일.]</ref>
  • 피우진 . . . . 1회 일치
         이를 통해 피우진이 얼마나 대쪽 같은 인물인지를 깨닫게 되었기에 더 이상 비슷한 성격의 요구가 하달되는 일은 없게 되었으나, 높으신 분들에게 미운 털이 단단히 박힌 피우진은 결국 중령에서 군 생활을 접게 된다. ~~안 돼~~ 한때는 이것이 루머라는 소문까지 돌았다. 하지만 실제 실탄 지급을 한 것에 대해 징계를 받은 기록이 남아 있다고 한다. ~~오호라, 그럼 기록에 남은 그 사람이 관련자로구나!~~이때가 1988년 무렵이고, 피우진은 [[제1야전군사령부]]에서 일하고 있었다. 1987년 6월부터 89년 4월까지가 [[정호근(군인)|정호근]](後 합참의장 역임)이 1군사령관이고 다음이 [[이진삼]]이다. 또한 88년 7월 소령으로 진급했기 때문에, 88년 대위 시절 사령관은 [[정호근(군인)|정호근]]으로 추측된다.
  • 하수빈 . . . . 1회 일치
         * 3집 《'''The Persistence Of Memory》는 ([[2010년]] [[11월 11일]] 발매)
  • 하이큐!! . . . . 1회 일치
         2013년 골든 위크에 신쥬쿠 역사에 대형 브로마이드 전시를 하기도 했으며, 2013년 [[7월 22일]], 7권 발매 및 누계 250만부 판매 기념으로 슈에이샤 본사 1층 전시회실에서 하이큐!! 전을 개최, 예상 외의 호평에 9월 20일까지 연장되기도 했으며 2013년 10월에는 하이큐!! 점프샵 페어가 열렸다.
  • 한가인 . . . . 1회 일치
         '''한가인'''([[1982년]] [[2월 25일]] ([[음력 2월 2일]]) ~ )은 [[대한민국]]의 [[가수]]이다.
  • 한국영 . . . . 1회 일치
         [[2016년]] [[카타르 SC]]가 2부리그로 떨어지자 [[알가라파 SC]]로 이적하였다. [[2017년]] [[7월 5일]] 군문제로 인해 [[K리그1]] [[강원 FC]]로 이적하였다.
  • 한국진 . . . . 1회 일치
         '''한국진'''([[1979년]] [[7월 25일]] ~ )은 [[대한민국]]의 [[배우]]이다. <ref> [http://movie.daum.net/movieperson/Biography.do?personId=229392#filmography&t__nil_main_workList=more 한국진-다음인물정보]</ref>
  • 한동욱 . . . . 1회 일치
         * [[2006년]] [[7월 1일]] vs [[박종수]] (디아이)
  • 한상훈 (야구선수) . . . . 1회 일치
         |첫 출장 = [[KBO (야구)|KBO]] / [[2003년]] [[4월 11일]] <br /> [[대구시민운동장 야구장|대구]] 대 [[삼성 라이온즈|삼성]]전
  • 한수진 (1969년) . . . . 1회 일치
         '''한수진'''([[1969년]] [[7월 24일]] ~ )은 [[대한민국]]의 방송사 [[SBS]] 소속의 선임기자이다.
  • 한승조 . . . . 1회 일치
         '''한승조'''(韓昇助, [[1930년]] [[1월 13일]] ~ [[2017년]] [[7월 25일]])는 [[대한민국]]의 교육자, 정치학자, 철학자, 언론인, 보수주의 운동가이다. [[미국]] [[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귀국 후 [[고려대학교]] 명예교수 등을 역임했다.
  • 한운사 . . . . 1회 일치
         [[1923년]] [[1월 15일]] ~ [[2009년]] [[8월 11일]]
  • 한이서 . . . . 1회 일치
         '''한이서'''([[1985년]] [[7월 19일]] ~ )는 [[대한민국]]의 [[배우]]이다. <ref>[http://people.search.naver.com/search.naver?where=nexearch&query=%ED%95%9C%EC%9D%B4%EC%84%9C&sm=tab_etc&ie=utf8&key=PeopleService&os=2502691 한이서-네이버인물정보]</ref>
  • 한지우(배우) . . . . 1회 일치
         [[2017년]] [[11월 11일]], 3살 연상의 대기업 연구원과 결혼하였다.[[http://osen.mt.co.kr/article/G1110755388|#]]
  • 한혁수 . . . . 1회 일치
         '''한혁수'''(韓赫洙<ref>한국야구위원회, 2012 가이드북</ref>[[1970년]] [[10월 11일]] ~ )는 전 [[KBO 리그]] [[쌍방울 레이더스]]의 [[내야수]]이고, 현 [[KBO 리그]] [[LG 트윈스]]의 1군 외야수비 코치 겸 1루 코치이다.
  • 한현규 . . . . 1회 일치
         * 2004년 7월 30일 ~ 2005년 11월 10일 경기도개발연구원 원장
  • 함석원 . . . . 1회 일치
         '''함석원'''(咸錫原, [[1975년]] [[7월 17일]] ~)은 전 [[KBO 리그]] [[OB 베어스]], [[두산베어스]]의 외야수였다.
  • 함신영 . . . . 1회 일치
         '''함신영'''([[1975년]] [[5월 11일]] ~)은 [[대한민국]]의 [[배우]]이다. <ref>[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33XXXXX37479 함신영-다음인물정보]</ref> 1998년 MBC 27기 공채 탤런트로 선발되었다.
  • 함준호 (교수) . . . . 1회 일치
         '''함준호'''(咸駿浩, 1964년 2월 11일 ~ )은 [[연세대학교]] 국제학대학원 교수이다. [[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을 지냈다.<ref>{{뉴스 인용 |제목=한은 떠나는 함준호 금통위원 "더 편하게 시장과 소통할 것" |url=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1&oid=015&aid=0003936133 |날짜=2018-05-09 |뉴스=한국경제}}</ref> 본관은 [[양근 함씨|양근]]이다.<ref>{{웹 인용 |제목=함준호 인물정보 |url=http://focus.chosun.com/people/people01.jsp?id=54450 |웹사이트=조선일보}}</ref>
  • 함중아 . . . . 1회 일치
         *1996년 07월 함중아 《술전쟁 돈전쟁 / 숙향아》
  • 해쉬스완 . . . . 1회 일치
         2017년에 《[[Show Me The Money 6]]》에 출연하였다. 음원 미션 곡인 요즘것들에서 모습을 보여줬고, 8월 11일 [[킬라그램]]과의 마이크 선택에서 탈락하였다. 해쉬스완이 탈락으로 인한 미공개 곡은 올 하반기 해쉬스완의 앨범 수록될 예정이다. <ref>{{뉴스 인용|url=http://news1.kr/articles/?3072919|제목=‘쇼미6’ 불꽃 튀는 대결, 네스·에이솔·해쉬스완·라이노 탈락 [종합]|날짜=2017-08-12|뉴스=뉴스1|언어=ko|확인날짜=2017-08-12}}</ref>
  • 허근욱 . . . . 1회 일치
         * 《싸늘한 달빛의 눈덮인 고원》, 월간문학사, 《월간문학 2003년 7월호》 (월간문학사, 2003)
  • 허남성 . . . . 1회 일치
         '''허남성'''([[1975년]] [[7월 8일]] ~)은 [[대한민국]]의 [[배우]]이다.<ref>[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33XXXX543329 허남성-다음인물정보]</ref>
  • 허용석 . . . . 1회 일치
         '''허용석'''(許龍錫, [[1956년]] [[7월 9일]] ~ )은 대한민국의 제22대 [[대한민국의 관세청장|관세청장]]을 역임한 공무원이다. 본관은 [[하양 허씨|하양]]이며, [[서울특별시|서울]]에서 태어났다.
  • 현민 . . . . 1회 일치
         ||'''출생'''||[[1991년]] [[7월 22일]] [[경상북도]] [[포항시]]||
  • 현소환 . . . . 1회 일치
         '''현소환'''(玄昭煥, [[1937년]] [[8월 1일]] ~ [[2018년]] [[7월 28일]])은 [[연합뉴스|연합통신]] 사장을 역임한 언론인이다. 현재는 방송콘텐츠진흥재단 이사장이다. 본관은 [[연주 현씨|연주]]이며, [[대구광역시|대구]] 출신이다.
  • 혜지 . . . . 1회 일치
         '''혜지'''([[1990년]] [[7월 21일]] ~ )는 [[대한민국]]의 [[여성]][[모델]]이다.
  • 홍기(영부인) . . . . 1회 일치
         [[1916년]] [[3월 3일]] ~ [[2004년]] [[7월 20일]] (88세 총 32282일)
  • 홍병선 . . . . 1회 일치
         '''홍병선'''(洪秉璇, [[1888년]] [[11월 6일]] ~ [[1967년]] [[7월 19일]])은 [[한국]]의 [[감리교]] [[목사]]이다. 호는 목양(牧羊). 사학자 [[홍이섭]]의 아버지이다.
  • 홍서범 . . . . 1회 일치
         * [[1994년]] [[7월 10일]] [[SBS]] 《전격 테크노 퀴즈》
  • 홍연아 . . . . 1회 일치
         '''홍연아'''(洪姸娥, [[1972년]] [[7월 5일]] ~ ,[[서울특별시]])은 [[대한민국]]의 전직 경기도의원, 전직 경기도 안산시의원이다.
  • 홍정욱 . . . . 1회 일치
         3년 연속 (2008, 2009, 2010) NGO 국감모니터단이 평가하는 국정감사 우수의원으로 선정되었으며, 2011년 6월에 법률소비자연맹에서 주최하는 ‘제18대 국회 의정활동 종합평가회’ 에서 헌정우수상을 수상하였다. 2009년 바른사회시민회의 '바른사회를 지키는 아름다운 사람상' , 2009년 제7회 시민일보 '의정대상' 을 수상하였다. 그러나 2011년 12월 11일 [[19대 총선]] 불출마를 선언하였다.
  • 홍주찬 . . . . 1회 일치
         '''홍주찬'''(洪周燦<ref>[http://weibo.com/6246751871/F6J9ju3zw 골든차일드 공식웨이보 홍주찬 한자]</ref>, [[1999년]] [[7월 31일]] ~ )는 [[대한민국]]의 [[가수]]이다. [[보이 그룹]] [[골든차일드 (음악 그룹)|골든차일드]]의 메인보컬이다.<ref name = "position">[http://woolliment.phps.kr/artists/about_goldenchild.php 울림엔터테인먼트 공식홈페이지 프로필]</ref><ref>[http://imgur.com/W3ioHll 홍주찬 메인보컬]</ref>
  • 홍헌표 . . . . 1회 일치
         |임기 = [[1963년]] [[12월 17일]] ~ [[1964년]] [[7월 22일]]
  • 홍혜경 . . . . 1회 일치
         '''홍혜경'''([[1959년]] 7월 4일 ~ )은 [[대한민국]]의 [[소프라노]] [[성악가]]이다.리릭 레제로 소프라노로 경력을 시작해 현재는 리릭-리릭 스핀토 소프라노까지를 아우르는 영역을 개척하였으며,[[조수미]]와 [[신영옥]]과 더불어 [[대한민국]]의 3대 소프라노로 손꼽힌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21&aid=0000134148 <2006 신년특집-한국이 낳은 글로벌 리더들>“세계로 뻗는 한국문화 내가 이끈다” 기사 내용중 대한민국의 3대 소프라노부분 게재되어 있음 《문화일보》2006-01-02 작성 : 김순환 기자]</ref>
  • 황광희 . . . . 1회 일치
         | [[2015년]] [[11월 11일]] ~ [[2016년]] [[2월 3일]]
  • 황덕균 . . . . 1회 일치
         '''황덕균'''(黃德均, [[1983년]] [[7월 28일]] ~ )은 전 [[KBO 리그]] [[넥센 히어로즈]]의 [[투수]]이다.
  • 황두진 . . . . 1회 일치
         '''황두진'''([[1963년]] [[7월 18일]] ~ , [[서울특별시]])은 대한민국의 건축가이다.
  • 황리아 . . . . 1회 일치
         '''황리아'''([[1987년]] [[2월 11일]] ~ )는 [[대한민국]]의 [[레이싱모델]]이다.
  • 황병하 . . . . 1회 일치
         |임기2 = 2016년 2월 11일 ~ 2017년 2월 8일
  • 황보관 . . . . 1회 일치
         [[1988년]] [[12월 11일]], [[1988년 AFC 아시안컵]] [[이란 축구 국가대표팀|이란]]전에서 [[A매치]] 데뷔전을 치렀다. [[1990년 FIFA 월드컵]], [[1988년 AFC 아시안컵]] 등의 많은 대회에서 뛰었고, [[A매치]] 36경기에서 10골을 넣었다.
  • 황용식 . . . . 1회 일치
         |임기2 = [[2000년]] [[7월]] ~ [[2003년]] [[6월]]
  • 황재규 . . . . 1회 일치
         [[청원고등학교 (서울)|서울청원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성균관대학교]]에 입학했다. 입학 동기인 [[허유강]] 선수와 함께 팀의 주축 선발 [[투수]]로 활약하였다. 제 4회 세계 대학야구 선수권 대회에 국가 대표팀으로 참가하여,<ref>[http://isplus.joins.com/sports/kbo/200806/12/200806122017013276010700000107020001070201.html 세계 대학야구 선수권 대표팀 명단 발표] 《일간스포츠》, 2008년 6월 12일 작성</ref> [[일본]]전에서 좋은 투구를 보여 주었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001&oid=295&aid=0000000067& 세계 대학야구 결산 - 협회의 외면 속에서도 유망주는 큰다] 《박동희칼럼》, 2008년 7월 29일 작성</ref> 제 1회 KBO 총재기 대학 야구 결승전에서 선발 [[투수]]였던 [[정태승]]에 이어 팀의 2번째 [[투수]]로 등판하여 8.1 이닝 3안타 6탈삼진 1실점의 호투로 [[성균관대학교]]의 우승에 기여하였고, 대회 최우수 선수에 올랐다.<ref>[http://joynews.inews24.com/php/news_view.php?g_menu=702120&g_serial=348816 성균관대, 연세대 꺾고 제 1회 KBO 총재기 우승] 《조이뉴스》, 2008년 8월 8일 작성</ref><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001&oid=295&aid=0000000075& 대학야구 취재기, 아직 끝난 게 아니다] 《박동희칼럼》, 2008년 8월 9일 작성</ref>
  • 황희두 . . . . 1회 일치
         2016년 7월, 서울시가 주최한 [['광장은 시장실']]에 참석하여 [[박원순]] 서울시장에게 [[e스포츠]]의 발전과 게임 문화의 인식 개선을 제안하였고 체택되었다. 학부모들과 청소년들에게 게임 문화가 마냥 안좋은게 아니란걸 알리기 위한 목적과 또한 중국 시장에 밀려 뒤쳐진 대한민국 e스포츠의 현실을 개선하기 위한 목적이다. 실제 2014년도 기준으로 중국은 약 4조원대의 금액을 [[e스포츠]]에 투자하며 세계 e스포츠 강국으로 도약하였으며, 정작 e스포츠의 종주국인 대한민국은 점차 중국에 밀리고 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전/현직 프로게이머, 게임단 관계자, 지자체, 정부 등과 협력하여 '대한민국 e스포츠 시장 살리기'를 추진중이다. <ref>http://www.sportsseoul.com/news/read/417966|턱 밑까지 쫓아온 중국...한국 e스포츠는 어디로?
  • 히나마츠리 . . . . 1회 일치
         [[일본]]에서 여자아이의 성장을 축하하는 날. 양력 3월 3일에 실시한다. 과거에는 음력 3월 3일에 실시했다. 지방에 따라서 조금씩 차이가 있는 경우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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